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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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강유영은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린 채, 차마 그들을 더 바라보지 못했다.조원철처럼 매사에 무심하고 차가운 사내일지라도, 태양처럼 정열적인 소은경 같은 여인은 거부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군주께선 어쩐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조원철의 목소리에는 다소 서늘한 한기가 묻어 있었다.“그게… 유영이가 이곳에서 불공을 드린다는 얘기를 듣고 공주 전하와 함께 들러본 것입니다. 유영이, 너도 우리와 함께 돌아갈 거지?”소은경은 말끝을 흐리며 강유영을 바라봤다.아무런 증거도 잡지 못한 채, 불륜 현장을 잡으러 왔다고 따질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괜찮습니다, 군주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오라버니와 함께 돌아가세요.”강유영은 서둘러 대답했다.그들이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이 아슬아슬한 상황이 끝날 것 같았다.산길을 걸어서 내려가는 고생쯤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럼 우리 먼저 실례할게.”소은경은 조원철의 팔짱을 꼭 낀 채 밖으로 향했다.강유영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조원철은 문을 나설 때까지 끝내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강유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으나,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어쨌든 오늘 고비는 무사히 넘긴 셈이었다.석양이 지면서 진국공부의 간판에 금빛 광채가 덧칠될 무렵이었다.강유영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의 사내가 담벽 근처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로는 시종이 따르고 있었다.사내는 수염 한 터럭 없는 허연 얼굴에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었고, 강유영의 몸을 무례하게 위아래로 훑어내리고 있었다.그 불쾌한 시선에 눈살을 찌푸린 강유영은 발걸음을 재촉해 안뜰로 향했다.진국공부의 대문을 당당히 통과한 사람치고는 어딘지 경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저토록 무례한 자가 누구인지 의아했지만, 생김새는 마치 궁 안의 내관 같다는 생각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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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강유영은 지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닥칠 일들을 곰곰이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아씨, 안색이 안 좋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단비가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가 얼굴이 창백한 강유영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좀 지쳤을 뿐이니 목욕물 좀 준비해다오. 일찍 쉬고 싶구나.”강유영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단비에게 말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걱정거리만 더 얹어주는 꼴이었다.“저녁도 안 드시고요?”단비는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되물었다.“약방에서 먹고 왔어.”강유영은 서둘러 침소로 발길을 옮겼다.사실 저녁 식사 따위는 구경도 못 했지만, 단비와 길게 대화할 기력이 없었다.목욕을 마친 뒤 침상에 몸을 뉘였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조월아가 전해준 청천벽력 같은 소식과 주지상의 기름기 흐르는 음습한 눈빛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나는 진정… 저런 사내에게 시집가야 할 운명이란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 떠나겠다고 말해본들, 한씨가 고개를 끄덕일 리 만무했다.진국공부의 그 누구도 그녀의 독립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요긴하게 써먹을 도구로 여기고 있었으니까…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양팔로 스스로를 위로하듯 껴안았다.참아보려 했으나, 눈물은 속절없이 베개를 적셨다.그때 휘장 밖에서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약방에서 먹고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강유영은 단비가 들어온 줄 알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돌려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그러나 이내 휘장이 걷히고 희미한 빛이 침상으로 스며들었다.이상한 낌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본 강유영은 침상 앞에 우뚝 선 거대한 인영을 보고 흠칫 놀랐다.그곳엔 조원철이 서 있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검은 머리칼이 어깨 위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채, 수렁에 빠진 듯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다행히 뺨에 남았던 손자국은 어느덧 가라앉아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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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어떤 이유에서든, 강유영은 약방에 가지 말라는 그의 명을 따를 수 없었다.“다시 한 번 말하마. 다시는 그곳에 가지 말거라.”조원철은 얇은 눈꺼풀을 들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그 시선만으로도 강유영은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었다.그가 이 일을 다시 꺼낸 것은 지난번과 무게가 다르다는 걸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나갔을 때는 더는 문책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이 일을 다시 꺼내며 완강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저는 약방에 꼭 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창백한 강유영의 얼굴에 오기가 서렸다.이번만큼은 그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약방은 훗날 그녀가 이곳을 떠나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댈 곳이고, 오씨 어멈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다.그녀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강유영.”조원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서늘하게 그녀를 응시했다.강유영은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상아색 잠옷 한 벌만 걸치고 있었다. 수려한 얼굴과 눈물을 머금은 맑은 눈동자는, 마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위태롭게 떨고 있는 순백의 꽃처럼 가련하여 절로 연민을 자아냈다.그가 두려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이 일만큼은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조원철은 몸을 일으켜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강유영은 비명을 삼키며 눈을 감고 그의 어깨를 치며 발버둥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이내 그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고, 두 손은 머리 위로 결박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놓으십시오! 약방에 다니는 건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소 군주를 곁에 두셨으면서 어찌하여 이리 저를 휘두르려 하시는 건가요!”눈물이 눈가로 흘러내려 귀밑머리 사이로 스며들었다.조원철은 고개를 숙여 반항의 말을 내뱉는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노기를 머금은 그의 공세는 맹렬했고, 단숨에 그녀의 성벽을 허물고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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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강유영은 조그만 발로 조원철의 단단한 어깨를 툭 걷어찼다.안색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창백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만약 한씨가 그들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를 능지처참하고도 남을 정도였다.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죽을 마음도 없었다.“이래도 거기 나가겠느냐?”그는 한씨에게 들키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 보였다.심지어 목소리조차 평소처럼 느긋하고 차분해서, 긴박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안 나갈 테니 제발 이것 좀 놓으세요!”강유영은 겁에 질린 나머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 어찌 고집을 피울 수 있겠는가.그녀는 그가 지난번처럼 소리 내지 말고 잘 숨어서, 한씨가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조원철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옷고름을 매어주고, 헝클어진 머리칼까지 정돈해준 뒤 침상의 휘장을 내렸다.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고, 조원철이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몸이 좋지 않아서 침상을 내릴 수 없다고 하고, 머리만 내밀거라.”강유영은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일단 서둘러 이불을 끌어당겨 그를 숨겼다.“유영아, 어미 왔다.”어느덧 한씨가 휘장 밖까지 다가왔다.강유영은 더는 조원철을 살필 겨를도 없이 휘장 사이로 머리만 살짝 내밀었다.“어머니,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몸살기가 조금 있어 일찍 자리에 누웠습니다. 지금 당장….”그녀는 힘겹게 말을 내뱉으며 예절을 차리기 위해 침상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조원철의 당부를 잊은 건 아니었지만, 수년간 몸에 밴 습관 때문에 감히 한씨에게 불경을 저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러나 다리를 움직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꽉 움켜쥐었다.조원철이 뒤에서 그녀를 내려가지 못하게 붙잡은 것이었다.강유영은 당황해서 이마에 식은땀이 돋았지만, 한씨가 눈치챌까 봐 차마 발버둥도 치지 못했다.다행히 한씨는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몸이 고단하다면 굳이 내려올 것 없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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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한씨는 미소를 머금은 채, 주지상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그런데 그 순간, 강유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조원철이 기어이 그녀의 속옥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그의 손이 안을 파고들며 집요하게 희롱하기 시작했다.‘어머니께서 바로 앞에 계시거늘, 어찌 이리도!’그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요, 뻔뻔함의 극치에 달했다.강유영은 혹여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 나올까, 감히 입을 떼지도 못했다.밀어냈다간 들킬 것이 뻔했기에 그녀는 그저 석상처럼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전율을 견뎌낼 뿐이었다.“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부끄러워서 그러느냐? 아니면 열이라도 오른 게야?”한씨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상태를 살피려 다가왔다.강유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를 느끼며 다급히 소리쳤다.“괜찮습니다, 어머니! 혹여 병증을 어머니께 옮길 수도 있으니, 다가오지 마십시오!”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과 긴장해서 빳빳이 굳은 몸을 한씨가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이리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니 너도 싫지 않은 모양이구나. 내 당장 네 아버지께 가서 혼사를 정하자고 이야기할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떠냐?”한씨가 걸음을 멈추었다.그녀 역시 아픈 강유영의 가까이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잠시만요, 어머니!”강유영은 힘껏 조원철의 팔뚝을 꼬집었다.어찌 이리 방자할 수가 있을까!그가 마침내 조금 조용해졌다.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왜 그러느냐?”한씨가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저… 조금만 고민 좀 더 해봐도 될까요?”강유영은 남은 용기를 쥐어짜 힘겹게 물었다.“사실 고민할 게 뭐가 있겠느냐.”한씨는 강유영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며 눈동자에 스친 살벌한 독기를 갈무리했다.“네 뜻이 정 그렇다면, 일단 먼저 만남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고 나서 확답을 주어도 늦지 않아.”주지상 같은 인간이 강유영을 점찍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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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강유영은 조원철을 밀어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가까스로 마음을 지탱하던 끈이 결국 끊어져 버린 듯했다.그녀는 결국 모든 기력을 잃은 사람처럼 늘어져 버렸다. 허공을 휘젓던 두 손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어둠 속에서 조원철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마에 닿은 그의 입술은 보드랍고도 뜨거웠다. 쏟아지는 숨결마다 그의 진한 체취가 배어 있었다.그는 정성을 담아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평소와 달리 강유영은 피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 어떤 거부의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조원철의 손끝에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닿았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저를 취하시려거든, 마음대로 하십시오.”강유영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어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더 거부해서 무엇하겠는가.고통스러워 봤자 하룻밤이면 지나갈 것이고, 지나가면 더는 아프지 않을 터였다.조원철의 집착이든, 한씨의 고의적인 안배든, 그녀로서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의지할 곳 없는 양녀라면 그저 시키는 대로 행하며 국공부의 길러준 은혜를 갚는 것이 순리일 터. 반항해 봐야 그저 헛된 몸부림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진정 그 주지상에게 시집이라도 가겠다는 것이냐?”조원철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가 침상 휘장을 거칠게 걷어 올리자, 일렁이는 촛불빛이 안으로 비쳐들어왔다.“그리하겠습니다.”강유영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눈물에 젖은 속눈썹 끝에는 맑은 눈물방울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고, 붉어진 코끝은 애처로웠으나,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그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가련하고도 위태로운 모습이었다.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무엇이 달라질까?그녀에게 거부할 권한이 있기는 한 걸까?한씨의 명대로 시집을 가서 설령 죽는다 해도, 그것은 그저 그녀의 기구한 운명일 뿐이다.물론 반항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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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단비가 휘장을 걷으며 물었다.“이제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강유영은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말했다.단비가 무슨 일인지 더 캐물으려던 찰나, 강유영이 무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역시 한 번은 가봐야겠어.”단비의 도움으로 의복을 정갈히 갖춰 입은 강유영은 침소로 들여온 아침을 먹었다.그러나 모래를 씹는 듯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아, 몇 술 뜨는 시늉만 하고 수저를 놓았다.단비가 상을 치우자, 강유영이 장롱으로 다가갔다.그곳에서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고 은표를 한 장 한 장 세어 보았다.그녀는 그 은표를 소매 안 깊숙한 곳에 조심스레 집어넣고, 상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강유영은 약방에 들러 장 의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생각이었다.수년간 자신을 보살펴준 어른이니, 다시는 오지 못하게 된 마당에 작별 인사 정도는 드리는 것이 도리라 여겼다.그러나 약방에 도착해 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장 의원과 일꾼들은 몰려든 환자들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강유영은 자연스레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그렇게 한바탕 일손을 돕다 보니 어느덧 정오가 지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강유영은 뒷마당으로 발길을 옮겼다.그곳에는 서준이 기다란 다리를 쩍 벌리고 회랑 바닥에 앉아 건성건성 약재를 뒤적이고 있었다.누가 봐도 일하기 싫어 온몸을 비트는 모양새였다.“서준아.”강유영이 그를 불렀다.“왜?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냐?”서준은 긴 눈매를 슬쩍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선이 가늘고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는 서늘한 인상이었으나, 얼굴에 남은 흉터가 묘하게 야성미를 더해주고 있었다.“너, 약은 꼬박꼬박 바르고 있는 거야?”강유영은 그의 짓꿎은 농담을 가볍게 흘리며 곁에 쪼그려 앉아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이까짓 상처가 뭐 대수라고.”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너 나한테 너무 지극정성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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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강유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 한구석에 자꾸만 죄송스러운 마음이 차올랐기 때문이다.장 의원은 그간 그녀에게 베풀어준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약방이 한창 바쁜 시기에 떠나려니,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국공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냐?”장 의원은 어딘가 멍해 보이는 강유영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기둥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서준 역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예.”강유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자세한 내막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장 의원의 걱정만 키울 뿐이기에, 함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알겠다.”장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며칠 있으면 추석이 아니냐. 매년 함께 보냈으니 그때 다 같이 모여 밥 한 끼 먹자꾸나. 그것으로 송별회를 대신하는 게 어떻겠니?”그는 강유영을 친딸처럼 아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 못내 아쉬웠으나, 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진국공부의 깊은 속사정이야 평민이 알 길이 없지만, 국공부의 신세를 지고 있는 강유영으로서는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을 터였다.이곳에서 몇 년이나마 일손을 도와준 것만으로도 장 의원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일이었다.서준의 시선이 강유영의 얼굴에 머물렀다.은근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좋죠.”강유영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해맑은 미소로 화답했다.“오씨 어멈은 내가 틈나는 대로 가서 살필 터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자, 앉아서 밥이나 먹고 가렴.”장 의원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다른 사람들은요?”그녀가 묻자, 장 의원이 웃으며 대답했다.“구경거리라도 났는지 다들 밖으로 뛰쳐나가더구나. 우리끼리 먼저 먹자.”강유영이 젓가락을 들고 몇 술 뜨던 중이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타다닥 하며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꽤 오랫동안 이어진 폭죽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회남왕비가 군주를 데리고 새 부저로 이사하는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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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문지기는 밖에서 들어오는 강유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딱히 그녀를 막아서지는 않았지만, 어서 빨리 대청으로 가라며 연신 재촉했다.강유영은 그제야 방금 전 조원철과 소은경이 그토록 급히 말을 달려 돌아온 것은, 황제의 교지가 내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었고, 안색은 서서히 핏기를 잃으며 창백해졌다.‘결국 오고야 말았네.’그녀는 마비된 듯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구름 위를 걷는 듯 발걸음이 위태로웠고, 마음은 허공에 붕 떠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했다.“아씨….”서유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앞으로 더 이상 내 곁에서 시중들지 않아도 된다.”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서유를 바라보다가, 내민 손을 조용히 밀어냈다.서유는 조원철의 사람이다.그의 혼사가 결정된 이상, 이제는 그와 관련된 모든 이, 모든 것과 선을 그어야 했다.“아씨!”서유가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이 미천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은 아씨입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소인은 아씨의 사람입니다.”강유영은 대꾸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서유는 그런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어딜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게야? 어서 들어오너라.”대청 입구에 서 있던 한씨가 강유영을 발견하고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주지상을 저택으로 불러 만남을 주선하려 했거늘, 강유영이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 심사가 뒤틀린 그녀였다.강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지금은 마음이 너무 어지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혹여 말실수라도 하여 속내를 들킬까 두려웠다.다행히 한씨는 현재 교지를 받는 일에 온 신경이 쏠려 있어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원철의 늠름한 뒷모습이었다.그는 소은경과 나란히 서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주변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는 언제나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강유영은 시선을 거두고 구석진 곳으로 가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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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조원철의 부름은 강유영에게 마치 구원처럼 들렸다.그녀는 처음으로 집안 모두의 시선을 받는 것이 주지상 같은 인간의 주시를 받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고 느껴졌다.“오라버니.”강유영은 앞으로 나아가 조원철에게 예를 갖추었다.조원철은 그저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잠깐 훑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유영아, 모든 이가 세자와 나를 축하해주고 있는데 넌 왜 입을 꾹 닫고 있니? 설마 우리 사이를 시샘이라도 하는 거야?”소은경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그녀는 조원철의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얼굴로 강유영을 내려다보며 도발의 눈빛을 보냈다.강유영과 조원철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든, 이제 두 사람의 혼사는 황제의 교지로 확정되었으니, 소은경은 승리자로서 강유영을 마음껏 비웃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그에 반해 조원철의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그는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오라버니와 형님께서 마침내 결실을 맺으셨으니, 부디 백년해로하시길 바라겠습니다.”강유영은 긴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눈빛을 감춘 채, 느릿하게 축복의 말을 내뱉었다.알고 보니 소은경이 조원철을 꼬드겨 그녀를 이쪽으로 부른 이유는 오로지 그녀에게서 이 말을 듣기 위함이구나 싶었다.그녀는 소은경이 자신과 조원철의 사이를 의심하여 일부러 모욕을 주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배운 게 없는 강유영은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줄 몰랐다.그래도 전에 타인의 혼례에서 귀동냥으로 배운 말들을 정성스레 읊었다.‘이 정도면 되겠지?’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끊임없이 밀려드는 쓸쓸한 아픔에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유영이는 말도 참 곱게 하네.”소은경은 경쾌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교지를 받드시오!”내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지자, 장내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대내관 고익이 걸어 들어와 좌중을 훑어본 뒤, 교지를 낭독했다.“좋은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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