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있는 별당으로 들어갔다.강유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사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더니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다.”익숙한 감송향이 코끝에 닿자, 강유영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눈이 순식간에 번쩍 뜨이더니 당황한 듯, 두 손을 뻗어 사내의 가슴을 밀쳤다. 분홍빛 도톰한 입술이 급하게 움찔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높게 솟은 날카로운 콧날과, 윤기가 도는 얇은 입술, 요염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이목구비와 가지런하게 틀어 올린 머리, 분명히 얼굴은 귀하게 자란 귀공자인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위압감이 풍겼다.사내의 이름은 조원철. 강유영의 큰 오라버니이자, 변방에서 5년간 나라를 지키다가 반달 전에야 개선가를 울리며 귀경한 대장군이었다.오늘 집안에서 덕망 높은 스님까지 불러 제를 지내는 이유 역시 그의 공적을 조상님들에게 알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조원철은 그녀를 놓아주고도 바로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내려 지그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오랜 시간 전장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라, 풍기는 위압감이 숨이 막혔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게 만드는 위엄이 느껴졌다.반면 강유영의 차림새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까만 머리에는 은비녀 하나만 꽂아 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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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조원철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말투만 들어서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알겠다. 어서 정돈하고 나오거라.”한씨의 말과 함께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강유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은 이미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위기가 사라진 것을 직감한 후에야 허벅지에서 청량한 느낌이 퍼지며 통증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이… 이제 괜찮습니다….”그녀는 다시금 조원철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손에 손목을 잡혔다.아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가 손을 거두었다.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허둥지둥 치마를 여몄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스르륵 아래로 주저앉았다.단단한 팔이 뻗어나와 그녀를 단번에 품에 안았다.얼굴이 단단한 가슴에 닿자, 청량한 감송향이 그녀를 감쌌다.그녀는 바둥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풀린 상태라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조원철은 몸을 굽혀 느릿느릿 그녀의 허리띠를 다시 매주고 꼼꼼하게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었다.강유영은 그제야 힘껏 그를 밀쳐내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조원철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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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오라버니, 저는 소은원 생활에 이미 적응해서 부용원으로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강유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그녀는 걸음을 잠깐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그녀보다는 한참 큰 키에 입은 늘 꾹 다물고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운 사람이었다.“부용원도 살다 보면 자연히 적응될 것이다.”조원철은 뒷짐을 지고서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강유영은 더 이상 무슨 핑계로 거절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부용원은 안뜰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매일 약국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한 곳이었다.소은원은 서북쪽 모퉁이 문으로 바로 나갈 수 있고 문을 지키는 어멈을 잘 구워삶아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드나들었다.그러나 부용원으로 옮긴다면 거리가 너무 멀고 보는 눈도 많아 비밀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그녀의 유모 오씨 어멈은 삼 년 전 갑자기 큰 병으로 앓아누웠다. 병상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이 돌아가 지금은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강유영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길러준 오씨 어멈을 모른 척할 수 없고 당연히 노후를 돌봐줄 생각이었다.어멈의 치료비를 모으기 위해 그녀는 몰래 약국에 나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약국의 서 의원을 따라 일 년 넘게 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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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 사내의 몸에 이런 망측한 자국을 남기지 않았을 테지.”비록 얼굴 한번 본 적은 없지만, 한씨 입장에서는 예뻐해 줄 수 없는 여자였다. 귀족가에서는 첩실을 들이더라도 출신을 따지는 법이다.강유영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푹 숙이고 무슨 맛인지 모를 떡만 입으로 가져갔다.그때는 그저 너무 아픈데 소리는 낼 수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을 뿐인데, 그게 그리도 점잖지 못한 행동이었던 걸까?조원철은 말없이 한씨의 손길을 피하고는 잔에 우유차를 따르고 강유영과 한씨의 앞에 놓아주었다.강유영은 앞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차를 바라보았다. 평소 단것을 좋아하는 그녀이지만, 지금 상황에 저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저 빨리 먹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한씨는 아들이 말이 없자, 재차 물었다.“그 아이는 어느 집안 딸이니?”“유영이와 처지가 같습니다.”조원철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강유영은 심장이 쪼그라들어 하마터면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조원철은 한마디 덧붙이고는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았다.강유영은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왜 하필 이 시점에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거지?어머니가 뭔가를 알아챌까 걱정도 안 되시는 걸까?“유영이가 왜 의지할 곳이 없어? 유영이에겐 우리가 있잖니.”한씨가 다급히 말했다.“그건 그렇고, 대체 그 아이를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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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네 오라비는?”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그러고는 큰손으로 아프다던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오라버니께선… 조회에 나가셨습니다.”강유영은 그가 시킨 대로 대답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움츠린 목은 수치심에 빨갛게 물들었다.‘너무 가까워….’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닿을 듯 말 듯 , 뜨거운 숨결이 스쳤다. 긴장한 탓인지,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몸은 이미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녀석, 간다고 말은 하고 가지.”한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이어 말했다.“네 오라비 혼사가 잘 마무리되면 다음 차례는 너인데, 혹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느냐?”강유영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애원에 찬 눈으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아랫배를 어루만지던 손길은 멈추었지만 조원철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강유영은 조급한 마음에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움찔거렸다. 한씨가 대답이 늦어 갑갑하다며 병풍 뒤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이때,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런, 수줍음 많은 아이에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평소 외출도 거의 안 하는 너인데,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혼사는 나와 네 아버지가 알아서 하마.”어차피 한씨도 지나가는 소리로 물어봤을 뿐이다. 강유영의 혼처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진국공부가 그동안 공짜로 길러줬으니 이제는 그 쓸모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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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무심하게 보이지만, 여전히 고귀함과 절제된 품위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맞은편에 앉은 처자를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는 강유영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온 지도 모르는 듯했다. 강유영은 그제야 바짝 긴장해서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왕씨 가문의 셋째 아씨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그날 세자께서 개선하실 때, 구경 나갔다가 누각 위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직접 뵈었답니다. 다들 세자께서는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군요.”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발랄했다. 고양이처럼 살짝 치켜올린 눈매에 복숭아꽃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볼, 눈처럼 하얀 피부, 과연 듣던 대로 미인이었다. 얼굴에는 소녀 특유의 수줍음이 배어 있었고 반짝거리는 눈빛에는 눈앞의 사내를 향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과한 칭찬입니다, 소저.”강유영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보아하니 왕 소저는 그가 개선하던 날부터 그를 마음에 둔 듯했다.어울리는 집안에 장차 그에게 도움이 되는 집안의 딸이니 조원철도 분명 허락할 것이다.어쩌면 얼마 안 있으면 혼례를 준비할지도 모른다.“연령이 이 아이는 그렇게 소설 속 영웅을 숭배하더니, 드디어 오늘 만났네요.”태사 부인인 교씨는 딸의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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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심한 듯 물었다.“손은 좀 괜찮아졌느냐?”“예, 다 나았습니다.”강유영은 짤막하게 답했다.심한 화상도 아니었고 화상 연고를 바로 발랐기에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나았다.조원철은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강유영은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용건을 물었다.“손수건 돌려주러 왔다.”조원철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기다란 손가락 위에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손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선이 깔끔하고 유려한 손가락에 손등에는 옅은 청색 핏줄이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손이었다. 마치 저 손에 무한한 힘이 담긴 듯, 모든 것을 손에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이 손이 그날 자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자신을 벽으로 밀치던 것을 생각하면,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날 밤 비밀의 장소에 같이 있었던 손수건을 가로챘다.하지만 조원철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강유영은 흠칫하다가 힘껏 잡아당겼다.마침내 손수건이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다.그녀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이라도 이걸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결국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장롱을 열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장롱을 닫은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조원철을 힐끗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오라버니,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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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사당에 갇히는 게 두렵지 않으면, 회초리는 어떠냐?”이때, 조원철이 병풍 뒤에서 뒷짐을 진 채로 걸어 나왔다. 조연화를 바라보는 그의 맑은 눈동자 깊은 곳에 서늘한 빛이 번뜩였다.“세자!”시녀와 어멈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다.강유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두렵고 조마조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비록 장롱 안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녀의 안방에서 떡하니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는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아득했다.조원철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에게서는 발각당한 초조함이나 당황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리 오너라.”그는 시선을 돌려 온화하지만 단호한 눈으로 강유영을 바라보았다.강유영은 순순히 앞으로 다가왔다. 긴 속눈썹은 살짝 처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조연화는 집으로 돌아온 이후 기회만 잡으면 강유영을 괴롭혔다. 강유영은 이미 그녀의 이런 행태에 익숙해져 있었고 평소에는 가급적 그녀와의 충돌을 피해왔었다.조원철은 주먹을 쥐었다 피더니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강유영을 뒤로 감추고 냉랭하게 조연화를 노려보았다.조원철을 본 조연화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오… 오라버니께서 여긴 어쩐 일로….”무서울 게 없이 살아온 그녀이지만, 유독 조원철의 앞에 서면 심장이 오그라들었다.어렸을 적에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는데 가족들 중에 유일하게 그녀에게 엄벌을 내린 사람이 조원철이었다.게다가 회초리라니! 다 큰 여동생에게 매라도 들겠다는 걸까?조사예도 겁에 질려 조연화의 뒤에 숨어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조원철은 잘못을 저지른 자라면 누구든 관대하지 않았다. 온 집안의 형제자매들 중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여봐라! 당장 회초리를 가져오너라!”조원철은 긴 말은 생략하고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밖에 있던 청운이 응답하더니 재빨리 움직였다.“오라버니, 제가 잘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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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조연화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며 원망하듯 말했다.“어머니도 저를 탓하시는 건가요?”예전에 어머니는 한번도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말한 적 없었다. 성격이 포악해도 생각이 단순한 조연화는 그저 지금 상황이 억울할 뿐이었다.“어머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조원철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잘못을 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그는 회초리를 들고 단비와 서유를 바라보았다.단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강유영의 눈치를 살폈다.서유는 그런 단비의 팔을 붙잡아 끌더니, 조원철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회초리를 건네받더니 조연화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단비에게 눈짓하여 조연화의 팔을 붙잡으라고 시켰다.조연화는 화들짝 놀라 한씨의 다리를 꼭 붙잡았다.“어머니, 도와주세요….”“원철아….”한씨는 간절한 눈빛으로 조원철을 바라보며 말했다.“연화가 잘못을 뉘우쳤으니, 유영이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맹세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 매질은 그만두거라.”그녀는 아들의 성품을 잘 알지만, 그래도 딸이 안쓰러워 결국 말리려고 나섰다.“어머니, 자식을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은 사랑하는 자식을 해치는 거란 이치를 아셔야지요. 오늘은 자매끼리 다툼으로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훗날 밖에 나가서 타인에게 무례를 범한다면 이리 가볍게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조원철은 여전히 싸늘한 눈을 하고서 단호히 말했다.“열 대만 때리거라.”한씨는 더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음침한 얼굴로 단비와 서유를 노려보았다.조원철이 또 말했다.“왼손을 때리거라.”단비는 힘껏 조연화가 피하지 못하게 힘껏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십 년 묵은 체기가 쭉 내려간 것처럼 속이 통쾌했다.그동안 조원철이 집을 비운 사이, 조연화는 틈만 나면 강유영을 괴롭혔다. 마침내 세자가 돌아왔으니, 이제 강유영에게도 든든한 기댈 곳이 생긴 셈이었다.서유는 회초리를 들고 힘껏 아래로 내리쳤다.짝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조연화는 비명을 지르더니 한방에 빨갛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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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 서서 싸늘한 눈길로 조사예를 바라보았다.강유영은 조사예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온몸이 굳었다.한씨와 조연화도 은근히 기대에 찬 눈으로 조사예를 바라봤다.“몰래 집을 빠져나가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왔는지 누가 알겠어요. 게다가 누가 저 애에게 회춘고 같은 귀한 것을 주었는데 그게 남이 쉽게 줄 수 있는 물건인가요? 밖에서 무슨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을지, 누가 알겠나요….”강유영은 조사예가 조원철이 자기 방에 있었던 일을 꺼낼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오히려 안도의 숨이 나왔다.조사예의 억측을 들으며 회춘고를 준 사람이 조원철이라는 것을 떠올리니, 얼굴이 다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오라버니가 여동생에게 상처 회복에 좋은 연고 한 병 준 것쯤이야, 그럭저럭 말이 된다고 여기지 않을까?그녀는 조심스레 조원철을 힐끗 바라보았다.그의 표정은 여전히 근엄하고 단정했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에서는 일말의 파문도 일지 않았고 온몸에서 권위자의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마치, 조사예가 주절대는 말들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했다.조사예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게다가 항상 저희에게는 그렇게 예법을 강조하시던 오라버니 아니셨습니까. 그런데 이 깊은 밤에 강유영은 오라버니를 안방으로 들였지요. 아무리 양녀라지만, 연화 언니처럼 친동생이라도 이렇게 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이는 예법에 어긋나니깐요. 오라버니는 공정하신 분이니, 이 일들만 보더라도 강유영이 저와 연화 언니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부인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니 이제, 강유영에겐 어떤 벌을 내리실 건가요?”그녀는 증오에 찬 눈으로 강유영을 노려보았다. 강유영뿐이 아니라 큰 오라버니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자신의 말은 빈틈이 없고, 당연히 받아들여질 거라 확신했다.강유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눈치를 보니 한씨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으로 흥건하고 심장이 조여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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