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101 - Chapter 110

200 Chapters

제101화

“오라버니, 이러지 마세요….”강유영은 몸부림치며 애원했다.“날 뭐라고 부르라 했었지?”조원철은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고정한 채, 협박하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원철….”강유영은 황급히 호칭을 바꾸었다. 그가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르는 걸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조원철은 그제야 마음에 든 듯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다시 한번 불러 보거라.”“원철.”강유영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다시.”“원철….”불그스름한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앞으로는 날 오라버니라 부르지 말거라. 알겠느냐?”조원철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살짝 깨물며 말했다.“세자.”그때 밖에서 청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강유영에게는 그 목소리가 구원처럼 들렸다. 몽롱하던 눈동자에도 금세 빛이 돌아왔다.조원철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그 소리를 무시했다.“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강유영은 눈물을 머금은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조원철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달아오르게 만들 뿐이었다.“세자, 궁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폐하께서 궁으로 드시랍니다.”이번에는 청운의 목소리였다.조원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를 놓아주고 침상에서 내려왔다.강유영은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조원철은 퍼렇게 굳은 얼굴로 옷깃을 정돈한 뒤 밖으로 나갔다.강유영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손톱을 감싸 두었던 봉숭아 잎을 벗겨 냈다.밤새 손톱이 어떻게 물들었을지 궁금했다.역시나 열 손톱 모두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에 무척 잘 어울렸다.어제 조원철이 가르쳐 준 대로라면, 이 과정을 세 번은 반복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더 진한 붉은색을 띨 수 있을 것이다.아침을 먹은 뒤 오씨 어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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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저자들은 누구야? 왜 검까지 들고 있는 거지?”강유영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아 잔뜩 찌푸린 얼굴로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물었다.그러자 서준이 그녀를 흘긋 보더니 무심하게 대꾸했다.“대금업자들. 내가 빚을 좀 졌거든.”“왜?”강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서준은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나른하게 말했다.“어머니가 몹쓸 병에 걸리셔서 어쩔 수 없었지.”약을 바르던 강유영의 손길이 멈칫했다. 매사 가볍고 신중하지 못해 보였는데, 뜻밖에도 효자였던 모양이다.“그럼 어머니는 지금 어떠셔?”그녀가 걱정스레 묻자, 서준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치료할 은자가 없어서 아마 돌아가실 것 같아.”강유영은 투명한 눈망울을 깜빡이다가,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얼마나 부족한데?”그녀는 저도 모르게 오씨 어멈을 떠올렸다. 만약 장 의원이 기꺼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오씨 어멈 역시 진작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서준에게는 낳아주신 어머니였다. 정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상심이 클까.서준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한 백 냥 정도?”강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약을 챙겼다.그때 거리 저편에서 왁자지껄한 풍악 소리가 들려왔다.“아씨, 어느 집에서 혼례를 올리나 보네요.”서유가 선 채로 멀리 내다보며 말했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훤칠한 키에 혼례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말을 타고 있었다. 신랑은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끌고 있었는데, 신부에 비해 키도 작고 몸도 메말랐으며 외모도 그리 준수한 편은 아니었다.신부는 너울을 살짝 올리고 신랑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신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누가 보아도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연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그녀는 이번 생에 저렇게 마음이 통하는 사내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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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강유영은 입을 꾹 다문 채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 도경진 사건도 그렇고, 조원철은 그녀가 다른 사내와 얽히는 것을 원치 않는 게 분명했다. 이러다가 자칫 서준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이기도 했다.조원철은 책자 하나를 집어 들더니 시선을 내리깔고 책장을 넘겼다.“이리 와서 앉거라.”강유영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느릿느릿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춤이 바짝 조여들었다.조원철은 한 줌에 들어올 듯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더니, 단숨에 그녀를 품 안으로 당겨 버렸다.강유영의 백옥 같은 얼굴에 홍조가 번졌고, 몸은 순식간에 잔뜩 긴장해 빳빳하게 굳었다.다행히 그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시선 역시 손에 든 책자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그저 이렇게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둬 두고 싶었던 모양이었다.강유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금씩 긴장을 풀고 그의 품에 얌전히 기대었다. 그의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휘장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교외로 나가는 길이다.”조원철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교외는 무슨 일로요?”강유영은 까만 눈망울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러나 조원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감히 캐묻지 못한 채 다시 입을 다물었다.근래 너무 피곤했던 걸까.마차가 흔들리고 그의 품에서 온기가 전해지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깜빡 잠들고 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가 지나 있었고, 몸 위에는 그의 겉옷이 덮여 있었다.마차는 어느새 멈춰 서 있었다.조원철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여전히 책자를 보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모습이 마치 무슨 큰 고민이라도 있는 듯했다.“깼느냐?”그는 책자를 덮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유영은 아직 멍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예.”“저녁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냐?”조원철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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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벗어라.”조원철은 뒷짐을 진 채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강유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감쌌고,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여져 있었다.“어찌… 그런….”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했다.어찌 저렇게 고귀하고 금욕적인 얼굴로, 저런 수치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대낮에, 사찰의 선방에서라니…정말 너무했다.“이걸로 갈아입거라.”그때 조원철은 손에 들고 있던 옷 한 벌을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강유영이 내려다보니 앞치마가 달린 옷이었다. 예전에 오씨 어멈이 즐겨 입던 옷과 비슷한, 일할 때 입는 옷이었다.‘왜 나한테 이런 걸 입으라는 거지?’그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하지만 조원철은 더 이상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강유영은 더 물어봐도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결국 얌전히 겉옷을 벗고 앞치마가 달린 옷으로 갈아입었다.고개를 숙여 자신의 차림을 보니, 부엌데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문제는 그녀가 부엌일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따라오너라.”조원철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강유영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밖으로 나오자 작은 정원이 보였다. 정원 안쪽에는 방 두 칸과 작은 부엌이 딸려 있었다.조원철은 부엌 문을 열고 들어가며, 눈짓으로 그녀에게 따라오라 했다.강유영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문 안쪽에는 깨끗한 부뚜막과 나무로 된 작은 식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불을 피우거라.”조원철은 부싯돌 두 개를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강유영은 제법 묵직한 돌을 받아 들고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싯돌로 불을 피우라는 뜻인가.하지만 그녀는 사용법조차 몰랐다. 평소 불을 피우는 일은 단비가 했고, 그녀는 기껏해야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거나 오씨 어멈을 위해 약을 달였을 뿐이었다.“부싯깃은 없나요?”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부싯깃은 불기만 하면 불을 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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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세자, 잡았습니다.”청운이 밖에서 말을 전했다.조원철은 힐끗 바깥을 내다보더니, 타오르던 불더미를 꺼버리고 말했다.“너 혼자 성공한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기뻐하느냐?”반짝이던 강유영의 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계속하거라.”말을 마친 조원철은 밖으로 나갔다.강유영은 쪼그려 앉아 있는 게 힘들어 작은 의자를 가져다 앉고는, 그가 했던 대로 부싯돌을 비스듬히 쳐 보기 시작했다.부싯깃으로도 성공할까 말까인데, 부싯돌로 불을 피우려니 너무 힘들었다.한참을 노력했는데도 검은 연기만 피어오를 뿐, 불은 붙지 않았다.손끝에서 쓰린 통증이 느껴지자, 강유영은 돌을 내려놓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왜 굳이 이런 걸 배우라고 하는 걸까?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갈증이 느껴져 물이라도 찾아 마시려고 밖으로 나갔더니, 조원철은 아까 그 선방 앞에 서 있었다.청운이 검은 옷의 사내를 잡아다가 심문하고 있었다.“세자께서 소인을 일부러 이런 곳까지 유인했다는 건, 아마도 제가 모시는 분의 신분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겠지요.”“전하께선 뭐라고 하셨느냐?”조원철이 담담히 물었다.“전하께서는 강 소저가 세자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하셨습니다.”사내의 말을 들은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전하라니?’이 나라에서 전하로 불릴 사람은 황족뿐이고, 그녀는 황족과 접촉한 적이 없었다.조원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내는 계속해서 말했다.“세자께서 저희 전하를 보좌해 주신다면 강 소저는 무사할 거라고도 하셨지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기둥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지금 내 안전을 빌미로 조원철에게 어느 황자를 보좌하라고 협박하는 건가?‘잘못 짚은 것 같은데.’그녀는 조원철에게 있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외실일 뿐이었다.‘어쩌면 외실조차 아닐지도 모르지.’그녀를 내세워 조원철을 협박하는 걸 보면, 저자가 말하는 전하도 그리 똑똑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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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조원철이 언성을 높이자, 강유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결국 그녀는 느릿느릿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조원철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강유영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비틀었다.조원철은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었다.“또 뭣 때문에 울고 그러느냐?”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눈도 부어 있고 코끝도 새빨간 것이, 울었던 티가 확 났다. 게다가 손으로 얼굴을 닦으려다 숯검댕이가 하얀 얼굴에 묻어, 마치 연기에 그을린 얼룩고양이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연기가… 너무 매워서요….”강유영은 그의 질문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시선을 피했다.조원철은 그녀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주고는 손수건을 도로 품에 넣었다.“불더미를 부뚜막으로 옮기자꾸나.”강유영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불더미로 다가갔다.거의 꺼져가던 불더미에 건초를 더하자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옮겨야 할지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조원철은 다가와 그녀에게 장작으로 불더미를 옮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요리할 줄은 아느냐?”강유영은 고개를 저었다.비록 진국공부에서 예쁨받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오씨 어멈과 단비가 있어 그녀의 손에는 거의 물 한 방울 묻을 일이 없었다.오씨 어멈이 앓아누운 뒤로는 단비가 모든 일을 도맡았다.강유영은 그저 탕약이나 끓이고, 장 의원에게 의술을 배운 것이 전부였다.“내가 가르쳐주지.”조원철은 부뚜막으로 다가서더니 그녀에게 눈짓했다.강유영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가 왜 자신에게 이런 걸 가르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원철은 하나하나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강유영은 또 못하면 집에 가지 말라고 할까 봐, 의문을 접고 열심히 배웠다.“말을 탈 줄은 아느냐?”조원철이 또 물었다.강유영은 고개만 흔들었다.조연화 같은 적녀라면 부모님의 총애를 받아 기마술을 배울 자격이 있었겠지만, 조월아와 조사예 같은 서녀들은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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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왜 이렇게 짜!’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모양이었다.그녀가 다급히 찻잔을 향해 손을 뻗자, 조원철이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그녀는 그걸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늘 조심스럽게 살아온 그녀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그만큼 음식이 짰다는 뜻이기도 했다.조원철의 눈가에 은은한 웃음이 스쳤다.“지금 안 먹으면 오후에 배고파도 밥 없다.”강유영은 경악한 눈으로 여전히 우아하게 식사 중인 조원철을 바라보았다.이렇게 맛없는 것을 존귀하신 진국공 세자께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먹고 있었다.“변방에 있을 때는 이런 것도 없어서 못 먹을 때가 있었지.”조원철은 마치 그녀의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강유영은 대충 몇 술 뜨고 수저를 내려놓았다.‘변방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나 보네.’그가 떠나 있던 오 년 동안, 그녀는 그의 소식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세자, 소 군주와 경화 군주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지금 대문 앞에서 들어오겠다고 난동을 부리고 계세요.”청운이 밖에서 보고했다.그 말을 듣자마자 강유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조원철과 단둘이 사찰 선방에 있었다는 걸 들키게 되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찔했다.소은경 한 명만으로도 상대하기 힘든데, 경화 공주는 그날 돌산 위에 조원철과 같이 있었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찾아온 걸까?그녀는 조원철을 바라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떡해야 하나요?”조원철은 일어서서 밖으로 향했다.“가지 마세요!”강유영은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소은경 혼자도 힘든데 경화 공주까지 와 있으니,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두려워졌다.뭘 알아냈길래 굳이 사찰까지 쫓아온 걸까?간단한 가구밖에 없는 이 방에 숨을 곳은 없었다.조원철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담벽을 뛰어넘어서 나가주세요. 네?”강유영은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듯 그에게 말했다.그녀는 혹 그가 거절할까 봐, 목소리를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낮췄다.애교스러운 그 모습에 그는 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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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경화 공주는 가만히 얘기를 듣더니 자신도 같이 오겠다고 했다.“군주님, 소인이 분명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유영 아씨가 불공을 드리러 오신다 하여 안전을 경호해드리려고 따라온 것뿐입니다. 세자는 여기 안 계세요.”청운은 전혀 기죽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본다면 어찌 할 테냐?”소은경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처음부터 그녀는 조원철과 강유영 사이에 뭔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일 때문에 조원철과의 혼사를 물릴 생각은 없었지만, 강유영은 제거하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가했다.그러지 않으면 혼인 후에도 삶이 편치 않을 것만 같았다.이는 경화 공주의 손을 빌려 강유영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어차피 경화 공주는 막무가내인 사람이고, 진국공부의 양녀 한 명쯤 죽였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에게 꾸중 좀 듣고 넘어갈 일이었다.아무도 일개 양녀의 생사에 신경 쓰지 않는다.“공주 전하, 소 군주,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멀지 않은 곳에서 왕연령이 사뿐사뿐 이쪽으로 다가왔다.그녀는 매우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여전히 한쪽 다리를 미세하게 절고 있었다.그날 낙마 사건 이후로 그녀는 정말 절름발이가 되었다.줄곧 분을 삭이지 못했던 그녀는 부상이 조금 낫자, 사찰에 잠시 머무르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한편, 정원에 있던 강유영은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었다.태부의 적녀와 회남왕의 군주, 그리고 황족인 공주까지. 그녀에게 적의를 품은 세 여인이 호시탐탐 이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그녀는 오늘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아씨, 겁내지 마세요.”서유가 다가와 그녀를 위로했다.강유영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기세등등하게 찾아와 몰아치는데 어찌 겁이 안 나겠는가.이 자리에 모인 귀녀들은 전에는 그녀와 접점조차 없던 이들이었다. 그저 조원철이 돌아온 이후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적대하고 미워하기 시작했을 뿐이다.‘당신은 참으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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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지난 몇 달간, 왕연령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생각할수록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당장이라도 달려가 강유영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진국공부로 쳐들어갈 수는 없어 분노만 불태우고 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니 눈이 뒤집히는 게 당연했다.왕연령은 온몸의 힘을 모두 끌어모아 손을 휘둘렀다.무방비 상태였던 강유영은 그대로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눈처럼 하얀 피부에 선명한 손자국이 찍히더니, 순식간에 붉게 부풀어 올랐다.불길이라도 닿은 듯, 화끈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눈시울이 단박에 붉어졌으나, 강유영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눈물을 참아냈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은경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가슴속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조원철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직접 강유영에게 손을 대는 대범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던 터였다.사실 그녀에게는 조원철을 연모하는 왕연령 역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연령의 무모한 행위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경화 공주 또한 이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어설픈 광대극을 보는 것보다 백배는 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왕연령은 한 대로는 성이 안 차는지, 다시금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그만하십시오!”그때 곁을 지키던 서유가 왕연령의 손목을 낚아챘다.“미천한 것이 어디서 감히! 당장 이 손을 놓지 못할까!”왕연령의 눈에 시녀 따위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그녀는 서유마저 내리치려고 다른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왕 태부의 딸은 참으로 대범한 성격을 지녔군.”그때 옥석이 굴러가는 듯, 맑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순식간에 정원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강유영은 대문 앞에 선 길고 꼿꼿한 인영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분명 떠나라고 그렇게 부탁했거늘, 어찌하여 다시 돌아온단 말인가.만약 소은경 일행에게 꼬투리라도 잡히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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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강유영은 왕연령을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려 있자, 그녀는 이 상황이 몹시 곤혹스럽게 느껴졌다.지난 수년간 그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존재감을 줄여왔다.그로 인해 그녀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은 감당하기 힘든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강유영, 어디 네까짓 게 감히!”왕연령은 서슬 퍼런 기세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명색이 태부의 금지옥엽인 그녀가 어찌 이런 수모를 당한단 말인가.그 기세에 움찔한 강유영이 걸음을 멈추었다.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강유영.”조원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강유영은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손이… 아픕니다.”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조금 전 부싯돌로 불을 지피느라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조원철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고 꾹 참고 있었을 뿐이다.‘역시 내가 왕연령을 치는 건 무리야.’일시적인 분풀이는 되겠지만, 왕연령의 뒤에는 태부라는 거대한 배경이 버티고 있었다. 일이 터지면 태부와 그의 가족들이 그녀를 가만둘 리 없었다.조원철이야 어쩌지 못하겠지만, 이름 없는 양녀 하나 요절내는 것쯤은 그들에게 일도 아닐 터였다.그녀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겁해 보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저 오씨 어멈과 단비와 함께 무사히 살아남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찰싹!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깜짝 놀란 강유영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왕연령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선명한 손자국과 함께 뺨이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올랐다.강유영의 얼굴에 남은 흔적보다 훨씬 처참했다.왕연령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부어오른 얼굴을 감싸며 서유를 노려보았다.“천한 계집종 주제에, 감히 나를 쳐?”서유는 얼얼한 손을 가볍게 털어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저희 아씨의 손은 사람을 때리는 데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여, 소인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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