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는 STJ커플입니다만?: Chapter 21 - Chapter 30

34 Chapters

21화. 투명인간이 된 기분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동료 같기도 하고, 지인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희수는 멈칫했다.이 몰골(보조기+추리닝)로 마주치는 게 좀 그런가 싶었지만, 그래도 연인 사이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거리가 좁혀졌다.10미터, 5미터.그리고 마침내, 재원의 시선이 희수에게 닿았다.분명했다.그의 눈동자가 희수를 담았다. 희수의 보조기를,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어, 자기야.’희수의 입술이 달싹이던 찰나.재원의 고개가,아주 매끄럽게 반대편으로 돌아갔다.“......”마치 가로수나 전봇대를 본 것처럼.아니,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그는 옆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희수의 어깨를 스치듯 그대로 지나쳐갔다.속도가 줄어들지도, 멈칫하지도 않았다.완벽한 무시.완벽한 타인.희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등 뒤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뭐지?”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ESTJ의 빠른 판단력도 이 순간만큼은 작동하지 않았다.‘못 봤나? 아니,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옆에 사람이 있어서? 그래도 눈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내가 창피한가? 다리 다쳐서 이러고 있는 게?’수만 가지 가설이 폭죽처럼 터졌지만, 결론은 하나였다.그는 나를 모른 척했다.다리가 떨려왔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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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사랑해서 숨겼다?

그날 밤, 희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루틴도 건너뛰었다.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보고 규칙’을 희수가 먼저 깨버렸다.이것은 시위가 아니었다.그냥, 할 말이 없었다.‘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는데, 굳이 ‘있는 척’ 보고를 하는 게 우스웠다.점심시간이 지났다.재원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희수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내가 보고 안 하니까 편하지? 네 시스템에서 오류가 사라져서 좋겠네.’그런데 오후 3시.재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다리는.] 15:00[많이 부었나.] 15:01평소라면 절대 연락하지 않을 애매한 시간.심지어 내용은 ‘루틴’이 아니라 ‘상태 체크’였다.희수는 답하지 않았다.그러자 30분 뒤, 또 메시지가 왔다.[약은.] 15:30[어제 무리해서 걸었잖아.] 15:30희수는 그 문장에서 멈칫했다.‘...어제 무리해서 걸었다고?’그는 알고 있었다.어제 편의점에 다녀온 것. 자기가 절뚝거리고 있었던 것.그 모든 걸 봤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희수는 떨리는 손으로 타자를 쳤다.[봤으면서 왜 모른 척했어?] 15:32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이건 ‘감정’이 아니라 ‘진실 규명’ 요구였다.답장은 한참 뒤에야 왔다.그가 수백 번 고민하고 지웠을 시간.[...설명하기 복잡했다.] 15:45[옆에 사람 있었고.] 15:45[준비 안 된 상황이었다.] 15:46‘준비 안 된 상황.’희수의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불이 들어왔다.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그는 희수가 창피했던 게 아니었다.‘예기치 못한 상황(변수)’에 ‘사적인 영역(희수)’이 ‘통제 없이 노출’되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위험 상황’이었던 것이다.재원에게 연애는 둘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완벽한 시스템이다.하지만 그 시스템이 외부(지인)에게, 그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개되는 건 그에게 ‘시스템 붕괴’나 다름없었다.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방어’했다.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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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나쁜놈 인 줄 알았는데 그냥 곰이었다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진짜 그런가? 내가 콩깍지가 씌어서 합리화하는 건가?’그때,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저녁 7시. 재원이었다.“문 열어.”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는,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족발, 보쌈 같은 데이트용 배달 음식이 아니었다.대형 마트 장바구니.그 안에는 우유, 칼슘 두유, 멸치볶음, 그리고 도가니탕 팩이 가득했다.“...이게 다 뭐야?”재원은 대답 대신 희수의 다리부터 스캔했다.“보조기 찼나.”“찼지.”“부기는 좀 빠졌네.”그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익숙하게 냉장고를 열고 사 온 것들을 채워 넣었다.정리는 칼각이었다. 유통기한 순서대로, 희수가 꺼내기 쉬운 칸에.“뼈 붙는 데 좋은 거다. 챙겨 먹어라.”“아니, 나 혼자 이걸 어떻게 다 먹어...”“먹어야 낫는다. 안 먹으면 안 낫는다.”그는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희수에게 물 한 잔과 약 봉투를 내밀었다.“약 먹어.”희수는 약을 받아먹으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친구들이 말한 ‘나쁜 남자’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행동을 대조해 보았다.‘나쁜 남자들은... 책임 회피하고, 맘대로 구속하고, 감정적으로 휘두른다는데.’지금 이 남자는?1. 책임감: “안 먹으면 안 낫는다”며 바리바리 장을 봐왔다.2. 구속: “보조기 차라”, “돌아다니지 마라”고 잔소리하지만, 그건 내 안전 때문이다.3. 감정: 휘두르기는커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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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생존자 없음 (No Survivors)

도가니탕은 훌륭했다.국물까지 싹 비운 그릇을 재원이 가져가 설거지를 시작했다.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물소리.희수는 식탁에 턱을 괴고 그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무뚝뚝하고, 말 없고, 표현도 없다.그런데 밥은 먹이고, 약 챙겨주고, 설거지까지 한다.‘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성격은 시멘트인데, 또 하는 짓은 진국이고.’문득 궁금해졌다.이 기이한 ‘곰’을 거쳐 간 다른 여자들은 어땠을까.다들 이 남자의 ‘시멘트 화법’에 질려 도망갔을까, 아니면 나처럼 ‘도가니탕’에 코가 꿰였을까.희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툭 던졌다.“자기야.”“어.”“전 여친들이랑은 얼마나 만났어? 제일 오래 만난 게 얼마야?”설거지하던 손이 멈칫했다.재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비밀이다.”“에? 비밀이 어딨어. 그냥 말해줘 봐.”“지나간 일이다. 알 필요 없다.”철벽이었다.하지만 희수는 목표가 생기면 물러서지 않는다.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아, 말해줘! 알아야 내가 이기지!”재원이 고무장갑을 낀 채 뒤를 돌아봤다. 미간이 좁혀져 있었다.“...뭘 이겨.”“기록 갱신!”희수는 눈을 반짝이며 선전포고했다.“난 무조건 자기 전 여친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거야.그러니까 데이터가 필요해. 최대 생존 기간이 얼만지 알아야 내가 목표를 잡지!”“......”재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희수를 내려다보았다.보통은 “사랑해”나 “질투 나”라고 할 타이밍에, “살아남겠다”고 선언하는 여자친구라니.그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싱크대로 몸을 돌렸다.그리고 헹굼을 마무리하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3개월.”“......어?”희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길어야 100일. 대부분 그전에 끝났다.”“뭐...? 3개월이 최대라고? 왜? 다 차였어?”재원은 물기를 닦고 식탁으로 와 희수의 맞은편에 앉았다.그의 표정은 건조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실패 기록’을 팩트로 나열했다.“지친대. 내가 감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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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프라이빗 존 (Private Zone)

재원의 지독한 간호(라 쓰고 통제라 읽는) 덕분에, 희수의 다리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되었다.드디어 보조기를 풀고, 두 발로 재원의 아파트 현관을 밟는 날.[도착 5분 전]희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질렀다.습관처럼 재원의 지정석을 확인했다.재원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늘 같은 자리에 주차하니까.그런데.“…어?”그 자리에 낯선 차가 서 있었다.처음 보는 검은색 신형 세단. 번쩍거리는 새 차였다.‘뭐야, 다른 사람이 댔나?’재원은 자기 자리에 누가 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희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차장을 한 바퀴 더 돌았지만, 재원의 익숙한 차는 보이지 않았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재원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왔나. 다리는.”“완전 멀쩡해! 근데 자기야.”“어.”“자기 차 어디 갔어? 지정석에 다른 차 있던데?”재원의 시선이 TV 화면에서 아주 잠시,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만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이 덤덤했다.“…그냥. 다른 데 세웠다.”“어디? 내가 오면서 봤는데 안 보이던데?”“지하 2층 구석에. 자리 없어서.”“아, 그래?”희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 꼼꼼한 성격에 문콕 당하기 싫어서 구석에 댔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방어 기제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칠 뒤.희수는 서프라이즈로 재원의 퇴근 시간에 맞춰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들어왔다.며칠 전 봤던 그 차였다.지정석에 세워져 있던, 그 번쩍이는 검은색 신형 세단.‘저 차 주인은 맨날 칼퇴 하네.’희수가 무심코 차를 바라보는데, 운전석 문이 열렸다.그리고 내리는 사람은.“……”재원이었다.익숙한 정장, 익숙한 가방을 든 그가 낯선 새 차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희수는 순간 뇌 회로가 정지했다.숨을 곳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재원의 눈이 커졌다.당황. 명백한 당황이었다.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범죄 현장을 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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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곰의 인간 코스프레

희수의 썸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그냥 곰이 인간 코스프레를 하던 시절이었다.1년 전, 집 앞 편의점.그곳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희수는 퇴근길에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렀고, 그 시간대에는 항상 그 남자가 있었다.큰 키, 딱 벌어진 어깨, 무뚝뚝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단정한 인상.희수가 그에게 호감을 느낀 건, 알바생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그는 계산대에 물건을 올릴 때도 바코드가 찍기 편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카드는 이미 손에 들려 있었다.“봉투는 괜찮습니다. 수고하십니다.”군더더기 없는 동작, 정중한 목소리.진상 손님이 난무하는 편의점에서, 그는 알바생의 감정 노동을 1g도 시키지 않는 ‘유니콘 같은 손님’이었다.동네 어르신이 길을 물으면, 귀찮은 내색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정확한 방향을 지시했다.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친절한 남자. 희수의 눈에는 그게 ‘다정함’으로 보였다.(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그냥 그의 철저하게 학습된 ‘사회생활 프로토콜’이었다.)어느 늦은 밤.편의점 앞 파라솔 테이블.우연히 맥주 한 캔을 사서 나온 희수와, 마침 컵라면을 먹으려던 그가 합석하게 되었다.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희수 혼자 좋았다.술기운이 살짝 오른 희수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과감하게 돌직구를 던졌다.“저기요.”“예.”“제가 원래 이상형이 좀 확고하거든요?”희수는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며 곁눈질로 그를 훑었다.“저는 키 크고, 어깨 딱 넓고. 쌍꺼풀 없는 큰 눈에… 입술 좀 도톰한 남자를 좋아해요.”누가 봐도 ‘너다’라는 묘사였다.보통의 남자라면 얼굴을 붉히거나 겸손을 떨었겠지만,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 딱 저네요?”“...네?”그는 세상 쿨하게 웃었다.“하하하! 전 팩트만 말합니다. 거울 보면 딱 그렇게 생겼거든요.”희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재수 없는 건지, 솔직한 건지. 근데 묘하게 설렜다.그는 기분 좋게 맥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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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보안 패치 업데이트

어느 한가한 주말 오후. 희수는 소파에 누워 재원의 무릎을 베고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간. 문득 희수는 그동안 모아온 데이터를 검증해보고 싶어졌다. “자기야.” “어.” “나 자기에 대해 알아낸 거 있어.” 재원은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건조하게 물었다. “뭔데.” “자기 말투.” 희수는 몸을 일으켜 재원과 눈을 맞췄다. 비장한 탐정의 눈빛이었다. “내가 분석해봤는데, 자기는 기분 좋을 때랑 안 좋을 때 대답이 달라.” “...?” “팩트나 긍정일 때는 ‘네에’.” “그리고 귀찮거나, 불편하거나,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할 때는 ‘예예’.” “......” 재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희수는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맞지? 내 말이 맞지? ‘예예’는 사실상 ‘대화 종료’ 버튼인 거잖아.” 재원은 잠시 침묵했다. 뇌 회로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의 가장 은밀한 감정 신호 체계가, 여자친구에게 완벽하게 해킹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시간. 그리고 그가 내뱉은 대답은, 희수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주… 똑같은데요?” “......어?” 희수는 빵 터졌다. “푸하하하! 뭐가 아주 똑같아! 지금 눈동자 지진 났는데?” “아니다. 그냥 ‘네’랑 ‘예’의 차이다. 의미 없다.” 재원은 황급히 TV 채널을 돌렸다. 누가 봐도 ‘들킨 포식자의 당황함’이었다. 희수는 그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그날 이후 벌어졌다. *** 다음 날부터, 재원의 메시지가 이상해졌다. [오늘 늦는다] [야근이다] 평소라면 희수가 [힝 ㅠㅠ 고생해 ㅠㅠ]라고 보내면, 귀찮음이 섞인 [예예]가 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네에] “…?” 희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타이밍에 네에? 갑자기 긍정이라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희수가 [나 오늘 떡볶이 먹고 싶어!]라고 (재원이 싫어하는) 메뉴를 던졌을 때도. 평소: [예예. 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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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곰 길들이기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나 싶더니, 기어이 재원의 고질병이 도졌다.일명 ‘온도 급락 및 루틴 누락’ 사태.[기상] 06:12[출근] 07:30점심시간.평소라면 [밥 먹고 쉰다]가 와야 할 12시 30분이 지났지만, 연락이 없었다.오후 3시가 되어서야 온 답장은 단 두 글자.[바빴다]끝.이모티콘도, 물결표도, 설명도 없었다.예전의 희수라면 “왜 연락 안 해? 서운해!”라고 따졌거나, 불안해하며 “무슨 일 있어? ㅠㅠ”라고 매달렸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희수는 다르다.그녀는 재원이라는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한 관리자니까.‘아하. 또 오토(Auto) 모드 켜졌네.’‘편해지니까 긴장 풀고 루틴 대충 돌린다 이거지?’희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었다.말투로 지적하면 그는 방어막을 칠 것이다.그러니 방법은 하나.그가 느끼는 ‘안정값’을 아주 미세하게 흔드는 것.희수는 비장하게 [곰 교정 프로토콜]을 가동했다.[DAY 1: 미러링 (거울 치료)]희수는 답장을 보냈다.재원이 보낸 ‘바빴다’에 딱 맞는 온도로.[응 수고]이모티콘 삭제.물결표 삭제.애정 표현 삭제.그날 저녁, 재원의 퇴근 보고가 왔다.[집 도착] 19:10[씻고 쉰다] 19:15평소라면 [고생했어 자기야❤️ 푹 쉬어~]라고 했겠지만, 희수는 건조하게 입력했다.[네에][쉬세요]그 순간, 재원의 채팅창에서 ‘1’이 사라지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채팅창에 ‘입력 중...’이 떴다가 사라지기를 몇 번 반복했다.‘감지했네.’희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재원은 지금 당황했을 것이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삐진 것도 아닌데, 묘하게 평소와 다른 이 건조함.그는 스스로 원인을 찾기 위해 뇌를 풀가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DAY 2: 조건부 보상 (당근과 채찍)]다음 날 아침.재원의 기상 보고가 평소보다 10분 일찍 왔다.[일어났다] 06:00[오늘 좀 춥네. 옷 따뜻하게 입어라.] 06:01평소엔 안 하던 ‘날씨 체크’와 ‘걱정’이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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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곰의 방어력이 0이 되는 순간

재원과의 연애는 ‘타이밍 싸움’이다.희수는 그동안의 데이터 수집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아무 때나 문제를 던지면, 곰은 기계적인 솔루션만 뱉고 사라진다.하지만 ‘시스템 점검 시간(방어력이 낮아지는 순간)’을 노리면, 의외로 순한 양이 된다.희수는 오늘, 그 ‘골든 타임’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실험 1. 최악의 타이밍 (방어력 100%)]오후 2시. 재원의 업무 시간.희수는 일부러 재원이 반응할 만한 ‘문제’를 하나 던졌다. 평소라면 걱정해서 달려올 만한 소재였다.[자기야~ 나 점심 먹은 게 얹혔나 봐 ㅠㅠ 머리도 아프고 속 안 좋아...]보통의 남친이라면 “괜찮아? 약 사다 줄까?”라고 했겠지만, 업무 모드의 재원은 달랐다.답장은 30분 뒤에 왔다.[급하게 먹으면 체한다.][소화제 먹어.][나 일한다~]완벽한 솔루션이었다. 하지만 온도는 영하 20도였다.‘체한 원인(급식)을 지적하고, 해결책(약)을 제시한다. 나는 바쁘다.’감정적인 위로는 1g도 섞이지 않은, 그저 ‘고장 난 기계 수리 매뉴얼’ 같은 대답.'하.. 가끔은 나도 위로 받고 싶다구 이 곰탱아... '예상대로였다.업무 모드일 때의 재원은 감정 수신 차단 상태다. 이때 징징거리는 건, 바쁜 상담원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것과 같다. ‘종료’당한다.***[실험 2. 애매한 타이밍 (방어력 50%)]저녁 8시. 데이트 중, 운전하는 차 안.재원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다.“자기야. 아까 낮에 나 아프다는데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는 팩폭이 뭐야? 좀 서운하더라.”“...팩트잖아. 너 급하게 먹는 거.”“아니, 1초면 되잖아. 걱정된다 한마디가 어려워?”“말 그만해라.. 운전 중이다.”역시 실패.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곰에게 ‘운전(미션)’과 ‘감정 처리(서브 미션)’를 동시에 요구하는 건 시스템 과부하를 일으킬 뿐이었다.***[실험 3. 골든 타임 (방어력 0%)]밤 10시 30분.재원의 집.그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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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상처의 불균형

재원과의 연애는 늘 ‘방패’와 ‘창’의 싸움 같았다.문제는, 누가 방패고 누가 창인지가 매번 헷갈린다는 점이었다.주말 저녁,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라디오에서 결혼에 관한 사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희수는 무심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자기야. 우리 내년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까? 미리 적금이라도 들까?”가벼운 제안이었다. 미래를 함께 그리자는 은유적인 표현.하지만 핸들을 잡은 재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회피형 특유의 ‘미래에 대한 불안’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그는 앞만 보며 건조하게 내뱉었다.“내년 일은 내년에 생각하자.”“아니, 미리 계획하면 좋잖아.”“사람 일 모르는 거다. 그때 우리가 만나고 있을지 아닐지 어떻게 아나.”희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또 시작이다. 저 놈의 ‘방어 기제’.좋으면 좋다고 하면 될 걸, 꼭 저렇게 찬물을 끼얹는다.“말을 왜 그렇게 해? 헤어질 수도 있다는 전제를 왜 깔아?”재원은 덤덤하게, 마치 남의 일을 분석하듯 팩트를 나열했다.“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라. 연애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니?”“......”“모든 연애엔 유효기간이 있다. 난 인지를 하는 것뿐이고.”[재원의 속마음]‘네가 너무 좋아서 불안하다. 영원을 기대했다가 실망하기 싫다. 그러니 미리 기대치를 낮춰놔야 한다. 그래야 내가 상처받지 않는다.’하지만 희수에게 그 말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으로 들렸다.특별하지 않다니. 유효기간이라니.희수는 울컥했다. 서운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그래서, 그녀는 재원의 논리를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그래요? 우리가 특별할 게 없고, 유효기간이 있는 거라면.”희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재원을 쏘아봤다.“그럼 유효기간 끝나기 전에 다른 여자 찾으시면 되겠네요!”그 순간.끼이익-!차가 거칠게 멈춰 섰다. 신호는 아직 바뀌지 않았는데도.재원의 손이 핸들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손등에 핏줄이 섰다.차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재원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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