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도 우리 집으로 가.”초코의 미용을 끝으로, 재원의 알레르기가 잦아들고퇴근 하는 길이었다.희수의 눈은 마주치지 않은 채, 차 안에 울려 퍼진 재원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못해 절박했다. 희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전의 재원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사였다. 그에게 연애란 철저하게 계획된 루틴 안에서만 존재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그어두고, 그 외의 시간은 각자의 동굴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믿었던 남자였다. 매일 함께 있는 것을 효율성 떨어지는 감정 소모라며 부담스러워하던 그 곰탱이가, 지금은 주인 곁을 한시도 떠나기 싫어하는 대형견의 눈을 하고 희수를 졸라대고 있었다.“뭐어? 안 돼. 나 오늘 할 일 많아.”희수는 일부러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단호하게 잘랐다.“현관 센서등도 갈아야 하고, 밀린 빨래도 돌려야 해. 자기 챙겨줄 정신없으니까 그냥 집에 가.”“센서등, 내가 갈아줄게. 공구 차에 있어.”“...뭐?”“빨래 돌아가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만 있을게. 집안 일 하고 우리집에 가."재원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결국 희수는 한숨을 내쉬며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털 알레르기로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도 빗질을 멈추지 않던 그 고집이 여기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띠리릭, 도어락 소리와 함께 재원이 희수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현관을 넘어서는 순간, 재원의 발걸음이 묘하게 머뭇거렸다. 분명 예전에도 수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재원이 마주한 공간은 낯설다 못해 서늘했다. 거실 한복판에 놓여 있던 자신의 전용 1인용 소파는 사라졌고, 벽면에 나란히 붙어 있던 커플 사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재원은 홀린 듯 주방으로 향했다. 찬장을 열자, 항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던 머그컵 선반에는 이제 희수의 것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말... 다 치웠네.’재원은 그 텅 빈 공간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희수
재원의 비장했던 기세는 초코의 거대한 꼬리질 한 번에 처참히 무너졌다. 테이블 위에 올라앉은 초코는 재원에게 친근함을 표시하듯 묵직한 앞발을 툭 내밀었고, 재원은 마치 폭탄이라도 피하듯 슬리커 빗을 쥔 손을 바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희수야, 얘는 내가 알던 강아지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아. 무게감이 거의 송아지 수준인데?”“자기야, 엄살 좀 부리지 마. 덩치만 컸지 얼마나 순한데. 자, 결 따라 부드럽게 빗겨줘 봐.”희수는 배를 잡고 웃으며 재원의 손을 초코의 엉킨 털 위로 이끌었다. 재원은 꿀꺽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가느다란 슬리커를 갖다 댔다. 사각, 사각. 엉킨 털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뽀얀 털 가루가 공중으로 흩날렸다.그때였다. 재원의 콧망울이 실룩거리기 시작한 것은.“에에엣취! 에취! 에취!”연달아 터지는 재채기 소리가 고요한 미용실 안을 울렸다. 재원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려 팔꿈치에 코를 묻었지만, 한 번 터진 재채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희수는 가위질을 멈추고 재원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재원의 눈가가 발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평소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앞머리는 재채기의 반동으로 헝클어져 이마를 덮었고, 콧등에는 발그레한 기운이 돌았다.“자기야, 너 설마 털 알레르기 있어? 아까 아침엔 괜찮았잖아!”“...에취! 아냐, 아침에는 털이 이렇게... 에취! 날리지 않았을 뿐이야. 괜찮아.”재원은 빨개진 눈을 비비며 다시 슬리커를 고쳐 잡았다. 희수는 기가 찼다. 저 고집불통. 지금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상태면서, 연차까지 내고 조수를 자처한 체면이 있는지 절대 빗을 놓지 않았다. 희수는 서랍을 뒤져 비상용으로 두었던 알레르기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재원에게 내밀었다.“이거 먹어. 그러다 쓰러지겠다. 눈 좀 봐, 완전 토끼 됐어.”“...안 먹어. 약 먹으면 졸음이 와서 작업에 지장이 생겨. 다음 주에 또 연차 내서 너 도와주려면,오늘 완벽하게 익혀둬야 해.”"또 연차 낸다구?"
차 안의 정적은 생각보다 길었다. 희수는 대시보드 위에 놓인 재원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들, 다음 주에 같이 집에 오는 건 어떠니?] 라는 문구는 이미 화면에서 사라졌지만, 그 잔상은 재원의 얼굴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재원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초점은 이미 안드로메다 어디쯤을 헤매는 듯했다. 핸들을 쥔 마디 굵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희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 뻣뻣하게 굳은 옆얼굴을 훑었다. 서울 본사 복귀라는 거창한 미션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남자가, 어머니의 '동행' 제안 한 줄에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지는 꼴이라니. 희수에게는 그 어떤 로맨틱 코미디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자기야, 넋 나갔어?” 희수의 목소리에 재원이 흠칫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그는 대답 대신 마른세수를 크게 한 번 하고는, 마치 중대한 결단을 내린 장수처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비해야겠어.” 재원의 말투는 비장하다 못해 비극적이기까지 했다. 희수는 조수석에 몸을 비스듬히 눕힌 채,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생존 시뮬레이션’에 돌입한 이 곰탱이를 즐겁게 관찰했다. 차가 출발했지만, 재원은 평소답지 않게 신호등의 노란불에도 과하게 움찔거렸다. 어머니의 메시지 한 줄이 그의 정교한 루틴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은 게 분명했다. 오전의 ‘보라색 꼬리’ 미용실 안에서도 재원의 소리 없는 사투는 계속되었다.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빗자루를 든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꼿꼿했지만, 희수의 눈에는 그 너머의 당혹감이 훤히 보였다. 재원은 바닥을 쓸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어머니께 드릴 첫 마디를 고르고, 또 고치고 있을 터였다. ‘자기, 너 지금 빗자루질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랑 면접 보고 있지?’ 희수는 별이의 털을 다듬으며 거울을 통해 재원을 훔쳐보았다. 재원의 손길은 기계처럼 정확했지만, 가끔
재원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떨렸다. 본사 출근 첫 주, 그것도 월요일 아침에 어머니가 건 페이스타임이라니. 이미 깔끔하게 씻고 머리까지 정돈한 재원의 모습은 누가 봐도 출근 준비를 마친 완벽한 형색이었다. 그 '완벽함'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자, 자기야! 일단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계속 울리는데?”“안 돼. 내 뒤로 보이는 거실 벽지가 회사 사무실일 리가 없잖아.”“그럼 거절해!”“어머니는 내가 전화를 거절하면 사고가 난 줄 알고 응급실부터 전화하실 분이야. 내 루틴상 전화를 안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재원의 논리 회로가 과부하로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벨소리가 끊기기 직전, 재원은 결단을 내린 듯 희수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기 있어. 절대로 소리 내지 마.”“잇 자기야! 읍!”재원은 희수의 입을 막고 문을 닫은 뒤, 급하게 하얀 대리석 벽면 앞으로 달려갔다. 그나마 가장 오피스 건물 내벽과 비슷해 보이는 위치였다. 재원은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락’ 버튼을 눌렀다. 화면 너머로 인자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 “아들! 역시 우리 아들, 벌써 출근해서 업무 준비 중이니? 옷 차림 보니까 든든하네.”어머니의 오해는 정교했다. 재원이 씻고 나와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깨끗한 티셔츠 차림이 화면상으로는 캐주얼 데이를 맞이한 직장인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네, 어머니. 보시다시피 아주 잘 적응 중입니다. 지금 막 회의 들어가기 직전이라 짧게 통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재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카메라 각도를 고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 즉 화장실 안에서 터졌다. “자기아! 수건 없어! 아까 자기가 다 썼어?”희수의 목소리가 화장실 문틈을 타고 거실을 울렸다. 재원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어머니의 미간이 좁아졌다. - “아들, 방금 무슨 소리니? 사무실에 여직원이 벌써 그렇게 친하게 지내? 수건을 찾고?”“
아침 햇살이 암막 커튼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희수의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희수는 기분 좋은 노곤함에 몸을 뒤척이다가, 코끝을 스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에 번쩍 눈을 떴다. 이곳은 자신의 자취방이 아니라 재원의 아파트였다. 어젯밤의 그 뜨거웠던 입맞춤과 재원의 품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자기?”잠결에 내뱉은 희수의 목소리는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한 순간, 희수의 심장은 다른 의미로 멈춰버렸다. 재원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씻고 나온 듯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그것은 재원의 폰이 아니라, 희수의 핑크색 폰이었다. 더 최악인 것은 화면 속에 띄워진 내용이었다. 재원의 시선은 희수가 어젯밤 잠들기 직전, 반쯤 풀린 정신으로 정성스럽게 업데이트했던 [🐶웬수] 폴더의 마지막 문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웬수가 아니라... 그냥 내 사랑임.]“...자기, 너 지금 뭐 해!”비명이 터져 나왔다. 희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재원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재원은 긴 팔을 이용해 가볍게 희수를 따돌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의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원의 목소리는 평소 본사 회의에서 실적을 발표할 때처럼 지극히 낮고 건조해서, 그 수치심은 배가 되었다.“1번. 융통성 없는 곰탱이. 5번. 사회성 결여된 AI. 12번. 눈치 없는 고집불통. 17번. 셔츠 걷어붙이고 요리하는 건 형법으로 처벌해야 함.”“아아악! 그만해! 죽을래 진짜!”희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재원의 낭독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희수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대목에 도달했다.“20번. 곰탱이인 줄 알았는데 사자였음. 심박수 데이터 측정 포기. ...웬수가 아니라, 그냥 내 사랑임.”재원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아주
“내일 아침엔 사과 사진 찍지 마. 그냥 얼굴 보여줘. 가게로 와.”희수의 폭탄선언에 재원은 들고 있던 물컵을 놓칠 뻔했다. 평소라면 ‘오전 8시 방문의 효율성’을 따졌을 그였지만, 지금은 뇌 회로가 완전히 타버린 듯 멍하니 희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재원이 컥컥거리며 사레들린 물을 삼키는 동안, 희수는 세상에서 가장 뻔뻔하고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틴이 망가진 자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달콤한 새로운 추억이 쌓여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계는 어느덧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창밖의 빗줄기는 기세를 꺾지 않은 채 유리창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고, 배를 채운 희수에게는 참기 힘든 노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재원의 어깨에 기댔던 그 온기가 다시금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희수는 빈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짐짓 쿨한 척 몸을 일으켰다. “...잘 먹었어. 이제 진짜 가야겠다. 내일 아침에 늦지 말고 와, 자기야.”희수가 현관으로 향하려던 그 찰나,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던 재원의 뒷모습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주 낮고 뻣뻣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이 비에 어딜 가. 자고 가.”“......어?”희수는 신발장에 손을 뻗으려다 말고 로봇처럼 멈춰 섰다. ISTJ인 그가 내뱉은 말 중 가장 비논리적이고, 동시에 가장 용감한 제안이었다. 희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재원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지만, 그의 귀 끝은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자기, 나 가지마? 유혹이야?”희수의 짖궂은 질문에 재원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지만, 입술은 단호하게 달싹였다.“유혹이 아니라... 이 강수량에 도보 이동은 감기 걸러.. 그리고 내일 아침에 같이 출근하는 게 동선상으로도 훨씬 효율적이야.”“출근? 재원 씨 내일 회사 안 가?”재원은 헛구역질 같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주머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 재원의 루틴이 오늘은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12:30 / 15:40 / 18:00] 같이 칼같이 들어오던 보고였다.희수는 처음엔 “바빴겠지” 하고 넘겼다.하지만 점심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왜 보고 안 해…?’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희수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희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진심을 담아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자기 늦어도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재원이 아침부터 보내는 ‘초건조 모드’를 보며슬슬 불쾌함이 쌓여갔다.[회의들어간다] 09:30[끝났다] 10:10[밥먹고 쉰다] 12:31[일하는 중] 13:05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정보만 던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심지어 온도도 없음.희수는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섞었다.[나 지금 밥먹었어!] 13:30[오늘 손님 많아 ㅠㅠ 지쳐어~] 14:25그런데 돌아오는 답은—[네에] 15:40[집이다 쉰다] 15:4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