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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Chapter 11 - Chapter 20

59 Chapters

11화. 귀여운 아가씨

“아, 그건…! 그냥, 메모장이에요. 진짜 별거 아닌데…”세레인이 당황해 다가가려 하자, 벨라는 재빨리 수첩을 열어봤다.안 쪽엔 날짜와 약초 이름들, 간단한 일상 단상과 알 수 없는 낙서가 빼곡했다.“으응… 흠… ‘나는 괜찮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산초가 깨끗했다.’ 꺄하학 이게 뭐야! 시야? 일기야?”벨라는 귀족 영애 답지 않은 모습으로 넘어가듯이 웃으며, 수첩을 넘겨봤다."약초 판매… 비누 만들… 뭐야!"도저히 들을 수가 없던 세레인이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수첩을 낚아채 듯 뺏어 들었다.“죄송해요! 아가씨…! 그냥... 그날 있었던 생각 같은 거예요.”벨라는 팔짱을 끼고 세레인을 빤히 쳐다봤다.이것 봐라? 이게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벌써 독립 준비를 하네?벨라는 입을 삐죽였다."비누는 왜 만드는데 네가?"그것도 되지도 않는 그 손재주로? 덧붙이려다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벨라는 뒷말을 생략했다."아 그게, 어…"“너 돈 매 달 받잖아. 부족해?”“아니요, 전혀 부족하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 베르나에서 하던 일은 약초를 캐는거라 버는 돈이 정말 적었어요."그건 사실이었다.남작가에서 받는 급여는 당연하게도 세레인이 베르나에서 벌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급여가 정해진 날짜에 들어오는 안정성도 확실했고, 또 마사가 있어 잘 적응할 수 있었다.이 곳의 사람들도 대부분 친절했다.레오폴트 리베르츠 남작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무역업을 하다보니, 사용인들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타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적었을 것이다.“흐응… 너 짐 싸서 나가기만 해봐!”벨라는 괜히 부풀린 뺨을 찌푸리듯이 말하며 다시 시선을 세레인의 손에 들린 수첩으로 옮겼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너, 몇 살이라고 했지?”“스물 둘이요. 이제 곧 있으면 스물 셋이에요.”“…두세 살 더 있으면 결혼할 나이잖아.”세레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벨라를 바라보았다.“저, 아직 그런 생각은.”누가 나랑 결혼을 한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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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황제의 질문, 하녀의 거짓말

저택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키가 크고 단정하게 제복을 갖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비안 리베르츠였다. 한눈에 봐도 훈련된 몸이라고 느껴지는 체격과 절제된 걸음걸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햇빛을 받자 살짝 밝아 보이는 머리색이 제복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살짝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는 푸른빛 눈동자가 엿보였다. 예리하게 보일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가볍게 미소 짓고 있어서 그런지 부드러워 보였다.확실히 괜히 남매가 아니구나. 벨라 아가씨하고도 많이 닮았다. 특히 눈매와 전체적인 윤곽이 비슷했다.“벨라! 너 또 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있냐?”“내가 입고 싶어서 입었거든? 어디서 오자마자 시비야!”“그래, 반 년 만에 네가 변하면 이상한 거지.”“내가 왜 변해?! 죽어볼래?”두 남매는 오랜만에 보는 만남이었음에도 서로를 보자마자 거세게 부딪히기 시작했다.세레인은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나 인사를 올렸다.“리나에요.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하녀입니다.”청년의 눈길이 세레인에게 향했다. 깔끔하게 묶어 올린 금빛 머리와 자신의 어깨 높이를 조금 넘는 아담한 키.“아, 새로 온 하녀?”“네, 영애께서 잘 챙겨주셔서 편하게 일하고 있습니다.”“걔가 그럴리가 없는데. 난 다비안.”“잘 부탁드립니다, 공자님.”그는 반쯤 농담하듯 말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시선은 한참이나 그녀에게 머물렀다.외지에서 온 하녀라더니, 발테리움의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다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동선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얼굴을 돌렸다.다비안이 돌아온 지 며칠 뒤, 저택에는 황금빛 밀랍으로 봉인된 두꺼운 봉투 한 장이 도착했다. 제국 황실에서 열리는 상무회 회의. 금빛 인장이 빛나는 문서 끝에는 황실의 표장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리베르츠 남작은 천천히 편지를 접으며 얼굴에 드러나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 카르안의 인장이 찍힌 소환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 브리스.수도 브리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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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못생긴 가면(1)

“가 봐. 하지만 다음번에도 내 눈 앞에 ‘길을 잃었다’는 핑계로 나타난다면… 그때는 네 주인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거다.”명백한 경고이자 동시에 자비로운 처분이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폐하."세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하고는 부리나케 훈련장을 빠져나갔다.“…숨 막혀.”세레인의 발걸음은 한동안 멈추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 정원이 보이기 시작해서야 겨우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방금 전의 일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듯 맴돌았다.…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아. 아니, 애초에 또 마주칠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거지.세레인이 심장 두근거림을 애써 진정시키며, 정원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벨라 아가씨는 이미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리나 늦었네. 어디까지 구경하고 온거야? 얼른 앉아!”“아 네!”“레이나 영애는 일이 있다고 방금 전에 갔어.”세레인은 양심에 찔려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황궁은 정말 넓네요… 사실 저 아까 길 잃어서 늦은거였어요… 아가씨.”“뭐야 어쩐지 늦다했네. 흐음 너 여기 위치 제대로 못 외웠지?”“네, 아직 잘 몰라요…”황궁은 넓어도 너무 넓고… 그리고 그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굳이 황제와 마주쳤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세레인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바라보다, 괜히 시선을 돌렸다.“그럼 황궁 구경가자!”“...네?”예상 외의 말에 세레인의 시선이 다시 벨라에게 향했다.“아침부터 뭔가 답답하기도 했고. 시원한 황궁 갔다가 시원한 디저트 먹으면 되겠다.”“어, 아가씨 저는-”달갑게 응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세레인은 다른 제안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말이 잘려버렸다.'그때는 네 주인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다.“됐고! 아무튼 가.”벨라는 이미 기분이 잔뜩 들뜬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가는 곳에는 사용인들이 따라야 하는 법. 결국 세레인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그녀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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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못생긴 가면(2)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집안의 영애들이 한쪽에 모여 있었다. 그녀들은 일찌감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을 마쳤다. 속눈썹에는 반짝이는 가루가 내려앉았고, 손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부채가 들려 있었다. 평소엔 사이좋게 웃던 친구 사이조차 오늘만큼은 서로의 가면을 은근히 견제했다. 누구의 것이 더 우아한지 누구의 것이 더 화려한지.크림색의 긴 테이블 위에는 화려하고 우아한 각양각색의 가면들이 놓여 있었다. 세레인은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내려다보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가장 눈에 띄지 않을 곳을 찾아 구석 자리에 내려놓았다.옆에 예쁜 가면들이 있어서 더 비교되는데… 하, 난 몰라… 아가씨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세레인은 가면을 두고 뒤로 몇 발짝 물러나 구석으로 이동했다. 아까 훈련장에서 황제가 했던 서늘한 경고가 자꾸만 떠올랐다.어차피 형식 상 보는거겠지...그때 후원 입구 쪽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붉은색 예복 차림의 황제 카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는 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과 몇 명의 시종이 따르고 있었다. 황제는 무심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하나씩 훑기 시작했다.“이건 라포르 백작가 영애의 작품입니다. 실크와 은실을 조합했군요.”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알리앙 가문의 엘리노어 영애가 만든 가면입니다. 진주를 붙여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처리했습니다.”황제의 시선이 머물 때마다 영애들의 얼굴은 기대와 실망으로 나뉘었다. 그러다 유난히 한산한 테이블 앞에서 황제와 시릴이 멈춰 섰다.“이건 뭐지?”황제의 짧은 질문에 시릴이 가까이 다가와 가면을 살폈다.“어… 음…”시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끼와 풀잎이 듬성듬성 덮인 괴상한 가면 옆에는 '리베르츠' 라고 적힌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시릴은 결국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죄송… 폐하, 이건… 푸흡, 이끼 맞죠?”세레인은 시릴의 웃음소리에 ‘뭐지? 많이 이상한가?’ 싶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하지만 황제의 시선이 자신의 가면에 닿여있는걸 발견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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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가면과 황제

카르안 황제는 집무실에 앉아 조용히 가면을 바라봤다.그 조악한 물건은 마치 누가 일부러 웃기려 만든 장난감처럼 우스꽝스러웠다.그게 이상하게도 꽤 즐거웠다. 그는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인상이 찌푸려졌다.처음 봤을 때 그녀는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러웠다.위축에 가까운 몸짓. 교활한 귀족들에게 책 잡히지 않으려고, 애써서 존재감을 숨기는 모습이었다.그래서 카르안은 그 여인을 의심했다. 자신을 속이고 황궁에 들어온 자. 반란을 일으켰다는 귀족 가문에서 신분이 바뀐 채, 제국으로 숨어든 계집. 그녀가 연회장에서 깬 유리잔 사건도 의심의 한 자락이었다.하찮아 보이는 실수.얼마 전에는 훈련장에 몰래 들어와 겁도 없이 거짓 이름을 내뱉었다.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주제에.하지만 오늘 가면으로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가면과 어울리지 않는 소재에 조악한 마무리. 누가 저런 걸 일부러 만들 수 있을까? 모두 허술한 손놀림의 산물이었다.교활한 술책을 감추기엔 너무나도 서툴렀다.그리고 당황한 표정과 쉽게 빨개지는 얼굴이 떠올랐다. 여인은 뭔가를 숨기고 있었지만 자기 감정을 감출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 이상 흥미를 느낄 필요는 없지.이내 그는 가면에 매달린 구슬을 손가락 끝으로 톡 들어올렸다.***홀의 타원형 테이블에 자리한 네 명의 귀족들은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황제 카르안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리하우의 제안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듣겠다.”루도빅 알리앙 공작이 먼저 나섰다.“리하우의 제안은 겉으로는 협력으로 보일 수 있지만, 분명 그 이면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겁니다. 저는 변방의 나라가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의심스럽습니다.”디켄 오브리엔 공작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얻는 것도 분명합니다. 조건만 잘 묶는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루도빅은 고개를 저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폐하.”카르안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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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황제의 은밀한 호출(1)

다비안의 기사단 입단식이 가까워지자, 리베르츠 저택은 한층 더 분주해졌다.세레인은 짐을 싸면서 생각했다.입단식 날이면… 다른 귀족가들도 다 브리스로 올라오려나?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벨라가 세레인의 짐 가방을 확 열어젖혔다.“리나! 짐 다 챙겼지?”“아, 네!”제국의 방패를 임명하는 벨스트람 기사단 입단식의 열기는 뜨거웠다.입단식이 끝남과 동시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신입 기사들을 위한 공식 연회는 황궁 별관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었다.연회장은 소란스러웠다. 곧 임무를 부여받을 신입 기사들의 들뜬 목소리와 그들의 앞날에 줄을 대려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연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상석에 앉은 카르안은 그 풍경을 무심하게 관조했다. 눈 앞의 익숙한 아첨들. 특별할 것 없는 광경에 그는 그저 와인잔을 흔들 뿐이었다.기사단장 알릭스 듀란트는 옆에서 이번 기수 중 쓸만한 재목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었다.“특히 저기 제로드 브린트는 실전 감각이 좋고 기세가 남다릅니다.”카르안은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기울였다. 그의 시선이 기사단장이 가리킨 중앙의 신입 기사들에게 잠시 머물렀을 때, 옆에 서 있던 시릴이 한 발짝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저쪽이 다비안 경인가요?”그 말에 알릭스가 대답했다.“그렇습니다. 다비안은 리베르츠의 장남으로 기초가 탄탄하고, 성실하다는 평이 많습니다. 아마 몇 년 안에 기사단 내에서도 꽤 자리를 잡을 겁니다.”중앙의 화려한 조명에서 한참 떨어진 기둥 옆, 어스름한 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카르안의 시야에 박혔다.리베르츠. 기사 배출이 드문 가문에서 드물게 황실 기사단 기사가 나왔다는 보고를 상기하던 카르안의 머릿속에, 집무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그 조악한 가면이 겹쳐졌다. 그 기묘한 산물을 만들어낸 여자가 지금 저 공자의 곁에 있었다.다비안이 하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낮추자, 그녀는 그의 비뚤어진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익숙한 손길.카르안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멀리서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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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황제의 은밀한 호출(2)

세레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평소보다 유난히 생각이 굼뜨게 돌아갔다.“어… 솜씨가 좋은 이에게 전달해서… 제대로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황제는 나직이 되받았다.“굳이? 황궁에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 거라 생각하나 보군.”세레인은 서둘러 부정하며 또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짧은 정적 후, 무게를 지닌 듯한 말이 세레인을 짓눌렀다.“고개를 들어.”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한동안 멈춰섰다.이건 또 뭐야?이내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세레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붉어진 뺨 위로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고, 떨리는 눈이 황제와 마주했다.그제야 가까이서 마주한 황제의 얼굴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세레인은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정교하게 빚어낸 조각처럼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붉은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쳤다. 세레인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고, 그 소리가 넓은 응접실 공간에 작게 울렸다.황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래 그 표정. 당황하고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과 끝내 숨기지 못한 두려움. 세레인은 그 말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바닥으로 푹 떨궜다.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였지만, 머리 위로 떨어진 음성은 잔인하리만치 선명했다. “고개 들어. 내 말이 가벼운가?”명령에 세레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불려온 이유가 궁금하진 않나 보군.”세레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궁금하지 않을 리 없다.하지만 제국의 주인이 하녀 하나를 응접실까지 부른 이유가 상식적인 범주 내에 있을 리 만무했다.잔인하다, 잔혹하다는 등의 수사를 들은 것만 수차례였다. 타국인인 자신조차도 들어왔지 않는가.수도에서 돌아온 이후, 리베르츠 남작의 표정에 묻어있는 긴장은 하녀인 세레인의 눈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그저 유희일까? 신분 낮은 자들이 권력자들의 심심풀이 땅콩으로 전락하는 꼴은 수도 없이 봐왔다.세레인은 결론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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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뜻밖의 편지

불빛과 음악이 사라진 날이었다.화려하고 아름답고 동시에 숨 막혔던 황궁의 연회.빛나는 장식과 처음 보는 마법 불꽃,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황제 카르안까지.그 모든 것들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꿈인가…?”세레인은 침대에 앉아 담요 끝을 매만지며 숨을 들이쉬었다. 괜히 담요 끝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한꺼번에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그러기엔 다비안 공자님의 기사단 입단식의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응접실에서의 기억이 떠오르자 손이 멈칫했다.어떻게 그곳에서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마사가 무슨 일인지, 몸이 아프냐고도 물어봤던 것 같다. 벨라 아가씨 앞에서는 차 시중이 조금 서툴러도 가벼운 타박으로 넘어갔다. 다비안 공자도 마지막에는 늘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원래 이런 게 아니였나.황제의 앞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정답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말귀도 못 알아듣고... 이런 건 어디에 쓰라고 있는걸까.’세레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 혹은 그 이하. 그렇게 생각하자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벨라 아가씨는 싫어하는 것 같아보여도 내심 옷을 세레인이 골라주기를 기다려줬고, 마사는 괜히 더 먹으라며 음식을 나눠주었다. 그들의 손길과 말은 늘 따뜻했다.황궁은 이 곳과 달랐다. 베르나에서 전해듣던 그대로였다.​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리나?” 마사였다. 세레인은 대답하기 전에 잠시 숨을 골랐다.“응, 들어와 마사.”벨라 아가씨는 여전히 말이 많았고 마사가 따뜻하게 웃고 가끔은 투덜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이상하리만큼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편지가 왔어~ 베르나에서!”문을 열고 고개를 불쑥 내민 마사가 반가운 소식을 전달했다.“헉! 정말?”세레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봉투를 낚아챘다.세상에 드디어 답장이 왔구나!분명 마델렌 아주머니다. 아주머니가 편지를…!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세레인이 서둘러 뜯은 종이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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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차마 잇지 못한 말

유난히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습기가 적당히 감도는 시원한 공기와 바람이 저택 구석구석에 들어왔다.세레인은 벤치에 앉아 무릎 위에 실뭉치를 올려두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마사는 햇살에 반짝이는 연초록 풀잎 너머에 앉아 무언가를 정성스레 꿰매고 있었다.“이 정도면 예쁘게 나오는 건가?”세레인은 턱을 기울이며 자신이 짜던 조그마한 손수건을 살폈다.방금 전 실수를 덮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코 몇 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도안도 없이 마음대로 만든 탓에 모양이 약간 비뚤어진 건 어쩔 수가 없었다.“아, 또 잘못했어…”푸념이 섞인 말에 그늘 아래에 앉아 있던 다비안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그는 평소보다 조금 편한 옷차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헝클어진 붉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며 말했다.“뜨개질은 원래 그런 거야. 네 번째 줄까지 잘 나왔는데.”“…공자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세레인은 놀란 눈으로 다비안을 바라봤다.기사 훈련으로 늘 먼지 묻은 옷을 입고 다니던 사람이 뜨개질을 할 줄 안다고?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벨라가 어릴 때 뜨개질 배우겠다고 기세등등하게 덤빈 적이 있어. 결국 풀린 실 감아주고 엉망진창 된 걸 다시 다 떠준 건 나였지만.”“어, 공자님 은근히 다정하시네요.”세레인이 조용히 중얼였다. 다비안은 어쩐지 당황한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그냥 내가 불쌍했던 거지. 걔가 뜨개질 하다가 내 옷에 구멍 냈다고 사과했거든.”그 말에 마사가 고개를 숙인 채 키득키득 웃었다.“우리 아가씨답네요.”“벨라 아가씨는 뭐든 호기롭게 시작하니까요.”세레인이 작게 웃으며 실을 감았다. 손가락에 따스한 바람이 스쳐갔다. 하늘은 반쯤 노을이 내려앉은 상태였고 정원 의 가장자리 울타리에는 하얀 벨루노 꽃이 피어 있었다.벌레 소리도 아직은 잦지 않았고 바람은 느긋했다.세레인은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걸 정리하며 중얼거렸다.“이 시간이 제일 좋네요. 시끄럽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고.”“조용하긴 하지.”다비안도 눈을 가늘게 뜨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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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그는 이미 보고 있었다

리베르츠 가의 평화로웠던 일상은 사냥제 준비로 제법 소란스러워졌다. 이미 벨스트람의 정식 기사가 된 다비안을 비롯해 가문의 일원들이 황실 행사에 참여하는 만큼, 저택의 하인들은 새벽부터 말 안장을 닦고 보급품을 챙기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황제 카르안의 눈길이 닿는 자리인지라 리벤헤르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숲의 초입은 그런 각 가문의 열기로 가득찼다. 가문의 문장의 새겨진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바람을 타고 휘날렸고 화려한 마차 행렬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귀족가 영애들은 정교하게 세공된 수통이나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들고 사냥제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웃음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뒤섞인 광장은 제국의 활기를 과시하듯 눈부시게 빛났다. 그 소란스러운 인파들 사이로리베르츠 가문의 별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멈춰 섰다."리나! 내 말 좀 봐. 오늘따라 갈기가 아주 완벽하지 않아?"말 위에 올라탄 벨라 리베르츠가 자신있게 질문했다.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둥근 뺨을 하고서, 승마복을 야무지게 차려입은 소녀는 자신이 늠름한 기사라도 된 양 턱을 한껏 치켜세웠다. 곁에서 구급상자와 보급용 수통을 챙기던 세레인이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요, 아가씨. 아가씨가 오늘 사냥제에서 제일 돋보이실 것 같은데요." "야, 당연하지! 오빠보다 내가 더 큰 공을 세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너도 딴짓하지 말고 내 뒤에 딱 붙어 있어야 해. 알았어?" 마사는 뒤에서 그 광경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세레인에게 속삭였다. "우리 아가씨 벌써 다 컸네. 리나, 아가씨 기 안 죽게 잘 보필해드려." 그러나 황실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울리자, 광장의 분위기는 일순간 서늘하게 내려앉았다.수백 마리의 말 울음소리와 사냥개들의 거친 숨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깃털 장식을 단 근위대가 길을 터주자 각 가문의 참가자들은 숲을 응시했다. 사냥제는 황제와 군부 핵심들에게 실력을 증명할 기회였기에 이를 지켜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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