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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핏빛 유산: Chapter 131 - Chapter 140

180 Chapters

131화 — 엄마 목소리

작고 흰 양말 한 짝.서아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하윤의 것이었다.얼마나 작았는지, 손가락 두 개로도 가려질 만큼 작았다. 그 작은 발이 어딘가에서 울었고, 걸었고, 도망쳤고, 기다렸을 것이다.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이 아이는 아직 엄마 목소리를 기억한다.그러니 늦지 마라.서아의 손끝이 떨렸다.태준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서아야.”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울음보다 먼저 분노가 올라왔다. 하윤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까.왜 그 아이가 엄마 목소리를 기억한다는 사실조차 기록으로만 남아 있어야 했을까.이선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죄송합니다.”그 말은 너무 작았다.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언제였어요.”이선은 숨을 삼켰다.“하윤 양이 본관으로 들어온 건… N-12 보호 경로가 흔들리던 날이었습니다. 민서윤 씨가 아이를 데리고 왔고, 회장실에 직접 올리려 했습니다.”회장 쪽 스피커가 조용해졌다.이선은 이어 말했다.“하지만 회장님은 외부 일정 중이셨고, 비서실은 아이를 회장실 안쪽 대기실로 옮겼습니다. 그곳이 H-ROOM입니다.”도윤이 파일명을 확인했다.H-ROOM / N-12 Voice Response Test서아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테스트?”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아이한테 뭘 한 거야.”이선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고문이나 의료 처치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이가 특정 목소리에 반응하는지 확인했습니다.”“누구 목소리.”이선은 서아를 보지 못했다.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재생할까요?”서아는 눈을 감았다.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들어야 했다.자신의 아이가 엄마를 기억했다는 증거라면, 그건 하윤의 것이었고, 하윤의 엄마인 자신도 알아야 했다.“틀어요.”도윤이 파일을 열었다.작은 화면에 흔들리는 영상이 나타났다.어두운 대기실. 소파 끝에 앉은 작은 아이. 품에는 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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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 목소리의 주인

상자 안에는 오래된 테이프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H-ROOM / Maternal Voice Samples서아는 손끝으로 라벨을 훑었다.Y-00. Y-03. N-00 mother. Unknown mothers.태성은 엄마들의 이름만 빼앗은 게 아니었다.목소리도 가져갔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마지막 길을, 실험처럼 틀어보고 기록했다.서아는 이를 악물었다.“이건 증거예요.”한재욱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낮게 들렸다.“네. 불법 수집, 정서 반응 평가, 보호자 통지 회피까지 모두 포함됩니다.”지연이 상자를 노려봤다.“사람 마음까지 관리 항목으로 만든 거네.”도윤은 테이프 목록을 스캔했다.“일부는 손상됐지만 복구 가능합니다. 다만 바로 재생하면 안 됩니다. 누구 목소리인지 확인되지 않은 것도 있고, 듣는 사람에게 충격이 클 수 있습니다.”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사자 동의 없이 열지 않아요.”그때 목록 하나가 화면에 크게 떴다.Y-03 / Voice Sample — Seo Hae-rin서해린.아이가 죽었다고 들었던 엄마. 그러나 N-19 이재와 연결될 가능성이 남아 있던 사람.서아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해린 씨에게 먼저 알려야 해요.”도윤이 보호 회선을 연결했다.잠시 뒤, 서해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서아 씨?”“해린 씨. 죄송해요. 지금 태성 회장실에서… 엄마들 목소리 파일을 찾았어요.”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제 목소리도요?”서아는 눈을 감았다.“네. 라벨이 있습니다. 아직 재생하지 않았어요. 해린 씨 동의 없이는 열지 않을 겁니다.”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서해린이 아주 작게 물었다.“그걸… 아이한테 들려줬다는 뜻인가요?”대답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숨길 수 없었다.“그 가능성이 큽니다.”전화 너머에서 숨이 무너졌다.“나는 아이 얼굴도 못 봤는데…”서해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그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아이에게 들려줬어요?”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서해린은 울음을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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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 태어나기 전의 이름

S-01 / prenatal voice sample그 라벨 앞에서 서아는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하윤의 목소리 파일을 열 때와는 달랐다. 그때 서아는 엄마였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엄마였고, 늦게라도 안아야 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번에는 서아가 아이였다.아직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의 기록 속에 들어간 아이.민유라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떨렸다.“서아야.”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엄마, 이거… 정말 들어도 돼?”민유라는 잠시 침묵했다.“그 목소리가 내 거라면, 너한테 가야 해.”짧은 숨.“엄마가 네게 준 첫 번째 것이니까.”서아의 손끝이 떨렸다.도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보호 열람으로 열겠습니다. 외부 저장은 막고, 기록에는 당사자 동의만 남깁니다.”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태준이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무리하지 않아도 돼.”서아는 그 손을 꼭 잡았다.“아니.”목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듣고 싶어.”도윤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처음에는 오래된 잡음이 들렸다. 낡은 테이프 특유의 긁히는 소리. 그리고 아주 희미한 심장 박동 소리.쿵. 쿵. 쿵.서아는 숨을 멈췄다.“이게…”도윤이 낮게 말했다.“태아 심박 기록과 같이 녹음된 파일 같습니다.”그 순간, 젊은 민유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아가야.서아의 눈가가 바로 젖었다.목소리는 지금의 민유라보다 훨씬 젊었다. 하지만 따뜻함은 같았다.엄마 목소리 들리니?작은 웃음소리.오늘은 네가 많이 움직였어. 간호사 선생님이 엄마가 말하면 네가 반응한다고 했어.민유라의 현재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무너졌다.“기억나…”서아는 눈물을 삼켰다.녹음 속 민유라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네 이름을 생각했어.그 말에 서아의 손이 굳었다.서아.짧은 침묵.강서아가 아니어도 돼. 민서아여도 되고, 그냥 서아여도 돼. 하지만 엄마는 너를 서아라고 부르고 싶어. 서쪽의 노을처럼, 어두워지는 시간에도 빛이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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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 문지기의 시작

Protocol inherited by: N-12 case officerName: Min Seo-yoon그 이름이 화면에 뜬 순간, 회장실 안의 공기가 굳었다.민서윤.하윤을 구하려다 피를 흘린 사람. 민유라의 친구였고, 서아에게 끝내 용서받지 못한 배신자. 하지만 동시에, 마지막 순간 하윤을 품고 도망친 사람.그녀의 이름이, 엄마와 아이를 끊는 프로토콜 위에 남아 있었다.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잠깐만요. 그럼 민서윤이 처음부터 하윤이 담당이었다는 거예요?”도윤은 화면을 더 내려봤다.“정확히는 N-12 voice restriction protocol의 초기 적용자입니다. S-01 케이스에서 쓰였던 ‘모성 음성 제한’ 모델을 N-12 케이스에 적용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습니다.”태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하윤이를 엄마 목소리에서 떼어놓은 사람이 민서윤이라는 뜻이군.”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손 안의 하윤 양말이 더 작게 느껴졌다.민서윤은 하윤을 살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윤을 시스템 안에 넣었다.그 모순이 서아의 가슴을 찔렀다.민유라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렸다.“서아야.”서아는 낮게 대답했다.“엄마, 알고 있었어?”잠시 침묵.민유라는 힘겹게 말했다.“몰랐어. 서윤이가 어디까지 했는지… 정확히는 몰랐어.”“하지만 의심은 했겠지.”민유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이 서아를 더 아프게 했다.“서윤이는 늘 문 앞에 있었어.”민유라가 말했다.“내가 네 이름을 찾으려 할 때도, 하윤이를 찾으려 할 때도, 그 애는 문을 열어줄 듯 닫았어. 그래서 내가 미워했고, 또 믿었어.”서아는 눈을 감았다.믿고 미워한다.그보다 잔인한 관계가 있을까.도윤이 새 파일을 열었다.Case Officer Training RecordSubject: Min Seo-yoonOriginal classification: Y-line proximity observerAssigned task: maternal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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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 용서받지 못한 증언

병원 복도는 새벽빛을 받아 희게 떠 있었다.태성병원 VIP 병동. 그 이름만으로도 서아는 숨이 막혔다.민유라가 지워졌던 곳. 서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록이 된 곳. 하윤이 엄마 목소리에서 떼어졌던 방식이 만들어진 곳.그리고 그 문 앞에, 민서윤이 있었다.도윤이 병실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의식은 돌아왔지만 오래 말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래 안 해요.”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힘들면 내가—”“아니.”서아는 문고리를 바라봤다.“이건 내가 물어야 해.”문이 열렸다.민서윤은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팔에는 수액이 연결돼 있었다. 하윤을 데리고 도망치다 다친 흔적이 아직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그녀는 서아를 보자마자 눈을 감았다.“왔구나.”서아는 침대 가까이 가지 않았다.“내가 올 줄 알았어요?”민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안 오면… 그게 더 무서웠을 거야.”지연이 뒤에서 이를 악물었다.태준의 눈빛도 차가웠다.서아는 손에 쥔 작은 상자를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렸다. 하윤의 흰 양말. 그리고 민서윤이 남긴 쪽지.민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찾았구나.”“네.”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하윤이가 엄마 목소리를 기억한다는 것도 봤어요.”민서윤의 입술이 떨렸다.“그 아이는… 정말 기억했어.”“그런데 왜 말 안 했어요.”침묵.“왜 나한테 안 왔어요. 왜 엄마한테도 숨겼어요. 왜 하윤이가 엄마는 나쁜 사람이냐고 묻게 만들었어요.”민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변명하지 않을게.”“변명 듣자고 온 거 아니에요.”서아는 한 걸음 다가갔다.“하지만 진실은 들어야겠어요.”민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엔 지시였어. 유라 옆에 있으라는 지시. 네가 태어나고 나서는 네 상태를 관찰하라는 지시. 나중엔 하윤이를 맡으라는 지시.”민유라의 목소리가 보호 회선 너머에서 떨렸다.“서윤아.”민서윤은 그 목소리에 얼굴이 무너졌다.“유라야…”민유라는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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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 훔친 목소리

“M.Y.R. 서명은 사람이 한 게 아니야.”민서윤의 목소리가 병실 안을 갈랐다.“민유라의 예전 음성 샘플로 만든 승인 키야.”순간,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서아는 손에 쥔 녹음기를 천천히 내려다봤다.엄마의 목소리. 서아를 부르던 목소리.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신에게 남겨졌던 첫 번째 사랑.태성은 그것마저 가져가, 승인 도구로 만들었다.태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목소리로 보호자 승인 흉내를 냈다는 뜻이야?”민서윤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엔 단순한 신원 확인용이라고 들었어. 오래된 녹음 파일에서 음성 패턴을 추출해서,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 내부 절차를 통과시키는 방식.”지연이 낮게 욕을 삼켰다.“미친 인간들.”민유라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렸다.“내가… 내 손녀를 옮기는 데 쓰였다고?”민서윤은 눈물을 흘렸다.“유라야, 미안해.”“미안하다는 말로는 안 돼.”민유라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내 목소리가 내 딸을 부르지 못하게 막았고, 내 손녀를 옮기는 데 쓰였다는 거잖아.”그 말에 서아의 눈빛이 완전히 식었다.이름을 빼앗고, 목소리를 빼앗고, 그 목소리로 다시 아이를 빼앗았다.핏빛 유산은 피가 아니었다.빼앗는 방식의 상속이었다.도윤이 빠르게 화면을 넘겼다.“확인합니다. M.Y.R. 음성 승인 키는 세 번 사용됐습니다.”서아가 물었다.“하윤이 때 말고 또 있어요?”도윤의 얼굴이 굳었다.“첫 번째는 S-01 출생 후 모성 접촉 제한. 두 번째는 Y-00 사망 처리 이후 잔여 기록 봉인. 세 번째가 N-12 최종 보호자 이전.”민유라가 숨을 삼켰다.“내가 나를 지우는 데도 쓰였구나.”병실은 고요해졌다.자기 이름을 잃는 절차에, 자기 목소리가 찍혀 있었다.한재욱의 음성이 낮게 이어졌다.“이건 단순 위조가 아닙니다. 생체 인증 도용, 보호자 권한 조작, 미성년자 이동 승인 위조, 사망 처리 기록 조작까지 연결됩니다.”태준이 차갑게 말했다.“누가 만들었어.”민서윤은 눈을 감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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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 죽은 사람의 서명

Original Command Authority:Kang Tae-seong강태성.태성그룹 창업주. 강도현과 강무진의 아버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그 이름이, 훔친 목소리들의 최초 명령자로 떠올랐다.병실 안은 완전히 얼어붙었다.서아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죽은 사람이 명령을 내렸다고요?”도윤은 빠르게 로그를 확인했다.“실시간 명령은 아닙니다. 오래된 루트 권한입니다. 창업주 명의로 만들어진 최초 지시 체계가 아직 살아 있었던 겁니다.”한재욱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법적으로는 ‘창업주 유지’라고 포장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회장실과 재단, 병원 시스템 위에 최상위 명령처럼 남겨둔 구조입니다.”지연이 헛웃음을 흘렸다.“그러니까 죽은 노인의 유언장 같은 걸로 산 사람 목소리를 훔쳤다는 거네.”민서윤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그걸 ‘원장 명령’이라고 불렀어. 아무도 거부하지 못했어. 강도현도 그 이름을 들먹였고, 회장실도 그 이름 앞에서는 멈췄어.”서아의 시선이 스피커로 향했다.“회장님.”회장의 숨소리가 들렸다.“알고 있었어요?”긴 침묵.“강태성이라는 이름이 시스템에 남아 있다는 건 알았다.”서아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또 일부만 알았다는 말이에요?”회장은 대답하지 못했다.서아는 낮게 말했다.“그 이름으로 엄마 목소리를 훔쳤어요. 그 이름으로 나와 하윤이를 떼어놨어요. 그 이름으로 엄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어요.”짧은 침묵.“그럼 그 이름도 가해자예요.”회장은 낮게 숨을 들이켰다.“맞다.”그 대답은 너무 늦었다.도윤이 화면을 넘겼다.Founder Root DirectiveBloodline Preservation / Maternal Risk ControlInstruction: preserve heir blood, suppress maternal claim, retain emotional samples for compliance verification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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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 피는 남기고

창업주 기념관은 태성 본관 지하 가장 안쪽에 있었다.대리석 벽, 유리 진열장, 오래된 훈장과 사진들. 강태성의 이름은 그곳에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처럼 걸려 있었다.태성의 시작.국가 산업의 아버지.피와 땀으로 세운 기업.서아는 그 문구 앞에서 멈췄다.“피와 땀.”그녀가 낮게 웃었다.“누구 피였는지는 안 써놨네.”태준은 말없이 그녀 곁에 섰다.도윤은 기념관 중앙의 낡은 음성 보관 장치 앞에 앉았다. 먼지가 쌓인 케이스 안에는 릴 테이프 하나가 있었다.라벨은 낡았지만 글씨는 선명했다.Founder Final Address / Private Root Use한재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저건 공개 연설이 아닙니다. 루트 권한용 원본 음성으로 보입니다.”회장의 숨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렸다.“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태성을 가족보다 위에 두었다.”서아는 차갑게 말했다.“가족을 위한다는 말로겠죠.”회장은 대답하지 못했다.도윤이 테이프를 장치에 연결했다.“재생하면 루트 해제 절차가 열릴 겁니다. 동시에 창업주 음성 명령도 활성화됩니다.”지연이 팔짱을 꼈다.“죽은 사람 목소리까지 상대해야 한다니, 진짜 태성답다.”도윤이 버튼을 눌렀다.기계가 낮게 돌아가기 시작했다.지직거리는 잡음. 그리고 아주 늙은 남자의 목소리.태성은 피로 이어져야 한다.서아의 손이 굳었다.목소리는 느렸지만 단호했다. 마치 아직도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사람 같았다.이름은 바꿀 수 있다. 기록은 고칠 수 있다. 그러나 피는 남겨야 한다.민유라의 숨이 전화 너머에서 떨렸다.강태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피를 흐리게 하는 어미는 위험이다. 어미의 말, 어미의 눈물, 어미의 손길은 후계를 흔든다.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러니 피는 남기고, 어미는 지워라.기념관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서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듣고 싶지 않았지만, 들어야 했다. 태성이 신성한 유산이라 부른 것의 실체를.그것은 사업 철학이 아니었다. 가문 신화도 아니었다.엄마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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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 정화라는 이름

보호 숙소 전력 내려갔습니다!전화 너머 경호원의 외침이 찢어지듯 들렸다.서아의 몸이 굳었다.“하윤이는요?”민유라의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방 안에 있어. 내가 안고 있어. 그런데 복도 쪽 비상등도 꺼졌어.”태준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차로 가.”도윤은 장비를 챙기며 화면을 붙잡았다.“숙소 보안망이 외부에서 끊겼습니다. 단순 정전이 아닙니다. 통신도 곧 떨어질 수 있어요.”서아는 전화기를 꽉 쥐었다.“엄마, 절대 문 열지 마. 누가 와도, 내 목소리 직접 듣기 전까지 열지 마.”민유라가 낮게 답했다.“알았어.”그때 전화 너머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할머니, 무서워?”하윤이었다.서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민유라는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아니. 우리 하윤이 안고 있으니까 안 무서워.”하윤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와?”서아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응. 엄마 가고 있어.”전화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그리고 하윤이 아주 작게 말했다.“빨리 와.”그 말에 서아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이번엔 늦지 않는다.절대로.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태준은 속도를 높였고, 지연은 바로 보호팀과 통화를 연결했다.“숙소 반경 차량 확인해요. 구급차, 전기 점검차, 방역차 전부 막아. 정식 확인 전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요.”도윤의 화면에 붉은 로그가 연속으로 떴다.Succession Purge / Phase 1: Power IsolationPhase 2: Emergency Medical TransferPhase 3: Claimant Dispersal도윤의 얼굴이 굳었다.“정화 프로토콜은 제거가 아니라 분산입니다. 보호 대상을 따로 떼어내서 다시 관리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구조예요.”태준이 낮게 말했다.“하윤이를 또 옮기려는 거군.”“네. 그리고 이번엔 하윤 양만이 아닙니다. 복구된 모계 청구자들에게도 동시에 긴급 이송 명령이 내려갔습니다.”서아는 이를 악물었다.강도현은 끝까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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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 선택의 모양

그 아이가 거부를 배웠구나.그럼 다음엔, 선택하게 만들면 된다.강도현의 목소리가 끝난 뒤에도 방 안은 조용해지지 않았다.그 말은 총성보다 오래 남았다.서아는 하윤을 품에 안은 채 화면을 바라봤다. 하윤은 아직 떨고 있었다. 작은 손이 서아의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선택하게 만든다…”태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강요를 선택처럼 포장하겠다는 뜻이야.”지연이 이를 악물었다.“항상 그랬잖아. ‘네가 원해서 서명했다’, ‘네가 원해서 숨었다’, ‘네가 원해서 포기했다’.”이선이 낮게 말했다.“저도 그렇게 서명했습니다.”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이선의 포기 각서. 문이린의 봉인. 차라온의 보호. 민서윤의 문지기.모두 선택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길이 하나뿐인 방 안에서 눌린 버튼이었다.서아는 하윤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하윤아.”하윤이 고개를 들었다.눈가가 젖어 있었다.“응…”“아까 안 간다고 말했지?”하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웠는데… 할머니가 꼭 안아줬어.”민유라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리 하윤이 잘했어.”서아는 하윤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앞으로 누가 하윤이한테 뭘 고르라고 할 수도 있어. 엄마한테 갈래, 안전한 데 갈래. 말 잘 들을래, 엄마를 위험하게 할래. 이렇게.”하윤의 눈이 흔들렸다.“그럼 어떻게 해?”서아는 숨을 삼켰다.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태성은 아이를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아이의 말을, 아이의 선택을, 다시 이용하려 할 것이다.그래서 알려줘야 했다.“하윤이가 혼자 고르지 않아도 돼.”하윤이 눈을 깜빡였다.“혼자 안 골라도 돼?”“응.”서아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았다.“진짜 선택은 무섭게 만들고 빨리 고르라고 하는 게 아니야. 충분히 설명해주고, 기다려주고, 싫다고 해도 벌주지 않는 거야.”태준이 조용히 덧붙였다.“그리고 엄마 아빠랑 같이 확인해도 돼.”하윤은 태준을 보았다.“아빠도?”태준의 목소리가 아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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