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Chapter 71 - Chapter 80

89 Chapters

다시, 우리를 증명하는 일 II

둘 다 피곤했기에 저녁 식사는 간단히 차렸다.흰쌀밥과 김치찌개에 계란말이, 그리고 김.둘 다 밥을 먹을 땐 말을 많이 하지 않았기에,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와 국물 떠먹는 소리가 유난히 오래 이어졌다.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하연의 밥그릇에 올려주는 지원의 모습이 부엌 조명 아래서 부드럽게 피어났다.계란말이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는 하연을 보며 지원은 조용히 웃었다.*식사 후, 소파에 나란히 앉아 다큐멘터리를 틀었다.내용은 솔직히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지원의 어깨에 기대며 말을 꺼냈다."저번에 시원이랑 만나서 다 얘기했어."지원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무슨 얘기?""우리 같이 또 바다 여행 다녀온 거.""그래서?""처음엔 놀라더니 그냥 웃더라고."지원이 고개를 돌렸다."뭐래?""'역시 둘답다'고."하연은 잠시 웃었다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그 말,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우리답다'는 말이.. 나도 몰랐는데 되게 단단한 말이더라고. 어딘가 든든한 느낌도 들고.언니도 그래?"지원은 가만히 하연의 손을 잡았다."당연하지. 우리잖아.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그 누구도 우리보다 우리다울 순 없으니까."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화면 속 북극곰보다 훨씬 선명했다.*그날 밤, 하연이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지원이 부엌에서 물을 마시며 말을 꺼냈다."오늘 회사 사람이 그러더라.""뭐라고?""왜 이렇게 얼굴이 편안해보이녜.맨날 피곤에 찌들어있더니 요새 좀 달라진 것 같다네.""그래서 언니는 뭐라고 그랬는데?"드라이기까지 끄고 왜인지 긴장한 얼굴로 묻는 하연.지원은 그런 하연에게 다가가 드라이기를 손에 쥐고 하연의 머리를 말려주었다."애인이 너무 너무 귀여워서 그랬다 했지.""..거짓말.""응. 거짓말 맞아. 사실 애인이 너무 너무 예쁘다고 했거든."하연의 머리를 다 말려주고 이젠 빗까지 집는 지원의 모습에 하연은 억지로 빗을 뺏어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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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것들 I

12월 31일.지원이 퇴근하고난 후 오후 8시즈음.겨울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거리는 유난히 밝았다. 시리는 바람이 불어와도 끄떡않는다는 듯 두 손을 맞잡고 걷는 커플들과 어린 아이의 붕붕거리는 손을 잡고 연말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흐린 날씨 탓에 오히려 조명과 간판 불빛이 더 또렷하게 떠올랐고, 차가운 공기 속에 섞인 군밤 냄새, 붕어빵 굽는 달콤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계란빵 파는 포장마차에 잠시 고민하고 갈등하며 서있기도 했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고,그 사이를 어렵사리 뚫고 지나가며 도착한 마트.대형 마트 입구 앞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저마다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계획을 잔뜩 품은 채 움직였다.지원도 그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벌써 머릿속에 오늘 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카트를 끌며 이것저것 들어보고 비교하다, 하나씩 카트에 집어넣는 지원.연말이라 그런지 하연이 좋아하는 것들이 세일을 많이 했다. 떡갈비, 치킨, 초밥, 피자, 등등."음.. 좋아하려나."사다두면 먹겠지, 마인드로 하연의 선호품들을 카트에 가득 담는 지원.지원이 자기를 위해 구매한 것은 오레오 오즈 시리얼 하나 뿐이었다.하연이 감동하기를 바란건 아니고, 라는 생각으로 괜히 애써 부끄러움을 감추는 지원이었다.지원은 카트에 가득 찬 짐들을 보며 이거 내가 다 들고갈 수 있으려나.. 하며 쓸모없는 거 산 건 없는지, 사야되는 것 다 샀는지 다시 확인하다가,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화면에 뜬 짧은 메시지를 읽었다.[하연언니, 나 먼저 집 가서 트리 켜놓을게너무 늦게 오지마!]하연의 문자 내용은 별 것 없지만, 지원에게는 묘하게 따뜻했다.올해 마지막 날을 누구와 보내게 될지, 아니 어쩌면, 모든 날들을 누구와 어떻게 보낼지, 이미 오래전부터 지원은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지원은 기꺼이, 양 손으로 아둥바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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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것들 II

창밖에서는 벌써 군데군데 말간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TV에서는 연예대상 시상식의 화려한 무대와 함성이 흘러나왔지만, 이 방 안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느렸다.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담요를 나눠 덮었다.치킨을 한 조각씩 나누어 먹고, 종종 서로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주며, 대화를 이어갔다.“언니, 올해는 어땠어?”하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지원은 대답하기 전에 한동안 생각했다.머릿속에 스친 건 여러 장면이었다.한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서 같이 먹은 아이스크림.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나눠 쓰다 옷이 다 젖었던 기억.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날의 떨림.“되게 많이 혼란스러웠긴 했는데, 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내 스스로 더 많이 단단해진 해였던 것 같아.”하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언니랑 있었던 날이 제일 선명해. 좋았든 힘들었든, 언니가 있는 하루는 무조건 기억날 거 같아.”지원은 그 말을 들으며 하연을 바라봤다.그 눈동자 속에는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단단한 빛이 있었다.“하연아.”“응?”“네가 그렇게 말해주면, 내가 너한테 조금 덜 미안해져.”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왜 굳이 미안해야하는 건데?”지원은 손에 든 커피가 담긴 컵을 바라보다, 낮게 숨을 내쉬었다.“처음부터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기까지.. 나는 많이 망설였고, 많이 도망쳤어. 네가 어른이 되길 기다렸고, 어쩌면 용기없는 나에게 네가 먼저 다가오길 바랐지. 그게.. 나만 살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몰라.”하연은 대답 대신 지원의 손등을 감쌌다.“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지. 그게 언니 입장에서 언니가 나를 지킬 수 있는 방식이었으니까.”그 말은 짧았지만, 한 해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시계가 11시 59분을 향하자,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트리 아래에서 포장된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우리 이제 선물 교환할까?”지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상자가 맞바뀌는 순간, 손끝이 살짝 스쳤다.하연이 먼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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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하루라는 기적 I

1월 1일 아침.거실은 조용했고, 벽시계 초침 소리마저 느릿하게 들렸다.똑딱똑딱침실.두꺼운 암막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빛은 겨울 특유의 묵직하고도 채색이 없는 빛을 띠며 바닥 위에 길게 번졌다. 그 빛줄기 속에 날리는 먼지가 가볍게 떠다니고 있었고, 바닥에 스며들은 공기는 밤새 식어 손끝이 닿으면 아마 금세 차갑게 스며들듯 굴었다.시계는 이미 오전 10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침실의 공기는 여전히 밤의 온도와 무게를 품고 있었다.그 온도를 만든 건 이불 속에서 서로에게 기댄 지원과 하연, 두 사람의 체온이었다.지원의 품에 안겨 고롱고롱 조용히 코를 고는 하연과,하연을 품에 안고 머리에 턱을 괴고 꿈나라에 입국한 지원이다.*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하연이 먼저 멀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어나, 언니. 해가 중천이야.”그러나 그 말을 하는 하연, 본인도 채 눈도 못 뜨며 하는 말임을 지원은 알고 있었다."..너는 졸릴 때 오히려 목소리가 또렷해지더라.."목소리는 베개 속에 파묻혀 둔탁하고 부드럽게 울렸다. 새벽녘 꿈에서 막 걸어 나온 듯,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지원은 눈을 반쯤 감은 채, 하연의 손을 느슨하게 감싸고 있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으응.. 조금만 더.. 새해엔 늦잠 자는 것도 복이라던데.”하연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킥킥 소리를 냈다.“누가 그런 말같지도 않은 말을 했나?"“지금 방금 내가 만들었어. 대박이지.”그 말이 우스운 건지, 하연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웃었더니 잠이 달아났다. 하연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 끝이 지원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 그 간질거림에 지원은 얼굴을 찡그렸다.하연은 침대 위에서 영원히 누워있고 싶다는 어두운 유혹의 손길로부터 벗어나 일어서며, 이불 끝을 쥐고, 이불 속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지원의 목끝까지 조심스럽게 덮어줬다. 마치 지원에게 아침 햇빛 대신 더 부드러운 온기를 걸쳐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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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하루라는 기적 II

식사를 마친 후, 지원과 하연은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거리에는 설렁한 공기와 비어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곳곳에 새해 인사를 적어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편의점 앞, 포장마차에서 따끈한 호빵 두 개를 사서, 둘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입을 크게 앙, 벌리는 하연.호빵의 김이 하연의 뺨을 타고 올라가, 하얗게 피어올랐다.지원이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바로 뜨겁게 먹다간 입 데인다.”“괜찮아. 언니가 있잖아.”“내가 무슨 데인 입천장 대변인이라도 돼?”“그런 건 아니고, 언니는.. 약간, 식혀주는 사람?”"..그게 뭐야.""안알려줌."지원은 그 말에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호빵 속 팥소의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사이,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분식집 앞에서 하연이 걸음을 멈췄다.눈치빠른 지원.“떡볶이 먹고 갈래?”“지금도 배부른데..근데, 언니랑 여기서 떡볶이 먹는 거, 작년 새해 소원이었어.”지원은 잠시 말없이 하연을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그럼, 올해 첫 소원부터 이뤄야지.”허름한 테이블, 김 서린 창문.창밖의 희끄무레한 겨울빛이, 떡볶이 양념의 선명한 붉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떡볶이를 한입 먹자, 입안 가득 달고 매운 맛이 퍼졌고, 하연의 뺨이 그 열기에 발그레해졌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연이 갑자기 멈춰 섰다.“언니, 우리 싸워본 적 있나?”“응. 있지. 사소하게.”“그럼, 올해는 더 크게 싸워도 돼?”“갑자기 왜?”“그냥.. 싸워도 다시 좋아질 자신이 생겨서.”지원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그래. 싸우자. 대신, 꼭 화해하자.”“약속.”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둘이다.*점심 때부터 다시 침대로 복귀해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둘.저녁엔 둘이 함께 요리를 했다.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 프라이팬에서 기름이 톡톡 튀는 소리, 양념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서로 손이 부딪힐 때마다 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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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배우는 중이니까 I

1월의 두 번째 일요일.켜진 테레비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의 단정한 목소리. 아침부터 뉴스는 연신 화면 한 구석에 한파주의보 발령 자막을 띄우고 있었다.도심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평화라기보다는 강제로 얼어붙은 정적에 가까웠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날카롭게 부딪혀왔다. 그 바람 속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흰 입김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외벽에 걸린 현수막같은 것들은 툭툭 얼어붙은 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들을 냈다.창문 너머로 비치는 하늘은 뿌연 유리창 너머를 어과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회색빛 구름 사이로 간간히 햇살이 간신히 제 몸을 내비쳤지만, 이런 날씨엔 그것조차 차갑게 느껴졌다.보일라를 켠 지 한참이 지났지만, 거실은 완전히 데워지지 않았다. 집 안의 공기 속에 아직 냉기가 남아 있었고, 그 냉기는 바닥 장판을 타고 발끝으로 스며들었다. 커튼은 절반쯤 젖혀져 있었고, 그 사이로 스며든 빛이 카펫 위에 얼룩처럼 내려앉았다.지원은 거실 한켠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노트북 화면 속에는 회사에서 넘긴 보고서가 켜져 있었다. 표와 그래프, 그리고 끊임없이 도착하는 메일 알림음. 그녀는 연신 마우스를 움직이며 숫자를 확인하고, 문장을 수정했다. 잠깐 쉴라치면 여지없이 새로운 메일들이 도착했고, 그 메일들을 쳐내느라 지원은 정신이 없었다.책상 위에는 전날 밤 급하게 프린트해온 자료 서류더미가 높게 쌓여 있었고, 한쪽에는 반쯤 식은 커피가 있었다. 커피는 식은지 오래, 커피 표면엔 얇게 막까지 생겨 있었지만, 지원은 아직 커피가 담긴 잔에 손도 대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커피를 따르긴 했지만 눈코뜰새없이 바빠서.한편, 소파 위의 하연은 무릎담요를 덮고 있었다. 얇은 양말을 신은 차림이었는데, 발끝이 조금 시린 듯 담요 속에서 발을 비볐다. 텔레비전은 낮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하연의 시선은 화면보다 허공에 머물렀다. 눈길이 한 번씩 지원에게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몇번이나 입을 뗐지만 말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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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배우는 중이니까 II

저녁 6시.지원은 노트북을 덮었다. 탁,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녀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온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지원 “으.. 배 안 고파? 뭐 시켜 먹을까?”지원이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지만, 하연에겐 그 부드러움이 다가오지 않았다.싱크대를 가리키는 하연.“먹었어.”하연은 짧게 대답했다.“같이 먹지 왜..”“언니 바빠 보여서.”그 말은 중립적인 어조로 나왔지만, 그 안에 서늘한 결이 분명히 섞여 있었다.“..하연아.”“괜찮아.”지원은 그 괜찮아,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식탁 위의 물컵 속에서 물결이 작게 흔들렸다. 지원은 물컵을 들고 조심조심 걸어가 하연이 앉은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물컵을 하연에게 조심스레 건넸다.“미안해. 아까 그건..”“언니, 나 이해해.”하연은 물을 마셨다. 유리컵에 입술이 닿는 순간, 물의 차가움이 혀끝을 스쳤다. 그 차가움이 오히려 마음속 빈 곳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근데 이해만 하고, 감정은 말 안 해주면내가 뭐가 괜찮고 뭐가 안 괜찮은지 모르잖아.”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 속에는 가라앉은 실망이 있었다.“그럼 말해줄까? 오늘 하루 종일 나 그냥.. 괜히 기대했나 싶었어.”지원의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내가 그랬구나. 미안해. 하연아, 난 늘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걸 표현하는 데 서툴러.”하연은 고개를 숙였다.“알아. 그래서 가끔 더 서운한 거야.”“..서운하면, 말해줘. 네가 너무 참고, 조용히 웃고 넘기니까 내가 더 바보처럼 구는 거야. 언니가 바보같은 짓 할 때마다 똑똑한 하연이가 지적해주면 안될까?”담요에 푹, 고개를 숙이는 하연.“내가 언니한테.. 당연해지는 거 같아서 무서웠어.”그 한마디가 지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숨이 잠시 막혔고, 동시에 미안함이 몰려왔다.“하연아, 넌 절대 당연한 존재가 아니야. 나는 그냥, 너랑 있는 게 너무 편해서 이런 날이 평생 갈 거라 착각했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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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남긴 흔적들 I

눈을 뜨는 하연.비몽사몽인 채로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들려하다가 이내, 번쩍. 커다랗게 눈을 떴다."하암.."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곤,"..언니?"조용히 지원을 불러본다.미동도 하지 않는 지원.지원의 눈 앞에 손바닥을 휘이휘이 저어본다."여전히 꿈나라 속이네.."괜히 지원의 코를 잡아당겨보는 하연.지원의 미간이 찌푸려진다."으응.. 아파.."코를 놓아주자 금세 다시 인상이 펴지며 평온한 얼굴로 잠에 빠져든 지원.그 모습에 소리없이 웃다가 지원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는 하연.지원은 때맞춰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헤헤, 하며 미소지었다."귀엽다니까."하연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다가,행여 지원이 깰까 조심스레 침실을 나왔다.천천히 침실 문을 닫고는 거실로 나와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버튼을 누르는 하연.찬장에서 티백들을 보며 고민한다."어디 보자.. 오늘은.."갈등하던 손이 허브티에서 멈춘다.때마침 끓는 물.머그컵에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아침의 햇빛은 유난히 부드럽게 집 안에 다가와 얇게 퍼지며 스며들고 있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 위에 하얀 직사각형을 그려냈다. 그 위에 놓인 식탁엔, 반쯤 마셔진 컵 속에 아직 식지 않은 허브티의 향이 은은히 향초처럼 거실을 맴돌았다.하연은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그 빛을 바라보다가, 마음속 깊이 저장해 두었던 기억 하나를 꺼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거실 구석, 버려두지도, 매일 챙기지도 않는, 오래된 상자였다. 바깥은 이미 손때가 묻어 다소 반질반질해져 있었고, 모서리에는 조금 뜯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자, 갖가지 것들이 보였다.하연은 상자를 들고 와 소파 앞에 놓았다. 두 손으로 뚜껑을 열자, 약간의 먼지 냄새와 함께, 낯설지 않은 숨결들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안에는 티켓들, 종이 조각들, 몇 장의 사진이 가지런하지 않게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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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남긴 흔적들 II

한편, 도심의 사무실.지원은 점심시간에, 무심코 휴대폰 사진첩을 넘기다 화면 한 장 앞에서 멈췄다. 작년 여름, 바닷가. 햇볕이 너무 강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하연은 모래 위에 [J+H]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같이 찍힌 그 옆에서 민망하다는 듯 웃고 있는 자신.그 당시에는 어린 장난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돌아보니 그 +는 이미 오래전부터 함께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땐 파도에 금세 지워질 마음이라고도 조심스레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흔적은 지원의 가슴 한구석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지원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연은 단순히 지원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원의 일상, 습관, 생각 속 구석구석에 스며든 존재였다.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져 갔다.*저녁.현관문을 열자마자 지원의 코끝을 스친 건 된장국 냄새였다. 단순한 향기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단숨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향 같은, 안식 같은.“왔어요?”부엌에서 하연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지원은 대답 대신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보고 싶었어.”하연은 잠시 놀라듯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기대며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 그냥 오늘은..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계속 들었어.”하연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마음, 매일 조금씩 주세요. 된장국처럼 오래 끓여서, 더 깊어지게.”지원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조금 짜도 괜찮아?”“괜찮죠. 그게 사랑이잖아요.”*식사 후, 하연은 다시 상자를 꺼내 지원 앞에 두었다.“이게 뭔데?”“우리 추억들이요.”뚜껑을 열자 지원의 눈이 커졌다. 버스표, 전시 티켓, 손편지 초안. 하나하나를 집어 들 때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났다.“이거.. 아직 가지고 있었네.”지원은 버스표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이날, 네가 처음 내 손 잡아줬지?”“네. 언니 손이 너무 차가워서.”하연은 웃으며 대답했다.지원은 순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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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다리는 계절 I

3월 초의 공기는 참으로 오묘하고 기묘했다.따듯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겨울처럼 날카롭게 몸을 찌르지도 않았다. 길바닥에는 아직 겨울이 다 녹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가로수 가지 끝에는 연둣빛 싹이 채 피어나지 못한 채 매달려 있었다. 푸른 기척과 희뿌연 잔설이 공존하는, 계절의 모호한 틈새.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각각이어서, 어떤 사람은 겨울 패딩을 목끝까지 여며 입고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가벼운 바람막이만 걸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지원과 하연의 집도 그 계절의 틈새에 있었다. 거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여전히 싸늘했지만, 그 속에 묘하게 달큰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이제 곧 꽃이 터질 거라는 계절의 예고처럼.토요일 아침, 주방에서 나는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와 전기포트에서 김 오르는 소리가 어우러지던 순간, "다녀왔습니다~""오냐."살짝 상기된 얼굴의 하연이 신발을 벗으며 불쑥 말했다.“언니, 우리 화분 하나 더 사자.”하연은 장봐온 마트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두고, 창가에 놓인 고무나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우리 몽실이, 혼자 있어서 겁나 외로워 보여.”지원은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화분 옆에 걸린 커튼은 반쯤 젖혀져 있었고, 햇살이 사선으로 들어와 잎사귀 표면에 맑은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하연이 말하는 친구는 그들의 첫 공동 육아라 할 수 있는 존재, 지난 가을 입양해온 고무나무, 일명 몽실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왠지 모르게 휑한 느낌이 드는 거실 한쪽을 채우려 산 것이었는데, 어느새 집안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왜, 몽실이가 친구가 필요하대?”지원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당연히 필요하지. 사람이든 식물이든, 같이 있어야 심심하지 않잖아. 같이 얘기할 상대도 있어야 하고. 우리보단 같은 식물이 몽실이도 더 편하지 않겠어?”지원은 허리를 숙여 잎을 한 번 쓰다듬은 뒤, 하연을 바라보았다.“근데, 너는 도대체 몽실이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맨날 보면 속닥속닥.. 몽실이한테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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