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Chapter 51 - Chapter 60

89 Chapters

사랑이라는 감정을 견디는 방식 II

다음 날.지원은 하연을 데리고 모델하우스를 찾았다.주말마다 열리는 분양 상담, 전단지에서 본 그 아파트였다.별다른 말 없이 데려왔지만, 하연은 금세 눈치를 챘다.“언니. 우리.. 여기 왜 왔어요?”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었다.“그냥, 뭐.. 구경.꼭 여기가 아니어도 좋아...우리 둘이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산다는 상상.. 한 번쯤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색하게 표정이 굳었다.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고요한 모델하우스 안.아직 사람이 많지 않은 오전이라, 둘은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햇살이 흩날리는 주방, 넓지 않지만 온기가 깃든 거실,서로의 체온이 섞일 것 같은 침실.“이 방엔 언니 책상이 있겠네요.아니다, 아예 엄청 큰 책상 갖다두고 같이 작업실로 쓸까요? 컴퓨터도 두 개 사고?”하연이 말했다.지원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너 과제 팽개치고 딴짓할 때마다 내가 옆에서 잔소리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건.. 언니가 항상 나 겁나 열심히 과제하다 잠깐 쉴때마다 방에 들어와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모범적인 대학생인데.”농담 같지만, 그 말들에는 분명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서로의 개인적인 일상이 아닌, 서로와 함께 하는 일상을 상상하는 대화는,그 자체로 사랑이 샘솟는 방식이었다.하지만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현실은 늘 조용히 사랑에 균열을 만들어냈다.*그날 저녁.하연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외출했다.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지원은 오랜만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업무 외에 지원과 가끔 연락하는 유일한 친구였다.“너, 요즘 많이 바쁜가 보네.""..회사 일 때문이지, 뭐. 요새 신경쓸 것들도 많아지고.""아, 그리고.. 그.. 하연이는 잘 있니? 인스타 보니까 이제 어른스럽고 예쁘더라.”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응, 잘 지내.”“다행이네. 근데.. 그 애, 너한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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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우리가 되는 과정 I

낮은 창가로 부드러운 햇빛이 길게 내려앉았다.따뜻한 커튼 틈 사이로 바람이 밀려들며 잔잔한 물결같이 먼지를 일으켰고,하연은 그 바람의 흐름에 따라 시선을 한참동안이나 고정해놓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카페 한쪽, 조용한 구석 자리.취업 준비 스터디 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앉은 긴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취업 준비 교재들과 노트북, 그리고 녹아가는 얼음들만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들이 놓여 있었다.그 사이에서 하연은 말없이 주고받은 대화들을 적은 메모를 축약하며 정리하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는 또렷했고, 손끝은 정갈하게 움직였다.공책 위의 글씨들은 가지런했고, 말 한마디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하연 씨, 다음 면접 예상 질문은 이거예요.”옆자리 여학생이 질문지를 넘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표를 준비했다."흠, 흠."목소리는 차분했고, 또렷했다.모두가 귀 기울이게 되는 톤이었다.“사실 예상 질문이나 그에 따른 답변을 떠올리기보다는 먼저 면접에 대해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경험에 빗대어 이해하려하는게 더 시급한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할 때 면접이라는 건 결국 심사관이 물어보는 질문에 답하는 기술이기 이전에,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진짜 누군지를 스스로 정확히 말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거라고 생각 하거든요.내가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준비되어 있다면 어떤 질문을 받아도 나의, 나만의 생각을 말 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그러니까.. 면접 준비라는 건 나를 제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인 거죠. 사실 살면서 자기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굳이 명상이나 나를 찾는 여행, 이런 거창하고 어려운 거 말고도 방법은 많다고 생각해요. 자기 전 5분씩이라도 폰 없이 멍하니 생각하기라던지, 뭐 그런 걸로요.”그 말을 들은 스터디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막, 엄청 대단하다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인정과 존중이 섞인 무언의 시선들이 테이블 위에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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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우리가 되는 과정 II

저녁.집 안은 조용했다.거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그 아래에 앉은 지원의 얼굴은 밝지도, 그렇다고 침잠하지도 않은 애매한 온도를 띄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반쯤 마신 커피 한 잔,그리고 쓰다 만 노트와 검은 펜 하나.하연은 침대에 누워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지원의 옆에 앉았다.의자 다리가 살짝 끼익 소리를 냈고,그 미세한 마찰음 사이로 둘 사이의 공기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괜찮아요?”하연이 물었다."뭐가?""..뭐든지간에요."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그 짧은 대답은 한참을 준비한 말처럼 묵직했고,하연은 말없이 지원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그 움직임은 느렸고, 따뜻했다.“그, 언니 친구가 언니한테 전화했을 때, 그거 때문에 그래요?왜요? 언니한테 뭐라고 했어요? 욕했어요?”지원은 자기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하연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지었다.“아니, 그냥 뭐.."지원은 무의식적으로 화제를 돌리려다가입을 꽉 물었다."..언니?"정말로 하연을 아끼고, 좋아한다면 이런 것도 다 말해줘야겠지. 그게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예의니까."..응.""뭐라고 했길래..""..죽은 남편 동생이랑 아직도 같이 사는 게 이상하다네.주위 사람들이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그 말 들었을 때는 전화를 끊었는데, 그렇다고 그게 그 친구가 꼭 나빠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거, 생각 정리하다보니까 이제 좀 알 것 같아.그냥.. 그냥인거지. 말 그대로, 그냥.”하연은 말없이 지원을 바라봤다.그리고 조금 더 지원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그럼, 우리부터.. 천천히 진짜 가족이 되어가면 되는 거죠. 남들의 시선을 떠나서, 우리가 우리가 되면..”스터디에서 자기가 했던 말이 떠올라 미소짓는 하연."..우리가 준비되어 있다면 어떤 질문을 받아도 우리의, 우리만의 생각을 말 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잖아요, 우리."하연의 말은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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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의 이름으로 I

금요일 저녁.해가 완전히 저물어버리기 전의 도시.붉은 기운이 하늘에 묻어 있다가 하나둘 네온사인 아래로 그 빛들이 스며들듯 사라져간다.지원은 홀로 사무실에 앉아 마지막 업무상 메일을 확인하고 자료와 함께 협력사에 답장을 보낸 뒤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기분이 노곤노곤했다.뭔가 이러다 스무스하게 바로 잠에 들 것 같은 느낌.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기지개를 켜는 지원."흐음.. 너무 늦지는 않았겠지?"직장인들에게, 아니 그 누구에겐들 하루의 끝은 언제나 고단할 것이다만,지원이 지금, 평소의 퇴근 시간보다도 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그저 단순히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하루 종일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그 이름 때문이었다.하연.집을 나온 뒤부터 회사의 업무시간, 하루종일 내내, 지원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하연의 옷깃과 말투, 눈동자, 부드러운 목소리, 사랑이 듬뿍 담긴 지원을 향한 시선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마치, 이미 그날 밤을 기다리는 누군가처럼.핸드백에 대충 자기 물건들을 쓸어놓고 자리를 정돈하며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회사를 나섰다.*엘리베이터 안.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유독 낯설었다.볼에 살짝 홍조가 돌아있었고,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었다.내가 원래도 이런 표정이었나..?..아마 이것도 그 애 때문이겠지.지원은 아예 그냥 화장을 다시 할까 고민하다가, 그저 립스틱만 덧발랐다.오늘은, 그냥 지금의 자신으로 충분할 것 같아서.*퇴근길에 들른 약속 장소는 지원의 회사 근처에 있는 단골 술집이었다.간판은 몇 년 전부터 바뀌지 않았고, 간판 아래 화분은 계절마다 주인이 다른 듯하지만, 매번 비슷하게 피어났다가 시들었다.술집 문을 밀고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들이 반겼다.“오, 드디어 오셨네~”“주인공도 아니면서 이리 늦으면 어떡하냐!”"누가 보면 혼자만 직장인인줄 알겠네.""여기 앉아, 여기!"전 회사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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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의 이름으로 II

가게 앞.가을바람이 느껴지는 밤 공기.가로등 불빛 아래, 지원이 먼저 문을 열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하연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파우치를 손끝으로 쥐며 고개를 들었다.“미안해요, 좀 늦었죠?”지원은 하연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어느정도 술이 들어갔는지, 무장해제된 얼굴이었다.“아니야. 딱 좋아.”손목을 살짝 잡고 앞장서는 그 손끝이 따뜻했다.하연은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지원의 옆에 섰다.지원이 문을 열며 말했다.“이미 다 얘기 했어. 내가 요즘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고.”그 말에 하연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작은 숨을 들이쉬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안녕하세요. 지원 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하연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순간, 테이블 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누군가는 젓가락을 멈췄고, 누군가는 술잔을 손에 든 채 멈칫했다.하지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우와.. 진짜 예쁘다.”“그럼.. 둘이 진짜? 와..”"..얼굴합은 맞긴 해.""얼굴합보다는 MBTI가 맞아야지.""그거 유행 지났거든.""관상 궁합 같은 거 보다는 안지났거든."놀람과 당황이 엇갈린 반응들.그러나 그 감정이 하연을 향한 거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사람들은 오히려 조심스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하연은 그런 시선에 조금 어색한 듯 웃었다.“제가.. 동생처럼 붙어 있다 보니까, 언니가 피곤할 때도 많았을 거예요. 저 때문에 못간 약속들도 많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지원이 그 말을 가볍게 가로챘다.“에이, 아니야. 나, 하연이 없었으면 아마 진작에 병났을걸? 너네들도 알잖아, 그치?”그 말에 모인 사람들 모두 가볍게 웃었다.술잔이 다시 움직이고, 안주가 돌기 시작했다.공기는 다시 풀렸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지원은 테이블 밑에서 하연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그 작은 접촉은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둘 사이의 어떤 경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가게를 나선 건 자정을 조금 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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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함께 쓰는 일 I

여름이 조금 지나고, 슬슬 뜨겁다고 느껴지기보다는 부드럽고 따듯한 햇살이 계절의 테두리를 서서히 넘어서는 시기였다. 길가의 철쭉은 이미 지고, 나무들은 아마 올해의 마지막으로 풍성하게 잎을 틔운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을의 기운이 느껴지는 오후, 바람이 슬그머니 부드럽고도 조심스럽게 피부를 가늘게 쓰다듬는 날이었다.지원과 하연은 작은 이삿짐 트럭을 따라 조용한 주택가 골목 끝,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오래된 연립주택 앞에 섰다. 붉은 벽돌로 된 이층 건물. 월세도 아니고, 전세도 아니고, 자가. 오래도록 고민하다 택한 지금의 둘에게 어울리는, 둘만의 집."여기가 이제 우리집 맞죠? 맞는거죠?"하연이 묻자, 지원은 트럭 기사에게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고생하셨다며 보내드린 뒤 다시 하연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하연의 어깨를 꼬옥 잡고 몸을 기대는 지원.하연 역시 지원에게 기대어섰다."응, 맞아. 우리 둘이 함께 살 집.진짜 우리 집."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주방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작고 네모난 거실이, 거실 끝엔 방이 둘 있었다. 오래된 집이라 그런지 벽지는 군데군데 빛이 바랬고, 전등 스위치도 조금 뻑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모든 것이 좋았다. 낡았지만 단단했고, 작지만 따뜻했으며, 사소해보여도 그 무게는 사소하지 않았다. 마치 둘이 생각하는 서로의 마음 같다고, 지원은 떠올렸다."방 하나는 작업실, 하나는 침실로 하면 되겠다. 나중에 리모델링도 한 번 하자.벽지도 새로 바르고.""헬로키티 벽지로?""꿈도 꾸지마.""헤.."*그날 하루 온종일,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포장해온 박스들을 거실에 쌓아놓고 하나씩 뜯으며 물건들을 꺼내 제자리에 두고, 책장을 조립하고, 이불을 널고, 작은 식탁 위에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커피 메이커와 커피포트를 올려두었다.이곳저곳, 고장나거나 작동하지 않는 곳은 없는지 꼼꼼히 찾으며, 지원이 욕실 안에 들어가 있던 동안, 하연은 가만히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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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함께 쓰는 일 II [시즌 1 (完)]

그날 밤, 침대에 누워있던 둘. 지원은 책을 읽고 있었고, 하연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 옆 자그마한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하연이 꺼낸 것은 작은 상자 하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살짝 뚜껑을 열자, 하얀 은 장식이 달린 반지 두 개 나란히 들어 있었다.조금 투박하지만 정성스럽게 공방에서 직접 하연의 손으로 만든 반지. 반지 안쪽에는 지원과 하연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이거.”하연은 조심스럽게 꺼내며 말했다.“알바해서 산 우리 첫 반지에요. 왼쪽엔 언니 이름, 다른 오른쪽엔 내 이름.”지원은 그걸 받아들고 천천히 손끝으로 반지를 만져보았다.“너.. 이런 건 언제 만들었어?”“비밀.”하연이 윙크하며 웃자, 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고마워. 내 옆에 네 이름이 있다는 게.. 이제서야 진짜 실감나네.”그 순간, 작은 집 안에 둘 밖에 없는데도 마치 바깥 세상이 조용히 경청하는 듯했다. 반지 둘, 이름 둘이 그들의 시간이 되었고, 공간이 되었다.*밤은 깊어가고, 조명이 꺼진 방 안엔 아직 새 이불의 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천장이 낮아 조용히 말해도 목소리가 벽에 닿는 듯했고,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은 커튼을 살짝 흔들다 사라졌다.하연이 이불 속에서 작게 말했다.“언니. 내일 이 집에서 처음 맞는 아침에 뭐부터 하고 싶어요?”지원은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다가, 부드럽게 속삭였다.“네 얼굴부터 보기.”“그건 매일 하는 거잖아요.”“그래도 좋아. 가장 익숙한 게 가장 소중하니까.”하연은 웃으며 이불 속으로 손을 뻗었다. 지원의 손을 찾아, 그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우듯 포개었다.“그럼 나는.. 일어나자마자 언니 이름부터 부를래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지원은 대답 대신 하연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속삭였다.“그냥이라는 이유가 실은 사랑이라는 걸 알잖아. 우리는 이제 그런 사이니까.”*아침이 왔다.새벽과 아침의 경계는 조용히 무너지고, 햇살은 어느 틈에 방 안 깊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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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불편이라는 이름의 현실 I

월요일 아침, 서울의 한복판.익숙하게 대학교 캠퍼스를 걸어가는 하연.강의실로 향하는 하연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가슴 한편이 묘하게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검은 니트에 청바지, 아이보리색 에코백. 품에는 두꺼운 전공 서적.언뜻 보면 마냥 평범한 대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달랐다.어쩐지 자신이 전부 노출된 듯한, 투명한 유리관 실험실 안의 하얀 쥐가 된 것 같은 느낌.그건 아마 얼마 전 강의실에서 홀로 남아 가방을 정리하고, 나서는 길에 복도에서 들려온, 우연히 들은 대학교 친구들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아, 너 그거 아냐? 그 하연이랑 같이 산다는 언니 있잖아. 친언니 아니라던데?”“아니, 나도 전에 들었는데.. 전 새언니래. 그, 하연이 오빠가 죽고 둘이 산다나.”“헐. 뭐야, 그런 관계도 있어? 좀 이상한데?”“둘이 꽤 붙어 다닌다며.”“너무 붙어다니는게 좀 수상하긴 하지.”교양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복도 끝, 또렷하게 들린 건 아니지만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린 건 분명 하연의 이름이자, 하연과 지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느껴지는, 친구들의 말끝에 감도는 은근한 조롱.그냥 단순히 친해 보인다는 말로는 감당되지 않는 어투.하연은 어디가서도, 누가 물어도 지금의 가족 관계에 관해 한 번도 숨긴 적 없었다.전 새언니라는 단어는 어딘가 설명이 필요했지만,굳이 굽히거나 숨기지 않았다.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왜냐면, 하연이 지원을, 지원이 하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지원에게도 확인받은 공식적인 사랑이니까.하지만 오늘처럼 등 뒤에서 들리는 수근거림은그 사실이 편협하고도 지리멸렬하게 왜곡된 이야기가 되어 하연을 마치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퇴근길 지하철 안, 지원은 폰 화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하연언니, 오늘 학과 애들이 내 얘기 하는 거 들었어.언니랑 내가 좀 이상한 사이라네...나만 당당하면 다 신경쓰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현실은 시궁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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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불편이라는 이름의 현실 II

일요일 오후.하연은 학교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 말고,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문득 고개를 들자, 같은 학과의 대화도 한 번 나눈적 없는, 모르는 여학생 둘이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다시, 또다시.계속 반복되는 기시감 같은 풍경.물론 하연의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하연의 얘기라고 하더라도 지원과의 사이에 대한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짜증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하연.하연은 가방에, 책상에 있던 전공서적, 노트, 펜들을 대충 쓸어담고 도서관을 나섰다.*집으로 돌아온 하연은 현관 앞에서 문고리를 쥔 채 한참을 망설였다.그리고 결국, 집에 들어가 노트를 찢어 책상 위에 무언가를 휘갈기고는 집밖으로 나섰다.지원이 퇴근하고 집에 도착했을 땐, 불 꺼진 거실.메모 한 장이 식탁 위에 남겨져 있었다.[언니, 나 조금만 나가있고 싶어.잠깐 시원이네 집에 가 있을게. 너무 걱정하지는 마.]지원은 메모를 내려다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심장이 멈춘 것처럼.*그날 밤, 지원은 하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지원혼자 있는 것도 괜찮아.근데 내가 곁에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아예 없애지는 마. 우리 그 정도는 부탁할 수 있는 사이잖아.]답장은 없었다.*이틀 후, 지원은 하연이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다.현관문이 열리고, 그 앞에 선 하연.얼굴은 피곤하고 눈가는 조금 부어 있었지만,입꼬리는 아주 작게 올라 있었다.“언니.”“응.”“..나 왔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하연을 끌어안았다.아무 말도 없이, 긴 시간.그리고 조용히 말했다.“고마워. 돌아와줘서.”하연은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다른 사람한텐 내가 이상해 보이던말던,언니한테만큼은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어.근데 그게 큰 욕심이었나봐.”지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하연아. 너는 이상하지 않아.오히려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기엔 좀 이상한 거야.”*그날 밤, 조용한 거실.하연이 씻고 나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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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아는 계절 I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 잔잔히 스며든 희끄무레한 안개,어디선가 흘러오는 계곡물이 졸졸대는 소리.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의 산자락에서는,새들이 저마다 여기서 저기로 날아다니며 지저귀었다.지겨운 평일을 버텨내고 마침네 주말을 맞아 새벽임에도 가볍게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 사이로,지원과 하연도 말없이 한발, 두발 조심조심 산을 올랐다.“하연아, 춥지는 않아? 바람막이말고 기모 들어간 후드티라도 입으라니까..”한동안 유지되면 둘 사이의 정적을 깨며 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이마 위로 들러붙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무슨 소리.. 지금이 딱 좋아. 언니가 옆에 있어서...언니 옆에 있어서. 아, 근데.. 흐.. 힘들긴.. 하다.. 후우..”하연의 숨가쁜 말을 들으며, 지원은 딱히 특별한 대꾸너 리액션 없이, 아무 대답도 없이 옷 소매를 쥐고, 볼을 타고 흐르는 하연의 땀을 톡톡, 다정하게 닦아주었다.햇살이 아직 흐릿하게 퍼지는 새벽,듬성듬성 보이던 등산복에 스틱을 들고있던 사람들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에 둘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이 겹겹이 쌓였다.하연은 평소의 모습보다 한결 조용했다.평소 같으면, 이런 산길은 힘들다 징징대고, 다리 아프다고, 꺾여서 부러질 것 같다고 호들갑 떨고, 올라가는 만큼 내려가야할 길도 늘어나는 이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등산이란 운동! 같은 말들을 하고, 나는 평소에 운동 많이 해서 괜찮은데 언니는 운동같은 거 안하니까 이럴 때 몰아서 운동하지 말고 일상 중에 걷기라도 많이 하고, 엘레베이터 말고 계단 좀 타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도 하며 지원을 웃게 만들었을 텐데. 그런 하연의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쿡쿡거리며 웃는 지원.그러나 그때, 지원의 머리를 스쳐가는 조금은 불길한 생각.설마..“저기.. 하연아.”지원이 갑자기 멈춰 섰다.뒤따르던 하연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혹시,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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