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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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가계영을 생각하던 현신의 머릿속은, 결국 자신을 이곳으로 다시 불러들인 원흉인 엘에프에게로 쏠렸다. 그나저나 엘에프는 무사히 돌아간 걸까. 설마 오늘 또 회의가 잡혀 있는 건 아니겠지. 현신은 밀려드는 의구심에 무휼에게 다시금 확인을 요청했다.“무휼아, 혹시 우리 회사 CCTV 조회 가능해?”-네가 나갔다 들어온 그 시각 말이지?“응. 엘에프 선배 동선 좀 알아봐 줘.”어제 그를 목격했던 시각부터 오늘까지, 엘에프가 이 회사에 출입했는지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현신의 말에 무휼의 숨소리 집중을 하는지 옅어졌다.-엘에프 선배는 회의를 마치자마자 어떤 여자를 데리고 바로 나갔어.“뭐?”불성실의 대명사인 엘에프가 회의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여자를 동반했다는 사실은 더욱 의외였다.-어? 현신!“왜?”그 순간, 무휼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너, 아무래도 미행당한 것 같아.“······뭐라고?”무휼의 깊은 한숨이 귓가를 울렸다. 누군가 나를 미행했다니.-네가 버스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 들어오는 동안, 한 여자가 줄곧 네 뒤를 쫓고 있었어.“세상에······.”현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였다면, 버스를 타기 전부터 미행이 붙었다는 소리였다. 누가? 설마 가계영? “고맙다, 무휼아. 전혀 몰랐어.”-현신, 요원치고는 너무 둔해진 거 아냐? 너 요즘 딴생각에 정신 팔린 거 아니지?“그러게······ 내가 요즘 너무 물렁하게 살았나 보네.”역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알록달록 찬란하게 빛나던 어제의 기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 무채색의 어두침침한 회색빛 현실이 돌아왔다. 엘에프에게 쫓기고, 가계영에게조차 신뢰받지 못한 채 감시당하는 처지라니.‘나 같은 거짓말쟁이를······ 누가 믿어주겠어.’현신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손등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았지만, 대낮의 환한 빛줄기는 좀처럼 잠재워주지 않았다.***그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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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예고 없이 건네는 그 무엇]

현신은 할멈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딸기 한 상자를 더 사 들고, 저녁이 다 되어서야 친구들의 집 앞에 도착했다. 자신보다 한두 살 많은 시온과 무휼은 '라ON' 시절부터 이탈리아까지 생사를 함께해온 요원들이자, 거짓으로 둘러싼 인생에서 유일하게 민낯을 보일 수 있는 존재였다.“나 왔다, 친구들아!”“어머, 신! 이제 오니?”강남 개포동의 낡은 15평 아파트. 비좁지만 알콩달콩 살아가는 시온과 무휼의 공간은 늘 평온한 행복으로 가득했다. 시온은 다소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문을 열어주더니, 현신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부터 냉큼 살폈다.“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네!”“그래, 시온. 너 다 먹어. 무휼이는 아주 조금만 주고.”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절세미인 서시온은 입만 열면 푼수 같은 매력을 흘리고 다녀, 현신에게는 늘 최고의 웃음 바이러스였다. 반면 모니터 세 대가 번쩍이는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이무휼은 슬쩍 뒤만 돌아볼 뿐, 여전히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커다란 덩치 탓에 집이 더 좁아 보이게 만드는 무휼은 무심한 듯해도 조각 같은 생김새가 퍽 훈훈한 사내였다.“어이, 왔냐?”“무휼, 바쁘네?”“어.”현신은 무휼의 뒤통수를 보며 피식 웃고는 주머니에서 봉투 두 개를 꺼내 각각 건넸다.“자, 늦어서 미안해. 지난 의료 비리 미션 완수금이야. 의뢰인이 달러로 주는 바람에 환전하느라 좀 늦었어.”“너 그때 통신 장치 방전돼서 혼자 임무 하느라 고생 했다며? 고마워. 근데······ 돈은 좀 빨리 주지 그랬어.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시온이 뾰족하게 한마디 던졌다.“미안, 미행이 붙은 것 같아서 몸 좀 사렸어. 의뢰인도 워낙 무시무시한 인간이었고······.”“세상에 돈 버는 게 쉬운 건 아니지. 아, 다음에는 달러로 줘도 돼. 알겠지?”“어휴, 돈귀신. ”구박을 들어도 시온은 연신 생글거리며 봉투 속 현금다발을 확인하느라 눈을 번뜩였다. 그때, 현신의 말이 거슬렸는지 무휼이 의자를 휙 돌려 녀석을 쏘아보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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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건 무엇?]

현신은 가계영이 자신을 위해 선물을 주었다니 너무 놀라 그 물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때, 옆에 있던 한규련이 손뼉을 짝 치며 특유의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와, 계영이 자식. 아까 비행시간 빠듯한데 대체 어디 가나 했더니. 알바생 주려고 이거 사러 간 거였어?”“규련아, 이런 건 원래 사장이 챙겨야 하는 거 아냐? 계영이 센스가 보통이 아니네.”규련과 강무의 장난 섞인 대화가 귓가를 스쳤지만, 현신의 가슴 속은 이미 거센 파도가 이는 듯 울렁거렸다. 가계영이 내민 커다란 상자 안에는 보석처럼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과일 타르트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차갑고 오만한 남자가 자신을 떠올리며 이 달콤한 것을 골랐을 거란 상상만으로도 목 끝이 뜨거워졌다.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울컥 차오르는 감정 탓에 입술만 달싹일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계영이 한 걸음 다가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먼저 건넸다.“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현신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난데없이 큰 상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선물의 무게에 짓눌린 채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상하게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현신은 애써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고맙습니다.”“그거 먹고 기운 내. 혼자 있을 때, 울지 말고.”사람이 어쩌면 저토록 치명적으로 다정한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낯부끄러울 만큼 노골적인 위로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그가 낯설어 현신의 뺨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와! 우리 계영이, 의외로 스위트하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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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달콤하게 은밀하게]

높은 굽의 킬힐을 신고도 흐트러짐 없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모습이 제법 재주다 싶었지만, 현신은 엮이기 싫은 마음에 서둘러 몸을 돌렸다. 하지만 등 뒤로 꽂히는 날카로운 음성이 발목을 잡았다.“알바생. 거기 서!”“저 말씀이세요?”뭐가 그리 급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던 주효진은 주변을 훑으며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휴—, 강무 오빠랑 계영 오빠도 여기 있었네요? 반가워요. 홍콩은 잘 다녀오셨어요? 잠깐! 전 알바생이랑 이야기 좀 나누고요.”효진은 부산스럽게 굴다 말고, 이내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멍한 얼굴로 현신을 빤히 바라보았다.“나는 주효진이라고 해. 한규련 사장님과는 이종사촌 지간이고.”“네. 안녕하세요.”천방지축 진상 재벌녀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 평범하게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에 현신도 예를 갖춰 가볍게 목례했다.“우리 귀염둥이 괴롭히지 마, 좀!”“규련 오빠는 가만히 있어 봐. 휴—, 너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 원래 뭐 하던 애야?”효진은 화를 내기는커녕,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질문을 쏟아냈다. 생전 처음 보는 이 낯선 관심에 현신의 미간에 묘한 위화감이 서렸다.“왜 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거죠?”현신은 효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계영이 선물한 타르트 상자가 기울어지지 않게 고쳐 들었다.“아니, 별건 아니고. 그때 그런 일도 있었고 해서······ 그런데 어머! 이거 홍콩 최고의 디저트 전문점 타르트잖아? 내 거는? 내 거는 없어?”화제가 널뛰듯 바뀌는 그녀의 번잡스러운 성격에 현신은 결국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네가 직접 홍콩 가서 사 먹어!”“아우! 하나밖에 없는 사촌 동생을 위해 그거 하나 못 사다 줘?”“어, 사주기 싫어! 그 하나뿐인 사촌이 망나니 진상이라서!”규련과 효진이 으르렁거리며 유치한 설전을 벌이는 사이, 옆에서 지켜보던 강무가 어이없다는 듯 현신에게 다가와 속삭였다.“알바생, 어서 들어가 봐. 더 험한 꼴 보기 전에.”“아, 제가 저번에 저분을 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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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치명적인 그 남자가 심장을 두드려]

이 남자가 자신을 이런 시선으로 보고 있다니.현신은 가계영의 매력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꼈다.계영은 타르트를 한입 베어 물고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더니 돌연, 타르트를 들고 있던 현신의 가녀린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아귀에 잡힌 손목이 움찔 떨렸다. 계영은 그대로 현신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입술 앞까지 가져갔다.“그 입, 벌려.”낮게 깔린 명령조의 음성. 평범한 말 한마디였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형형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현신은 마치 강력한 최면에 걸린 듯, 그의 깊은 눈동자에 홀려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달콤한 타르트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방금 전 계영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현신의 입술에 겹쳐지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며 뜨거운 열꽃이 피어올랐다. 간접적인 입맞춤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너 재밌네.”조용히, 그러나 지독하게 매혹적으로 속삭이는 계영의 눈매가 가느다란 활처럼 휘어졌다. 현신은 그에게 장난을 치려다 오히려 영혼까지 잠식당한 기분이 들어,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 남자의 노련한 도발을 당해낼 재간이 도저히 없었다.그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굳어 있는 주효진이 보였다. 현신은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며 효진에게 다가가 남은 상자를 내밀었다. 효진은 넋이 나간 듯 타르트 상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이거 맛보실래요?”효진은 당황하다가도 화려한 디저트를 보자 탈출했던 정신이 돌아왔는지,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응! 나 나도 먹고 싶어!”그녀는 타르트를 하나 집어 입에 넣더니, 황홀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아, 정말 천상의 맛이다. 하나 더 얻어 가도 돼?” “그럼요. 마음껏 드세요.”효진은 뇌에 당분을 쏟아붓겠다는 듯 남은 손에도 타르트를 하나 더 챙겨 들었다. 현신은 모두가 달콤한 온기에 젖어있는 틈을 타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자, 그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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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권태로운 자와 소년이 되어야 하는 여인]

그 시각, 일본의 어느 초호화 호텔 스위트룸.똑똑.헤르만이 룸 안으로 발을 들이며 엘에프를 살피자, 절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오늘도 바스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느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아, 독한 위스키를 즐기고 있었다.가운 사이로 언뜻 비치는 탄탄한 가슴팍과 위험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왔어?” “또 술은-.”헤르만은 엘에프의 상태를 확인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세상 모든 욕망을 다 손에 넣고도 정작 본인은 의욕을 상실한 채 술잔만 만지작하다니. 그래도 엘에프가 뉴스는 틀어 놓고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위안 삼으며, 헤르만은 입술 끝까지 차오른 잔소리를 삼켰다.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연일 일본의 건실한 기업 하나가 독일계 젊은 IT 경영인에게 속절없이 넘어갔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었다.“이번 주말까지 기업 승계가 마무리되면, 그곳에 뿌리내린 어둠의 세력까지 우리가 전부 흡수하게 될 거야.”헤르만이 인수 과정의 상세 내역을 냉철하게 보고하는 동안에도, 엘에프는 시큰둥한 눈빛으로 화면 속 숫자의 나열만 응시할 뿐이었다. 수 분에 걸친 보고가 끝나자, 헤르만은 조금 편해진 기색으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이 기업, 구린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어. 탈세에 불법 승계까지, 비리의 온상이었거든.” “헤르만, 네 덕분에 지루한 히어로 놀이는 잘 즐기는 중이다.”엘에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런 모습마저 익숙한 헤르만은 긍정적인 말들을 내뱉으며 자신도 잔에 얼음을 채워 넣었다.“네가 직접 나서준 덕분에 정의 구현도 하고, 짭짤한 전리품도 챙겼으니 즐거운 일이지.” “즐거웠다면 다행이군.”매사에 건조하고 냉소적인 엘에프였다. 하지만 헤르만은 그가 타깃을 정하고 차근차근 무너뜨려 가는 과정이 얼마나 치밀하고 잔혹하리만큼 깔끔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 친구지만, 자신의 인생을 엘에프를 위해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헤르만은 그를 신뢰하고 존경했다.“엘에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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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절망은 마약 같아서 중독되고 싶지 않아]

가계영이 그토록 신신당부하며 미션은 절대 하지 말라고 경고했건만.자신에게 진심 어린 호의를 베풀어준 그를 기만하고 배신하는 것 같아 현신의 마음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겁고 갑갑했다. 숙소의 좁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려면 독한 술기운이라도 빌려야 했다.평소 이용하던 근처 편의점은 회사 직원들과 마주칠까 두려웠다. 행여 술을 사는 모습이라도 들켰다가는 '소년 이신'의 가면이 단숨에 깨질 터였다. 현신은 최대한 수수한 차림으로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섰다.직원들이 대부분 퇴근한 시각이라 복도는 적막하리만큼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층수 표시등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는데, 문득 뒷목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회사 건물을 빠져나온 뒤에도 그 묘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회사에 붙은 편의점을 지나쳐 일부러 먼 길을 택해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도, 등 뒤를 찌르는 시선은 여전히 집요했다.현신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대신 인도를 향해 급격히 방향을 틀어 걸었다. 그러자 10여 미터 뒤에서 뒤따라 멈추는 발소리의 잔향이 느껴졌다. 현신은 완전히 발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이런······ 미행이잖아?’현신은 수많은 임무를 수행하며 온갖 돌발 상황을 겪어왔기에 이런 미행쯤이야 허다한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회사 내부에서부터 누군가 제 뒤를 밟았다면, 그것은 회사 내부에 언더커버 요원이 잠입해 있거나, 혹은 자신을 의심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위험 신호였다.현신은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쩌면 이 요원을 역으로 이용할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모르는 체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마치 중요한 물건이라도 두고 온 듯 딴청을 부리며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자, 대체 어떤 놈이 따라붙은 건지 확인해 볼까.그런데 뒤를 돌아본 현신의 눈이 커졌다.“어머, 신아?”“······송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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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내 인생은 잔혹한 동화]

달리고 또 달리고.6월의 달력을 넘기기가 무섭게 대지는 낮의 열기를 밤까지 머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목덜미를 타고 뜨거운 열기가 울컥울컥 솟구쳤다.컴컴한 밤. 서울 강동구의 어느 번화가 일대.화려한 네온사인과 즐비한 상점들이 골목마다 불빛을 쏟아내며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전투복 일색에 마스크까지 눌러쓴 탓에 전신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은 상태였다. 달라붙은 옷감 너머로 예민하게 곤두선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졌으나 현신은 멈추지 않았다. -코드명 에스! 오른쪽이야, 꺾어!폐가 터져나갈 것 같은 압박감과 끊어질 듯 비명을 지르는 다리 근육의 통증이 오히려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감각처럼 느껴졌다. -아직 뒤따라오는 쥐새끼들은 없어. 오토바이를 주차한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귓가 깊숙이 박힌 인이어 너머로 무휼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현신은 정신없이 뛰고 또 뛰었다. 마스크 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짧게 생각했다.‘그래도 임무가 가벼워 다행이야.’생각보다 단시간에 해결될 것 같아 입술 끝에 묘한 고양감이 감돌았다. 지하철 좀도둑 아지트의 좌표만 확보하면 끝나기 때문이었다.불쌍한 아이들을 범죄의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일. 게다가 그들의 배후에서 눈을 감아주던 비리 경찰들의 추악한 현장까지 무휼과 함께 동영상으로 확보했으니, 이번 미션의 수확은 예상보다 컸다.잘못하면 밑바닥 아이들만 소년원에 가고 몸통들은 빠져나갔을 텐데. 증거를 완벽하게 손에 쥔 현신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마침내 골목 어귀, 그림자 속에 숨겨두었던 오토바이가 시야에 들어왔다.“도착했어!”에스! 난 현장에 남은 우리 흔적 좀 지우고 합류할게. 먼저 이동해.“쉬엄쉬엄해, ‘코드명 휼’. 난 바로 의뢰인 접선하러 간다!”점퍼 단추에 숨겨진 초소형 마이크를 통해 현신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임무 완수를 눈앞에 둔 해방감이 그녀의 목소리 톤을 한껏 높여놓았다. 현신은 오토바이에 올라타 스로틀(Throttle)을 거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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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완벽하게 짜인 덫]

오토바이를 돌려 퇴로를 확보하면서도 현신은 차오르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었다. 명일동을 지나 고덕동으로 향하는 내내, 심장은 기이한 고동을 치며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경찰들의 미행이 끈질기게 붙어 골목을 빙빙 돌아오느라 예상보다 훨씬 많은 진을 뺀 탓이었다.그 바람에 뒤를 받쳐주려던 무휼에게도 몇 번이나 대기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곧 하남이었다. 현신은 이를 악물고 눈에 서늘한 힘을 주었다. 그녀는 오토바이의 스로틀을 거칠게 비틀어 잡아당기며 밤의 공기를 갈기갈기 찢었다.-코드명 에스, 무리하지 마! 오늘 의뢰인 만나는 거 포기하자, 응?포기라니.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무휼아, 고덕동 덕강초등학교 뒤편에 어제 오토바이 한 대 더 숨겨뒀어. 넌······ 지금 바로 가서 오토바이 바꿔 타고 시온이한테 가. 나도 바로 회군할게.”비장한 마음을 담아, 현신은 코드명이 아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원으로서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미행이 이토록 집요하게 늘어난다는 것은 답이 하나뿐이었다. 현신, 오직 자신만이 타깃이 되었다는 것.그 사실을 무휼이 몰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으나, 수화기 저편은 한참이나 침묵에 잠겼다.-······알았어, 현신.드디어. 현신은 듣고 싶었던 답을 듣고 나서야 밭은 숨을 내뱉었다.-좌표 서포트는 마지막까지 계속할게! 너도 무조건 돌아오는 거다, 알겠지?“당연하지.”-CCTV가 하나도 없는 골목길이 등장할 거야. 아주 가까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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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지옥에서 펼쳐지는 라이어 게임]

현신의 귓전을 파고드는 낮게 깔리는 가계영의 음성은 폐공장의 서늘한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릴 만큼 위협적이었다.“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돈만 보고 달려드는 철없는 애송이.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결국 사지로 기어 들어왔군.”역시, 예상대로였다. 그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폐공장 가운데에 있는 사각 링. 그것은 오로지 경고를 어긴 애송이에게 내리는 잔인한 시험대였다.현신은 계영이 뿜어내는 살벌한 기운에 압도되어 숨이 가빠왔지만,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었다. 앞으로의 미션에서 그가 사사건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둘 수는 없었다. 현신은 마스크 너머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이런 무대까지 준비하시다니. 형님께서는 삶이 꽤나 지루하고 심심하신 모양이군요.”“그래, 날 좀 재미있게 해야 할 거다.”현신의 도발에도 계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저 눈빛이 타오르는 분노인지, 아니면 먹잇감을 지켜보는 즐거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현신은 결심한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계영에게 다가갔다.그와의 간극이 좁혀질수록 공기는 질식할 듯 팽팽해졌다. 마침내 그의 코앞에 섰을 때, 현신은 계영의 깊고 검은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진득한 감정을 읽어냈다. 그것은 명백한 분노, 즉 통제 범위를 넘어선 대상에 대한 배신감이었다.“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에게는 벌이 필요한 법이지.”계영이 으르렁거리듯 현신을 향해 살벌한 경고를 내뱉었다. 역시, 상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예상보다 훨씬 뜨겁고 날카로웠다. 현신은 눈으로 웃으며 계영의 가슴팍을 스칠 듯 지나쳐 링 위로 올라갔다.“형님, 그럼······ 제가 좀 놀아 드리겠습니다.”현신은 링 로프를 잡고 돌아서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날렵하게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아래에 선 계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려다보는 현신과 올려다보는 계영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하남의 폐공장. 가계영은 이 일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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