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Chapter 31 - Chapter 40

118 Chapters

#31. [폭력과도 같은 자비로움]

점입가경이었다. 사방을 메운 가계영의 경호원들이 녀석의 서슬 퍼런 패기에 질려 술렁이기 시작했다. 평생 쌓아온 인내의 한계치를 정확히 건드려 폭발시키고 있었다.“너, 정말······ 안 되겠다.”계영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열기는 당장이라도 폐공장을 집어삼킬 듯 뜨거웠다. 그는 이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지금 의뢰인을 도발해서 어쩌자는 거야?”“이건 내가 목숨 걸고 가져온 증거입니다. 당신은 그저 의뢰인답게 돈이나 지불하면 되는 거라고요!”마스크 너머로 쏟아지는 녀석의 독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날 선 눈빛이 계영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댔다.“오늘 넌 좀 배워야겠다. 세상 무서운 것을!”“좋습니다! 어디 마음껏 가르쳐주세요!”호기롭게 눈을 반짝이며 대치하는 녀석을 보자 계영은 현기증이 일어 버렸다.***퍽—! 퍽—!공격이 들어오면 막고, 또 막고.현신은 계영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려 애썼다. 그가 자신을 동정하고, 애틋하게 여기며 신경 쓰는 것이 느껴질수록 현신은 더욱 그를 도발했다. 하지만 계영의 압도적인 완력이 현신을 밀어붙이는 둔탁한 소리가 폐공장의 정적을 갈기갈기 찢었다. “시선 놓치지 마. 여기가 비었어.”가계영은 너무 화가 났는지 짐승의 으르렁소리처럼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그가 자신에게 '연민'이라는 약점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실력자라는 것은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수많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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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치명적인 잔향에 홀린 남자]

휙···. 가계영이 몸을 돌려 링에서 내려갔다. 조금씩 소음들이 멀어져 가자, 사위는 금방 질식할 것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땀이 식어 그런 걸까, 아니면 마음 한구석이 통째로 잘려 나가서일까. 현신은 그저 뼈가 시릴 만큼 춥기만 했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거친 숨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게 되어서야, 현신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하아···.”그제야 참았던 뜨겁고도 비참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또르륵···. 배신감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액체가 눈가로 흘러 짜증 나게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현신의 오늘 미션은 잔인할 만큼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무휼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 몸에 심어진 모든 추적 기기와 통신을 종료시켰는데도 그는 귀신같이 이곳을 찾아냈다. 역시 대단한 무휼이었다.“이런, 현신! 괜찮아? 그러게 왜 통신을 다 끊어버린 거야!”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무휼이 울먹이며 링 위로 뛰어올라 현신의 몸을 훑었다. 현신은 가물가물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무휼을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골절된 곳은 없어···. 그냥 피곤해서 잠깐 쉰 거야. 멀쩡해···.”“멀쩡은 무슨! 탈진이잖아. 잠깐만, 이것 좀 마셔봐.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어.”무휼은 떨리는 손으로 음료를 꺼내 현신의 입술에 적시듯 흘려 넣었다. 그러고는 강박적으로 그녀의 팔과 다리를 살폈다. 다행히 링 위에 선명한 핏자국은 없었고 당장 응급처치가 필요한 외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무휼의 죄책감이 아주 조금은 덜어질 것 같았다.“무휼아, 돈···.”현신의 시선이 닿은 곳에 놓인 달러 뭉치 6개를 보자, 무휼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낮은 탄식을 뱉었다.“시온의 수술비만 아니었어도 이딴 미션은 안 시켰을 텐데. 이런, 제길···.”그는 가볍게 현신을 단숨에 번쩍 안아 올렸다. 현신은 본능적으로 괜찮다며 몸을 비틀었지만,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힘없이 파닥거리는 움직임이 오히려 하찮게 여겨졌다.“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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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책임지지 못할 감정의 예고]

 꿈속? 아니 기억?  현신은 지금 이탈리아에 있는 빅토리아 국제 요원 양성기관에 있다. Rrr Rrr Rrr 이곳에서는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에는 항상 이렇게 예비 알람이 울렸다.  “코드명 에스! 서둘러!” “시온아, 로마에 그냥 눌러앉을까? 피자랑 파스타 너무 좋아. 후식도 젤라또라서 좋다.” 꿈인 것을 아는데, 왜 이리 생생한지. 현신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쉿! 에스. 본명 말하지마.” “윽. 알았어.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출신도 다 비밀이라니.” “우린 요원이잖아. 참, 이번 미션만 끝나면 포인트 다 채우는 거지? 그럼 도망갈 수 있겠다.” “엘에프 선배 뒤통수 제대로 맞겠는걸? 하하!” 현신 18살, 시온 19살, 무휼 20살.  라ON에서 블랙라벨을 잔뜩 따고 실력을 인정받아 빅토리아 기관에 유학 온 뒤 그 셋은 나름 알차게 1년을 보냈다.  영어도 많이 늘고, 이탈리아어도 배웠다. 서로 요원으로 성장하면서 쌓은 포인트로 돈도 많이 받았다.  현신은 부모님이 남긴 빚을 갚는 동안 시온과 무휼은 그래도 차곡차곡 저금해 나갔다. “난 강남에 집 살 거야. 10평이 안 되어도 좋아.” “오호. 코드명 온! 포부가 큰데?” “참! 라ON의 전설 알아? 요원 중에 돈 모아서 건물 사고, 땅 사고, 주식 사고 5년 만에 대재벌이 된 선배님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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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몸서리치게 생각나]

그 시각, 서초동 예술의 전당.‘어머! 세상에···!’설마, 설마 했다. 무대 위 쏟아지는 조명을 받으며 불 켜진 객석을 훑어내리던 주효진의 눈이 일순 커졌다. 이내 그녀의 붉은 입가에 만개한 미소가 번졌다. 이곳에 절대로 있을 리 없는 남자,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될 만큼 비현실적인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빛이 나네, 정말 빛이 나. 신의 축복을 온몸으로 받아낸 남자, 엘에프가 오다니.’지난봄, 짧고 뜨거웠던 원나잇 스탠드를 뒤로하고 독일로 떠나보낼 때 건넸던 VIP 티켓이었다. 사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유희의 조각으로 자신을 잊었을 거라 단정했는데, 이토록 오만한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니. 효진은 당장이라도 무대 위에서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앙코르곡을 단 한 곡으로 갈음한 그녀는 무대 뒤로 달려가 비서의 어깨를 낚아채듯 신신당부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에프를 잡아두라고. 후다닥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가장 관능적인 옷으로 갈아입은 효진이 로비로 나섰을 때,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자나 깨나 명화처럼 고운 그의 얼굴을 그리며 밤을 지새웠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사람 맞지? 그림이네, 명화야!’어린 시절, 야생마 같은 거친 매력의 가계영을 보고 첫눈에 반해 평생을 쫓아다녔던 그녀였다. 그런데 정반대의 외모, 국적도 성격도 딴판인 데다 심지어 여자에게 다정하지도 않은 이 나쁜 남자에게 이렇게 미쳐버릴 줄이야. 제 인생은 매번 짝사랑으로 점철된 시시한 연애담뿐이었지만, 뭐 어떠랴 싶었다. 정략결혼이라는 새장에 갇히기 전, 자신에게 선사하는 화려한 선물이라 여기면 그만이었다.‘어디 한번, 짝사랑도 폭풍처럼 제대로 즐겨보는 거지 뭐.’멀찍이서 엘에프를 관찰하던 주효진은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오늘 그의 드레스코드는 치명적일 만큼 완벽했다. 시원한 물 향기가 느껴지는 옅은 여름 투 버튼 슈트. 그 위로 하늘거리는 은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손길 하나하나가 로비의 공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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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나쁜 여자, 나쁜 남자, 나쁜 소년.]

이 와중에 가계영이 걱정된 현신은 일단 주차를 서둘렀다. 회사 편의점에 들러 파운데이션 하나를 집어 들고는, 거울 속 처참한 멍 자국 위로 대충 펴 발랐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출근길에 올랐다.어제 총무과장에게 출근하지 못한다고 짧게 전하긴 했지만, 양심이 쿡쿡 쑤셔대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 죄짓고는 못 산다더니, 복도를 지나는 내내 사방의 눈치만 살피게 되었다.일단 마스크를 깊게 눌러쓰고 평소 일하던 자리로 향했다.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각이니, 자신 같은 알바생 하나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투명 인간 취급을 해주리라. 일말의 기대를 품어 보았건만···.“어이! 알바생! 어제 왜 안 왔어? 마스크는 또 왜 썼냐?”“와, 근데 너 마스크 쓰니까 진짜 아이돌 같다. 연예인 느낌인데?”“어? 사람들이 너 계속 숙소에 박혀 있다고 하더니, 아니었네?”“언제 어떻게, 왜 어디로 나간 거야?”현신의 등장과 동시에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란 최 대리와 송화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시온이 분명 CCTV 동선은 손을 본 것으로 알았는데, 이 사람들은 마치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는 듯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소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잠시 뒤, 현신의 자리 근처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더니 급기야 총무과 과장과 총괄부 부장까지 모습을 드러냈다.“아이고, 알바생. 걱정 많이 했어.”고작 하루 결근한 알바생을 위해 과장님이 왜 이토록 가슴을 졸이시는 건지.“이거 참, 고맙군.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와줘서 말이야.”심지어 총괄부 부장님은 왜 이리 극진한 환대를 베푸시는 걸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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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동정도 폭력이야!]

“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현신은 이참에 그만두라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사장실에 끼고 돌며 일을 시키겠다니. 그것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서슬 퍼런 감시망 아래에 두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앞으로 내가 알바생을 옆에 꼭 붙여둘 거야. 각오해. 무슨 지독한 일을 시킬지 모르니까.”현신이 어이가 없어 멍하니 대꾸조차 못 하고 얼어붙은 그 순간이었다. “표정 좀 봐! 너무 귀엽잖아! 아, 진짜 못 참겠다! 하하하!”역시나, 그는 여전히 현신을 골려 먹는 중이었다. 한규련은 배를 움켜잡고 손을 휘저어대며 꺼이꺼이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함이 극에 달한 현신이 이번에는 참지 않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였다.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사장실 육중한 문이 열렸다. 여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예고도 없이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사장님, 가계영 님과 김강무 님 오셨습니다.”***아-.현신의 가슴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규련에게 놀아나고 있는 이 상황도 벅찬데, 강무와 특히 ‘그’ 가계영까지 나타나자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며 현기증이 일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몰골을 감추려 고개를 더 깊숙이 숙이자, 한규련의 유쾌한 웃음소리만이 사장실의 정적을 깨뜨렸다.“아, 한참 웃었네!”활짝 열린 문 사이로 가계영이 현신을 훑어내리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도 흐트러짐 없는 번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어 있었다. 가계영과 눈을 마주칠 용기조차 없었던 현신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규련, 무슨 일이야.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워.”“계영아, 강무야! 마침 잘 왔어. 여기 재미있는 일이 있었거든!”규련은 조금 전의 소동을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늘방석에 앉은 듯 가시 돋친 긴장감을 느낀 현신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탈출구를 찾았다.“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씀 나누세요.”현신의 다급한 인사에 다들 눈길로만 대충 인사를 건넸고, 흥이 오른 규련도 어서 가보라며 휘휘 손을 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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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1부완결)[카오스, 뒤엉킨 운명]

변명이든 부정이든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이 서툰 현신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가계영은 기가 찬다는 듯 현신에게 다가와 어깨를 거칠게 돌려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너, 대체 주말 내내 뭐 하고 돌아다녔어?”현신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코앞에서 마주한 가계영을 바라보았다. 그를 감싸고 있는 기운이 어찌나 흉흉하고 위협적인지 현신의 어깨는 절로 움츠러들었다.“왜 대답을 못 해.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됐나?”왜긴. 그렇다고 당신한테 얻어맞아 모텔방에 쓰러져 있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현신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무미건조한 가면을 썼다. 제 안에서 일렁이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사생활입니다. 보고할 의무 없습니다.”사장실 안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 남자의 표정은 마치 일시 정지 화면처럼 굳어버렸고, 그들은 현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빤히 응시했다.“뭐? 사생활?”결국 계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짙은 실망감을 내비쳤다. 그 서늘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현신의 마음 한구석이 시큰하게 아려왔다.“계영아, 아직 어리니까 우리가 가르쳐야지.”한규련이 다가와 가계영의 어깨를 다독이며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계영의 날 선 분노는 이내 한규련을 향했다.“하필이면 주말 동안 시스템에 오류가 있었고, 이 녀석은 이러고 돌아다니다니. 가르쳐서 될 놈인지 모르겠군.”가계영이 꾹꾹 눌러 내뱉은 서늘한 말에 현신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말은 곧, 그가 현신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CCTV까지 뒤졌다는 뜻이었으니까.역시 시온이 원격으로 작업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덜미가 잡혔을 터였다.‘계영 님은 처음부터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거야.’그때 강무가 피식 웃으며 현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계영아, 말 그대로 사생활이야. 내가 너무 들쑤셨나 보네. 미안하게 됐어. 알바군, 가서 일 봐.” “그래, 강무 말이 맞아. 나도 직원의 사생활은 존중해 줘야지.”규련과 강무는 여전히 묘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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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부)[The Fool-무대에 선 광대]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사장실.어느 이방인의 등장으로 공기의 흐름은 묘하게 비틀렸다.한 소년을 뒤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남자, 가계영. 소년에게 지독한 호기심을 품은 채 다가온 보랏빛 머리칼의 또 다른 남자, 엘에프. 두 사내는 황금빛 눈을 지닌, 초라한 옷차림의 고운 소년만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 공간에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Nice to meet you.(만나서 반갑습니다.)”엘에프는 시선을 오직 현신에게 고정한 채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곱게 다물어진 입매 사이로 흘러나오는 낮고 우아한 영국식 영어는 사람을 홀리는 듯한 목소리가 되어 가계영의 귓가까지 파고들었다. “I’m glad to see you, too.(그쪽을 만나니 나도 반갑군.)”가계영은 현신을 제 품 안에 꼭 안은 채 엘에프에게 으르렁거리듯 인사를 건넸다. 그 어떤 소음이나 상황도 간섭하지 못할 정도로 두 남자는 서로에게 무겁게 집중하고 있었다.“어, 어이, 저기 분위기 왜 저래?” “그러게. 살기가 여기까지 느껴지네.” “어머! 저기 오빠들! 엘에프! 아, 그리고 저 소년! 지금 무슨 상황이야?”규련이 경기를 하듯 놀라 강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강무 역시 묘한 기류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가장 당황한 이는 주효진이었다. “계영 오빠 등장했다는 말에 와 봤더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참, 너는 뇌가 참 해맑다. 뇌 주름이 스팀 다림질이라도 된 것처럼 매끈하네.” “저 럭비공 같은 남자는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야?” “효진아, 그냥 너는 당 충전이나 해. 마카롱이랑 놀게 해줄 테니까.”규련이 효진의 등을 토닥이며 자리에 앉혔고, 강무도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 관망하며 웃었다. 한규련은 이 공간의 주인으로서 엘에프와 가계영 사이로 가서 섰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짓으로 그들을 안내했다.“Everyone, please come to the sofa and sit down.(모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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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The High Priestess, 아찔한 경고]

독일에서 온 이방인, 엘에프.왜 그는 녀석만 이렇게 집요하게 보는 걸까. 계영은 본능적으로 녀석을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잡고 있는 손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계영의 손바닥을 타고 심장까지 고스란히 박혔기 때문이었다.“계영 님. 괜찮아요. 저, 저 먼저 갈게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녀석은 제 손에서 벗어나 거의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도망치듯 사무실로 향하는 녀석의 뒤를 계영이 느릿하게 쫓았다. 짓눌린 듯 심란해 보이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자, 계영의 안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갈증과 불안이 치밀어 올랐다.***계영이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걷던 녀석은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멍하니 있었다.그러다 서류함에서 뭉치를 잔뜩 꺼내 들더니 복사를 하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넋이 나간 눈으로 영혼은 이미 이곳에 없어 보였다. 주변 동료들이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는 듯, 고립된 섬처럼 혼란의 늪에 빠져 있었다.“가계영 대표님이시네요. 최 대리라고 합니다.”“어머 안녕하세요. 전 송화라고 합니다.”계영은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을 무심하게 물리고는, 팔짱을 낀 채 멀찍이 서서 녀석을 관찰했다. 대체 무엇이 이 소년을 이토록 흔드는 건지, 그 지독한 생각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현신이 가느다란 숨을 진득하게 내뱉으며 혼잣말을 흘렸다.“······어쩌면 다····&mi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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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어둠의 왕관을 쓴 The Emperor]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서울 시내의 야경은 보석을 뿌려놓은 듯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화려하고, 예상보다 만만치 않은 도시. 대한민국 서울의 밤이었다.헤르만은 엘에프의 은밀한 사생활을 충분히 존중한 뒤, 효진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객실에 들어섰다. 서울에 온 이후 눈에 띄게 생기가 도는 엘에프의 모습에, 그를 보좌하는 헤르만의 얼굴에도 밝은 기색이 감돌았다.“엘에프, 나야. 이야기 좀 해.”“음. 그래.”“또 술이야? 너도 참 어지간히 말 안 듣네.”“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거지.”엘에프는 나른하게 몸을 일으켜 헤르만이 건네는 시원한 생수를 들이켰다.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헤르만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그의 기분이 꽤 고양되어 있다는 것을. 엘에프는 생수병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탁자에 놓인 독한 위스키를 얼음도 없이 잔득 채워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도쿄하고는 또 분위기가 다르네. 비슷할 줄 알았는데.”“그냥 서울 건너뛰고, 바로 홍콩으로 갈까?”“글쎄, 고민 중이야.”헤르만은 엘에프의 뜻밖의 대답에 의아함을 느끼며 자신도 잔을 집어 들었다. 얼음을 가득 채운 위스키 잔을 들고 엘에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대체 무엇이 이 변덕스러운 남자를 붙잡고 있는 걸까. 설마 그 붉은 드레스의 여자 때문일까.“그 여자, 벌써 몇 번이나 만났지? 어지간히 특이한가 봐?”“어. 좀처럼 질리지가 않네. 그건 그렇고 일본 쪽은?”“엘에프, 이제 완전히 정리됐어. 지하 세계의 검은 세력들도 다 네 거야.”엘에프가 독일과 일본을 거치는 동안, 그의 영향력은 공룡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있었다. 막대한 자금력과 유명세, 그리고 어둠의 힘까지. 이제 그는 명실상부한 정점의 위치에 서 있었다.“헤르만, 차익 제대로 챙겨. 절반은 네 몫이다.”“당연히 마다 안 하지. 그건 그렇고, 이탈리아에 한번 다녀와야 하지 않겠어?”“그보다······, 그 남자는?”순간 헤르만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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