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Chapter 11 - Chapter 20

118 Chapters

#11. [포식자와 포식자가 얽힌 시선 사이]

“뭐? 살려달라고?”가계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감히 제 등 뒤에 숨은 이 작은 생명체를 이토록 겁에 질리게 만든 놈들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가계영은 현신의 몸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자신의 넓은 어깨와 등을 이용해 그녀를 완전히 차단하며 거대한 성벽처럼 앞을 가로막아 섰다.현신의 이마가 가계영의 등에 더 깊게 파묻혔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박한 침묵 속에서, 터질 듯한 긴장감이 불꽃처럼 튀었다.쌔액쌔액, 불규칙하게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가 가계영의 척추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는 녀석의 체온이 셔츠 너머로 뜨겁게 배어들었다.가계영의 시선이 천천히 외국인 무리로 향했다. 일순, 무리의 중심에서 의전을 받는 보랏빛 눈동자의 사내와 가계영의 눈이 마주쳤다.건너편의 사내도 멈칫, 계영도 멈칫.찰나의 순간, 시선이 얽혔다.사내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는 듯하더니 이내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던 자 또한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다 가계영과 눈을 맞췄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는 듯 오만하고 도도한 시선으로 로비 곳곳을 훑고는 폭풍처럼 빠져나갔다.하, 이런.계영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닫혔던 입을 다시 열었다.“뭐지?”등 뒤에선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가늘고 마른 손가락이 가계영의 슈트 자락을 부서질 듯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엘에프 폰 루드비히는 예민한 표정으로 회의장을 향하며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HH그룹, 그리고 그 자회사인 H건설 강남 본사.오늘 아침 급하게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자마자 이곳으로 직행했더니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헤르만의 정보에 따르면 H건설은 건실한 회사라 손대기 만만치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투자 가치가 충분하고, 향후 아시아권 건설 사업을 맡기기에 이보다 적합한 파트너는 없었기에 그는 직접 한국 땅을 밟았다.네이비색 슈트에 하늘색 셔츠, 흰색 타이를 매고 같은 색 구두를 신은 그는 카펫 위를 나른하게 걷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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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붉은 낙인의 흔적이 이끈 곳]

대한민국 건설업계의 거인, H건설.이곳의 오너 한규련은 가계영과 함께 보스턴에서 학위를 마친 뒤 바로 가업을 물려받았다. 모기업인 HH그룹의 비호 아래 그는 거칠 것 없는 경영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하지만 오늘, 평온했던 대주주 회합의 공기는 낯선 불청객들의 등장으로 인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엘에프와 헤르만.그들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규련에게도 적잖은 압박이었다. 진행자의 사업 보고가 이어졌지만, 한규련은 지루한 듯 딴짓을 일삼았다. 물론 실적은 완벽했다. 연이은 흑자와 정부 추진 사업의 선정까지, 회사는 이상적인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사내이사 명함을 달고 무임금으로 자리를 지켜주는 가계영과 김강무가 있었기에 한규련은 이곳에서 많은 꼰대 이사진들 앞에서 권위를 챙길 수 있었다. 가계영은 3.1%, 김강무는 1.8%의 지분으로 그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뜬금없이 독일 E그룹의 젊은 수장이 0.8%나 지분을 확보하다니. 헤르만까지 합치면 무시 못 할 수치잖아?’한규련은 회의 내내 미간을 좁혔다. 해외 투자자의 실체가 엘에프였다는 사실은 예상 밖의 변수였다. 엘에프는 회의 내내 침묵을 지켰으나, 그 존재감만으로도 장내를 장악하고 있었다.“음, 뭔가 쎄한데? 이러다 먹튀라도 하려는 거 아냐?”한규련이 전전긍긍하자 역시 친구들은 그게 뭐 대수라는 분위기였다.“주가가 오르면 좋은 거고, 악재가 터지면 내가 더 사서 방어하면 그만이야.”그의 염려를 비웃듯 가계영은 여유롭게 대꾸했다.“개미들만 불쌍하지. 그나저나 계영이 너 오늘따라 유독 한가해 보인다?”“글쎄.”가계영은 김강무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상대편에 앉은 엘에프를 관찰하다가, 한규련에게 시선을 옮겼다.한규련은 피곤이 몰려와 크게 하품을 내뱉는 순간, 가계영은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일어났다.“내가 좀 바빠서.”회의 시작 40분 만에 한규련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바로 쉬는 시간을 선포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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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 남자의 내게 준 벌]

잠시 회의가 중단된 쉬는 시간.한규련은 주효진이 아르바이트생을 붙잡고 난리를 치고 있다는 김 비서의 보고를 받자마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가뜩이나 예민한 대주주 회합 중에 사고를 치는 사촌 동생의 소행에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급히 효진을 말리러 가려던 찰나, 규련은 김강무와 함께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평소 냉철하던 계영이 느닷없이 녀석의 뺨을 갈기는 모습이었다.계영이 얼이 빠진 아르바이트생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사라지자, 남겨진 효진의 악다구니는 더욱 거세졌다. 규련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너 진짜 미치려면 곱게 미쳐! 불쌍한 아르바이트생을 왜 괴롭혀? 내가 얼마나 예뻐하는 귀염둥이인데!”규련의 잔소리에도 오히려 효진은 더 당당하게 대답을 뱉었다.“규련 오빠! 이번에는 강무 오빠에서 소년 취향으로 바뀐 거야? 뭐야?”늘 그렇듯 으르렁거리는 효진의 목소리는 해맑게 복도를 울렸다.“그런데 계영 오빠 취향이 정말 그쪽이었어?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모노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 감정의 기복이 빠르게 바뀌는 주효진을 보자 한규련은 감당이 되지 않아 핀잔만 주었다.“너 어디 아프냐? 이제 좀 그 망나니짓 좀 그만하면 안 되겠어?”“아니, 같이 넘어졌는데 그 애가 순식간에 날아와서 내 몸을 확 잡는데 얼마나 황당했는지 몰라. 내 허리를 막!”“나는 너 때문에 항상 황당해! CCTV 확인해서 네가 먼저 잘못한 거면 이번엔 진짜 손절이다!”“오빠!! 맨날 나한테만 그래!”한규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저어 구경하듯 몰려든 직원들을 흩어놓았다. 김 비서가 매의 눈으로 현장을 수습하며 회의실에서 나온 VIP들을 홍보관으로 안내했다. 강무는 헛웃음을 삼키며 규련의 어깨를 다독였다.“역시 네 사촌은 참 창의적으로 재미있어.”“강무야, 이러니까 내가 쟤를 부르기 싫다니까. 사고를 쳐도 꼭 저렇게 친다.”그때 주효진은 억울하다는 듯 다시 규련의 앞에 몸을 들이밀었다.“피해자는 나라고! 오빠들 잘 들어봐.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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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길들여지지 않는 열망]

그는 왜 자신에게 이러는 것일까. 가계영의 단단한 손가락이 천천히 현신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매끄러운 살결을 타고 흐르는 그 노골적인 애무에 현신은 숨을 들이켰다.“······저기, 계영 님?”왜 이러느냐고, 이러지 말라고 밀어내야 마땅했다. 하지만 현신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저 젖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부르고야 말았다.그러자 계영의 손이 현신의 눈가로 옮겨갔다. 이윽고 커다란 손바닥 전체가 녀석의 뺨을 완전히 덮어 누르듯 어루만졌다. 뜨거운 체온이 현신의 안면을 타고 전율처럼 번졌다.“눈이 태양처럼 예쁘군”현신은 평소 자신의 눈 색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 순간만큼은 근처에 거울이라도 있다면 당장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남자의 시선은 오직 현신, 자신에게만 지독할 정도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신은 심장을 통째로 뒤흔드는 엄청난 고백을 듣고야 말았다.“너처럼 고운 아이는 세상이 흉흉하니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급 세단, 그리고 아름다운 봄날의 햇살. 시간도, 공간도 잊어버린 찰나였다.***가계영은 녀석이 너무 고와 자신도 모르게 사내자식에게 예쁘다는 생각을 말로 내뱉고 말았다. 이성은 경고하고 있었으나, 본능은 이미 고삐를 풀고 있었다.“계영 님?”“왜.”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볼을 한 채, 아랫입술을 달싹거리는 모양새가 지독하게 선정적이었다. 왜 저리도 입술은 도톰하고 붉은 것이 탐스러운지. 녀석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뱉었다 할 때마다, 계영의 시선은 녀석의 젖은 입술에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정신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계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꼭 주었다.“저······.”“빨리 말해.”조급함에 불쑥 튀어나온 계영의 목소리가 거칠게 차 안을 울렸다. “손이······ 아파요.”손? 무슨 손? 계영이 의아한 듯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은 녀석의 볼을 만지작거리느라 뻗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다른 한 손은.‘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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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좋은 날인데]

순간 그들은 짧은 웃음을 거두었다.한규련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강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사라진 자리에 서늘한 경영인의 계산이 들어차 있었다.“강무야. 계영이 그 자식이 없는데, 저 괴물들을 그냥 만나도 될까?”김강무 역시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슈트 상의를 매만지며 한규련을 응시했다.“어쩔 수 없지. 이미 발을 들였으니까.”여전히 서서 마카롱을 집어 먹으며 입안 가득 단맛을 채워가던 주효진이 의아한 듯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일순간, 규련과 강무의 눈이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쳤다. 김강무는 밖으로 나가려던 주효진을 부드럽게 가로막으며 미소 지었다.“잠깐, 효진아. 나가지 말고 일단 여기 있어 봐.”강무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한 한규련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 구역 미친년의 활약을 기대해 봐도 되겠지?”규련은 효진의 어깨를 다독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주효진은 그들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눈을 굴리다, 다시 마카롱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조금 전까지 현신은 모든 상황이 의아해 헷갈렸으나, 결국 가계영의 강압적인 손에 이끌려 그의 거처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상황은 자꾸만 꼬여갔다. 가장 피해야 할 인물이 가계영이건만, 역설적이게도 그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현신의 심장을 옥죄었다.‘조심해야 해. 계영 님도 언제 엘에프 선배처럼 변할지 몰라.’몇 년 전, 이탈리아의 빅토리아 요원 양성기관에서 만난 독일 남자 엘에프. 현신은 그에 대한 신뢰를 찢어발기고 도망치듯 한국까지 숨어들었다. 미성년자였던 그 시절, 잔혹한 성정을 지닌 엘에프가 그저 자신을 불쌍한 소년인 줄로만 알고 지극정성으로 대했었다.요원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뽐내며 끔찍하리만큼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던 현신은 어느 순간 엘에프의 밑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시온이 미션을 하러 나갔다가 다치게 된 바람에 요원으로 쓸모 없어지면 잔혹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녀를 데리고 한국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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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 밤, 낯선 온기의 침범]

그때 가계영이 등 뒤에서 현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언제 봐도 그는 배우를 할 법한 얼굴에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압도적인 피지컬이었다.단정하게 잘 마감된 검은 셔츠와 슬랙스 차림. 185cm는 훌쩍 넘을 훤칠한 키에, 현신의 몸무게 두 배는 됨 직한 강인한 체격의 그가 아도니스처럼 서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체취가 좁은 시야를 가득 메웠다.“아찔한 이 높이를······ 즐기고 있었어요.”“뭐, 이 일대에서 이 빌딩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하긴 하지.”“뛰어내리는 용기도······ 보통 각오가 아니면 힘들겠지요?”순식간에 가계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트레이 가득 음식을 받쳐 들고 온 것을 본 현신은 다시금 미안함이 밀려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런 곳에 거주할 정도의 거물이, 대체 자신 같은 게 뭐라고 이토록 살뜰히 챙겨주는 것인지. 스무 살이 넘은 성인 여자이면서 소년 행세를 하고, 보육원 원장이면서 집 없는 천사 노릇을 하는 거짓말쟁이. 현신은 면목이 없어 고개를 떨구며 그의 집요한 시선을 피했다.현신은 바닥이 아닌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언젠가 자신도 땅이 아닌 저 하늘을 보며 진심으로 웃을 날이 오기는 할까. 평범함이라는 이름의 축복은 자신에게만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아, 노을 녘의 하늘이 유독 눈부시게 시렸다.태양은 이제 뉘엿뉘엿 불타오르던 기세는 꺾여 있었다. 거실 전체가 둥글게 디자인된 덕에 일출의 동쪽과 낙조의 서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경이로운 펜트하우스. 현신은 이미 빛을 잃고 어둠이 스며드는 동쪽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아름다움은 짧고······ 어둠은 길지······.’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을 지켜주는 계영에게 끝내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현신은 그저 희미하게 스러져가는 서쪽 하늘만을 눈에 담았다.***주효진은 오늘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다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충격적일 만큼 잘생긴 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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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콤함]

가계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녀석을 살뜰하게 돌봤다.“바닥은 차갑지 않아?”“절절 끓어요, 계영 님. 방석까지 주셔서 제 엉덩이가 아주 호사를 누리고 있네요.”“풋.”이 집에서 단 한 번도 거실 바닥에 앉아본 적 없던 집주인 계영은, 생경하게도 처음으로 제 집이 아늑하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창밖 풍경을 가까이서 보겠다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녀석을 위해, 대리석 바닥이 오늘따라 유독 싸늘하게 느껴져 방석을 깔아주고 난방 온도까지 높였다.“난방비 많이 나오겠어요. 이 넓은 곳을······.”남의 지갑 사정까지 걱정하는 그 말에 계영은 실소가 터져 절로 와인잔에 입술이 닿았다.“별걱정을 다 하는군.”“참, 유럽에서는 열여섯 살부터 와인을 마신다고 하던데요.”“유럽은 무슨.”계영은 감히 미성년자 주제에 술을 입에 대겠다고 설쳐대는 녀석을 단단히 혼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독한 술을 한 모금 먹여 놓으면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흐트러질지 궁금해하는 제 자신이 미친 것 같아 머리라도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더 크면 줄게.”계영의 말에 놀란 듯 녀석은 잠시 의아해하더니, 이내 해사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진짜요? 나중에도 저를 이렇게 돌봐주시게요? 우와, 감동이네요. 저 나중에 크면 꼭 다시 놀러 올게요.”기분 탓일까. 녀석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이채가 돌며 묘한 물기가 머금어진 것 같았다. 그 약속이 그렇게나 좋은 걸까.“그래. 술은 내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원래 어른한테 배워야 하는 법이니까.”“······이런, 감동이네요.”확실히 녀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울컥했는지 고개를 떨군 채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연신 깨무는 아랫입술이 녀석의 위태로운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없는 놈들이 나쁘다는 편견은 버려야겠군. 저리 말갛고 곱게 생긴 데다 서류도 잘 살피고 영어도 읽을 줄 알다니. 환경만 좋았으면 정말 잘 컸을 텐데······.’보면 볼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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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잠을 잊은 열기에 물든 그대에게]

얼마나 힘이 좋은지.팔이 안정감 있게 제 허리를 잡아주어, 현신은 몸을 축 늘어뜨려도 편안함을 느꼈다. 얼떨결에 가계영의 품에 안긴 현신은 술기운이 돌아 그런가, 얼굴에 뜨거운 열이 올랐다. 게다가 심장과 심장이 맞닿아 서로의 심박수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니, 더욱 푸근하고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계영을 끌어안게 되었다.‘계영 님, 향기가 좋네.’비싼 향수를 쓰는 걸까, 아니면 이 남자 자체가 원래 이런 시원한 향을 풍기는 걸까. 현신은 그가 주는 이 묘한 감각에 취해 그를 뿌리치지 못한 채 가만히 안겨 있었다.사람의 온기와 온기가 만나면 이렇게나 포근하다니. 현신에게 이런 안온함은 지독히도 낯선 것이었다. 제 것이 아닌 것만 같고, 지금도 온통 거짓투성이라 그에게 뭐라도 들킬까 봐 불안하기만 했다.하지만 현신의 본능은 계영이 고맙고 좋은 데다, 지금 이 밀착된 느낌이 너무나도 달콤해 밤새도록 이러고만 싶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아슬아슬하게 심장이 간지럽기까지 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슴 한편이 양심이라는 칼날로 심장을 도려내듯 찔러대는 것이 느껴졌다.현신은 이윽고 한계에 이르러 말문을 열고야 말았다.“계영 님.”“······왜.”현신은 술기운을 빌려 큰 결심을 하고 고백했다.“저는······ 나쁜 사람입니다.”현신은 다 털어놓고 싶었다. 이리 좋은 사람에게 거짓말 대신 진실만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순간, 가계영의 몸이 흠칫하며 경직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현신의 몸을 떼어놓았다. 이내 현신도 차분하게 이성을 되찾으며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알았어. 너 못된 짓 한 거 반성하니까 용서해주지.”잠시 가계영의 근엄한 설교가 이어졌다. 지금 뭐라는 건지. 현신은 그제야 그가 자신이 와인을 몰래 마셔서 반성한다는 의미로 말했다고 판단했음을 깨달았다.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 자신이 여자라는 것도, 불탄 보육원 땅의 주인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기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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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거짓말처럼 마음에 닿은 온기]

다음 날이 밝았다.현신은 여기가 어디인지 가늠하려는 듯, 수 초간 눈을 껌뻑이며 천장을 응시했다. 푹신하고 개운한 잠자리 덕에 누적된 피로는 씻은 듯 사라졌으나, 어제 있었던 일들을 차례로 떠올리던 그는 비명 섞인 신음과 함께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미쳤어, 정말!’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방문 앞에는 가계영이 편안한 면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서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선 숨길 수 없는 귀족적인 기품이 흘러나왔다.“일어났어?”“아······ 계영 님?”현신을 바라보는 가계영의 안색이 미묘했다. 팔짱을 낀 채 굳게 다문 입술과 단호한 기운이 서린 눈빛. 그 서늘한 기운에서 현신은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신, 어제 일, 혹시 기억나나?”“헉! ······네?”“기억 안 나는 모양이군.”현신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당황함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미쳤지!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에게 그런 더러운 기억을 심어주다니! 얼마나 꼴 보기 싫을까. 어서 나가야 해!’아마도 그의 볼에 입을 맞춘 것이 불쾌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확신한 현신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에프로부터 구해주고, 극상의 음식에 편안한 안식처까지 내어준 은인에게 그런 무례를 범하다니. 현신은 밀려오는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였다.“저기······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부끄러움에 말을 쏟아낸 현신은 욕실로 들어가 후다닥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가방까지 챙겨 메고 도망치듯 집을 나서려던 순간, 가계영의 커다란 손이 현신의 팔목을 덥석 낚아챘다. 단단한 악력에 손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어디?”“저기, 오늘······ 어디 보자. 어제가 3월 말이었으니 오늘이 4월 1일이라······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요!”가계영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건조하게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는 어제의 온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그래? 밥 먹고 가.”“네?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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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만우절이 남긴 신기루]

[시온······. 너를 구했어야 했는데······ 미안, 무휼아······ 시온 좀······ 잘 부탁해.][당신은 좋은······ 사람. 나는 나쁜······ 사람. 나는 거짓말쟁이······.][······오지 마세요. 날 찾지 마세요. 말 안 해서······ 미안합니다······.]연신 사과만 뱉어내는 녀석.녀석은 간밤에 지독한 악몽에 짓눌린 채 괴로워했다. 계영이 곁으로 다가가 이름을 불러도 깨지 못할 만큼 깊은 늪에 빠진 듯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흐느낌은 계영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도대체 무엇이 녀석을 이토록 옥죄고 있는 건지, 베일에 싸인 녀석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고 싶다는 지독한 충동이 일었다.화면 속 녀석은 결국 집을 말끔히 치워놓고,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건넨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계영의 가슴 속에서 정체 모를 미묘한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마 실장을 호출했다.“마 실장, 녀석에게 사람 붙여.”그냥 둘 수는 없었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인지, 어디로 향해 누구를 만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계영의 머릿속은 온통 그 조그만 녀석으로 가득 들어차,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직접 보고하라고 해.”“송화를 붙이겠습니다.”길 고양이 같은 녀석을 거두어 돌봐주고, 심지어 제 볼에 입술을 맞추는 해괴한 짓까지 허용해 버리다니. 타인의 몸이 닿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던 결벽증 환자인 자신이, 홀린 듯 녀석의 손을 잡고 뺨을 어루만졌던 순간들이 떠올랐다.‘한심하기 짝이 없군.’오늘 계영은 이 녀석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내고, 이 찜찜한 감정의 연결고리를 단호히 끊어내고 싶었다. 차라리 녀석의 실체가 실망스러워 이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길 바랐다.***계영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고도로 훈련된 그의 부하 송화가 현신의 미행을 시작했다. -송화입니다. 타깃이 지금 은행에 진입했습니다.-타깃이 옆 가게로 이동했습니다. 아무것도 구매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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