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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날 매도해줘: Chapter 1 - Chapter 10

12 Chapters

제1장

어른이 된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서른 살이 되면,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을 거라고. 그게 보통의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스물아홉 살이다. 도쿄 외곽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평범하다.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매일 아침 8시 전철에 몸을 실어 출근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은 커녕, 연애조차 없다. 아니, 그보다도—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한숨부터 나오는 삶에 익숙해진 내가 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여자친구가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가 슬슬 결혼 준비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꺼냈는데, 그녀의 대답은 계획 밖이었다. "넌... 뭔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이프로 접시 위의 음식을 천천히 잘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는 한참 동안 앉은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말. 잠시 뜸을 들이다 완전히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로 내뱉었다. "그럴지도..." “그래서… 나도 더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그녀는 끝까지 내 눈을 보지 않았다. 접시 위의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른의 시간이라는 건 원래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 시절까지는 달랐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학년이 올라갔다. 주어진 공부를 하고, 과제를 하고, 그 나이대에 맞는 과정을 밟아가며 마치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대학 시절까지는 튜토리얼이다. 그 이후부터가 본편이다. ...어쩌면 나는, 그 게임에 적성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현관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이 집에는 나 혼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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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회사에 출근해서도 주식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뤄둔 채, 나는 아무 의미도 없이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분명 업무용 메일을 읽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어제 봤던 차트가 계속 떠올랐다.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을 올려놓고, 간단한 업무부터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파일을 열고, 숫자를 정리한다. 익숙한 작업이었다. 몸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다시 읽고 나서야, 내가 방금 무슨 내용을 처리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그러던 중, 문득 시야 한쪽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었다. 별 생각 없이 따라간 시선 끝에는, 어제의 그 신입 사원 아마네 씨가 있었다.외형은 분명 단정했지만,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있었다. 옅은 화장 속에 가려져 있어 멀리서 보면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피부는 지나치게 창백했고 눈 밑에는 희미하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건조한 느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눈빛만은 또렷했다. 피로와 각성이 동시에 남아 있는 듯한, 모순된 표정이었다.머리는 어제처럼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고, 회색 정장은 몸에 맞게 단정하게 떨어졌다. 구김 하나 없는 셔츠와 가지런히 정돈된 소매 끝까지, 어디 하나 흐트러진 곳은 없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아마네 씨.” 옆자리 직원이 가볍게 그녀를 불렀다.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 길다고 하기에는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럽다고 보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네.”한 박자 늦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정확히 상대를 향하기까지 또 한 번의 미묘한 지연이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이거 자료, 오전 회의 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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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전철에 올라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밖 풍경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도쿄에 도착해 있었다.사람들 틈에 섞여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발걸음들. 누구 하나 멈추지 않고, 누구 하나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했는데. 시야 한쪽에, 낯익은 머리색이 스쳤다. 밝은 갈색. 어깨를 넘는 길이의 웨이브 머리.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마네 씨였다.어제와 같은 정장. 같은 표정.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서 있었다. 그저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선을 돌리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멈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그녀를 봤다.…이상하다. 분명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서 있는데,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다. 시선이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 셔츠 단추가 하나, 살짝 어긋나 있었다. 아주 사소한 차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정도의 어긋남.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그 순간, 전철이 도착했다.밀려 들어가듯 사람들 사이에 끼여 올라탔다. 몸이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밀려 들어간다. 숨 쉴 공간도 없이,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그리고— 바로 앞에, 그녀가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선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리며 목선을 가리고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나는 괜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볼 필요도 없는 광고판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골랐다. 그런데도—의식이,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전철이 흔들렸다. 사람들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순간, 그녀의 어깨가 아주 잠깐— 내 팔에 닿았다.…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저, 스친 것뿐이다. 그런데도—이상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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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카페는 회사에서 몇 분 떨어진, 평범한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보는 자리. 주문은 간단했다. 나는 아메리카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같은 걸 골랐다. 커피가 나오기까지, 대화는 없었다. 시선을 둘 곳이 애매했다. 창밖을 보다가, 테이블을 보다가, 결국 다시 그녀를 보게 된다. 아마네 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자주 오세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짧은 대답.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조용해졌다. 커피가 나왔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나는 아무 의미 없이 컵을 들어 올렸다. “…손해 보고 있죠.” 손이 멈췄다. 그녀는 커피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뭐가요.” 괜히 물었다. “어제 산 거요.” 시선을 피했다.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조금.”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계속 들고 갈 거예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아마도요.” 그렇게 답했다. 그녀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럼 더 손해 보겠네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럼, 팔아야 하나요.” 반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그녀는 이번엔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짧고 단정적인 부정. “지금 팔면, 제일 손해예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조금 안심이 됐다. 왜일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그럼 언제요.”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컵을 손에 들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알려드릴게요.” 그 말은 너무 가볍게 나왔다. 나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처음으로, 아주 조금 웃었다. “대가를 받아야겠죠.”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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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나는 손을 그대로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이미 괜찮은 걸로 정해진 것처럼. 아마네 씨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닿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언제든 다시 닿을 수 있는 거리.“기억하고 계세요?” 갑자기 물었다.나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뭐를…”말을 흐리자, 그녀는 아주 조금 눈을 좁혔다.“대가요.” 짧게 말했다.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잠깐 멈췄다. 카페에서의 대화가,그대로 떠올랐다.“손해는 안 보게 해드릴게요.”나는 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네.”짧게 대답했다. 아마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조금 더 해볼게요.”그 말은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멈춰야 하는데. 거절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아마네 씨는 잠깐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이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고,“고개 들어 보세요.”짧게 말했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대로 따랐다.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가까웠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인데— 이상하게,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네 씨는 한 발 더 다가왔다."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까요?"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거부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네.”짧게 대답했다. 그 순간— 아마네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생각보다 잘 따르시네요."낮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남았다. 칭찬 같은 건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금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아, 그리고 하나 더..." 아마네 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제부터는 저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셔야 해요."…순간, 말이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방금 들은 게 맞는 건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주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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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눈을 떴을 때 여기가 어디인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천장. 익숙한 색인데,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몇 초쯤 지나서야 여기가 내 집이라는 걸 깨달았다.…언제 들어왔지. 기억이 끊겨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 사이가, 이상하게 비어 있었다. 몸을 조금 움직였다. 이불이 스쳤다. 그 순간, 아주 미묘하게— 어젯밤의 감각이 떠올랐다. 목 언저리.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렸다가, 바로 멈췄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건데— 조금 허전하게 느껴졌다.몸을 일으켰다. 시계는 평소와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어딘가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생각은 계속 어제에 머물러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현관을 나섰다. 문을 잠그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옆집. 문은 닫혀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나는 잠깐 그 앞에 서 있었다. 벨을 누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지나가기에는, 조금 애매했다.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출근길은 평소와 똑같았다. 전철도, 사람도, 전부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안에 서 있는 내가 어제와 같다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소랑 똑같은 풍경이었다. 사람들, 자리, 모니터 불빛. 인사 몇 마디가 오갔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켰다. 화면이 켜지고, 익숙한 작업 창이 올라왔다. 손은 자연스럽게 움직였지만— 머리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어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목에 닿던 감각. 낮은 목소리. 나는 괜히 키보드를 한 번 더 두드렸다. 아무 의미 없는 입력이 화면에 찍혔다가, 다시 지워졌다. 그때—“키리시마 씨.”몸이 먼저 반응했다. 고개를 들었다. 아마네가 서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 회색 정장, 단정한 셔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네.”대답이 조금 늦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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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이제 도망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선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피해야 할 것 같은데, 피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네의 손이, 어깨를 잡은 채로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거리가 더 좁아졌다. 숨이 닿을 것 같은 거리. 나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셔츠.” 낮은 목소리가 다시 떨어졌다.나는 아무 말 없이, 이미 풀어놓은 단추 사이로 천천히 옷을 벗어 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 그 순간— 시선이, 더 직접적으로 닿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조금 더 얕아졌다.아마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짧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따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이 바닥을 스쳤다. 거리가—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손이 다시 움직였다. 어깨에 닿았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턱 끝에 닿았다. 가볍게 고개를 더 들어 올렸다. 시선이 완전히 맞닿았다. 숨이, 더 이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았다.“이제…”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스쳤다.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도망칠 생각도, 멈출 생각도— 전혀 들지 않은 채로.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에, 손이 턱을 잡은 채로 멈췄다. 아주 짧은 정적. 시선이 맞닿은 상태에서, 숨만 가까워졌다.입술이 닿았다. 갑작스러웠지만 놀랄 틈은 없었다.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주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숨이 어중간하게 끊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시선이 맞닿았다. 그 다음—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다가왔다.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숨이 섞였다. 잠깐, 다시 멈췄다. 일부러 끊은 것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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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커서는 화면 위를 천천히 떠돌다가,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멈췄다. 손은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아무 이유 없이— 시선이 아주 미묘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책상 밑. 아무 것도 없는 공간. 그런데도, 그걸 보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잠깐 그대로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괜히 주변을 한 번 훑었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금 전의 그 자세를,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일을 하나 열었다. 제목을 읽고, 내용을 훑고, 답장을 쓰기 위해 커서를 옮겼다. 익숙한 순서였다. 손은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문장을 완성하고, 엔터를 눌렀다. 그런데— 보내고 나서야, 내가 방금 무슨 내용을 썼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화면을 다시 열어봤다. 분명히 내가 쓴 문장이었는데, 어딘가 남의 글처럼 느껴졌다. 손을 떼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 사이에, 전혀 다른 감각이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닿아 있지 않은 목 언저리. 그런데도, 어제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아주 조금 낮췄다. 누가 보지 않는 자리에서, 이유도 없이 자세를 고치는 것처럼. 그게 더 편하다고 느껴졌다. …왜지.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그 순간— “키리시마 씨.”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마치— 방금 전까지의 자세를, 들키면 안 되는 것처럼. 뒤돌아봤다. 동료가 서 있었다. 별다른 표정은 아니었는데— 시선이 잠깐, 내 얼굴을 스쳤다가 내려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선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남았다. “…아, 네.”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동료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요, 아까 부탁드린 거… 확인해주셨나요?” 나는 그걸 받아들었다.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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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갔다. 도망칠 수 있는 거리였다. 한 발만 물러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아마네는 잠깐 나를 내려다봤다. 무언가를 재는 것처럼.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손에 들린 채찍을 한 번 들어 올렸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들어와.”낮게, 단정적으로 말했다.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한 발을 내디뎠다.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구조는 어제와 같았다. 좁은 현관, 이어지는 거실, 같은 위치의 소파와 테이블. 그런데도, 같은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조명이 조금 더 어두웠다. 커튼은 완전히 닫혀 있었고, 바깥의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한쪽 벽에만,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빛이 바닥을 길게 끌고 가면서, 공간을 더 좁게 만드는 것 같았다.소리도 달랐다. 어제는 조용하다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아무 소리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는 소리조차 신경 쓰일 정도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한 번 울리고 나서, 그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움직여야 하는지,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미묘하게, 어깨가 내려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어제랑, 다르다.짧게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아마네는 문을 닫은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시선이,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얼굴, 목, 어깨— 그리고 다시 눈으로 돌아왔다. 마치 어디까지 변했는지, 하나씩 확인하는 것처럼.“생각보다 빨리 왔네.”낮게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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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분명 익숙한 차트였다. 수없이 열어봤던 종목, 수없이 반복해서 봤던 흐름. 그런데—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선은 그대로였다. 오르고, 내려가고, 다시 이어지는 선. 예전이라면 그 안에서 나름의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타이밍을 재고, 이유를 붙이고, 확신 없는 확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커서가 멈춰 있었다. 마우스를 쥐고 있었는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지점을 눌러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감이 없는 게 아니라, 내 기준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마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서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그런데도— 그 존재감이, 화면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나는 아주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릴까 고민했다.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 그런데—“…보지 마.”나는 그대로 멈췄다. 고개가 아주 미묘하게 돌아가려던 순간, 그대로 고정됐다. 시선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왔다.“스스로 봐.” 짧게 덧붙였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게 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화면은 그대로인데— 의미가 지워진 것처럼.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차트를 봤다. 선이 있었다. 숫자가 있었다.…모르겠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마네는 그걸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깐의 정적. 그리고—“여기.”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화면 한쪽을 가리켰다. 아주 짧은 동작이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 지점을 봤다. 아무 특징도 없는 구간이었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은— 애매한 위치.“…지금이야.” 낮게 말했다.나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 커서를 움직였다. 매수 버튼 위에 올렸다. 멈췄다. 이유는 없었다. 근거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눌러도 되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망설이지 마.”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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