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사에 출근해서도 주식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뤄둔 채, 나는 아무 의미도 없이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분명 업무용 메일을 읽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어제 봤던 차트가 계속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을 올려놓고, 간단한 업무부터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파일을 열고, 숫자를 정리한다. 익숙한 작업이었다. 몸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다시 읽고 나서야, 내가 방금 무슨 내용을 처리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던 중, 문득 시야 한쪽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었다. 별 생각 없이 따라간 시선 끝에는, 어제의 그 신입 사원 아마네 씨가 있었다. 외형은 분명 단정했지만,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있었다. 옅은 화장 속에 가려져 있어 멀리서 보면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피부는 지나치게 창백했고 눈 밑에는 희미하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건조한 느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눈빛만은 또렷했다. 피로와 각성이 동시에 남아 있는 듯한, 모순된 표정이었다. 머리는 어제처럼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고, 회색 정장은 몸에 맞게 단정하게 떨어졌다. 구김 하나 없는 셔츠와 가지런히 정돈된 소매 끝까지, 어디 하나 흐트러진 곳은 없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아마네 씨.” 옆자리 직원이 가볍게 그녀를 불렀다.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 길다고 하기에는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럽다고 보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네.” 한 박자 늦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정확히 상대를 향하기까지 또 한 번의 미묘한 지연이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이거 자료, 오전 회의 전에 한 번만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직원이 건넨 서류를 그녀는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손을 뻗기까지, 또 짧은 공백이 있었다. 그 사이에 직원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네.” 이번에도 같은 타이밍이었다. 느리지만, 이상할 정도로 일정한 간격. 나는 그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괜히 시선을 떼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해야 할 일은 쌓여 있었다. 방금까지 손을 멈추고 있던 게 떠올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나서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흐릿해졌다. 커서를 움직이다가 멈췄다. 화면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무실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여기저기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나고, 삼삼오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무리가 나뉘었다. 늘 같이 다니는 사람들끼리, 아무렇지 않게. “오늘 뭐 먹으러 갈래?” “근처에 새로 생긴 데 있다던데.”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괜히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였다. 시야 한쪽에,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마네 씨였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네 씨, 식사 안 하세요?”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잠시 멈춰 있었다. “…괜찮아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 말 한마디로 끝이라는 듯,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말을 건 사람은 잠깐 서 있다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럼 먼저 다녀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뒤로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아무 이유 없이 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같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딱히 어울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금방 조용해졌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키보드 소리만이 남았다. 나는 괜히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 뭔가 하고 있는 척을 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흘렀다. 아마네 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자세였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뭔가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화면은 켜져 있었지만, 시선은 그 위에 제대로 닿아 있지 않았다. 초점이 어딘가 흐릿하게 어긋나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때였다. 그녀의 손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을 잡았다.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는다. 그 동작이,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나는 이유도 없이 그걸 끝까지 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괜히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아무 의미도 없이 화면을 넘기고,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해야 할 일은 분명 있었지만, 손이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자꾸만 의식이 옆으로 흘렀다.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사무실에 사람이 없는 건 처음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묘하게, 공기가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신경 쓰일 정도로.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아니, 있었다. 손목. 소매 끝이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일부러 올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밀려 올라간 정도였다. 그 사이로, 희미한 선이 보였다. 한 줄이 아니었다. 겹쳐 있었다. 나는 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녀는 다시 컵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시선을 돌렸다. 괜히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면 안 되는 걸 본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퇴근 이후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무도 없는 공간이 맞아줬다. 불을 켜지 않은 채, 그대로 신발을 벗었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곧장 책상 앞으로 향했다. 익숙한 동선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증권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화면이 뜨기까지의 짧은 시간.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게 길게 느껴졌다. 차트가 나타났다.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선이 오르고 내리는 걸 보고 있는데도,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겹쳐진 선들. 손목. 나는 무의식적으로 마우스를 멈췄다. 잠깐, 숨을 고른다. 다시 화면을 본다. 선이 보인다. 숫자가 보인다. 그래야 하는데— 자꾸만 다른 선이 떠올랐다. 일정하지도, 정리되어 있지도 않은, 아무렇게나 겹쳐진 선들.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 괜히 차트를 확대했다. 의미는 없었다. 더 자세히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커서를 움직여 매수 버튼 위에 올렸다. 멈췄다. 오늘은 이미 샀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손가락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클릭했다. ‘주문 완료’라는 문구가 화면에 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에 남아 있는 감각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단순히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몸 어딘가가 자극된 것처럼 남아 있었다. …왜지. 이 정도 금액이다. 잃어도 큰일 날 건 없다.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방금 전의 감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괜히 손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문득, 낮에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잠깐 멈췄다. 왜 이게 같이 떠오르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트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그런데도. 묘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떴다. 천장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이었다. 그런데도, 머릿속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누웠다. 불은 여전히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희미한 빛이 방 안을 어둡게 비추고 있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이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눈을 감는 순간 다시 떠오를 것 같았다. 겹쳐진 선들. 나는 결국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에 앉는다. 컴퓨터 화면은 아직 켜져 있었다. 마우스를 움직였다. 차트를 다시 열었다. 이미 끝난 장인데도. 그걸, 또 보고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불을 켜지 않은 채였지만, 컴퓨터 화면에서 새어나오는 빛만으로도 충분했다. 희미한 파란빛이 책상과 벽을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차트는 그대로였다. 이미 멈춰 있는 선. 오늘 하루 동안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변할 일도 없고, 지금 와서 의미를 찾을 이유도 없는 것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계속 보고 있었다. 눈을 떼지 못했다. 손을 뻗으면 마우스를 움직일 수 있었고, 창을 닫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시선만. 고정된 채로. 그때, 문득.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낮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네 미호. 고개를 들던 순간. 그리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차트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왜 그런 게 떠오르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화면을 봤다. 선이 있었다. 규칙적으로 이어진 선. 오르고, 내려가고, 다시 이어지는 선. 그 위에 겹쳐졌다. 끊겨 있는 선. 정리되지 않은 선. 방향도 없이 겹쳐진 선.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화면을 더 가까이 들여다봤다. 마치, 거기서 뭔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끝내, 화면을 끄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사무실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컴퓨터 전원이 하나둘 켜지는 소리, 프린터가 종이를 뱉어 내는 소리, 커피 향이 희미하게 퍼지는 공기. 나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 그런데 이상했다. 시선이 자꾸 한곳으로 향했다. 사무실 창가 쪽. 아마네는 이미 출근해 있었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메일을 확인하고, 전화벨이 울리자 짧게 응대한 뒤,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특별한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와도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어젯밤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말 안 했네.'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평범한 회사원의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같은 사람 맞지. 혼잣말처럼 생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조용한 직원. 퇴근 후에는 나를 무릎 꿇리고 차트를 가르치는 사람. 그 두 모습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괜히 모니터를 켰다. 업무를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의식은 계속 사무실 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고개를 숙였다. 모니터에 떠 있는 메일 목록을 하나씩 훑었지만, 내용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은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전혀 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주임님." "네." "오전 회의 자료, 다 준비됐습니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뒤 서류를 받아 들었다. 평소라면 바로 내용을 확인했을 텐데, 이번에는 한 박자 늦었다. 상대가 돌아선 뒤에야 나는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그때였다. 복사기 쪽에서 남직원 둘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또 사장님 오셨더라." "
“차트.” 짧은 한마디가 떨어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부터 떠 있던 그래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은 움직이지 않았고, 숫자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전까지 보던 화면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는 종이에 숫자를 적고, 소리 내어 읽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같은 차트인데도 낯설었다. 아마네는 내 옆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촉도 없었다. 설명도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길게 느껴졌다. 나는 마우스를 천천히 움직였다. 커서가 화면 위를 가로질렀다. 이전에 매수했던 자리, 그리고 매도하기로 했던 구간.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 보려니 다시 확신이 흐려졌다.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먼저 말이 나왔다. 순간 방 안이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아마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틀렸다고 할까. 다시 보라고 할까. 머릿속으로 몇 가지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래.” 낮은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건, 틀린 것보다 나아.” 나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주식에서 제일 위험한 건… 모르는 걸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니까.” 그 말이 떨어진 뒤에도 그녀는 차트를 가리키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내 옆에 서서, 내가 다시 화면을 바라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차트를 바라봤다. 조금 전보다 더 오래, 더 천천히. 선 하나를 따라가고, 다시 되짚었다. 오르던 흐름이 멈춘 자리. 거래량이 붙었다가 사라진 구간. 예전 같았으면 거기서부터 하나씩 이유를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려고 할수록 오히려 생각이 흐려졌다. "...왜."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말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마네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시선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시계가 더 자주 눈에 들어왔다. 일을 하고는 있었는데—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파일을 열고, 숫자를 정리하고. 전부 익숙한 작업이었는데,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줄을 읽었는지, 방금 뭘 처리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시선이 다시 한 번 시계로 향했다.…아직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늦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자세를 한 번 고쳐 앉았다. 손이 허벅지 위에 잠깐 올라갔다가, 다시 키보드로 내려왔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 박자 늦게 스스로 인식했다.집중해야 한다. 짧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다른 게 먼저 떠올랐다. 현관. 문. 그리고— 나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오늘도.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시선을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키보드를 한 번 더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봤다.초침이 한 칸 움직였다. 그 짧은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의식은 전부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앞으로 밀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멈췄다.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던 손가락이 그대로 굳었다. 한 글자도 더 입력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지금 당장 일어나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마우스를 놓았다. 손이 키보드에서 떨어졌다. 의자가 아주 작게 뒤로 밀렸다. 나는 그걸 인식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잠깐…”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짧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누군가 힐끗 쳐다본 것 같았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몇 시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먼저 깨어 있었다. 천장을 한 번 보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대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시간이 된 것처럼.나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정리하고, 발을 바닥에 내렸다. 차가운 감각이 잠깐 스쳤다가, 금방 사라졌다.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잠깐, 시선이 멈췄다.…이상하지 않았다. 어딘가 바뀐 것 같은데— 정확히 뭐가 다른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물을 받아 얼굴을 씻었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 다시 거울을 봤다. 아무 일도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걸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옷을 꺼내 입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씩 채우는 동작이, 생각보다 일정했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디까지 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넥타이를 들었다가 잠깐 멈췄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선택이었다. 굳이 맬 필요도 없었고, 어울리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나는 아무 말 없이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매는 과정이 어딘가 어색했는데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매듭을 정리하고, 옷깃을 한 번 더 다듬었다. 거울 속의 내가, 아까보다 조금 더 정돈되어 보였다. 나는 그걸 한 번 확인하고—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는 묻지 않았다.전철 안은 평소처럼 붐볐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선 채로, 손잡이를 잡고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숨이 완전히 막히는 건 아니었지만— 편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어깨가 부딪히고, 팔이 스치고, 체온이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이유는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려던 것도 아니고, 누가 연락을 했는지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손이 먼저 움직였다. 폴더를 열고, 증권 메뉴를 눌렀다. 작은 화면이 켜졌
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분명 익숙한 차트였다. 수없이 열어봤던 종목, 수없이 반복해서 봤던 흐름. 그런데—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선은 그대로였다. 오르고, 내려가고, 다시 이어지는 선. 예전이라면 그 안에서 나름의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타이밍을 재고, 이유를 붙이고, 확신 없는 확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커서가 멈춰 있었다. 마우스를 쥐고 있었는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지점을 눌러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감이 없는 게 아니라, 내 기준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마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서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그런데도— 그 존재감이, 화면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나는 아주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릴까 고민했다.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 그런데—“…보지 마.”나는 그대로 멈췄다. 고개가 아주 미묘하게 돌아가려던 순간, 그대로 고정됐다. 시선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왔다.“스스로 봐.” 짧게 덧붙였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게 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화면은 그대로인데— 의미가 지워진 것처럼.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차트를 봤다. 선이 있었다. 숫자가 있었다.…모르겠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마네는 그걸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깐의 정적. 그리고—“여기.”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화면 한쪽을 가리켰다. 아주 짧은 동작이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 지점을 봤다. 아무 특징도 없는 구간이었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은— 애매한 위치.“…지금이야.” 낮게 말했다.나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 커서를 움직였다. 매수 버튼 위에 올렸다. 멈췄다. 이유는 없었다. 근거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눌러도 되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망설이지 마.”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갔다. 도망칠 수 있는 거리였다. 한 발만 물러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아마네는 잠깐 나를 내려다봤다. 무언가를 재는 것처럼.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손에 들린 채찍을 한 번 들어 올렸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들어와.”낮게, 단정적으로 말했다.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한 발을 내디뎠다.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구조는 어제와 같았다. 좁은 현관, 이어지는 거실, 같은 위치의 소파와 테이블. 그런데도, 같은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조명이 조금 더 어두웠다. 커튼은 완전히 닫혀 있었고, 바깥의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한쪽 벽에만,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빛이 바닥을 길게 끌고 가면서, 공간을 더 좁게 만드는 것 같았다.소리도 달랐다. 어제는 조용하다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아무 소리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는 소리조차 신경 쓰일 정도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한 번 울리고 나서, 그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움직여야 하는지,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미묘하게, 어깨가 내려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어제랑, 다르다.짧게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아마네는 문을 닫은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시선이,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얼굴, 목, 어깨— 그리고 다시 눈으로 돌아왔다. 마치 어디까지 변했는지, 하나씩 확인하는 것처럼.“생각보다 빨리 왔네.”낮게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나는 손을 그대로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이미 괜찮은 걸로 정해진 것처럼. 아마네 씨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닿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언제든 다시 닿을 수 있는 거리.“기억하고 계세요?” 갑자기 물었다.나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뭐를…”말을 흐리자, 그녀는 아주 조금 눈을 좁혔다.“대가요.” 짧게 말했다.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잠깐 멈췄다. 카페에서의 대화가,그대로 떠올랐다.“손해는 안 보게 해드릴게요.”나는 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네.”짧게
카페는 회사에서 몇 분 떨어진, 평범한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보는 자리. 주문은 간단했다. 나는 아메리카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같은 걸 골랐다. 커피가 나오기까지, 대화는 없었다. 시선을 둘 곳이 애매했다. 창밖을 보다가, 테이블을 보다가, 결국 다시 그녀를 보게 된다. 아마네 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자주 오세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짧은 대답.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조용해졌다. 커피가 나
전철에 올라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밖 풍경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도쿄에 도착해 있었다.사람들 틈에 섞여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발걸음들. 누구 하나 멈추지 않고, 누구 하나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했는데. 시야 한쪽에, 낯익은 머리색이 스쳤다. 밝은 갈색. 어깨를 넘는 길이의 웨이브 머리.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마네 씨였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서른 살이 되면,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을 거라고. 그게 보통의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스물아홉 살이다. 도쿄 외곽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평범하다.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매일 아침 8시 전철에 몸을 실어 출근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은 커녕, 연애조차 없다. 아니, 그보다도—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한숨부터 나오는 삶에 익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