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261 - Chapter 270

284 Chapters

#260. 사악한 기운이 가득한 곳에 그녀가 있다니

본래 마리는 할 로드와 마찬가지로 캔돔가에 버려진 소녀였다.대공가에서 할 로드를 가만히 바라보며 소소하고 소박한 미래만을 꿈꾸며 살아왔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할 로드를 위해 엄청난 범죄도 저질러 버려 이젠 벼랑 끝에 서 있었다.그때, 같이 대공가에서 얼굴을 봐 오다 여기 함께 온 제크가 마리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마리, 대공가가 쳐들어올거야.”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마리가 제크를 돌아보았다. “제크 경. 설마 대공비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데, 바아르 각하께서 여기를 다 쓸어 버릴 리는 없잖아요?” “만약 여기서 잠들기라도 한다면 너와 나는 그대로 끝장이라고.”마리는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절대 함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금기의 장소, 최하층 지하 문 앞에 서서 제크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제크 경. 세실리에 님이 곧 오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 “······하긴.”깊게 심호흡을 마친 두 사람은 마침내 도르하르 제국민에게 축복이자 금기인 그곳의 웅장한 문을 열어젖혔다. *** 숨을 쉬기조차 힘들 만큼 무겁고 진득한 공기가 밀려오자, 마리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마리는 지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량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일반인이라면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이성을 잃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 장소였기에, 제크가 그토록 공포에 질려 떨었던 까닭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그녀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마나를 끌어 올려 세실리에를 이곳에 강제 소환해 냈다.그 순간, 은빛 마력의 기운을 풍기며 마리의 주변으로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세실리에는 황당한 표정을 하고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세실리에 님. 오셨습니까.”제크는 세실리에를 향해 깍듯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그러나 세실리에는 제크의 인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마리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한 손이 허공을 가로질렀다.찰싹! 찰싹!“읍!”거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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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위기, 괴물이 움직이다

세실리에는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아무리 추적해도 대공비를 찾아낼 수조차 없었는데, 이렇게 제 발로 데려오기까지 했으니.인정하기는 싫지만, 마리는 이제 자신을 상회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냈고, 도르하르에 큰 보탬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제가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는데요? 이제 와서 뭘 숨기겠어요? 오히려 제 속을 다 갈라 보여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전 할 로드 전하에게만큼은 진심이니까요.”세실리에의 떨림은 온몸으로 전이되어,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 그래, 맞아. 할 로드에게는 진심이지.”그래서 걱정이었다. 이 위험한 아이를 할 로드 곁에 놔둬도 되는 걸까.세실리에는 마리를 살려 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만큼, 이제 그녀가 감당되지 않아 견딜 수가 없었다.도르하르 황궁 지하에서 마력을 순간순간 한계까지 흡수하면서 현재의 마리가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할 로드를 좋아하는 그 마음은 이용해 먹기 딱 좋긴 하지만.‘도르하르 제국의 억울함만 풀고 나면 반드시 마리부터 처단할 거야!’마리는 광기에 휩싸여 있고, 그 능력 또한 미쳐 날뛰어 괴물이 되어 있었다.이래서 인간은 짐승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뼈아프게 느끼게 되었다.“휴, 그래. 네가 우리를 그리 핍박하던 황제도 죽이고······ 대공비도 잡아 온 건 대단한 일이야. 인정할 건 해야지.”떨리는 목소리로 세실리에는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그래도 대공비 라이신이 있다니.황제보다 훨씬 안전하고 할 로드를 절대 해치지 않을 최고의 인질, 라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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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내가 지금 미칠 지경이야

키요리타 산맥을 감싸 안은 도르하르의 오랜 결계마저 대지의 경련 앞에 미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바아르는 척수를 타고 올라오는 불길한 오한에 이를 악물었다.이 거대한 산맥이 화산의 포효와 함께 폭주한다면, 자신과 군사들은 물론 결계 안의 도르하르 제국민,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 있을 라이신까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핏빛 용암이 산맥을 타고 흘러내리면 인근 레투니카 지대 전체가 잿더미로 변할 터였다.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한, 그야말로 재앙이었다.“바아르! 지열이 한계를 넘어서고 있어. 어쩔 작정이야?”길 소르도의 떨리는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상황의 엄중함은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뼈저리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참혹한 위기 속에서도 바아르의 시선은 단 한 곳, 도르하르 지하 깊은 어둠 속 어디엔가 갇혀 있을 라이신만을 향하고 있었다.“길, 도르하르 백성들을 수습할 수 있는 대로 끌어모아 즉시 철수해라. 라이신은······ 나 혼자 찾는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길 소르도가 기가 차다는 듯 다가와 바아르의 어깨를 억세게 움켜쥐었다.“야, 미쳤어? 너 혼자 어떻게 남는다고! 이리 온 김에 도르하르를 끝장내야지!”“라이신과 레이나를 구해 내서 뒤따라가겠다. 항복을 선언하는 도르하르 군사들까지 모두 거두어 탈출해. 그리고······.”바아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만년설에 덮인 키요리타의 풍경은 수묵화처럼 고요했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 역시 무심할 만큼 평온했다.그러나 발밑에서 사납게 기어오르는 진동은 이미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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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죽어도 같이 죽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기이한 푸른 빛이 어둠을 집어삼킨 지하 미궁의 한가운데.우우웅, 우우웅.할 로드와 레이나가 무기력하게 쓰러진 곳 근처까지 다가섰던 세실리에는 그제야 제 두 발이 바닥에 달라붙은 듯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마리! 추잡하고 미천한 년이 감히 나를 결계에 가둬?”세실리에의 허울뿐인 권위 속에서 참아왔던 분노가 치가 떨릴 만큼 거칠게 폭발했다.“하하하!”미궁을 찌르는 마리의 기괴하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사납게 흔들었다. 붉은 마법진이라는 직조된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세실리에를 향해, 이 미궁 전체가 비웃음을 퍼붓는 듯했다.“이 은혜도 모르는 천한 년!” “당신이라고 고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잖아! 레투니카와 도르하르 사이에서 잇속만 챙긴 주제에 무슨!”캔돔가의 빛바랜 하녀 복장, 갈색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흩뿌려진 꾸밈없는 얼굴. 스무 살 남짓의 수수한 하녀 모습 그대로였으나, 마리가 품은 기운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괴물이었다.사실 세실리에는 마리에게 제대로 된 금은보화를 쥐여준 적은 없었다. 그저 할 로드의 후첩으로 넣어주겠다는 달콤한 감언이설로 그녀를 철저히 이용해 먹었을 뿐이었다.마리는 표독스러운 눈빛을 품은 채 천천히, 한 걸음씩 공터 중앙을 향해 다가섰다.“세실리에, 당신의 그 오만한 야욕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알아? 가만히만 있었어도 바아르 각하나 라이신 대공비가 구원해 주었을 텐데! 당신이 전부 망쳐버렸다고!”세실리에의 두 동공이 사정없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참을 수 없는 어지럼증에 세실리에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아니야! 황제와 황태자를 구워삶고, 에스메를 조종해서······ 할 로드를······.”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게 고작 그따위야?”세실리에 자신도 꽤 대단한 마법사인데. 주술의 영창도, 저주가 담긴 매개체도 없는데 이토록 완벽히 통제당하다니. 게다가 머리 위에 떠오른, 양팔을 벌린 크기의 두 배는 족히 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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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마지막 희망이 꿈틀거리다

도르하르 깊고 깊은 지하 미궁에는 기이한 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그 소리는 크고 웅장하면서도 괴이해 숨도 못 쉴 정도의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으윽······! 마리! 이 무시무시한······ 굉음은······ 뭐지? 설마, 여기 무너지는 거야?”세실리에의 말에 마리도 공포에 질린 듯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실리에의 몸은 굳어져 움직여지지 않아 이대로 매몰될 판국이었다.그런데 마리는 갑자기 이곳 구석으로 향하더니 온 힘을 다해 마력을 불러일으켰다.그 순간, 갑자기 스르륵 무언가 막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곳에서 무지갯빛 연기가 활활 피어올랐다.세실리에는 조금씩 몸이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손은 줬다 폈다 하면서 빤히 앞을 바라보았다.“설마······ 은밀 마법? 누구를 숨겨 놓았어?”연기가 걷히자, 피투성이가 된 누군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그때, 누워있는 사람의 바닥과 머리 위에도 그제야 붉은 마법진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세실리에는 알아차렸다.마리는 제 온 은빛 마력을 울면서 쓰러진 그 사람에게 쏟아부었다.“흑흑······ 제 마력 모두 다······ 드릴게요. 라이신 님···&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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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반격의 서막

우르르 쾅쾅. 우르르.그때, 손바닥만큼은 자유로웠던 세실리에가 기습적으로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에잇!”라이신은 급히 제 마력을 뿜어내어 세실리에를 향해 내던졌다. 공격이나 방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오롯이 그녀의 마력을 상쇄하고 소실시키기 위한 시도였다.“라이신! 네 이년! 어서 속박을 풀어! 결계를 파훼해서 이 저주도 당장 풀란 말이다!”속박이든 저주든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라이신의 마력에 가로막힌 세실리에는 또다시 몸이 단단히 굳어버렸다.지하 미궁의 바닥을 흔드는 진동은 점차 거세졌고, 지상에서 들려오는 울림 역시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미끼 역할을 자처하며 같이 왔던 할 로드와 레이나마저 이 거대한 미궁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듯했다.“······빨리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쓰러져 눈을 가물거리는 마리를 안은 라이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하아, 하아! 나도 당장 풀어! 안 그러면 저주를 내리겠어!”자유로운 손을 그러모은 세실리에가 섬뜩한 은빛 연기를 피워 올리더니, 마리를 향해 다급히 저주를 내뿜었다. 아직 라이신의 눈에는 저주의 기운을 간파해 낼 능력이 부족했다. 상황을 직감한 마리만이,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흠칫거리며 쓰러진 몸을 움직였다.“으악!”“마리!”라이신 대신 저주를 받은 마리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진작 이걸 썼어야 했는데! 저주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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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내 남자가 나를 찾는 소리

키요리타, 구 도르하르 제국민들의 터전을 가로막은 거대한 결계의 입구.지하 깊은 곳에서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고, 지상에서는 바아르가 휘두른 오러가 결계의 틈새를 향해 사정없이 쏟아졌다.수십 미터에 달하는 검붉은 연기가 키요리타 일대를 옥죄어 왔고, 그의 검날이 내뿜은 묵직한 충격은 마침내 견고하던 결계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바아르! 됐어! 입구 쪽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좋아! 싹 다 부숴 버리겠다!”“그래! 선발대라도 먼저 침투시키자!”“길! 화산이라도 터지면 들어가기도 전에 전멸이다! 소규모 병력 따위는 저쪽 마법사 군대의 먹잇감만 될 뿐이야. 입구를 완전히 삼켜야 해! 한꺼번에 밀어붙여!”바아르의 검이 다시 한번 궤적을 그리며 내리꽂히자, 결계의 균열이 뱀처럼 비틀거리며 점차 붉어져 갔다.땅울림이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바아르는 쉼 없이 일격을 날렸다.“바아르! 마력을 아껴! 그러다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해!”“시간이 없어!”바아르는 내재된 마력을 모조리 해방했다. 검은 빛을 띠던 오러가 폭풍처럼 일렁이더니, 이내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캔돔가와 하르트가의 기사들은 그 무지막지한 위압감에 숨을 들이켜며 혀를 내둘렀다. 바아르는 더 이상 제 전력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바아르, 너! 오러의 색은 물론이고 마력의 궤 자체가 달라졌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지?”“나중에 얘기해!”짙은 핏빛 연기가 키요리타 주변 반경 백여 미터를 붉은 광풍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 막대한 에너지는 순식간에 바아르의 검끝으로 응축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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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두드리면 열릴 것이니 대공비는 내가 찾아

라이신은 지상의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헐떡이던 세실리에가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이성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던 그때."하하하! 하하하!"세실리에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또렷해졌다. 울음과 웃음을 단번에 거둬들인 그녀는 독기를 품은 눈으로 라이신을 쏘아보았다."멍청한 년. 너희는, 내 이동을 막기 위해 발을 묶을 게 아니라, 마력부터 봉인했어야지! 드디어! 술식 완성이다!"세실리에가 두 눈을 번뜩이며 라이신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겁고도 진득한 연기가 폭풍처럼 몰아닥치며 라이신과 마리 주변을 감쌌다. 이곳이 갑자기 물속처럼 변해 공기가 이질적이었다.그 순간, 라이신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윽! 이게 ······무슨!""라이신 님······!"머리 위와 바닥에서 불길한 검은 마법진이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라이신의 전신을 사정없이 옥죄었다.과거 스레기니 남작 부인이 지니고 있던 저주받은 향낭 수십 개를 한꺼번에 코앞에 들이민 듯, 끔찍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그 순간, 세실리에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하얀 옷과 기척 잃은 얼굴 위로 붉은 핏물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렸다."내 생명력을 터뜨려······, 너의 마력을 봉인했다······.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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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충격적인 협상 카드가 왜 여기에?

라이신은 세실리에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할 로드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를 데리고 곧바로 공간 이동을 시도하려 했으나, 세실리에의 맹렬한 저주를 막아내느라 지금은 마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몸속 깊은 곳에서 에너지를 겨우 쥐어짜 내 할 로드를 깨우는 데 온 힘을 쏟아붓자, 마침내 그가 미세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파르르 떨리며 뻗어나간 잔여 마력이 그의 차갑게 식어가는 뺨에 스며들자,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할 로드, 정신 차려 봐. 너라도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면, 제발, 레이나 공녀님을 데리고 나가 줘." "······아, 머리가 왜 이리 어지럽지. ······라이신? 너, 무사한 거야?"가까스로 의식을 차린 할 로드는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며 라이신에게 시선을 맞추었다."응, 무사해. 할 로드 덕분이야. 배 속의 아이도, 나도 전부 무사해." "······하아,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혹시 이모님은······?" "날 해치려 하셨지만, 저주가 반사되어 도리어 그 해를 입고 쓰러지셨어."할 로드는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세실리에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손등으로 눈가를 툭 문질러 닦아냈다.한때는 혈육이자 스승이었던 여인의 처참한 몰락을 눈에 담는 그의 얼굴에 지독한 허무함과 씁쓸함이 교차했다."사필귀정이지. ······여기서 당분간 쉬시게 두자. 미궁의 기운으로 서서히 치유되실 거야."지금까지 사투를 벌인 일을 말해야 하나 했지만, 라이신은 입을 다물었다.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정적이 흘렀다.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라이신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할 로드, 혹시 지금 마력을 끌어올릴 수 있겠어?"할 로드는 손끝에 마력을 모으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나 깊은 침식에서 막 깨어난 탓인지 손끝의 연기는 피어나다 꺼지기를 되풀이할 뿐이었다."이상하네. 방금 깨어나서 그런지 마력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라이신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손으로 위쪽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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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마지막 선물은 찬란한 구원

깊고도 깊은 지하.라이신의 몸에서 피어나는 무지갯빛 환한 마력이 없었다면 한 걸음조차 내디딜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어둠이었다."라이신 님······, 저를 믿어 주시다니······."이렇게 깊숙하게 왔다가 만약 가는 길을 못 찾는다면, 그리고 바아르나 선대 대공도 영영 못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당연히 믿을 거야. 내가 하인 행세를 하며······ 매 맞는 아이였을 때에도 수프를 주던 마리였어. 지금도 날 위해 이리 아픈 거잖아? 배 속에 아기를 살려줘서 고마운 사람이야."이게 정답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끝없는 내리막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 만약 혼자였다면 두려움에 얼어붙어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쉽지 않았을 터였다.세실리에에게 저주를 받은 마리의 몸에서는 지독한 피비린내와 함께 계속해서 출혈이 이어지고 있었다.마리를 그 자리에 그냥 두고 떠난다면, 그녀의 숨은 곧 끊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라이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서로에게 이게 최선이야."라이신 역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순도 높은 마력이 온몸에 들어차 있어, 까딱하면 서 있는 채로 잠들어 버릴 것만 같이 나른함이 밀려왔다.하지만 발밑에서는 거친 진동이 오르고 지상에서 넘어오는 소음도 무시무시했기에, 그녀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이성을 잡았다."······그래도 참 대단하세요. 카이우스 님에게 나중에 가자고 하실까 봐······ 내심 걱정했었거든요."라이신은 마리를 향해 피식 웃어 보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온몸은 짓눌리듯 나른해져 가고 마음 한구석에는 조급함이 차올랐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확신을 담아 입을 열었다."카이우스 님을 찾아낸다면 바아르 각하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야.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을 잠재워 주시던 아버지를······, 무척이나 그리워하셨거든."마리는 힘겹게 숨을 내쉬며 라이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웅웅- 우웅웅-.여전히 귀를 거스르는 기괴한 소음이 이어졌지만,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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