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241 - Chapter 250

284 Chapters

#240. 충돌, 도발에는 도발로

아처린은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뱀처럼 사악한 감정을 품고 주변을 살폈다.그런데 연회장 내부에는 순식간에 묘하고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아처린 자신의 등장을 보고 가장 크게 동요했어야 할 이는 단연 에스메일 텐데, 놀랍게도 그녀는 지극히 의연하게 레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처린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아처린 황태자 전하. 이렇듯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니, 감읍할 따름입니다.”“오호, 누군가 했더니 에스메였군? 내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군. 어찌 된 거지?”“네, 오라버니.”여유를 부리던 아처린은 에스메의 뜻밖의 모습에 깊이 당황하며 말끝을 매끄럽게 잇지 못했다.게다가 늘 수레의자에 의지하던 그녀가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제게 다가오다니.아처린은 비릿한 실소를 지으며 최측근 피르닉스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피르닉스 경, 나의 에스메가 꽤나 건강해졌군?”“전하, 저 역시 놀라울 따름입니다. 제국의 대마법사가 조력한 덕에 저리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성격마저 사뭇 달라졌습니다.”피르닉스는 에스메를 서늘하게 노려보며 입꼬리를 한쪽만 오만하게 비틀어 올렸다.“그래? 그 대마법사라는 자가 누구지? 도르하르의 잔당인가?”그 옆에 서 있던 바아르는 아처린의 말에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처린은 에스메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만히 훑어내린 뒤, 시선을 레인에게로 돌렸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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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진실을 벗겨 버리다니

바아르는 정무 대신들로 구성된 자문회를 직접 언급함으로써 에스메를 완벽히 옹호하는 한편, 제 입장을 명확히 단정 지었다.훗날 아처린과의 치명적인 대립을 초래할 수도 있는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바아르, 너 줄을 아주 잘못 서는군. 네가 그토록 신봉하는 자문회를 당장 소집해서 최고 통치권자를 나로 바꿔버리면 그땐 어쩌려 그러지?”아처린이 작작하라며 대놓고 비꼬았으나, 바아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서늘한 헛웃음을 흘렸다.“아처린, 난 타인의 뒤에 줄을 서는 위인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맨 앞에 설 사람이다.”순식간에 연회장은 숨을 들이켜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침묵에 휩싸였다. 바아르의 묵직한 일갈이 장내에 있던 모든 이의 입을 봉해버린 것이다.그간 단 한 번도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지 않던 바아르가 이토록 전면에 서서 당당히 맞서자, 아처린은 기가 찬다는 듯 오만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아주 재미있네! 진작 황궁으로 돌아왔어야 했는데 말이야! 안 그래? 레이나? 오늘 내가 더 흥분해서 너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군! 하하!”그 저열한 발언을 듣자 레이나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길 소르도의 뒤로 몸을 숨겼다.길 소르도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품에서 손아귀에 쥐어지는 마도구 몇 개를 꺼내 들고 아처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여차하면 그간 숨겨둔 발톱을 드러낼 작정으로 보였다.그러나 아처린은 배를 잡고 크게 웃어댈 뿐이었고, 그 폭소 소리가 연회장에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어찌나 유유자적한지, 마치 엄청난 수를 미리 쥐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렘브란트! 지금 당장 황녀 에스메를 체포해 감옥에 가둬라!”아처린은 잔혹하리치만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안색이 하얗게 일그러진 에스메와 레이나 앞에서 패왕 행세를 하려 들었다.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바아르는 아처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장내의 공기만 살필 뿐이었다. *** 마도구 너머로 들려오는 생생한 정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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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여우들의 수싸움이 시작되다

에스메는 지금 쓰러질 지경이지만, 머릿속에서는 강인한 의지로 이성을 붙잡았다.자신은 죄가 있고, 아처린의 입장에서는 천하의 나쁜 악녀이니 할 말이 없었다.과정은 나빴지만 의도는 선의였고 황제와 황태자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듬어 주고 싶다는 결론은 정의였다고 판단했다.“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 전하!”에스메 자신이 생각해도 뻔뻔하지만, 수많은 눈이 있고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레인이 곁에 있었다.그리고 이런 자신이 볼품없고 아무런 미래조차 없는 시절에도 목숨을 걸고 건강을 찾게 해준 라이신을 생각해서라도 에스메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 들었다.그때 레인이 칼을 들고 에스메 앞에서 체포하려는 호위 기사들을 막아내며 소리쳤다.“현재 레투니카 제국의 통치자는 에스메 황녀 전하이시다! 난 이 황실의 현재 기사단장이기도 하다! 내 명을 따르라!”역시 레인의 명령이 아처린이나 에스메의 권위보다 앞서 있었다.레인이 고함을 지르며 검으로 호위기사들을 막아서 에스메를 보호하려 들자, 그 뒤에 서 있던 섀도우와 길 소르도 역시 아처린을 향해 한마디씩 말을 뱉었다.“오늘은 에스메 황녀님의 데뷔탕트 날입니다! 황태자 전하, 고정하십시오!” “아처린 전하!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아처린의 호위기사들이 다시 멈칫거리며 감히 에스메에게 다가서지 못하자, 아처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그 증거가 바로 나다. 지난 몇 달간 에스메와 세실리에가 한통속이 된 탓에 키요리타 산맥 한가운데 갇혀 있었거든. 겨우 나의 심복들이 구해준 덕분에 이곳에 올 수 있었지.”에스메는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바아르도 아처린을 향했던 의심의 눈초리를 반대로 에스메에게 돌렸다.아처린의 말이 미친 자의 헛소리임이 분명해야 하는데, 왜 에스메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걸까.그 순간, 에스메는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뜨고는 차분하게 숨을 골라 내었다.“레인, 물러서 계세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검을 거두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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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재앙이 시작되어 버렸어

피르닉스는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아처린의 눈치만 살폈다.자신의 유일한 줄이자 단단한 밧줄이 되어준 황태자에게만 안절부절못하며 머리를 조아릴 뿐, 감히 그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아처린은 의연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바아르에게로 시선을 돌린 뒤 차분히 답을 건넸다.“마차가 전복된 순간 정신을 잃었어. 오늘 눈을 떠보니 황궁 안 내 침실이었지. 그동안 키요리타 산맥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고는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어. 불과 하루 남짓 자고 일어난 기분인데, 세월이 이렇듯 몇 달이나 흘렀을 줄이야.”아처린이 하는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키요리타 산맥에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신빙성이 있었다. 원래 그곳은 영험한 곳이고 도르하르 후예가 그곳에 새로운 제국 건설을 꿈꾸며 힘을 모으고 있다는 것도 밝혀진 바였기 때문이었다.“그렇다면 너 역시 무엇 하나 직접 겪거나 목격한 바가 없다는 뜻 아닌가? 대체 누가 널 구출해 낸 거지?”허를 찌르는 바아르의 날카로운 질문에, 피르닉스가 슬금슬금 앞으로 걸어 나왔다.“저, 저입니다! 저는 감옥에 구금되어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제가 홀로 키요리타 산맥으로 달려가······ 전하를 구출해 냈습니다!”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마법력도 없는 피르닉스 혼자서 엄중한 키요리타 산맥 한가운데 갇힌 황태자를 꺼내왔다니.바아르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실소를 흘렸고, 옆에 서 있던 길 소르도와 연이어 시선이 마주쳤다. 피르닉스가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답이 이미 명확히 도출된 상황이었기에, 바아르의 입매가 서늘하게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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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폭주, 지혜가 필요한 순간

세실리에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자, 제크는 쭈뼛거리며 망설이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세실리에 님을 향해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언사도 남기셨다고 합니다.”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었던 세실리에는 떨리는 음성으로 제크에게 물음을 던졌다.“지금 황궁에서 무슨 판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텐데······ 어째서 나를 향해 분노한단 말인가?”제크는 주저하다가 결국 차가운 진실을 털어놓았다.“······절대로 도르하르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셨다고 합니다.”“뭐라고?”세실리에는 제 귀를 의심했다.다리에 턱없이 힘이 풀린 세실리에는 한 손으로 가까스로 거목을 짚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그러쥐며 눈을 감았다.“자신에게 도청 마도구를 몰래 설치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으며, 도르하르 제국은 세실리에 님께서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셨다고 합니다.”“무슨 마도구? 내가 도청을 했다고? 아니, 그건······ 아, 설마 마리 그 계집이?”세실리에의 머릿속에 퍼뜩 짚이는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시녀 마리였다.“······그 계집이 감히 마도구를 몰래 붙인 게 분명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감히 할 로드에게 헛된 욕심을 부려? 주제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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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아내의 명령, 좋은 남편의 조건

“라이신?”-각하? 저예요. 할 로드가 은밀 마법을 걸어주어서 전 안전해요. 각하께서는 무슨 일 없으시죠?바아르는 고위 마법까지 구사하는 할 로드가 라이신의 곁에 있으니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까지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다.“난 괜찮아. 너만 무사하면 돼.”-실은, 결계 안에서 연회장 상황을 조금 듣고 있었어요. 큰일이 난 게 맞죠?라이신이 자신을 떠올리며 우려를 내비치자, 바아르의 입꼬리가 절로 슬그머니 올라갔다.“걱정 마, 곧 정리하고 너에게로 갈 테니까.”-네. 꼭 제게로 와 주세요. 저 이곳에서 대공비의 모습으로 각하를 기다리고 있을게요.“그래, 나의 아내 캔돔 대공비는 꼭꼭 숨어 있어야 해.”-그럼요. 그리고 한 가지 작전을 생각해 냈어요.이 위급한 와중에 또 무슨 기묘한 묘수를 고안해 낸 것일까.라이신이라면 결코 이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으리라 예감했던 바아르는 순간 긴장으로 굳어졌다.“말해 봐.”-지금 제가 어딘가에 납치되었다고 발표해 주세요. 그리고 할 로드 역시 인질이 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널리 소문을 내주세요.뜬금없는 제안처럼 들렸지만, 바아르는 라이신이 이러한 부탁을 건넨 연유가 궁금해 조용히 물었다.“왜?”-그러면 세실리에도, 아처린 황태자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제약이 생길 테니까요. 누가 일을 벌였는지 서로 의심하는 사이, 사람들을 구출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바아르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라이신의 제안이 꽤 타당했기 때문이었다.황궁의 정세가 악화되었을 때 대공비가 사라지면 캔돔가의 눈치를 보느라 황태자도 주저할 테고, 할 로드마저 자취를 감추면 세실리에 역시 경솔하게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라이신, 이건 아내가 남편에게 내리는 명령인가?”-하하, 부탁이라고 해두죠.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라이신의 목소리에 바아르의 얼굴에도 은근한 미소가 감돌았다.바아르는 라이신의 판단을 무조건 신뢰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입을 열었다.“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훌륭한 남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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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누군가 짠 판에서 놀아난 사람들

수천 명의 마법사 군대는 레투니카 전역이 가뭄으로 메마른 틈을 타 황궁부터 불태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결정적인 순간에 할 로드에게 변고가 생긴 것이란 말인가.세실리에는 진격을 전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바아르의 경고를 들은 도르하르 마법사들 역시 충격을 받아 멈칫거리며, 황궁의 공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어서 찾아야 한다!” “도르하르 황태자를 찾아라! 공격 대신 수색에 전력을 다해라!”그때, 황궁 정문 너머로 육중한 소음과 함께 칠흑 같은 망토를 둘러쓴 거대한 수의 기사단이 들이닥쳤다.드래곤 한 마리가 두 자루의 검 사이를 뚫고 하늘을 향해 도약하는 문양. 캔돔 대공가의 검은 망토였다.대략 눈대중으로만 가늠해도 수천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기사단이 순식간에 황궁 외곽을 겹겹이 에워쌌다.이어 대공가 기사단을 지휘하는 자들의 급박한 호령이 세실리에의 귓전을 강렬하게 스쳤다.“아무것도 부수지 말고, 그 누구도 해치지 마라! 황궁 밖 1만 군사에게도 전령을 보내라!”캔돔 대공가의 군사들 역시 세실리에처럼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휘관은 몹시 다급한 표정으로 어수선하게 명령을 내렸다.“대공비 전하께서 위험하시다! 귀족들의 탈출을 돕는 즉시, 캔돔 대공비 전하의 행방을 수색하라!”공격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던 세실리에는 기함을 토했다.눈앞에 보이는 인원만 해도 수천인데, 황궁 외곽에 1만이 더 대기하고 있다니.순백의 망토를 뒤집어쓴 도르하르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검은 망토의 캔돔 군사들에게 완벽히 포위되었다. 게다가 회색 망토를 입은 레투니카 황가 군사들까지 가세하면서 사위는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설마 우리 쪽에서 캔돔 대공비와 도르하르 황태자를 붙잡은 건가? 대체 어느 부대에서?”그 순간, 황궁 정문 쪽에서 빛나는 태양 문양이 새겨진 초록색 망토의 군대가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하르트 백작가였다.황궁 높은 첨탑 위에도 하르트가의 마법사 군대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며 세를 늘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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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하늘이 돕는 대공비

지금 라이신은 마법이라는 정교한 가면을 쓴 채, 자신만의 과학을 조용히 펼치는 중이었다.오랜 가뭄으로 바짝 말라붙은 레투니카 전역은 그야말로 거대한 마른 장작과 다름없었으니,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이 미친 불길을 잡는 일이었다.“라이신, 마력이 아닌 순수한 인간의 지혜로 비를 내리게 한다고?” “뭐랄까······ 응결핵이 조성되면 구름이 형성되는 원리인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할 로드는 라이신의 미심쩍은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그래도 호쾌하게 웃어 보이며 그녀의 마력에 힘을 보탰다.얼떨결에 황궁 사방에서 치솟은 재와 매연이 라이신이 끌어올린 자욱한 수증기와 부딪히자, 거짓말처럼 유연한 먹구름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사실 전생의 장교 시절, 드라이아이스나 염화나트륨을 이용한 인공 강우에 대한 문헌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 그녀였다.하늘에서 국민의 안위를 수호하던 공군 장교 출신다운 지식과 경험이 이 이계의 땅에서 뜻밖의 기적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다만, 수증기와 공명한 라이신의 무지갯빛 마력이 자욱한 오로라를 만들어내는 바람에 사방이 화려하게 물들고 말았다.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척을 가린 채 황성의 위기를 막아설 완벽한 방어막이 되어준 셈이었다.“라이신, 무리는 금물이다. 너는 본래 가르남에 정숙히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야.”공식적으로 대공비 라이신은 마력을 거의 구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섀도우의 우려는 지당했다.“네, 형님. 비만 확실히 뿌리고 할 로드랑 가르남으로 돌아갈게요.”섀도우와 낮은 담소를 나누던 라이신은 문득 미하엘의 데뷔탕트 연회가 떠올라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황궁 안은 이미 참혹한 아수라장이었으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라이신의 선언에 섀도우와 할 로드는 깊은 신뢰를 보내며 도움을 주게 되었다.물론 이 대담한 작전에 동참한 대공가의 정예 기사들 역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공비가 이 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철통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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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완벽하게 약속을 지키는 법

연회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으나, 바아르가 벽을 뚫어 안전한 탈출로를 확보해 준 덕분에 그나마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이 난리통 속에서 아처린과 피르닉스는 언제 도망쳤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렘브란트만이 바아르의 곁에서 사람들의 대피를 돕고 있었다.“아처린, 이 생쥐 같은 황태자 놈! 백성들을 돌보지는 못할망정 제 몸 하나 보전하겠다고 제일 먼저 도망을 쳐?”“아, 길 소르도 공작 각하. 저도 잘······. 그나저나 아까 술을 꽤 많이 드신 것 같았는데 괜찮으십니까?”“······나는 멀쩡해! 그런데 오늘 대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뒤틀린 거지? 렘브란트 경, 설명 좀 해!”길 소르도는 짜증이 섞인 얼굴로 당황해하는 렘브란트를 거세게 추궁했다.렘브란트는 이 긴박한 와중에도 습관처럼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으며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저 역시······ 오늘 갑자기 피르닉스 경이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나타나는 바람에 무척 놀란 참입니다.”“감옥에서 탈출한 범죄자가 나타났으면 당장 다시 가둬야 했을 것 아닌가!”길 소르도가 답답하다는 듯 짓눌린 목소리로 다그치자, 렘브란트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갑자기 나타나신 황태자 전하께서 자신을 구출한 피르닉스의 죄를 사해주시겠다 선언하시고는, 느닷없이 에스메 황녀 전하가 죄인이라며 군대를 소집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사라지셔서 저 역시 황당할 따름입니다.”바아르는 렘브란트와 길 소르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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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참, 비밀이 있었지?

라이신은 바아르의 단단한 품 안에서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각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잠깐 궁에 다녀왔어요.”이런 상황에서 어설픈 거짓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라이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 “할 로드가 걸어준 은밀 마법 덕분에 비가 내리도록 조치만 취하고 왔어요.” “나의 아내는 너무나 대범해서, 때로는 감당하기가 벅차군.”바아르는 품속에 파묻힌 라이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말로는 마력을 별로 쓰지 않았다고 담담히 털어놓았으나, 사방을 물들였던 그 무지갯빛 오로라를 바아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 깊은 동공에는 애틋함과 우려가 오롯이 번져 있었다.이번에는 반대로 라이신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각하야말로 화재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셨군요. 몸에 매연 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네요.” “그랬지.” “그리고 몸도 조금 젖으셨어요. 서늘한 빗내음도 함께 나고요.”동일한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으니, 서로에게 배어든 향취가 닮아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라이신은 손끝에 기분 좋은 열기를 은은하게 피워 올려, 바아르의 식어가는 체온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다.“그만, 나는 본래 몸에 열이 많으니 마력은 아끼도록 해.” “하하, 네.” “참, 아까 내게 알려준다던 비밀은 뭐지?” “이 와중에도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지금 황궁 외곽에는 1만이 넘는 군사가 대기 중이고, 캔돔 영지에서도 누군가가 대공비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테지만.“나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아. 천천히 말해도 상관없어.”바아르는 대상이 라이신에 한해서라면 시간이든, 에너지든, 그 어떤 물질이든 아낌없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짐짓 한가로운 여유를 부렸다.“설마요.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법인걸요.” “마치 곧 사라질 사람처럼 말하는군.” “하하, 이제 제 의지로는 절대로 각하 곁을 떠나지 않아요.”오늘은 다행히 라이신의 뛰어난 기지 덕분에 도르하르 군대와의 대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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