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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엄마, 나 잘 지내요. 호명그룹이 얼마나 좋은 회산지 엄마도 알잖아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별채 뒤뜰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을 때였다.담배를 피우던 도언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너무도 고요해서 빈집 같은 저택에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그 소리가 생경했다."선배들이 다 잘해줘요. 알았어요. 나도 잘할게."호기심이었나, 아니면 외로움이었나.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 모퉁이를 돌았다.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도언이 인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엄마, 나 끊어요."서둘러 전화를 끊는 그 목소리가 허둥대고 있었다.도언은 그 자리에서 잠자코 기다렸다.누군지 제 앞에 알아서 나타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죄송합니다."그러나 그뿐이었다.그 여자는 그대로 도언 앞을 지나쳐 숙소동 쪽으로 사라졌다.도언이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움직이기도 전에 여자는 모습을 감추었다.기억나는 건 제 앞을 지나칠 때 언뜻 보았던 눈이 젖어 있었다는 것.그것도 어쩌면 제가 만든 착각일지도 몰랐다.하지만 그 순간, 고요했던 감정의 끈이 툭 끊긴 느낌이 들었다.호명 가에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애쓰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기분이 이상했다.어디에도 섞이지 못한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건 묘하게도 위로가 되었다.그때는 누군지 몰랐던 여자가 바로 이재였다. 도언이 이재를 처음 본 날이었다.‘한이재에게는 없을 기억이겠지.’이재를 처음 만났던 날의 상념을 떨쳐내며 도언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오늘이 끝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김 비서님, 병원으로 가시죠.”“회장님 계신 병원 말씀이십니까?”“네.”“알겠습니다.”김 비서가 급하게 차선을 바꿔 유턴 차선으로 접어들었다.도언은 내렸던 넥타이 매듭을 다시 올려붙였다.갑자기 갈증이 일었다.이재의 입술을 한껏 빨아들이고 싶었다.내내 긴장하며 속이 타게 하던 답답함도 그녀의 입술을 빨면 해결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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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안서희가 얼굴이 벌게져 차 회장의 팔을 잡았다."여보......"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꼬리를 늘였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차 회장이 안서희를 마다한 채 도언에게 말을 이었다.“잘됐구나. 도경이가 네 말이라면 듣지 않겠니. 이제라도 정신 차리게 네가 신경 써주거라.”“네, 알겠습니다.”안서희가 울상이 되어 다시 차 회장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아이, 여보. 도경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면 돼요. 도언이까지 이럴 필요 없어요.”“알아서 하는데 애가 그 모양이야?”“도경이가 어때서요? 공부야 하면 되는 거고…….”“해야 말이지. 그 녀석 요즘 하고 다니는 꼴을 보라고.”"아직 어린애잖아요. 제가 잘 타일러서 공부 시킬게요.""언제까지 도경이 그렇게 싸고 돌거야. 당신이 그러니 애가 그 모양 아닌가." 도언이 차 회장과 안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픽 내뱉었다.들어올 때 놀랐던 두 가지 일 말고 세 번째로 놀랐기 때문이었다.뭐, 이건 사랑싸움도 아니고.과하게 콧소리를 섞은 안서희의 말투는 역시 듣기 싫었다.뿐만 아니라 내심 싫지 않은 듯한 내색을 보이는 차 회장을 보는 것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도언은 고개를 숙이고 바로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갔다.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짧은 사이에 안서희의 과한 애교 말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역겹기는.”도언은 못 먹을 걸 먹은 것처럼 손으로 제 입을 쓸어 닦으며 중얼거렸다.* * *“도착했습니다.”김 비서의 알림에 도언이 느리게 눈을 떴다.호명 가 별채 입구였다.도언이 내리면 김 비서는 차를 차고에 들여놓고 퇴근할 것이다.도언이 몸을 일으켰다.그러자 김 비서가 먼저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도언이 탄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덜컥, 쿵-.갑자기 들린 소리에 김 비서와 도언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별채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였다. 대문에서 나온 사람은 이재였다.“지금 상태는 어떤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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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클럽에 도착한 이재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웨이터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갔다.그런 이재의 뒤를 도언과 김 비서가 따라왔다.“도경이 어디 있어요?”“이쪽으로 가시죠. 룸에 계십니다.”이재를 안내하려던 웨이터가 뒤에 선 도언과 김 비서를 보고는 멈칫했다.이재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저랑 같이 오신 분이세요. 도경이 가족 되시는 분…….”“아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웨이터가 앞장서자 이재가 도언을 보며 빠르게 말했다.“저 혼자 가도 돼요. 괜히 가셨다가…….”“됐습니다.”도언이 이재의 말을 자르고는 그녀를 지나쳤다.이재보다 먼저 웨이터가 사라진 복도 쪽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김 비서도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이재는 왠지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난감해졌지만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술 취한 도경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게 불안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차도경, 나도 모르겠다.”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재는 불길한 예감을 안고 도언의 뒤를 따라갔다.이재가 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언이 룸 안에 들어간 후였다.열린 룸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가관이었다.매캐한 담배 연기가 가득한 방에는 도경이 또래 남자와 여자들이 얽혀서 난장판이었다.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술병과 남녀가 한 몸이 된 듯 낯 뜨겁게 얽혀 있었다.시끄럽게 떠드는 말소리는 대체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알 수 없었다.도언이 문 앞에 서서 그 꼴을 관망하듯 바라보는 동안 김 비서가 도경을 찾고 있었다.김 비서는 술에 취한 애들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하지만 이재는 도경이 어디에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앉아 있을 정도로 멀쩡하면 자신이 여기 불려 나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도경이 이쪽에 있을 거예요."이재는 김 비서를 지나쳐 소파 구석으로 갔다.역시나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잠이 든 도경이 있었다.“도경아! 차도경!”이재가 잠든 도경을 깨우려 이름을 불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차도경,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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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도언은 자신을 보는 아이를 노려보았다.위압감에 아이가 시선을 내리다 도언이 지갑을 다시 재킷 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그리고.”“……?”“차도경한테 술 얻어먹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야. 아무리 거지새끼라도 낯짝이라는 게 있어야지. 안 그래?”그 말에는 차마 대답도 못 한 아이가 뒷걸음질을 쳤다.도언은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룸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웅성거리던 아이들이 도언이 지나는 길을 터주었다.룸 바깥 복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재는 그가 돌아서자 저도 모르게 복도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잘못은 자신이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화가 난 그의 눈이 겁이 났다.그가 지나가면 뒤따라갈 생각이었다.도경이는 김 비서가 데리고 나갔으니 자신은 조용히 도경의 차만 가지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이재는 그가 어서 지나가길 바라며 벽에 붙은 채 바닥을 보았다.얼마나 지났을까.이재 눈에 멈춰 선 구두가 들어왔다.고개를 번쩍 들었다.도언이었다.“갑시다.”“네? 어어……?”뭐라고 대답할 사이도 없이 도언이 이재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당겨 복도를 걸었다.이재는 도언에게 손을 잡힌 채 어두운 클럽 복도를 걸었다.그와 함께 걷는 것이 마치 진공 상태의 공간에서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쿵쿵대는 베이스 소리도, 복도를 지나가는 술 취한 사람들의 소리도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오직 저의 손을 그러잡은 그의 커다란 손의 느낌만 남아 진공의 공간에 손만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이재는 도언을 올려다보았다.그는 마치 곁에 이재가 있는 것도, 이재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앞만 보고 있었다.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의 표정은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차가웠다.아니, 그보다 굉장히 낯설었다.그러나 이재가 슬며시 그에게 잡힌 손을 빼보려 살짝 비틀었을 때 놓치지 않으려 힘을 주었다.그 순간, 숨을 들이켠 이재는 복도 끝 입구를 바라보았다.점점 짧아지는 그 길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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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얼굴을 감싼 도언의 손이 뜨거웠다.이재는 뺨이 데일 것만 같았다. 도언의 얼굴이 이재에게 거의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그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진 탓에 이재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저, 가야해요.""그냥 가버리게 둘 거였으면 같이 오지도 않았어요."대체 무슨 말일까.아니, 이재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더 겁이 났다. “나는 말로만 하는 사람은 안 믿어요.”그가 말을 하자 입술이 맞닿을 듯 간질거렸다.뜨거운 숨이 그대로 이재에게 전해졌다.“그게 무슨…….”이재가 말을 하려 입을 열자 그의 입술이 더 다가와 스쳤다.얼굴을 감싼 손보다 뜨거운 감촉.마치 불꽃이 튄 것처럼 깜짝 놀라 숨이 막혔다. 살짝 스친 감촉에 그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그리고 턱을 살짝 들어 이번엔 이재의 동그란 코끝에 입술을 댔다.“고마우면, 얼마나 고마운지 보여줘요.”“어, 어떻게요?”도언이 고개를 틀며 이재 등 뒤로 손을 뻗었다.쿵-.도언이 열려 있던 차 문을 닫았다.실내등이 꺼지는 동시에 그의 입술이 이재의 입술에 닿았다.그의 입맞춤에 문이 닫히던 그 소리처럼 이재의 가슴도 쿵, 떨어졌다.그는 오늘 클럽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그리고 태연하게 손을 잡았다.견고한 얼굴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러더니 결국엔, 입을 맞췄다.속도감시 카메라에 몇 번이고 찍히고도 남았을 만큼 빠르게 달려왔다.그래놓고 마치 그랬던 이유가 오직 이 키스만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구는 남자.그의 키스는 항상 그랬듯 갑작스럽고 억지스러웠으며 거칠고,……달았다.결국엔 입을 벌리게 만드는 그의 키스에 이재는 이번에도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대신 깊게 밀고 들어오는 그에게 감기고 말았다.“으음…….”이재가 저를 받아들이자 도언이 목구멍 끝에서 참아 내린 소리를 미처 삼키지 못하고 내뱉었다.그리고 이재의 뺨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이재의 손을 잡았다.긴장감에 주먹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모아 쥔 손가락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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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다음 날 아침.도언이 별채 1층으로 내려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내려온 도언을 보고 김 여사가 펄쩍 뛰듯 놀았다.무슨 사달이라도 나는 건가 눈치를 보았다.아들뻘이었지만 그는 엄연히 별채의 주인이었다.“일찍 나가시네요? 식사 준비 금방 돼요. 잠깐만 기다리세요.”“안채에서 먹겠습니다.”“안채에서요?”도언이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바로 현관 밖으로 나갔다.김 여사가 허둥대며 안채로 연락하기 위해 인터폰을 들었다.안채 고용인들에게 도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 시간은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탁, 치이익-.정원으로 나온 도언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깊게 빨아들였다.담배 끝이 빨갛게 타오르며 매캐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후우…….”입안 가득 머금었다가 삼킨 연기를 내뱉었다.부쩍 선선해진 아침 공기에 연기가 뿌옇게 퍼졌다가 사라졌다.다시 담배를 입에 물며 도언은 숙소동으로 시선을 주었다.1층, 2층, 3층…….3층 끝에 이재의 방이 있었다.베이지색 커튼이 드리워진 그 방 안에서 그녀는 아직 자고 있을까.어젯밤 제 입안에서 가득 뭉개지던 그녀의 말캉한 입술을 떠올리며 도언은 다시 담배를 빨아들였다.볼이 깊게 패도록 가득 빨며 왠지 모를 헛헛함을 느꼈다.지금 제가 빨고 있는 것이 이 씁쓸한 담배 따위가 아니었으면 하는 부질 없는 생각.그리고 아침부터 뭐에 굶주린 놈처럼 그런 생각이나 하며 세워버린 자신에 대해 조소가 났다.자괴감은 담배 연기를 아무리 내뱉어도 쉬 사라지지 않았다.굶주린 건 맞는 건가.도언은 픽 웃음을 내뱉었다.기어이 합리화 하는 자신이 우습기는 했다.그래도 솔직히 이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동그랗게 뜬 눈으로 잔뜩 경계하는 그녀가 귀엽다고 느꼈을 때부터 저답지 않았다.여자를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놀려주고 싶어 짓궂게 굴었지만 그게 또 완전히 진심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제 앞에서 허둥대는 그녀를 안고 싶어 꽤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입술을 씹어 삼키듯 키스를 하는 것으로 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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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안서희가 불안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아니, 그걸 네가 왜 해.”“대학 보내셔야죠. 이번에도 떨어지면 아버지는 외국으로 보내실 생각이던데요?”안서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언을 보았다.드디어 마주친 눈에 도언이 비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국을 떠 입에 넣었다.“도경이도 외국 가면 집에도 못 오고 혼자서 지내게 될까요?”“뭐……?”“제가 그랬던 것처럼 도경이도 그렇게 지내게 될까, 궁금해서요.”“너, 너…….”안서희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도언을 노려보았다.안서희가 도경이를 품에서 놓지 못하고 끝까지 품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호명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도경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호명의 둘째 아들이자 차재성의 늦둥이 아들 도경은 안서희 자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존재였다.“어머니 도경이 못 보내시잖아요. 그럼 대학 가게 해야죠.”“도경이, 대학 갈 거야. 그러니까…….”“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린다고요. 도경이 대학 갈 수 있게. 어머니가 계속 이 집에 계실 수 있게 말입니다.”숟가락을 쥐고 있는 안서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도언은 그런 안서희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일어섰다.“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안서희를 뒤로 하고 다이닝 룸을 나가려던 도언이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섰다.주방에 있던 조 여사와 시선이 마주쳤다.“여사님, 음식 솜씨가 그대로시네요. 엄마 계실 때 먹었던 콩나물국 맛이랑 똑같아요.”조 여사가 도언의 말에 눈을 찡그리며 눈치를 보냈다.도언은 쿡쿡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조 여사는 도언의 말을 들은 안서희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그리고 곧 도언이 미처 안채 현관을 나오기 전에 안서희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안서희의 역정을 가만히 들어야 할 조 여사에겐 미안하게 된 일이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아무 생각 없이 입에 넣은 국물 맛에 잊고 있었던 순간들이 순식간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그때와 달라진 건 커버린 자신과 제 앞에 앉은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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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도언이 자신을 이렇게 저장해 놓은 걸 안다면 뭐라고 할까.그나마 개새끼를 다 쓰지 않은 건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 거라는 걸 알기나 할까."연락하면 받아요.""다음, 이라고 한 거 있잖아."어젯밤 헤어질 때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이재는 차마 받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라만 보았다.징징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과 번쩍이는 빛이 마치 차도언이 어서 전화를 받으라고 눈을 부라리는 것 같았다.전화를 받으면 그가 말한 「다음」이 당장 올까 봐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도언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다음이라는 말은 왜 해서는…….저도 모르게 다음이라 내뱉었던 제 입을 원망해 봤자 이미 늦었다.이재가 그 말을 했을 때는 다음에 뭘 하자는 뜻이 아니라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려 했을 뿐이었다.그런데 그는 그 말을 제 뜻대로 해석하는 게 분명했다.다음이 뭔데?키스 다음은 뭐.어? 뭐…… 그건가?“으악!”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에 낯 뜨거워진 이재는 핸드폰을 침대 이불 더미로 휙 집어 던졌다.이불 더미 안에서도 한참을 둔탁하게 울리던 진동이 끊어졌다.이재는 언제 또 울릴지도 모를 핸드폰을 얼른 이불로 덮어 두었다.그것도 성에 안 차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백날 전화해 봐라, 내가 받나. 다음 같은 소리…… 으으!”이재는 제가 한 말에 진저리를 치며 한달음에 욕실로 향했다.* * *“하, 전화를 안 받으신다?”도언이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전화 받아요.]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분명했다.그럼 관두면 그만인데 조바심을 드러낸 자신이 어이없어 미간이 구겨졌다.“한이재.”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도언의 입술 끝에 설핏 미소가 그려졌다.제 전화를 받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겠지.입술까지 물고 있으려나.“하.”도언의 입에서 한숨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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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도경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더니 끝내는 다시 끅끅대며 웃었다."얼른 일어나.""누나 진짜 나 토할 것 같다니까."도경은 여전히 머리는 들지 않고 엎드린 채 웃어댔다.이재가 도경의 얼굴 옆으로 들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내려놨다.“이럴 거 알면서 매번 왜 그렇게 술을 마시는 거야?”“재밌잖아.”“재밌긴. 맨날 뻗으면서.”“그러려고 마시는 건데 뭐.”“에휴, 언제 철들래?”한숨을 내쉬는 이재를 보면서 도경은 헤헤거릴 뿐이었다.그나마 퉁퉁 부은 얼굴로 엎드려서라도 수업을 듣겠다니 잔소리는 이 정도만 해야지 싶었다.“정말 그러고 있을 거야?”“나 머리 들면 토한다니까. 누나한테 토하면 안 되잖아. 누나가 설명하는 거 이러고 들을게.”퍽이나 그러고 듣겠다.자장가 삼아 잠이나 잘 거면서.그렇게 말하는 대신 이재는 도경을 한 번 째려보고는 문제집을 펼쳤다.어쨌든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너무 밀려서 더는 쉴 수 없었다.“그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졸기만 해봐.”“졸면 어쩔 건데?”“확 꼬집어 버릴 거니까.”“이왕이면 뽀뽀해 주지. 그럼 번쩍 깰…… 아앗!”결국 이재에게 등짝을 한 대 더 맞은 도경이 아프다고 발을 굴렀다.다리도 긴 녀석이 아프다고 허우적댔다.이재는 순간 너무 세게 때렸나 싶어 멈칫하고 말았다.아무리 그래도 주인집 아들인데 이 아우성이 밖에까지 들리면 난처해지는 건 이재였다.“아파?”“어어. 아파아…….”도경이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이재는 도경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미안.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 넌 꼭 헛소리해서 매를 벌더라.”“치이, 그게 왜 헛소리야. 누나야말로 내 진심을 몰라주고.”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도경이 끝까지 헛소리를 멈추지 않아 이재가 째려보았다.도경이 이내 눈을 반달로 만들며 헤헤 웃었다.“사실 하나도 안 아파. 누나 그 쪼그만 손으로 때려 봤자지. 때리고 싶으면 더 때려. 나는 누나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이니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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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도경이 기다란 팔과 다리를 축 내린 채 책상에 머리를 연이어 박았다.“왜 형을 데리고 왔어. 왜에…….”“내가 데리고 간 게 아니라, 네 형이 막무가내로…….”“그럼 누나가 말렸어야지이…….”말린다고 말려지니.너나 네 형이나 내 말은 더럽게도 안 들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니.“아아, 누나아 왜 그랬어…….”이재는 계속해서 머리를 박는 도경을 말리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그새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 아래로 도경이 눈꼬리를 한껏 내린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너 형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형이 너 데리러 간 건데 뭘 그래.”도경이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이재를 보았다.“형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기 싫단 말이야.”그래도 창피한 건 아는가 싶어 이재는 도경이 조금 측은해졌다.좋아하는 사람, 그것도 도경이 생각하기에 완벽한 형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게 창피할 것도 같았다.“그러니까 도경아, 이제부터 술은…….”“우리 형이 술 얼마나 잘 마시는데. 나는 등신처럼 취해서 꼴아 박혀 있었잖아. 형이 날 뭐로 생각하겠어. 술도 못 마시는 애송이로 볼 거 아니야.”이재는 잠시 멈칫했다.지금 이게 맞아?차도경이 이 상황 제대로 이해한 거 맞는 건가?그러나 이재가 상황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도경의 말이 이어졌다.“그리고 이제 애들이 나랑 안 논대. 형이 나 불러내지 말라고 했대.”“그건…….”“나 그럼 이제 누구랑 놀아? 얘네들 아니면 친구도 없단 말이야.”“야!”이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버럭 소리를 지르자 도경이 움찔하며 이재를 보았다.“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니?”“무슨 상황?”“너 큰일 났어.”도경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 얼굴에서 어젯밤 굳은 표정으로 클럽으로 나오던 도언의 얼굴이 보였다.전혀 다른 표정을 한 도경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리다니.그래도 어딘가 닮아서겠지.둘은 형제니까.“왜, 뭐가? 뭐가 큰일인데? 어? 누나.”제 얼굴을 빤히 보고만 있는 이재에게 도경이 재촉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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