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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유지영은 웃으며 유선주를 부축해서 일으켰다.“한순간 말실수인 것을 어찌 아직까지 원망하겠어. 그날 내가 욱해서 귀뺨을 때렸는데 너야말로 마음에 담아두지 말렴.”귀뺨 얘기가 나오니 유선주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졌다.피부가 여린 그녀는 밤새 얼음 찜질을 해서 겨우 붓기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튿날에는 분을 두텁게 발라야 했다. 이 일로 배준형과 사이가 멀어지거나 한다면 유지영을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다짐했다.“지영아, 그날은 네가 힘을 너무 줬어.”송씨는 그제야 그날의 일이 생각난 듯, 한마디했다. 아까워서 자신도 매 한번 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귀뺨을 맞았으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선주가 실언한 일로 사죄했으니 군주도 그날 선주의 귀뺨을 때린 일을 사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배준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유선주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저는 괜찮아요. 안 그러셔도 돼요.”“군주가 되었다고 하여 마음대로 동생을 괴롭힐 생각은 아니겠지요?”배준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어투로 다그쳤다.그는 유지영을 보면 볼수록 기분이 잡쳤다. 전생에 서 태후가 세상을 뜬 담혜정을 생각해서 유지영을 조금 특별히 챙긴 것은 사실이었다. 태후는 틈만 나면 그의 앞에서 유지영이 참하고 현명하다고 치하했다.태후가 예뻐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정왕부도 유지영을 삼 년이나 품어주지 않았을 것이다.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유지영이 산적들에게 겁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후도 그날부터 몸져누었다. 그리고 유지영이 자결을 택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녀가 죽은 날에 태후도 세상을 떠났다.배준형은 전생에 어쩔 수없이 유선주와 삼 년을 남으로 지낸 것이 너무 후회되고 미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절대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그는 유선주를 잘 보살필 것이다.복덩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태어나 양나라 전체의 복덩이라고 칭송받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어려운 일들이 술술 풀리니, 앞으로 그의 미래에도 큰 도움을 줄 사람이었다. 그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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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낭독을 마친 내관은 교지를 유정혁에게 건넸다.유정혁은 활짝 웃는 얼굴로 교지를 받들었다.“신,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유 상서님, 폐하께서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귀경하여 임직하라 분부하셨습니다.”내관의 귀띔에 유정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행한 궁인들에게 풍부한 포상을 줘서 돌려보냈다.유씨 노부인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폐하께서 널 중용하려 하신다니 당장 오늘부터 짐을 싸서 너 먼저 경성으로 가거라. 우리도 최대한 빨리 행장을 정리하고 따라가도록 하마.”“그것도 좋겠군요.”유정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준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정왕께서 추천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귀경길이 이렇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배준형이 말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감, 앞으로 가족이 될 텐데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그래요, 앞으로 가족이 될 텐데요.”송씨는 생글생글 웃으며 맞장구를 치고는 유선주의 손을 꼭 잡았다.“역시 우리 선주가 복덩이라니깐요.”유선주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유씨 집안 전체에 즐거운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유씨 노부인의 재촉 하에 서둘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배준형도 유씨 노부인에게 작별을 고했다.“세자, 그럼 경성에서 다시 뵙겠습니다.”유씨 노부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선주를 시켜 그를 배웅하게 했다.떠나기 전, 배준형은 조용히 유지영을 뒤돌아보았다. 이번 생에 그가 유선주를 선택하면서 분명 상심이 클 것이다.‘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는 거겠지.’하지만 복을 타고난 사람도 아니고 그저 태후의 미미한 총애를 등에 업었을 뿐,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세자 오라버니, 뭘 보고 계시나요?”유선주는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유지영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배준형이 말했다.“선주야, 경성에 가면 일단은 군주의 심기를 건들지 말거라. 태후께선 큰 부인의 체면을 생각하여 필히 유지영을 보살필 것이야. 하지만 괜찮다. 태후께서 너를 보신다면 분명히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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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유지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동금을 가까이 불러 작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동금의 표정이 진지해지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일가족은 짐정리에 분주하게 돌아치고 있었기에 아무도 동금이 저택을 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경성에서 재촉이 심했기에 다음날 아침 유정혁은 시종들만 거느리고 간단한 짐만 챙겨서 먼저 경성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남은 사람들도 짐을 싸느라 여념이 없었다.마차만 백 대를 빌렸고 수많은 상자들이 쌓였다. 시녀들의 짐만 해도 적지 않았다.종령원은 큰댁의 짐까지 해서 족히 십여 대의 마차를 사용했다.유정혁이 떠나고 다섯째 되던 날, 유씨 일가는 위풍당당하게 경성으로 향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마다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유씨 노부인의 마차는 대오 중에 가장 큰 마차였는데 송씨와 유선주, 유지영이 함께 탔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사소한 말다툼도 없었다.그렇게 세 시진이 지나 경성에 거의 도착할 때쯤, 유씨 노부인이 감개무량해서 말했다.“벌써 열두 해나 흘렀구나. 드디어 돌아왔어.”“그야말로 금의환향이라 할 수 있지요. 큰댁은 국공에 둘째인 저희는 상서, 게다가 한 집안에서 세자비가 둘이나 나왔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요?”송씨는 어깨를 한껏 펴고 의기양양함을 담아 말했다.한 집안에 세자비가 둘이나 나왔다는 말에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바라보며 당부했다.“경왕 세자라는 자는 도무지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다. 이 혼사를 과연 수락할지 아직 고심 중에 있으니 그와 지나치게 가까이 지내서 우리 유씨 집안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요컨대 경왕 세자가 태후의 눈에 들어 배준형과 권력을 두고 다투게 될까 염려하는 눈치였다.송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집안의 가세가 지나치게 드높은 것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요. 기회가 닿는 대로 혼사를 물릴 수 있다면 물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지영이 너도 안심하렴. 설령 파혼 때문에 명성이 조금 나빠진다 해도 내가 널 박대하지는 않을 테니. 우리 송씨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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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은 짜증스럽게 염주를 만지작거렸다.“어떤 망할 놈이 감히 유국공부의 마차를 들이받은 게냐!”송씨도 모퉁이에 허리를 부딪힌 터라, 말투가 곱지 않았다.“어머님, 제가 내려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유씨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송씨가 마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적어도 서른 대가 넘는 마차가 피해를 입었다. 특히나 둘째 댁의 마차는 아예 뒤집혀 버릴 정도로 손상이 심해 큰 상자 여러 개가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뚜껑이 열리며 안에 든 물건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때마침 성문과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이라 구경하러 몰려온 사람들도 많았다.화가 치민 송씨는 하인들을 호되게 꾸짖으며 빨리 짐들을 수습하라 명했다.“이 비단들은 왜 곰팡이가 끼어 있지? 약재도 다 썩은 것 같은데… 그림들도 다 누렇게 변했네. 그동안 유씨 가문이 인주에서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았나 봐?”“그렇다고 하기엔 앞에 마차에서 떨어진 상자 안에는 수많은 금은보화가 들었던데요.”유지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재미난 구경이 곧 시작될 것이다.“군주님, 마차가 흔들리면서 상자 안에 있던 것들이 다 쏟아져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를 어떡하면 좋나요!”홍주가 앙칼진 목소리로 마차 안을 향해 소리쳤다.그러자 유선주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나무라듯 말했다.“언니, 언니의 측근에서 모시는 시녀가 어찌 이리도 예의를 모르고 감히 큰소리를 지르나요?”노부인도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호통쳤다.“멍청한 것! 경성에 오자마자 창피를 당하게 생겼구나!”유지영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담담히 말했다.“제가 내려가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사고 현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열 개가 넘는 상자들이 뚜껑이 열려 입을 벌린 채, 안에 내용물들을 드러내고 있었다.수많은 도자기들이 산산조각 났고 그림들은 서로 들러붙거나 구겨졌으며, 옷감들은 살릴 수 없을 정도로 곰팡이 자국이 번져 있었다.장신구들도 먼지가 잔뜩 낀 상태로 사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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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 모습을 본 유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명거당은 과거 양모인 담혜정이 거주하던 곳이고 유수각은 본래 그녀의 처소였다.송씨가 대뜸 이 모든 걸 차지하려고 드니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동금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동금이 작은 돌멩이 하나를 상자를 메고 가는 시종의 무릎에 던졌다.통증에 놀란 시종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뒤따르던 시종들까지 덩달아 넘어지고 말았다.“아이고!”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에 유씨 노부인의 안면이 파르르 떨렸다. 노부인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송씨를 꾸짖었다.“명거당은 왜 넘보는 것이냐? 거긴 큰집 처소가 아니더냐.”꾸중을 들은 송씨는 감히 불만을 말하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수각은 선주가 마음에 든다면 선주에게 주도록 하거라.”유씨 노부인은 가벼운 한마디로 유수각을 유선주의 거처로 정했다.유선주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진작부터 이층 누각이 달린 유수각을 눈독들이고 있던 그녀였다. 주변 풍경도 좋아 국공부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처소였다.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단하각도 꽤 괜찮다. 송죽당과 거리도 가깝고. 지영이 너는 앞으로 단하각에서 지내도록 하거라.”단하각은 원래 서재로 쓰던 곳이었는데 비좁아서 서재를 옮기고 지금은 비어 있는 곳이었다.그러나 유지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유선주, 네가 유수각에서 얼마나 머물 수 있을 것 같니?’“이제 거처도 정해졌고 시간도 늦었으니 각자 처소로 돌아가고 남은 건 내일 얘기하자꾸나.”유씨 노부인은 손사래를 치며 사람들을 물렸다.단하각으로 온 동금이 분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군주님 신분으로 유수각에 드는 게 당연한데 어찌 이런 좁은 곳으로 군주님을 모신단 말입니까? 단하각이 아니더라도 국공부에 이보다 나은 처소가 가득한데요.”“잠시 머무는 것뿐이다.”유지영은 담담하게 답하고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동금에게 물었다.“널 발견한 자는 없겠지?”“걱정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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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창 내관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물었다.“노부인, 장녕 군주께선 어디에 거주하고 계십니까?”노부인이 답하기도 전에 눈치 빠른 홍주가 한곳을 가리켰다. 궁에서 사람이 올 거라는 지영의 말을 듣고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었던 그녀였다.“소인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홍주는 새삼 유지영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앞장서서 말했다.창 내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홍주를 따라 단하각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창 내관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빗자루를 잡고 정원을 쓸고 있는 유지영을 보자 음침한 얼굴로 달려가서 그녀를 말렸다.“아이고, 군주님. 귀하신 분이 어찌 이런 일을 직접 하십니까?”그는 유지영의 손에서 빗자루를 빼앗고는 그녀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계속 말했다.“태후께서 군주님을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압니까? 군주님께서 이런 대우를 받고 계신 줄 알면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요?”유지영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창 내관에게 물었다.“그런데 창 내관은 오늘 무슨 일로 오셨나요?”“태후께서 환영 연회를 베푸신다고 궁으로 오시라 하셨습니다.”창 내관이 답했다.전생에도 환영 연회가 있었다. 그때 서 태후는 딸을 키워준 유씨 일가에 감사한 마음에 모두를 궁에 초대하고 그들의 요구라면 뭐든 들어주겠노라 약조했다.그런데 태후의 그런 행동이 유씨 일가 눈에는 그저 서 태후가 자신들을 영입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참으로 우습지 않은가!창 내관은 좁아터질 것 같은 단하각을 둘러보고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멍청한 것들. 적장녀를 이런 누추한 곳에 살게 하다니! 태후마마께 돌아가서 다 말씀드려야겠어!’“그럼 잠시 옷부터 갈아입고 오겠습니다.”유지영의 말에 창 내관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 늙은이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방으로 들어간 유지영은 화려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작은 봉황 비녀 하나를 머리에 꽂았다. 화려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단정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본 동금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참으로 고우십니다, 군주님. 군주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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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송씨는 오늘 굉장히 성대하게 차려입었다. 머리에는 번쩍거리는 금비녀와 장신구를 꽂았고 허리에는 비단 향낭을 매었으며 신발도 분홍빛 진주를 박은 화려한 신발로 신었다.동행한 유선주도 만만치 않게 차려입었다. 비록 금비녀는 착용하지 않았지만 최상급 양지백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은은한 빛이 감도는 비단옷을 입었다. 청순한 얼굴은 정교한 화장을 하고 미간 사이에는 도화를 찍어 마치 선녀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그들에 비하면 유지영은 지나치게 수수해 보였다.옅은 주홍색 치마에 날씬한 허리에 허리띠와 향낭을 차고 장신구는 옥으로 된 작은 귀걸이가 전부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부드럽고 속세를 벗어난 듯한 고상한 느낌을 주었다.“언니, 왜 옷을 갈아입었어요?”유선주가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꼴로 입궁하면 너무 초라해 보이잖아요?”유씨 노부인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참으로 가문의 체면을 깎아먹는구나.”유지영은 조용히 해명했다.“아까 입었던 비단 저고리가 실밥이 터져 올이 풀어져 버렸습니다. 이 옷은 제가 가진 것 중에 그나마 가장 고급 원단으로 지은 것이고 금비녀는 도저히 이 옷과 어울리지 않아 옥 장식을 골랐던 거예요.”유지영은 유선주가 입궁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태후께서 초대하지 않으셨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동원해서 입궁했을 것이다.그렇기에 유지영은 처음 등장할 때 일부러 화려하게 입어 유선주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역시나 이들 모녀는 온갖 값비싼 장신구는 모조리 달고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유씨 노부인이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올해 새로 옷을 지어주지 않았느냐?”유지영은 조심스레 송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 눈빛 하나로 유씨 노부인은 바로 알아차렸다.“아무리 그래도 적장녀인데 살림을 맡았으면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지.”송씨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오해세요, 어머니. 며칠 전에 운부 비단을 주려고 했는데 지영이가 필요 없다고 거절했잖아요. 제가 정말 어렵게 구한 비단이었어요.”유씨 노부인은 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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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한편, 유씨 노부인은 내관을 따라 자녕궁으로 향하며 감회에 젖었다. 십이 년만에 다시 와보니 역시 경성의 번화함을 따라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자녕궁 대문에 들어서자 서 태후의 최측근인 소 상궁이 다가왔다.“유씨 노부인이신가요? 태후마마께선 지금 불공을 드리고 계시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소 상궁이 친히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유씨 노부인의 웃음은 한층 짙어졌다.“태후마마께서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유씨 노부인이 보기에 태후도 결국 아녀자의 몸이니, 권세를 빌릴 사람이 필요할 터였다. 지금 유씨 가문의 가세라면, 태후가 아첨하려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했다.“예, 늘 그러셨지요.”소 상궁의 말투는 담담했다.그녀는 유씨 노부인을 불당 안으로 들였다.희미하게 봉황포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염주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전각 안에는 향까지 타고 있어 자욱한 향내가 가득 배어 있었다.소 상궁은 예를 올리려는 유씨 노부인을 막아섰다.“태후마마께서는 불공 중에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노부인, 이쪽에서 기다리세요.”소 상궁은 바닥을 손으로 가리켰다.유씨 노부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소 상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태후마마께선 노부인도 평소 불공을 자주 드린다는 걸 들으시고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유씨 노부인은 하는 수없이 이를 악물고 찬 바닥에 무릎을 굽혀 꿇어앉았다.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살을 가르는 듯한 한기가 무릎을 통해 온몸에 전해졌다.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유씨 노부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사방은 적막하고도 근엄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유씨 노부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반 시진이 흘렀다.서 태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씨 노부인은 이미 버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몸을 조금 움직이면 소 상궁이 다가와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노부인, 태후마마께선 불공을 드릴 때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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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군주께서 선주에게 준 것이었군요. 자매지간에 우애가 참 깊은 듯합니다.”정왕비가 얼른 나서서 거들었다.유지영은 장신구들을 다시 유선주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이렇게 귀한 장신구들을 저는 본 적조차 없습니다.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흠집이라도 나면 저는 배상할 여력이 없으니 선주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구나.”금비녀와 장신구가 모두 손에 돌아오자 유선주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지영아!”송씨가 이를 갈며 유지영을 낮게 불렀다.조령 장공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 국공부의 살림은 둘째 부인이 도맡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아는데 소문에는 큰댁 작은댁 할 것 없이 공정하게 대한다더니, 소문이 믿을 게 못되나 보군.”“그런 게 아닙니다….”송씨는 다급히 변명했다.“원래는 오늘 지영이도 비슷한 모양의 비녀를 하고 나왔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저희는 태후마마를 공경하는 마음에 정중하게 차려입었을 뿐입니다. 지영이 너도 빨리 장공주께 해명드려.”유지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제가 집을 나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은 것은 사실입니다.”“군주, 그렇다면 그건 군주가 잘못하였네. 분명 둘째 부인께서도 군주의 몫을 준비해 두셨다는데 어찌 말을 흐리고 해명을 하지 않아서 둘째 부인과 선주만 억울한 누명을 쓰게 만든 것인가?”정왕비가 유지영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첫눈에 이 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지영이가 원래 말주변이 없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송씨가 머쓱한 듯 웃으며 유지영의 팔을 잡아끌었다.“어서 장공주께 사과 말씀 드리거라.”조령 장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원래 금비녀가 두 개 있었는데 네가 스스로 이처럼 화려한 것이 싫다 하여 선주에게 주었고 선주는 네 마음을 거절하기 싫어서 이걸 꽂고 입궁한 것 아니니.”유지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유선주도 눈시울을 붉히며 억울한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는 숙모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 모르겠네요.”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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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정왕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조령 장공주가 웃음을 터뜨렸다.“정왕비께서는 미래의 며느리를 두둔하려고 아무 죄없는 처자를 모함하는군요.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자잘못을 따지자면 둘째 부인께 괜히 몇마디 한 제가 잘못이네요. 금비녀든 은비녀든 뭐가 중하겠어요. 안 그런가, 둘째 부인? 국공 부인의 혼수엔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믿지. 앞으로 경왕부에 혼수을 들고 갈 때 만약에 쓰레기로 숫자를 채우려고 한다면 현준이 그 녀석 성격에 징을 치며 동네방네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네.”조령 장공주의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국공부도 체면 있는 집안인데 아무리 큰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들, 담씨 가문도 아직 건재하고 태후마마도 계신데 남의 혼수을 도둑질하는 일은 하지 않겠지.”“괜한 걱정이십니다, 장공주 전하. 만약 차남댁에서 큰댁 혼수을 도둑질한다면 새로 부임한 유 상서가 국고를 도둑질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사람들은 너 한마디 나 한마디 우스개를 이어갔다.송씨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나서려는데 정왕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난 단지 어린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후배가 듣기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요.”말을 마친 정왕비는 아니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노려보았다.‘마음에 안 들어.’조령 장공주는 이렇게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정왕비는 자기 며느리를 두둔한다고 군주를 모함하였지요. 만약 군주가 해명을 하지 않았더라면 장녕 군주는 동생의 정혼자에게 집착하는 불결한 여인이 되었겠죠. 잘못을 따지는데 웃어른과 후배가 무슨 상관인가요? 하긴, 정왕부는 폐하와 태후마마의 신뢰를 받는 집안이니,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요.”“공주!”정왕비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원래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장공주인데 오늘 유지영을 위하여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체면도 있는데 정왕비가 어린 군주에게 사과할 수는 없었다.싸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유선주는 다가가서 유지영에게 무릎을 굽혔다.“언니, 왕비께선 몇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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