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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1화

"형님...""그래도 비바람을 피할 곳은 생기지 않았느냐."유정랑이 달래듯 말했다.그들은 일단 머물 곳은 구했으니, 나중의 일은 천천히 도모하기로 했다.지금은 어떻게든 할머니를 만나 뵐 방도부터 찾아야했다.자신을 가장 아끼는 할머니라면 절대 그들을 모른 체하지 않을 것이다.저택으로 들어선 유정남은 유지영을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아비가 늑대 새끼를 집안에 들일 만큼 노망이 나진 않았다."두 아이 모두 사리 분별을 할 나이가 지났으니, 아무리 거두어 먹여도 은혜를 모를 것들이었다."허나 오늘 숙태비의 처사는 참으로 지나치구나."유정남이 혀를 찼다.유지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게 말입니다. 숙태비께서 선주에게 주었던 예물을 도로 빼앗아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자비를 베풀어 거처를 내어주시지 않았다면 두 아이는 꼼짝없이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습니다."이 일은 반드시 밖으로 크게 키워야 했다.그녀는 숙태비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체면을 구기게 만들 생각이었다."네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겠지."유정남은 그리 말하고는 시종들에게 이 일을 유씨 노부인이 알지 못하도록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아버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습니다. 할머니께서도 언젠가는 아시게 될 테니, 차라리 먼저 말씀드리고 할머니께서 직접 결정하시도록 내버려 두시지요."유지영은 아버지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두었다.유씨 노부인을 속이려 들었다가 어느 날 불쑥 들통이라도 나면 더 큰 분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았다.만약 유씨 노부인이 유정랑 형제를 돌보겠다고 나선다 해도 굳이 막을 이유는 없었다.게다가 유지영이 보기에, 잇속에 밝은 유씨 노부인이 두 형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유정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은 아비가 알아서 처리하마."밖을 보니 어느덧 날이 꽤 저물어 있었다.유지영은 마차를 타고 경왕부로 돌아갔다.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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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다음 날이 되자, 숙태비가 국공부 차남댁으로 쳐들어가 재산을 모조리 빼앗고, 그 바람에 차남댁 두 적자가 오갈 데 없이 길거리에 나앉았다는 소문이 재빨리 퍼져나갔다.배현준이 은밀히 부추긴 결과였다.사람들은 숙태비가 수치를 모른다며 손가락질했다. 심지어 정왕부가 궁지에 몰리니 이제는 대놓고 빈집털이를 한다며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이 상황에서 가장 죽을 맛인 사람은 단연 담시령이었다.혼례 당일 밤에 부군이 끌려가더니, 시집온 첫날부터 등 떠밀려 혼수를 몇 상자나 바쳐야 했다.지금 정왕부 전체가 은자를 긁어모으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숙태비가 또다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불렀다.담시령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대청에 들어서자마자 뜬소문 때문에 길길이 날뛰는 숙태비의 모습이 보였다."새빨간 거짓말이다!""감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다니!"마당에 들어설 때부터 숙태비의 성난 욕설과 도자기가 깨지는 소음이 난무했다.정왕비가 곁에서 만류했다."어머님, 우선 고정하십시오. 이미 사람을 시켜 소문의 출처를 캐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루빨리 은자를 모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그 말에 숙태비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막 문을 들어서는 담시령에게 싸늘한 시선을 돌렸다."세자비, 성대하게 혼례를 치르고 우리 정왕부에 들어왔으니 이제 너도 정왕부 사람이다. 가문이 위기에 처했거늘, 뻔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담시령은 미간을 찌푸렸다.정왕비도 곁에서 거들었다."세자비는 사리 분별이 밝으니, 모른 척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압박해오자 담시령은 진퇴양난에 빠졌다.그녀는 손수건이 구겨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서, 겉으로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저도 정왕부의 식솔이니 마땅히 힘을 보태야지요."그렇게 그녀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혼수 스무 상자를 더 내놓겠다고 했다.정왕비는 즉시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기특하다 치켜세웠으나, 숙태비는 불만스레 혀를 찼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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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정왕부와 국공부 차남댁 두 집안 모두와 원한을 맺은 자는 유지영이 유일했다.담시령은 그 말을 듣고 번뜩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제가 시집오기 며칠 전, 지영이가 저희 집으로 와서 어머니께 정왕부에 큰일이 닥칠 것이라며 이 혼사를 무르라고 종용했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숙태비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유지영! 역시 그것이었어! 그 요망한 계집,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에취!"그 시각 유지영은 코끝을 문지르며 연신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홍주가 다가와 망토를 걸쳐주며 말했다."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마마께서도 건강에 유의하셔야 합니다."유지영은 말없이 담담히 미소 지었다.근래 들어 경왕부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배영준의 혼례가 임박하여 왕부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간혹 앞마당을 지날 때 마주치는 경왕비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이 혼사를 전혀 반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배현준의 말에 따르면, 요 며칠 경왕은 황제를 찾아가 봉지로 돌아가게 해달라 수차례 청을 올렸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그 탓에 경왕의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을 듯했다.그때 밖에서 경왕비가 행차했다는 전갈이 들려왔다.유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경왕비를 방비각 안으로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마당으로 나가니 수심이 가득한 경왕비의 얼굴이 보였다."왕비께서 어쩐 일로 방비각까지 오셨습니까?"경왕비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유지영이 문 앞을 막아선 채 안으로 들일 기색이 없자, 미련 없이 앞에 보이는 정자를 가리켰다."지영아, 네게 물어볼 말이 있어 들렀다. 저기 앉아서 얘기 좀 나누자꾸나."말을 마친 경왕비는 먼저 발길을 돌렸다.유지영은 잠시 고민하다 그 뒤를 따랐다.자리에 앉자마자 경왕비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영아, 솔직히 말해 다오. 묵산마을 일을 너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느냐? 방금 정왕비가 날 불렀는데, 담시령이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더구나.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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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경왕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어머님께서 가장 아끼는 아이가 현준이와 영준이, 두 적손이었다. 며칠 전에 서신을 보내 말씀하시길, 현준이의 혼례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몹시 애통해하시며 이번 영준이의 혼례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하시더구나."경왕비가 아무리 돌려 말해도 유지영은 일절 호응도 하지 않았다.결국 경왕비는 툭 까놓고 본론을 꺼냈다."네가 수고스럽겠지만 입궁을 좀 해주어야겠다. 태후 마마께 간청하여 우리가 영지로 돌아가 혼례를 치를 수 있게 허락을 받아 다오. 그래야 어머님께서도 한을 푸시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라면 어머님께서 경성으로 오실 수 있도록 윤허를 받아 와도 좋고."임 태비는 숙태비 못지않게 까다롭고 표독스러운 노인이었다.유지영은 그런 사람을 경성으로 모셔 와 사서 고생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그렇다고 경왕과 경왕비가 영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배현준의 계획이 틀어질 것이다."임 태비께서 경성으로 오셔서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비께서 직접 태비 마마의 귀경을 청하시면 되지 않습니까?"유지영은 짐짓 의아한 척 되물었다.애초에 경왕비가 혼례 후 처음 차를 올리는 자리에서 얕은수를 쓰지만 않았어도, 유지영이 태후를 찾아가 임 태비의 귀경을 막아달라 청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경왕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지영을 노려보며 물었다."네가 태후 마마께 청하여 태비의 귀경을 막은 것이 아니더냐?"유지영은 당연히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그녀는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임 태비 마마의 얼굴조차 뵌 적이 없거늘, 어찌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르겠습니까?""너... 너!"경왕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곳에 오기 전부터 화가 날 상황을 짐작하고 유지영과 옥신각신하지 말자며 수없이 다짐했건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어려웠다.그녀는 유지영의 얄미운 대응에 터질 것 같은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그럼 네가 태후 마마께 간청해 줄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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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아까는 정왕비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는데, 방금 유지영의 행태를 보니 묵산마을 일은 틀림없이 저것들이 벌인 짓일 거야!"경왕비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한편, 방비각.방으로 돌아온 유지영은 흔들의자에 누웠으나, 마음은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았다.그때 동금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정세자비가 억지에 못 이겨 혼수의 팔 할을 내놓아 정왕부의 구멍을 메웠다 합니다."그런 말을 들어도 유지영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숙태비의 독한 입놀림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는 데 탁월했다.어리석은 담시령이 그 기세를 당해낼 리 없었다.그러나 담시령이 미련하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다닌다는 사실은 퍽 불쾌했다.마침 밖에서 정세자비가 만남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왔다는 전갈이 들려왔다.서신을 힐끗 내려다본 유지영은 서늘하게 냉소했다."가서 그리 전하거라. 정왕부는 역모에 연루되어 있으니, 엉뚱한 불똥이 튈까 염려되어 만나지 않겠다고."운청은 그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담시령에게 전했다.담시령은 화가 치밀어 앙칼진 목소리로 추궁했다."네 상전이 정녕 그리 말했단 말이냐?"운청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정왕부의 죄명이 벗겨지지 않는 한 그것은 명백한 역모입니다. 정세자비 마마께서도 괜히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마시고 부디 자중하시지요!"말을 마친 운청은 미련 없이 돌아서 가버렸다.담시령은 분을 못 이겨 욕설을 퍼부었다."건방진 계집!"그녀가 유지영을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숙태비의 등쌀 때문이었다.숙태비는 유지영이 입궁하여 태후에게 자비를 구하기만 한다면,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지도 모른다며 그녀를 떠밀었다.담시령은 유지영을 구슬릴 온갖 변명거리까지 낱낱이 생각해 두었건만, 결국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오히려 수모만 당하고 말았다.그러니 이 수치를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세자비 마마, 경세자비가 뵙기를 거절하는데 이제 어찌합니까?"시녀가 곁에서 눈치를 보며 물었다."어찌하긴 뭘 어찌해! 내가 경왕부를 강제로 쳐들어가기라도 하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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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담시령은 숙태비가 신신당부를 하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정왕비가 찾아낸 서신 몇 통을 건네자, 담시령은 그것을 받아 들고 황급히 경왕부로 향했다.허둥지둥 쫓겨가던 조금 전과는 달리, 확실한 패를 쥐고 있으니 그녀의 기세도 매우 당당해졌다."가서 내가 다시 왔다고 전하거라!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우리도 체면을 봐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일러라!"담시령이 호기롭게 명하자, 시녀가 거칠게 대문을 두드렸다.소란이 일자 호위들이 다가왔지만, 시녀는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안하무인으로 소리쳤다."당장 경세자비를 모셔 오지 못할까! 그러지 않으면 우리 정세자비 마마께서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시녀는 악을 쓰듯 목청을 높였다.이 소란은 본채에 있는 경왕비의 귀에 가장 먼저 들어갔다.경왕비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정왕부도 눈이 멀었지. 어찌 저런 화상을 집안에 들였을까.""마마,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곁에 있던 소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담씨 가문 적장녀는 경성에서 꽤 평판이 좋았다.경왕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코웃음을 쳤다."어미인 담 부인은 저 살겠다고 진작에 고향으로 피신했는데, 저 미련한 것은 스스로 나서서 정왕부에 이용당하고 있지 않느냐. 악귀 같은 숙태비 성격에 그 큰 구멍을 메우느라, 이미 혼수의 대부분을 다 털렸을 게다."한참 후에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결국 견디지 못한 부관이 경왕비에게 달려와 고했다."마마, 저희 세자비께서 한사코 만나지 않겠다 피하시는데, 문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이 다 쏠리고 있습니다."그 말에 경왕비는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주물렀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대문을 열어 담시령을 들이라 명했다.대청.경왕비는 담시령을 맞아 자리에 앉히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조카며느리, 대낮부터 남의 대문 앞에서 이게 무슨 소란인가?"담시령은 경왕부에 뼛속 깊이 원한을 품고 있었다.배현준이 신혼 첫날밤에 부군을 잡아가지만 않았어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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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입에 담기도 힘든 상스러운 욕설들이었다.경왕비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소월에게 눈짓했다.잠시 후, 가문의 친척들이 대청에 도착했다. 그들 모두 담시령이 예전에 유지영이 배준형에게 보냈던 서신을 들고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불구경하는 마음으로 달려온 것이었다."이게 정녕 세자비의 필적이라고?""거짓은 아닌 듯하네요. 두 사람이 전에 약혼한 사이이기도 했고요.""이러니 정세자가 갑자기 정혼 상대를 바꿔 차남댁 따님과 혼인하겠다고 했겠지. 세자비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저마다 너 한마디, 나 한마디 떠들어댔다.하지만 경왕비만은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자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침묵만 지켰다."형님, 무슨 말씀이라도 좀 해보시지요."방현숙이 경왕비의 팔을 툭 치며 재촉했다.경왕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정세자비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이 서신을 지영이가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네. 세상에 남의 글씨를 흉내 내는 자가 어디 한둘인가? 게다가 모두 혼인 전의 일이야. 지영이가 우리 왕부에 들어올 때 정결한 몸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고."방현숙은 경왕비가 유지영을 두둔하고 나서자 제 귀를 의심했다.평소 두 사람이 앙숙처럼 지내온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그녀는 얼굴에 난 멍 자국을 어루만지며 분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정세자비는 지영이의 사촌 언니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로 함부로 동생을 모함하겠습니까?""본인이 직접 나서서 해명하기 전까진 함부로 결론지을 수 없네!"경왕비는 마치 돌부처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담시령의 말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고작 서신 몇 통으로는 유지영에게 흠집 하나 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만에 하나 담시령의 말에 동조했다가, 나중에 그 광인이 돌아와 또 난동이라도 부리면 감당할 수 없었다."이 서신이 여기 버젓이 있는데 어찌 가짜라 하십니까! 정 못 믿으시겠다면 유지영을 불러 직접 대질하게 하십시오!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고 방구석에 숨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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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습하고 어두운 감옥 안에는 코를 찌르는 역겨운 악취가 가득했다.담시령은 올라오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하지만 배현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담시령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몇 개의 옥문을 지나친 뒤, 마침내 배현준이 걸음을 멈췄다.담시령이 시선을 돌리자, 붉은 혼례복 차림 그대로 안에 갇혀 있는 배준형이 보였다!"부군!"담시령은 쇠창살에 매달리며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배준형은 그녀를 발견하고 눈가에 희색을 띠었다.마침 호위가 열쇠를 꺼내 철창문을 열고 있었다.배준형은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배현준과 시선을 마주했다.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배현준이 먼저 싸늘하게 냉소했다."설마 이 미련한 것이 널 구하러 왔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모욕적인 말에 담시령은 미간을 구기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감히 날 모욕하다니! 내가 그 추잡한 연서를 천하에 까발리면 경세자 당신도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텐데?"배현준은 담시령의 발악을 깔끔히 무시하고 호위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끌어내거라."호위 두 명이 다가가 배준형의 양어깨를 잡았다.배준형은 뿌리치려 했으나, 온몸에 힘이 풀린 탓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나왔다."배현준, 네놈이 감히 내게 사사로이 혹형을 가하다니!"그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곧이어 호위들이 그의 몸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경세자,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담시령이 말리려고 달려들었지만, 호위들에게 거칠게 제압당했다.짜악!무자비한 채찍이 배준형의 몸으로 날아들었다.살갗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매질에 혼례복은 찢어지고, 피범벅이 된 살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크윽!"배준형이 고통에 찬 신음을 씹어 삼키며 이마에 시퍼런 핏대를 세웠다.반면 배현준은 미리 준비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지극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담시령을 응시했다."방금 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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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네놈 짓이었구나!"담시령은 고개를 번쩍 들고 배현준을 노려보았다.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그렇게 그녀는 호위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감옥 밖으로 내쫓긴 담시령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시녀가 부축해주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어서, 당장 왕부로 돌아가자!"정왕부로 돌아온 담시령은 배현준이 한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했고, 그가 배준형에게 사사로이 혹형을 가했다는 사실까지 낱낱이 털어놓았다.쨍그랑!찻잔 하나가 담시령의 발치에 날아와 산산조각 났다.담시령은 고개를 들어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떨며 숙태비를 바라보았다."사람이 어찌 그토록 오만방자할 수 있단 말입니까!"정왕비 역시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폐하의 총애를 믿고 갈수록 안하무인이구나. 어찌 감히 사사로이 형벌을 가한단 말이냐!"아들이 모진 매질을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정왕비는 살이 도려지는 듯했다.그녀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들을 빼내 오고 싶었다.담시령 또한 배현준의 잔혹한 수단에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숙태비는 잘려 나가 텅 빈 자신의 반쪽 소매를 내려다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역시 그놈 짓이었어!"수십 년을 무탈하게 살아온 숙태비였다.그 외에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없었다.선황이 건재할 때는 후궁 비빈들과 앙금이 있었지만, 복수를 꾀할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했을 테고 지금까지 기다렸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물증이 없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어머님,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정왕비가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숙태비는 한참을 침묵했다.그때, 대문 밖에서 부관이 비단 상자 하나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태비 마마, 방금 누군가 왕부 대문 앞에 이것을 던져두고 갔습니다. 이것은... 세자의 의복이옵니다."상자를 열자, 역시나 배준형의 붉은 혼례복이 들어 있었다.혼례복 곳곳에는 시뻘건 핏자국이 흥건하게 배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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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경왕은 경왕비에게 거듭 당부했다."당분간은 병을 핑계로 침소에 누워 계시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아무도 만나지 마시오. 괜한 이상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경왕비도 그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궁에서 사람이 당도했다.상 내관이 경왕에게 말했다."전하, 폐하께서 세자를 궁으로 부르십니다. 지금 곧 입궁하라 하셨습니다.""당연히 가야지!"경왕은 즉시 시종을 시켜 상 내관을 방비각으로 안내했다.그는 황제가 이 시간에 왜 아들을 부르는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조금도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상 내관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현준과 유지영은 상 내관의 안내를 받아 입궁했다.두 사람이 출발하자마자 경왕은 곧바로 병을 핑계로 몸져누웠다.곁에 있던 경왕비가 불안한 듯 말했다."정세자는 숙태비가 끔찍이 아끼는 장손입니다. 그리 반죽음이 되도록 맞았으니, 이 일을 결코 가볍게 넘기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경왕은 코웃음을 쳤다."두고 보시오! 그 자식은 오늘 분명 호되게 처벌받을 테니!"그는 배현준을 위해 선처를 청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황궁.숙태비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오열하고 있었다."폐하, 부디 저희 정왕부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옵소서.""준형이는 오랫동안 올곧고 예의 바른 아이였습니다. 사람이 어찌 완벽하기만 하겠사옵니까. 설령 작은 잘못을 저질렀다 한들 명색이 세자인데, 경세자가 어찌 그 아이에게 이토록 끔찍한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숙태비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선황께서 살아계실 적에도 준형이를 여러 번 칭찬하셨사옵니다. 선황께서는..."숙태비는 급기야 선황까지 들먹이기 시작했다.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곁에 있는 어린 내관에게 눈짓했다."경세자 내외는 아직이냐?"어린 내관이 대답했다."폐하, 상 내관께서 두 분을 모시고 오는 중이라 하옵니다."황제는 그제야 미간을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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