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극 로맨스 / 피안을 거슬러 / Chapter 391 - Chapter 400

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391 - Chapter 400

556 Chapters

제391화

“안 됩니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경왕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핏기 없이 질린 얼굴 위로 두 눈만 벌겋게 충혈된 채, 다급히 다가가 경왕의 소매를 움켜쥐었다.“전하, 저 사람 말 몇 마디만 듣고 제 왕비 자리를 빼앗으시려는 겁니까?”배현준은 코웃음을 치며 임 태비를 바라보았다.“한 시진 안에 답을 듣겠습니다.”말을 마치자 그는 소매를 털어 올리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의 모습이 멀어지자 뜰에는 적막만이 내려앉았다.뜰을 가득 메운 시종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이쪽을 훔쳐보았다. 모두 긴장과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임 태비는 깊숙이 몸을 기대며 혀를 찼다.“살다 살다 아들이 아비의 방안일까지 간섭하는 건 또 처음 보는구나. 왕비는 그래도 제 어미인데, 어쩌면 저렇게 인정머리가 없단 말이냐. 고작 오해 하나였을 뿐이다. 황실의 일은 저 아이 말 한마디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 왕비 자리가 비면 그 아이들 셋은 모두 서출이 되고 말 것이다.”흥분한 임 태비는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경왕비는 여전히 경왕의 소매를 붙든 채 애원하듯 말했다.“전하, 이 집안의 가장은 전하이십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왕은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굳게 얼굴을 굳힌 그는 경왕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물었다.“오늘 일, 정말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정면으로 추궁당한 경왕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아직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셈이냐?”경왕의 눈에 분노가 치솟았다.“정말 시종들에게서 증거를 찾아내야만 인정하겠다는 것이냐!”조금 전까지 경왕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도 이미 마음속에 의심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배현준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일을 크게 벌였고, 세자 자리까지 걸어가며 끝까지 진상을 밝히겠다고 나섰다.그 모습을 보고 경왕도 모든 사정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저는….”경왕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임 태비를 바라보았다.임 태비는 깊게
Read more

제392화

경왕은 배현준이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왕비는 그래도 내 아이 셋을 낳아 기른 사람이다. 너무 몰아붙이지 말거라.”배현준은 단호하게 맞받아쳤다.“태비 마마와 경왕비가 손을 잡고 이모님을 함정에 빠뜨려 조씨 가문의 명예를 짓밟았습니다. 제가 이모님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겠다는데, 그게 어찌 잘못입니까?”그는 경왕보다 머리 하나 가까이 더 큰 체구로 우뚝 서 있었다. 압도적인 기세에 경왕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네가 궁에 들어간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배현준은 손을 한 번 내저었다.“평안, 손님을 배웅하거라.”“배현준, 정말 일을 여기까지 키울 셈이냐?”경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배현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제대로 벌하지 않으면 저들은 또다시 요행을 바라겠지요. 그때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그는 끝까지 일을 크게 만들 작정이었다.설령 조원금이 끝내 경왕비 자리를 얻지 못한다 해도, 지금의 경왕비만큼은 결코 계속 왕부의 안주인으로 둘 생각이 없었다.부자는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똑같이 타오르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한참이 흐른 끝에,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은 경왕이었다.“조원금을 왕비로 삼고, 여씨를 평처로 올리겠다. 그것이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다.”배현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옅게 웃었다.“세 아이를 이모님 슬하로 입적시키고, 여씨는 귀첩으로 두십시오. 그러면 아이들은 여전히 적자와 적녀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렇지 않으면 태비 마마께서도 남은 여생을 경왕부에서 편안히 보내시기는 어려울 겁니다.”또다시 협박을 받자 간신히 눌러 두었던 경왕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배현준! 적당히 하거라!”하지만 배현준은 그의 노여움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옷자락을 걷어 올린 그는 태연히 의자에 앉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Read more

제393화

그날 밤, 임 태비는 분이 풀리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입만 열면 배현준을 두고 인정도 없는 놈, 끝내 사람 구실도 못 하는 짐승이라며 거듭 저주를 퍼부었다.그럼에도 이튿날 아침, 경왕은 입궁해 교지를 청할 준비를 마쳤다.“전하.”여씨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경왕이 지나갈 길목을 막아섰다.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민경주와 배영준, 배옥준, 배유리까지 모두 따라와 있었다.털썩.네 사람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아버지, 어머니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배영준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간절히 청했다.배옥준도 뒤이어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수년 동안 이 집안을 위해 애쓰셨습니다. 공이 없다 해도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잠시 판단을 그르쳐 잘못을 저지르셨을 뿐입니다. 이미 깊이 뉘우치고 계십니다. 아들인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부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그러게요,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늘 온 집안을 돌보느라 마음을 다하셨습니다.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해 실수하신 것뿐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세 사람은 연달아 머리를 조아렸다.반면 민경주는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버님께서 이번에 물러서시면 다음에 또 어떤 일을 요구할지 알 수 없습니다. 고작 오해 하나로 어머님께서 왕비 자리를 잃게 되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처사입니다.”모두가 한마디씩 거들며 경왕을 설득하자, 경왕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그때 마침 배현준이 지나갔다.한 번 흘끗 바라본 뒤 그대로 지나치려 했지만, 배영준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님께서는 이미 세자이신데, 어찌하여 아직도 어머니를 놓아주시지 않는 겁니까?”“형님, 이번 한 번만 어머니를 용서해 주십시오.”배옥준도 거들었다.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배현준에게 쏠렸다.배현준은 혀를 차며 비웃었다.“어제 그 계략이 성공했다면 이모님은 첩이 되거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까지 끊으셨
Read more

제394화

“경왕 전하께서 제정신이란 말입니까? 멀쩡한 왕비를 첩으로 강등시키고 다른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니요?”첩실 류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당응성 역시 적잖이 놀라 곧장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알아보려 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당학이 사람을 제지하며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이미 어제 경왕부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아본 뒤였다.당학은 숨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이야기를 들은 첩실 류씨의 얼굴이 굳어졌다.“경왕비에게 잘못이 있었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왕부 전체가 세자 하나에게 휘둘릴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 경왕은 친부이고, 임 태비는 친조모인데, 둘이 힘을 합쳐도 그 아이 하나를 막지 못한단 말이냐?”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속으로는 여씨가 너무도 무능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어머니, 그런 말씀은 밖에서 하시면 안 됩니다.”당학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만류하자 첩실 류씨는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학아, 너는 경왕부 적녀와 혼인하는 몸이다. 여씨가 첩으로 강등됐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있느냐?”만약 배유리가 서녀가 된다면, 더는 당학의 배필로는 어울리지 않았다.당학은 담담하게 말했다.“외숙모께서 이미 혼사를 주선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바뀔 일은 없습니다.”“안 된다. 내가 장공주를 찾아가 보마.”첩실 류씨가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당학이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어머니께서 가시면 외숙모께서 마음 상하실 겁니다. 제 혼사 때문에 이미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배유리가 적녀든 서녀든, 제가 거절할 일은 아닙니다.”끝내 설득당한 첩실 류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당응성은 말없이 당학의 어깨를 두드렸다.“네가 고생이 많구나.”배유리의 처지는 한순간에 애매해졌고, 당학이 적장자로서 누릴 수 있었던 이점 또한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당응성은 미안한 마음에 앞으로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당학을 더 챙겨 주리라 마음먹었다.“아버지, 전
Read more

제395화

그날 경성에서는 두 가지 일이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다.하나는 유국공부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아들 유관성을 되찾았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왕이 본처를 첩으로 강등시키고 조씨 가문 차녀를 새 왕비로 맞아들인다는 일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후자보다 전자에 더욱 쏠렸다.마침내 유국공부에도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생겼기 때문이었다.친인식이 열리는 날, 유국공부는 이른 아침부터 축하객들로 북적였다.대문 앞에는 마차가 끊이지 않고 줄지어 들어섰고, 유지영 역시 일찍부터 국공부를 찾았다.“셋째 부인께서 축하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운청이 가져온 것은 최고급 옥여의 한 쌍이었다.유지영은 선물을 한 번 살펴본 뒤 말했다.“나중에 직접 셋째 숙모네에 들러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그동안 셋째네 사람들과 접촉한 이가 있었느냐?”“없었습니다.”유지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짙은 붉은빛 옷차림의 여인이 천천히 다가왔다.화려한 비녀와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조령 장공주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오늘은 국공부의 경사로운 날이니 예는 생략해도 좋다. 모두 일어나거라.”“감사합니다, 장공주 전하.”널찍한 뜰은 온통 잔칫집답게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시녀와 시종들 역시 길한 색의 옷을 입은 채 곳곳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주위를 둘러보던 조령 장공주는 곧장 유지영에게 다가왔다.“역시 경사가 있으면 사람은 얼굴부터 달라지는 법이지. 경세자비는 오늘 유난히 안색이 좋아 보이는구나.”유지영은 미소를 머금고 예를 갖췄다.“과찬이십니다, 장공주 전하.”조령 장공주는 그대로 곁에 선 채 목소리를 낮췄다.“예전에는 너와 곽 소저가 가까운 사이라는 걸 몰랐다. 혼사 문제에서도 다소 오해가 있었던 듯하니,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면 한다.”그 말에 유지영의 눈썹이 살짝 모아졌다.하지만 조령 장공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당학은 내 조카나 다름없는 아이다
Read more

제396화

하인이 다급히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세자비 마마, 모두 소인의 불찰입니다. 둘째 공자님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손님들을 따라 들어오셨기에 소인은 그저…… 손님 댁의 하인인 줄로만 알았습니다.”유지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오늘은 국공부의 경사스러운 날이니 이리 긴장할 것 없다. 그만 물러가거라.”그 말을 들은 하인은 그제야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리를 뜨면서도 유정랑을 매섭게 노려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큰누님은 왜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자는 큰형님이 아닙니다. 큰형님은 진작 죽었어요. 저자는 가짜란 말입니다!”유정랑은 눈시울을 붉힌 채 울먹였다.가짜라는 한마디가 떨어지자, 사방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지영에게로 쏠렸다.유지영은 오늘 연회에서 누군가 유관상의 신분을 의심하리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가장 먼저 나서서 시비를 걸 사람이 유정랑일 줄은 미처 몰랐다.“내 큰오라버니가 태어났을 때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헌데 네가 무슨 수로 가짜인지 안다는 것이냐?”유지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태의께서 직접 확인했고, 큰오라버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피를 섞어 친자임을 증명하셨다. 헌데 어찌 네 입에서는 가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냐? 설마 피를 섞어 확인한 결과마저 거짓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냐?”유정랑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큰누님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그 큰형님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너무 약해 돌도 채 되기 전에 요절했다고 하셨습니다.” “큰오라버니께서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셨던 것은 사실이다. 매장된 뒤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방씨 부부에게 발견되셨고, 때마침 명의를 만나 치료를 받은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신 것이다.”유지영은 그의 말을 받아 자연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말도 안 됩니다!”유정랑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거칠게 들썩이는
Read more

제397화

국공부의 연회는 유정랑이 한 차례 소란을 피운 일을 제외하면 끝까지 순조롭게 이어졌다. 축하 인사가 끊이지 않았고, 여러 전하들까지 직접 찾아와 자리를 빛냈다. 그들은 모두 유정남의 극진한 접대를 받았다.그 가운데는 배이수도 있었다.그는 친자 확인에 쓰인 물그릇을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얼굴에 스치는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연회 내내 말수도 극히 적었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차만 마실 뿐이었다.안채에서는 유지영이 직접 부인들을 맞이했다.조령 장공주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국공부에 충분한 체면을 세워 주었다.연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유지영은 담씨 가문에서도 축하를 전하러 사람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만 예물만 내려놓고 곧바로 돌아갔을 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 했다.“외삼촌께서는 큰오라버니를 만나 보지 않으셨느냐?”유지영이 의아한 얼굴로 운청을 바라보자, 운청이 조용히 답했다.“큰공자께 본분을 지키라는 말씀만 남기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지영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방온이 진짜든 가짜든 지금 겉으로는 분명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담성국 역시 마땅히 외삼촌이라 불려야 했다.무려 십육 년 만의 재회였다.그런데도 담성국이 보인 태도는 유지영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 실망을 애써 눌러 삼켰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다시 손님들을 맞이했고, 연회가 모두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했다.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있었다.유지영은 배현준에게 한마디 인사를 건넨 뒤 곧장 삼방의 거처로 향했다.뜰에는 이미 다과와 차가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 마치 그녀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했다.기척을 들은 정씨가 눈꺼풀을 가볍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망토를 걸친 유지영이 들어서고 있었고, 그 뒤에는 시녀 넷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고요한 뜰에는 정씨와 유정웅,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큰누님.”유정웅이 먼저 다가왔다.정씨도 억지로
Read more

제398화

유지영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영아, 원래 어머님께서는 그 쌍둥이를 모두 없애려 하셨다. 헌데 큰형님께서 목숨을 걸고 너를 지켜 낸 탓에 관성이만 빼앗기게 된 것이다. 네가 아직 어린 계집아이라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거야. 괜히 너까지 죽였다가는 큰아주버님의 분노만 살 테니, 여러 사정을 따져 결국 너만 살려 둔 거지.”정씨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쯤 유씨 노부인은 분명 창자가 끊어질 만큼 후회하고 있을 거라고.유지영은 차갑게 비웃었다.“무슨 위협이 되지 않아서 살려 둔 겁니까. 제가 죽었다면 어머니의 혼수는 전부 담씨 집안으로 돌아갔을 거잖아요.”유씨 노부인이 선심을 베풀어 그녀를 살려 둘 리는 없었다. 애초부터 다른 속셈이 있었을 뿐이다.정씨도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속셈도 있었던 게 사실이야.”“이 일을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유지영이 묻자 정씨는 고개를 저었다.“영아, 난 이 일을 정웅에게조차 말한 적이 없다. 네 아버지는 처음부터 큰형님을 믿으셨고, 너를 친딸처럼 아끼셨으니까.”유지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본래 아버지의 친딸입니다. 무슨 친딸처럼 아끼셨다는 겁니까?”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이 모든 건 송씨가 제 어머니를 모함하기 위해 꾸민 계략일 뿐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큰오라버니와 아버지가 피를 섞어 친자를 확인했습니다. 두 핏방울이 하나로 섞인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지요.”정씨는 순간 멍해졌다.“숙모께서는 아직 모르시겠군요. 유정랑이야말로 사생아입니다. 할머니께서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수십 년이나 속아 오신 거예요.”유지영은 가슴 깊이 치밀어 오르는 증오를 억눌렀다.송씨를 너무 쉽게 죽게 했다는 것이 새삼 한스러울 뿐이었다.정씨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고, 유지영은 오늘 유정랑이 국공부에 찾아와 소란을 피운 일의 전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었다.“둘째네 식구들은 장남댁의 작위를 탐냈고, 어머니의 혼수까지 손에 넣으려
Read more

제399화

셋째네 집을 나온 유지영은 경왕부로 돌아가지 않았다.그녀가 향한 곳은 유국공부였다.짙은 밤이 내려앉은 가운데, 온몸에서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송죽원에 들어선 그녀는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방을 바라보았다. 인사를 올리려던 시녀는 운청이 먼저 손짓으로 제지했다.고요가 깔린 뜰을 가로질러 회랑에 다다르자, 방 안에서 길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씨 어멈, 송씨 그 계집이 나를 속였구나. 관성은 정말… 정말 큰댁의 핏줄이었다.”오늘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유씨 노부인은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밤새도록 송씨를 욕하며 가슴을 움켜쥔 채 거듭 후회만 하고 있었다.그때 이씨 어멈은 창가 너머로 드리운 그림자와 희미하게 흔들리는 비녀를 발견했다.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척 급히 입을 열었다.“노, 노부인. 헌데 어째서 예전에 세자비 마마와 국공 어르신의 피는 섞이지 않았던 겁니까?”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유씨 노부인은 이를 악물었다.“십중팔구는 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 송씨가 손을 쓴 게 틀림없다.”쌍둥이 아버지가 다를 리는 없지 않은가.“송씨 그 계집이야말로 바람을 피운 게지! 그 일 때문에 내가 평생 둘째네만 감싸다가 정작 친손주들을 해치고 말았구나.”유씨 노부인은 끝내 눈물을 쏟아 내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이씨 어멈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노부인, 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때 큰공자는 분명 숨이 끊어졌는데, 어째서 다시 방씨 부부에게 발견된 것입니까? 그날 있었던 일에 뭔가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한창 흥분해 있던 유씨 노부인은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내가 분명 관성을 숨도 못 쉬게 꽉 눌러 죽였다.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었지. 그 뒤에는 육씨 어멈에게 시켜 난장터에 내다 버리게 했고.”‘숨도 못 쉬게 꽉 눌러 죽였다.’그 한마디에 유지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럼...... 육씨 어멈은요?”“진작 죽었다.”이씨
Read more

제400화

육씨 어멈의 죽음은 당씨 집안의 첩실 류씨 귀에까지 들어갔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죽은 것이냐?”시녀가 고개를 저었다.“나이가 많아 다리가 불편하셨는데,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두 사람은 친척 사이였지만, 첩실 류씨는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육씨 어멈은 어디까지나 하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시녀를 시켜 은자 천 냥만 보내게 한 뒤 더는 이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물었다.“큰공자는?”“마님, 큰공자께서 경왕부 유리 아가씨를 교외로 꽃구경하자며 불러내셨습니다.”‘꽃구경’이라는 말에 류씨의 미간이 다시 깊게 구겨졌다.“이런 때에 꽃구경이나 다닐 여유가 있다니. 그 경왕부의 아가씨도 행실이 단정한 아이는 아니구나.”배유리가 서녀가 된 뒤부터 그녀는 이 혼사가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시녀는 함부로 맞장구칠 수 없어 고개만 숙인 채 발끝만 내려다보았다.잠시 뒤 첩실 류씨가 입을 열었다.“장공주부에 다녀온 지도 꽤 되었구나. 오늘은 마침 한가하니 한번 들러 보자.”그녀는 예물을 준비하게 한 뒤 곧장 장공주부로 향했다.하지만 이번에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문 앞에서 발길이 막혔다.“이게 무슨 무례란 말이냐?”첩실 류씨가 눈을 치켜뜨며 화를 내던 순간, 마침 유영현주가 그곳을 지나가다 그녀를 발견했다.유영현주는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한 번 훑어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아버님께서는 임강으로 떠나셨고, 어머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한동안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마님께서는 돌아가시지요.”첩실 류씨는 얼른 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유영현주는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아 세웠다.“앞으로는 장공주부에 자주 드나들지 마십시오. 분수도 좀 지키시고요.”그 말을 남긴 채 안으로 들어간 유영현주는 사람들에게 대문을 닫으라고 명했다.쿵.굳게 닫힌 대
Read more
PREV
1
...
3839404142
...
5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