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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축복의 모든 챕터: 챕터 111 - 챕터 120

146 챕터

111화 훔친 왕관의 유효기한

‘새로운 태양’의 정식 론칭은 대성공이었다. 브랜드가 시장에 안착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기 시작하자, 한수진의 눈빛은 빠르게 계산적으로 변해갔다. 사내 입지를 굳히자마자 가장 먼저 아까워진 것은 매달 윤유진의 계좌로 빠져나가는 가온이의 막대한 병원비였다. 어차피 공정은 안정화됐고 데이터는 확보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었다.수진은 대표이사실 대기실로 유진을 불러 냉정하게 사직서를 던졌다.“이제 배가 제법 불러서요.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드니 몸이 무거워서 조만간 출산 휴가를 낼 예정이에요. 총괄 디렉터가 자리를 비우는데, 내 개인 어시스턴트인 유진 씨가 회사에 남아있을 명분이 없잖아요? 그동안 수고했어요.”출산 휴가를 핑계로 유진을 철저하게 용도 폐기하겠다는 잔인한 선언이었다. 유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당장 다음 달 가온이의 항암 치료비가 떠올라 눈앞이 아찔해졌다.“수진 씨, 제발요……. 제 디자인 권리 다 넘겨드렸잖아요. 가온이 완치될 때까지 병원비는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했으면서……!”“착각하지 마요. 내가 유진 씨 사생아 약값 대주는 자선사업가야? 더 구질구질하게 굴면 그동안 받아 간 돈까지 법적으로 다 토해내게 만들 테니까 조용히 나가요.”“그럼…… 퇴직금이라도…….”“퇴직금? 퇴직금은 입사 1년이 지나야 나오는 거야. 유진 씨 입사 1년 지났어?”수진의 냉정한 말에 유진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런 유진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수진이 쾡한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아, 혹시 노동부에 신고라도 하면 안 되니까. 퇴직금은 아니고…… 위로금은 조금 줄게.”수진의 적선하는 듯한 말이 유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온이의 병원비 영수증 생각에 그 적선을 거부할 권리마저도 유진에게는 없었다. 영혼을 갈아 넣은 대가로 돌아온 것은 완벽한 배신과 모욕이었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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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윤유진의 영입

경리단길의 후미진 골목, 낡은 공방의 문을 열었을 때 지수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적막이었다.공방 안쪽, 빛바랜 작업대 앞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유진의 모습이 지수의 시야에 담겼다. 그곳에는 한때 촉망받던 천재 디자이너의 자부심도, 젊음으로 생기 있게 빛나던 여자의 흔적도 없었다. 오직 잔인한 생활고와 비극에 처참하게 짓밟혀 바스러지기 직전인 아슬아슬한 어머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한수진은 병원비를 주었다고 생색을 냈지만, 그것은 겨우 가온이가 산소호흡기를 달고 기본 치료만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피 말리는 금액에 불과했다. 유진이 제 목숨보다 소중한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과 모정을 통째로 판 대가는 그토록 비참하고도 적선 같았다.구두 굽 소리에 유진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지수의 단정한 실루엣이 맺혔다.“……누구시죠? 당분간 문 닫습니다. 나갈 차비도 없어서 개별 의뢰는 안 받아요.”기계처럼 차갑게 밀어내는 유진의 앞에, 지수는 조용히 다가가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그 위에는 대학병원의 로고와 가온이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윤유진 씨. 저는 제이아우라의 대표 이지수라고 합니다.”지수의 단정한 자기소개에 유진의 입가에 뼈아픈 실소가 걸렸다. 수진에게 영혼까지 착취당하고 버려진 유진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지수의 말을 가로챘다.“당신도 저의 디자인을 사러 오신 건가요?”또다시 제 재능을 헐값에 사들여 왕관을 치장하려는 귀부인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유진의 처절한 방어기제였다.하지만 지수는 유진의 날카로운 적대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유진에게 디자이너로서의 계약이나 제안을 대뜸 건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수는 유진의 쾡한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수진과는 전혀 다른 나직하고 단단한 본론을 꺼냈다.“아니요. 저는 유진 씨의 재능을 사러 온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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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유진만을 위한 팀

지수의 품에서 한참을 목 놓아 눈물을 쏟아낸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제 눈물로 얼룩이 져버린 지수의 고급스러운 실크 드레스를 민망한 듯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이제 진정 좀 됐어요?”지수의 다정하고 따뜻한 물음에 유진의 눈가에 다시금 왈칵 눈물이 맺혔다. 지수는 그런 유진의 젖은 눈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그만 울어요. 눈가 짓물러져요.”지수의 다정한 달램에 유진은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그녀는 돌아서려는 지수를 붙잡고, 공방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카페로 지수를 이끌었다. 따뜻한 음료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유진이 굳은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대가 없는 호의는 믿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제가 당신에게 받은 이 거대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유진의 절박한 말에 지수는 설핏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저랑 비슷하네요. 사실 저도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지수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처음엔 유진 씨의 디자인이 탐났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뒷조사를 조금 해봤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태양>의 추악한 비밀도 알게 되었죠.”유진은 지수의 덤덤한 고백에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완벽한 비밀이라 믿었었다. 스스로도 결코 떳떳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그 지옥 같은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식을 위해 똑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지수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하지만 아까 공방에서 한 말도 전부 사실이에요. 난 당신의 그 빛나는 재능이 꺾이는 것도, 가온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원치 않아요. 그래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정을 내밀어 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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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더 문의 비밀

거대한 가림막이 처진 ‘더 문’ 빌딩의 리모델링 현장은 자욱한 먼지와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지수는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채, 제 든든한 양팔인 김민철 실장, 그리고 보안담당인 김철수와 함께 공사가 한창인 현장 내부를 천천히 걸었다.콘크리트 골조가 훤히 드러난 거대한 지하 공간에 멈춰 섰을 때, 철수가 태블릿을 펼치며 지수에게 나직하게 설명을 시작했다.“대표님, 요청하신 최첨단 보안 및 동선 제어 시스템 설계안입니다. 맞춤 서비스를 신청한 VIP 고객이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차량 번호와 안면 인식을 통해 그 사람의 동선이 실시간으로 확인됩니다.”철수의 손가락을 따라 화면 위의 3D 도면이 유연하게 움직였다.“지하의 비밀 물류 보관소에서는 고객의 사전 취향에 맞춘 제품들이 즉시 선별됩니다. 이 제품들은 고객들이 이동하는 일반 통로와는 완전히 분리된 전용 승강기를 통해 운반되므로, VIP 고객들은 매장에 머무는 동안 물류의 흐름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겁니다. 철저하게 대접받는다는 기분만 느끼게 만드는 구조죠.”이어 철수는 도면을 가장 최상층으로 올렸다.“그리고 최상층 시크릿 룸은 벽면 전체에 특수 전파 차단막이 설치됩니다. 외부에서의 도청은 물론, 내부에서의 영상 녹화나 음성 녹음까지 완벽하게 전파가 차단되는 절대 보안 구역입니다.”완벽했다. 단순한 명품관이 아닌, 상류층들의 은밀한 회동과 비밀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거대한 요새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요, 철수 씨. 오직 더 문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밀한 특권이 되겠네요.”지수는 철수를 격려한 뒤, 민철과 함께 리모델링이 진행 중인 1층과 2층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방을 둘러보던 지수가 민철을 향해 제 머릿속에 든 거대한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1층은 이미 A국에 잘 알려진 최고급 명품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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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인재 영입2

철수와 민철이 올린 프로필을 검토한 지수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두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수가 선택한 약속 장소는, 다름 아닌 아직 가림막이 쳐진 채 공사가 한창인 ‘더 문’ 빌딩 2층의 남성복 라운지 예정 부지였다.임시 테이블과 도면만 덩그러니 놓인 서늘한 콘크리트 현장에 도착한 두 남자는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았다.한 명은 클래식과 파격을 아우르는 독보적인 세공 감각을 가졌으나 자본과의 타협을 거부해 온 남성복의 천재, 테일러 권. 다른 한 명은 정재계 VIP들의 헤어와 스타일링을 전담하며 상류층 남성들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독창적인 독립 매장을 차릴 자금의 한계에 부딪혀 고뇌하던 명장, 정우진이었다.두 사람은 젊고 아름다운 여류 경영인인 지수를 보며 짐짓 관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테일러는 먼저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제이아우라의 이지수 대표님. 이런 먼지 구덩이 현장으로 사람을 불러내다니 꽤나 성격이 파격적이십니다.”테일러의 뼈 있는 도발에도 지수는 그저 나직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지수는 민철이 들고 있던 거대한 3D 입체 도면 패드를 두 사람의 한가운데에 툭 내려놓았다.“테일러 권 씨.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디자인은 그냥 낙서에 불과합니다.”테일러는 지수의 말에 사납던 인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당신이 디자인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거야.”“그래서 그렇게 디자인에 대해 잘 알고 계신 테일러 권 씨는, 1년 넘게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지 않으시나요?”지수의 서늘한 반격에 테일러는 준비했던 말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그의 숨겨진 이력을 날카롭게 읊조렸다.“CB에서 어시스턴트로 시작해 2년 만에 파격적으로 디자이너로 승진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너무 고집해서 결국 권고사직을 당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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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오닉스와의 제휴

지수는 김 여사의 ‘태양의 성좌’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준비한 블루 사파이어 커프스를 챙겨 성북동 김 여사의 저택을 방문했다.“여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지수는 두 개의 벨벳 상자와 함께 묵직한 서류 봉투를 김 여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또 하나의 상자를 꺼내 들었다.“그리고 이건 여사님을 위한 제 작은 성의입니다.”화사한 화이트 벨벳 상자 표면에는 ‘J’Aura’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상자가 열리자, 안에서 눈이 멀 것 같이 화려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과거 <새로운 태양> 시절 자신이 디자인했던 이어링의 완벽한 변형본이었다.은은한 파스텔 블루 빛의 안젤라이트가 갇힌 정교한 서클 케이지. 그리고 그 위를 장식한 건, 김 여사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수선화였다. 투명한 레몬빛의 황수정(시트린)으로 형상화된 수선화는 지독하게 아름다웠다.김 여사는 지수가 건넨 선물들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의뢰 비용은 이미 입금했어요. 음…… 내가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지수 씨에게 조금 더 성의 표시를 해도 될까요?”향후 사교계에서 지수에게 무엇이든 부탁할 수 있는 거대한 권리를 얹어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여사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의 제이아우라는 그 무엇도 여사님께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으니까요.”자신에게 굴러들어온 절대적인 주도권을 지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해 버렸다. 김 여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지수의 거대한 뒷배인 ‘오닉스’를 상기하곤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지수 씨가 누구에게 아쉬운 부탁을 할 위치는 아니지.”지수와 김 여사는 사교계의 흥미진진한 풍문들을 나누며 차를 마신 뒤, 이윽고 지수는 저택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김민철 실장이 신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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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Z의 초기작품

전날 지현과 함께 오닉스 협약 계약을 무사히 마무리 지은 덕분일까. 오랫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풀린 지수는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른 아침의 늦잠을 만끽했다. 복잡한 서류들은 전부 서재 책상 위로 던져둔 채였다. 침대 위에서 기분 좋게 뒹굴거리던 지수는 가만히 눈을 떠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A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그곳에 단단히 자리를 잡으면서, 언젠가부터 K국을 찾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었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오든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방, 그리고 계절별로 가장 트렌디한 새 옷들로 빈틈없이 채워지는 드레스룸. 공간 가득 배어 있는 가족들의 지극한 정성을 온몸으로 느끼자 메말랐던 가슴이 따뜻하게 충만해졌다.침대에서 일어난 지서는 방 한 켠을 서성이다가, 자신이 아주 어릴 적 디자인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끄적였던 포트폴리오 스크랩 파일을 발견했다. 한 장 한 장 바래진 종이를 넘겨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헉. 이렇게 촌스러운 디자인을 내가 했다고? 아니, 엄마는 이런 걸 진작에 안 없애고 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던 거야……”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홧홧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수가 민망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때, 열린 문틈으로 서윤주가 그런 딸의 모습을 눈에 새기듯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지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서 자신을 인자하게 바라보는 엄마를 말없이 마주 보던 지수는,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우리 딸, 오랜만에 옛날 작품들 보니까 기분이 어때?” “엄마, 무슨 질문이 그래. 너무 부끄러워. 나 정말 이때는 형편없었구나.”지수의 투정 어린 말에 윤주가 부드러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곁으로 온 윤주는 지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스크랩북을 같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딸의 머리를 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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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입양1

지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A국으로 돌아왔다. K국이 안온한 휴식처였다면, A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그리고 그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기 전, 지수에게는 반드시 끝내야 할 마지막 숙제가 남아있었다.“보육원으로 가주세요.”지수는 비서 민철에게 행선지를 알려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세 살배기 예인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해맑게 웃는 모습, 가지 말라며 붙잡던 간절한 눈빛, 헤어짐의 아쉬움을 애써 참아내던 표정까지. 아이의 모든 순간이 심장 깊은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대표님, 도착했습니다.”민철의 목소리에 지수는 길었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도진과 이혼하고 자신의 브랜드인 ‘제이아우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느라,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예인이를 보지 못한 터였다.차창 밖을 내다보니 낯선 차량에 호기심을 보이며 웅성거리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 무리 가운데서 가장 작고 동그란 얼굴을 한 예인이가 지수의 눈에 들어왔다. 지수는 급하게 차문이 열리자마자 내리며 예인이의 이름을 불렀다.“예인아!”지수의 목소리에 놀라 토끼 눈을 한 예인이가 낯선 듯 잠시 멈칫거렸다. 이내 지수의 얼굴을 알아본 아이가 하얗고 작은 통통한 다리로 거침없이 달려왔다.“조심해! 그러다 넘어진다.”지수가 얼른 몸을 낮춰 다가오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예인이는 지수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녀의 익숙한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아줌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아이의 나지막한 고백에 지수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뒤섞여 아이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미안해, 예인아. 아줌마도 예인이 정말 보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서 늦었어.”예인이는 오히려 미안해하는 지수를 위로하려는 듯,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톡톡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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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입양 2

지수는 담담한 태도로 가방 안에서 두툼한 가죽 서류 봉투를 꺼내어 원장 앞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지수는 이혼 전 성재가 준비해 준 입양 서류를 원장 앞에 펼쳐 놓았다. 서류의 준비 상태는 완벽함 그 자체였다. 도진과의 결별을 준비하던 그 지옥 같던 시간 속에서도, 지수는 예인이를 향한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성재를 통해 A국의 독신 입양 조건과 필요한 모든 법적 증빙을 미리 완벽하게 갖추어 두었던 것이다.원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서류를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겨보았다.재정 능력 증명: 제이아우라의 지분 및 세부 개인 자산 포트폴리오주거 환경 검증: 예인이를 위해 친환경 소재로 리모델링을 마친 저택의 도면과 실물 사진신원 자격 심사: A국 정재계 및 아동 심리 전문가들의 연명 추천서“이걸…… 도진 씨와 이혼하시기 전부터 혼자 준비하셨던 건가요?”“네. 제 삶이 어떻게 흔들리든 예인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책임지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법적으로 독신 입양이 요구하는 재산, 신원, 양육 환경 기준을 완벽하게 맞춘 서류입니다.”지수의 흔들림 없는 태도와 철저한 준비성에 원장은 깊은 감탄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수 씨의 진심이 이 서류 한 장 한 장에 그대로 묻어있네요. 이 정도라면 보육원 측에서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당장 법원에 제출할 기관 추천서와 동의서를 성심껏 작성해 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원장님. 그리고…… 염치 불구하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지수는 조심스럽게 원장에게 입양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예인이와 먼저 지낼 수 있는지 물었다.원장은 지수의 돌발적이면서도 간절한 질문에 잠시 서류를 보던 손길을 멈추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법적으로 입양 허가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아동을 미리 신청인의 집으로 데려가 키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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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든든한 내 편

지수가 처음 예인이를 입양한다고 했을 때, K국에 있는 부모님과 오빠가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온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입양 과정에서 이정환과 서윤주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결과, 예인이는 현재 리버파크에서 가장 좋은 방에 머물고 있었다. 화이트와 딸기우유 색으로 사랑스럽게 인테리어된 자신만의 방에서, 아이는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엄마, 아빠 고마워요."예인이를 겨우 재우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오는 정환과 윤주를 안으며 지수는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마음을 고백했다. 윤주가 지수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아니야, 우리가 고마워. 저렇게 사랑스러운 손녀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잖니?""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우리 딸 너무 장하다."정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동안 홀로 이 차가운 A국에서 온갖 풍파를 견디며 살아갔을 딸의 생각에 부모의 목이 메어왔다. 지수는 속상해하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활짝 웃으며 거실 한쪽에 쌓여있는 상자들을 바라봤다."엄마, 아빠. 그 전에 저것부터 같이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그래, 지현이 그 녀석은 아직 예인이가 아기라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야."K국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오빠 지현은, 사진으로 본 예인이의 모습에 완전히 반했는지 매일같이 선물을 보내오고 있었다. 또 한 명의 극성스러운 '조카바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얼마간 지수의 곁에 머물며 예인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던 정환과 윤주가 K국으로 떠나자, 평소에는 좁게만 느껴졌던 리버파크가 문득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진과 이혼한 후, 아니 이혼하기 전부터 홀로 서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졌다고 믿었건만. K국에서의 달콤했던 휴가와 A국에서 보낸 부모님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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