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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축복의 모든 챕터: 챕터 91 - 챕터 100

107 챕터

91화 지현의 본가

점심 무렵, 지현은 슬비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당장이라도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전했지만, 아직 동거를 허락하지 않는 슬비의 곧은 모습이 조금은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수줍은 모습 또한 슬비의 매력이었기에 지현은 조급한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도착했어.]지현의 문자에 슬비는 거울 앞에서 옷차림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웅장한 롤스로이스 고스트에 기대어 서 있는 지현이 보였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입에는 딸기 맛 막대사탕을 물고 있는 모습에 슬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오빠, 나 담배 냄새 싫어.’예전에 지나가듯 툭 던진 슬비의 말 한마디에, 골초였던 지현은 그날 이후 담배 대신 사탕을 입에 물기 시작했다. 슬비는 자신의 작은 취향 하나까지 온전히 배려해 주는 지현이 정말 좋았다."오빠."자신을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에 지현의 고개가 번쩍 들리며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오늘 왜 이렇게 이쁘게 하고 왔어. 이러면 나 본가에 너 데려가기 싫어지는데……."지현의 뜨거운 눈빛이 슬비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슬비가 고심 끝에 선택한 착장은 상류층의 엄격한 시선에서도 단정하면서도,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은 밀크티 베이지 컬러의 플리츠 원피스였다. 단아한 라운드넥 아래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실크 원단이 부드럽게 흐르며 과한 노출 없이도 슬비의 정돈된 실루엣을 완성해 주었다. 그 위에 걸친 숏 기장의 하얀 부클 재킷은 진주 펄이 미세하게 섞여 화사함을 더했고, 아코야 진주 귀걸이와 차분한 토프 컬러의 토트백까지 선을 넘지 않는 영리한 격식으로 무장한 착장이었다."나 이뻐? 다행이다."슬비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감추려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지현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고, 슬비의 머리가 차체에 부딪히지 않도록 매너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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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호 이성(理性)의 한계, 천재의 손끝

수진이 디자인실의 신뢰를 회복하고 기세를 올린 지 불과 사흘 뒤, 실제 제품을 가공하는 하청 공방에서 급박한 연락이 날아들었다. 기성 판매용 파인 주얼리 라인의 대량 가공 단계에서 원석에 미세한 실금(크랙)이 가기 시작했다는 보고였다.“각도 세팅 값을 다시 확인했습니까? 프레임의 연성이 문제인가요?”보고를 받은 수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개인 공방을 운영하며 기초부터 뼈를 깎는 노력을 해온 수재(秀才)였다. 수진은 냉정하게 어시스턴트인 유진을 대동한 채 직접 공방 현장으로 향했다.공방 안은 뜨거운 가열로의 열기와 장인들의 초조한 한숨 소리로 가득했다. 수진은 작업대 위에 놓인, 세팅 도중 쩍 갈라져 버린 안젤라이트 파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가공 압축기의 수평 압력이 한쪽으로 미세하게 쏠렸네요. 지그(Jig)의 가이드라인을 0.5밀리미터 넓히고, 백금 프레임의 연성을 높이기 위해 토치로 금속을 살짝 더 달군 뒤에 서서히 물려주세요. 그럼 압력이 분산되어 안 깨질 겁니다.”수진의 지시는 세공학적으로 아주 정석적이고 완벽한 처방이었다. 현장에 있던 베테랑 장인들 역시 수진의 막힘없는 지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이 지시한 대로 세팅 값을 수정하고 가공을 다시 시작하자, 확실히 처음에는 원석이 부드럽게 안착하는 듯했다. 수진은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역시 자신의 지식과 기본기는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었다.그러나 그 안도는 채 3분을 가지 못했다.쩍―!마지막 고정 작업을 위해 기계가 미세한 압력을 가한 순간, 투명하게 빛나던 안젤라이트 원석이 맥없이 갈라지며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연거푸 시도한 세 개의 원석이 모두 똑같은 지점에서 처참하게 터져 나갔다.“이, 이게 왜……?”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완벽한 물리적 설계였다. 수진이 가진 정석적인 이론으로는 도무지 이 비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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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새로운 태양' 론칭 쇼 1

‘총괄’이라는 직책은 수진이 생각했던 단순한 권력과 명예를 지닌 이름이 아니었다. 브랜드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고 조율하는 자리였으며 그 자리의 무게는 수진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수진은 기획실장 태준이 가져온 론칭 쇼 최종 실행 기획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수진의 눈빛은 진지했고, 도안을 보는 태도에는 보석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디렉터님, 전시관 내 메인 쇼케이스 조도 세팅 값입니다.”태준이 조명 기획안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수진은 미적 감각이 뛰어난 디자이너답게, 안젤라이트 원석의 부드러운 청빛을 가장 우아하게 살릴 수 있는 은은한 조명 앵글을 직접 짚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에 있어서만큼은 수진 역시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조도는 이 정도로 부드럽게 유지해 주세요. 안젤라이트 고유의 푸른 깊이감이 살아야 하니까요. 쇼피스가 놓일 전시대 배경도 이 톤으로 맞춰주시고요.”“알겠습니다. 디자인 연출 방향은 이대로 확정하겠습니다.”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태준이 내민 서류들은 VVIP 초청장 전달 방식, 의전 차량 동선 시나리오, 사교계 안주인들의 세부 좌석 배치도 등 고도의 사교계 프로토콜이 필요한 실무 영역이었다.“그리고 디렉터님, 사교계 핵심 인물들의 동선 조율 건입니다. 오 사모님을 포함한 주요 안주인들께서 입장하실 때 전용 엘리베이터 보안 라인을 동원할지, 아니면 메인 홀 리셉션을 거치게 할지 의전 매뉴얼을 확정해 주셔야 합니다. 한지수 디렉터 시절에는 사모님들의 개인 성향에 맞춰 동선과 프라이버시 가이드라인을 매번 세세하게 확정해 주셨거든요.”수진은 쏟아지는 자잘한 실무 질문들에 미간을 짓푸렸다. 보석을 아름답게 디자인하고 보여주는 영역은 자신 있었지만, VVIP들의 까다로운 의전 취향이나 자잘한 현장 통제 매뉴얼까지 신경 쓰는 것은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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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새로운 태양' 론칭 쇼 2

지수가 타이칸에서 내리는 순간 로비의 공기는 일순간 정지했다. 지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도진과 수진을 지나쳐, 차갑게 굳어 있는 오 사모님에게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사모님, 귀한 걸음 해주셨는데 입구가 너무 혼잡해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안쪽에 사모님만을 위해 특별히 조도를 맞춘 정갈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제가 직접 모셔도 될까요?”지수의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오 사모님의 서슬 퍼런 눈매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사교계의 생리를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는 지수의 영리한 대처였다. 지수는 동시에 뒤를 돌아 도진의 비서실장 태준과 짧게 눈을 맞췄다.‘지금 즉시 오 사모님의 동선과 VIP 입장 순서를 다시 꽉 쥐세요.’입술 모양만으로 전달된 지수의 지시는 태준에게는 구원과도 같았다. 태준이 급히 움직이며 무너진 의전을 수습하는 동안, 지수는 오 사모님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연회장 안으로 유유히 사라졌다.도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임신한 배를 가리려 블랙 드레스를 입고 안절부절못하는 수진과, 연회색 비단 드레스 위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며 판을 정리하는 지수. 만약 오늘 저 자리에 지수가 서 있었다면, 자신은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아닌 왕으로 군림했을 터였다. 수진을 향한 신뢰의 성벽에 커다란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화려한 음악과 함께 시작된 론칭 쇼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톱 모델 혜진과 진경이 수진의 메인 주얼리를 착용하고 런웨이를 돌 때마다 젊은 셀럽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백금을 덩굴처럼 꼬아 안젤라이트를 공격적으로 배치한 수진의 디자인은 확실히 화려했다.하지만 쇼장 앞줄을 가득 채운 진짜 ‘큰손’ 안주인들의 반응은 미묘했다.“디자인이 좀… 과하네. 젊은 친구들이 파티 때나 한두 번 찰 법하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차기엔 가시 돋친 듯한 그 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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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최고의 영광과 은밀한 그리움

‘새로운 태양’의 론칭 쇼가 끝난 호텔 연회장은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다. 젊은 셀럽들과 미디어의 찬사가 쏟아졌고, 패션 잡지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져 나갔다. SNS에는 실시간으로 안젤라이트의 화려한 광채를 담은 포스팅이 타임라인을 가득 도배하고 있었다.강도진은 완벽하게 재단된 턱시도 차림으로 고급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곁에 선 수진 역시 임신한 배를 영리하게 감춘 블랙 엠파이어 드레스 위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만끽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대중의 열광, 쏟아지는 호평 기사, 그리고 눈앞의 완벽한 결과물까지. 도진은 이제야 이지수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완벽한 제국을 완성했다고 확신했다.연회장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수진은 남모르게 연회장 한구석을 흘낏 보았다. 조금 전까지 사교계의 거물 사모님들에게 둘러싸여 잔잔한 찬사를 받던 지수의 빈자리였다. 오 사모님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고 유유히 행사장을 빠져나간 지수의 서늘한 잔상이 수진의 가슴 한편을 날카롭게 긁어내렸다. 수진은 샴페인 잔을 쥔 손에 은근히 힘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결국 대중이 기억하는 건 메인 디자이너인 나야. 네가 사모님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넌 흘러간 과거일 뿐이라고.’수진은 애써 몰려오는 불안감과 열등감을 지워내며 가장 화려한 미소를 얼굴에 걸쳤다.성공적인 론칭을 자축하며 두 사람은 호텔 최고층에 위치한 VVIP 스위트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창 너머로 서울 도심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위트룸에서, 도진과 수진은 오직 둘만의 은밀한 축하 파티를 시작했다. 도진은 최고급 빈티지 샴페인을 크리스탈 잔에 따랐고, 수진은 은빛 잔에 담긴 무알코올 샴페인을 채워 부딪쳤다. 오만한 승리감에 완전히 도취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넓은 방 안의 허공을 가득 채웠다. 도진은 수진의 배를 다정하게 문지르며 CB 그룹과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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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지수의 스캔들

강도진은 호텔 스위트룸 침대에 기대어, 제 품에 잠든 수진의 살짝 부풀기 시작한 배를 만지며 전날의 화려했던 론칭 쇼를 회상했다.이지수(Z)가 아니어도 브랜드가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지수가 아닌 그 어떤 누구도 제 옆에서 완벽하게 상류층의 의전을 조율할 수 없다는 비참한 한계를 깨닫는 자리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지수가 그토록 원했던 보육원 아이, 예인이의 입양 문제가 다시금 도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도진 씨, 그 아이는 후원으로만 남기면 안 돼?’‘난 예인이를 당신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이혼하지 않는 거야. 그 아이에게 완벽한 가정을 선물해 주고 싶으니까.’자신의 두 번의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지수가 단호하게 했던 말들이었다. 수진이 가진 배 속 아이를 선택하거나, 완벽한 아내인 지수를 선택하거나. 선택권은 온전히 제 손에 쥐어져 있는 듯했지만 도진은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예전의 지수였다면 무조건 내 선택을 받아주었을 텐데…….’도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제 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수진을 내려다보았다. 수렁에서 건져 올려 자신이 직접 빚어낸 완벽한 트로피였다. 수진이 주는 정복감과 성취감은, 지수가 주던 안온한 안정감과 본질이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래서 더욱 어느 하나를 버리기 힘들었다.결국 도진의 생각은 뻔뻔한 탐욕으로 이어졌다. 이번 브랜드가 대성공을 거두어 제 금 간 명성이 완벽히 회복된다면, 두 여자 모두 제 손아귀에 쥘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뉴스란을 켜기 전까지, 도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독점] CB그룹의 안주인 이지수, 의문의 재력가와 밀회… “타국까지 찾아온 지독한 그리움”화면 속 사진이 도진의 눈을 찔렀다. 사진 속 지수는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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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이혼

쿵,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지수의 걸음에는 한 톨의 미련도 섞여 있지 않았다.홀로 남은 도진은 지수의 흔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드레스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텅 빈 옷걸이들을 보며, 문득 지난 두 번의 스캔들 때마다 자신을 묵묵히 이해하고 곁을 지켜주었던 지수의 단단한 모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내가 너무 성급했나…….’가슴 언저리를 스치는 기묘한 불안감에 도진이 미간을 짚은 찰나, 타이밍 좋게 휴대폰이 울렸다. 수진이었다.“도진 씨! 방금 병원 검진 결과가 나왔어요. 우리 아이…… 아들이래요! CB 그룹을 이을 완벽한 아들이라고요!”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수진의 흥분된 목소리에 도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탐욕으로 물들었다. 후계자 확진.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방금 전의 찰나 같던 후회는 안개처럼 흩어졌다. 역시 지수를 내치고 수진을 선택한 제 판단은 지극히 타당했고 완벽했다. 도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며칠 뒤, 법원 앞에는 짜증스럽게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도진이 서 있었다.“역시 이지수, 강한 척하더니 막상 이혼하려니까 겁나서 못 오겠다는 거지? 이런 식으로 내 귀한 시간을 뺏어?”도진의 불만이 극에 달해 폭발하기 직전, 저 멀리 도로 끝에서부터 고요한 법원 마당을 찢을 듯한 서늘하고 정교한 가솔린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귀를 찌르는 파격적인 사운드와 함께 미끄러져 들어온 것은 강렬한 빨간색 마세라티 MC20이었다. 차가 멈춰 서고 시동이 꺼진 순간, 조용히 지켜보던 도진의 눈이 커졌다. 마세라티의 도어가 하늘을 향해 화려한 날개를 펴듯 우아하게 위로 열린 것이다.그 문틈 사이로 강렬한 빨간색 스틸레토 힐을 신은 매끄러운 다리가 먼저 드러났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몸매 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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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이혼 확정서 1

며칠 뒤 오전, 법원 주차장 구석에 육중한 진회색 마이바흐 한 대가 은밀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조정실에서 이지수에게 추잡한 불륜 증거 폭탄을 맞고 간신히 도장을 찍고 나온 강도진은, 평소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눈에 띄게 위축되어 있었다. 수진이 벨트를 풀고 내리려 하자, 도진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만류했다.“기자들이나 눈들이 많으니 난 차에서 기다릴게. 얼른 도장 찍고 와.”평소라면 당당히 에스코트해 주었을 도진의 소극적인 태도에 수진은 내심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임신 6개월 차에 접어들어 살짝 부풀어 오른 제 배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이제 이 고급스러운 마이바흐의 진짜 안주인은 자신이라는 오만한 승리감에 취해 문을 열었다.바로 그 순간, 수진이 내리려던 마이바흐 바로 옆 칸으로 도진의 차량과 똑같은 최고급 사양의 마이바흐 한 대가 거침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뒷좌석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을 확인한 순간, 도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지난번 '더 오리진' 쇼에서 지수의 곁에 서늘하게 서 있던 의문의 남자, 박진우였다. 지수에게 당한 처참한 패배감과 열등감이 번뜩 도진의 온몸을 지배했다. 도진은 순간, 저 남자의 소유였던 수진을 자신이 완벽하게 빼앗아 가졌다는 뒤틀린 소유욕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도진은 급하게 차 문을 열고 내려 수진을 제 품에 와락 안아 들었다. 그리고 옆 차에서 내린 진우가 보란 듯이, 수진의 이마에 진하게 축복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수진은 당황하면서도 이내 어깨가 한껏 으쓱해졌다. 도진은 옆 차의 남자를 매섭게 곁눈질하며, 수진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소리 내어 코웃음을 쳤다.“네 전남편, 오늘 이혼한다고 무리 좀 했나 보네? 어디서 회장님 차 기사 알바라도 뛰는 거야, 아니면 마지막 날이라고 일일 렌탈이라도 한 건가? 허세가 참 눈물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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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이혼확정서 2

법원 앞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긴 박진우는 현지와 현수를 데리고 명품 아동복 매장으로 향했다. 수진은 한 걸음 뒤에 서서 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날카롭게 주시했다.“현지야, 현수야.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다 골라.”하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갖고 싶은 것은 엄마의 남자친구인 강도진이 전부 해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진우는 아이들이 수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사고 싶은 게 없으면 안 사도 괜찮아. 다른 거 하고 싶은 거 있어?""키즈카페 가고 싶어요. 그리고 놀이동산도…….""키즈카페는 오늘 가고, 놀이동산은 시간이 안 되니까 주말에 가자."진우가 아이들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자,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현수가 걱정스러운 듯 수진을 돌아보았다."엄마가…… 놀이동산 가는 걸 허락해 줄까요?"진우는 현수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들어 수진을 바라보았다."허락해 주실 거야."수진은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아이들 앞에서 거절할 명분이 없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식사를 위해 이동한 곳은 최소 6개월 전에 예약해야 올 수 있다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의 외식에 신나게 밥을 먹더니, 이내 졸기 시작했다. 진우는 잠이 깬 현수를 다독이고, 깊이 잠든 현지를 품에 안아 들었다.계산대 앞에 선 진우가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묵직한 검은색 메탈 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센추리온. 일명 '블랙카드'였다.도진을 만나며 상류층의 세계를 배운 수진은 그 카드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강도진조차 발급 거부를 당해 가질 수 없었던 부의 정점. 점원은 카드를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진우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결제 완료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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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새로운 시작

지수의 사적인 거처, 리버파크.그중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장 전망 좋은 방은 철저한 방음 벽체와 최고급 대리석으로 개조되어 오직 단 한 명의 VVIP만을 위한 프라이빗 접객실로 탈바꿈해 있었다. 사교계의 거물들이 주변에 "지수 씨와 차 한잔하며 친목이나 다지러 간다"며 완벽한 알리바이를 대고 은밀히 드나들기 최적의 요새였다.은은한 조명 아래, 사교계의 거물 김 여사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창밖의 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공간이 아주 아늑하고 좋군.”“믿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사님. 오늘 어떤 디자인을 원하시나요?”지수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급스러운 옷감 샘플 북과 정교하게 가공된 다양한 원석들이 담긴 보석함을 내밀었다. 김 여사는 화려한 원석들을 가만히 눈으로 좇다가, 이내 핏빛처럼 붉고 강렬한 광채를 내뿜는 최상급 루비 하나를 우아한 손짓으로 집어 들었다.“내달이 우리 큰며느리 생일이라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김 여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만큼은 상대의 바닥까지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지수는 김 여사가 집어 든 루비의 묵직한 아우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루비는 고대부터 '보석의 왕'이자, 스스로 타오르는 불멸의 불꽃, 그리고 가장 고귀한 혈통을 상징하는 원석이었다.지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서늘한 눈빛으로 김 여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하게 물었다.“여사님.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말해 보게.”“여사님께서는 며느님께…… 권력을 쥐여주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정통성을 이어받길 원하십니까?”순간, 접객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김 여사의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며느리에게 완벽한 승계권을 쥐여주어 아들의 강력한 칼과 방패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근본 없는 사생아 따위는 감히 비비지도 못할 가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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