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가장 잔인한 축복: Bab 261 - Bab 270

302 Bab

261화 칠흑 속의 단서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알리는 사내 안내 방송이 조용히 꺼졌지만, 유현은 사위가 가라앉은 디자인실 한구석에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하루 내내 찰스의 서늘한 멸시와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낸 끝이었다. 스케치북을 감싸 안았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오도독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유현은 도망치듯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꺼진 모니터에 얼핏 비친 낯선 잔상이 발걸음을 턱 막아서게 했다.짙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앉고, 며칠 새 체중이 줄어 귀신처럼 볼이 홀쭉하게 패인 형태. 한때 디자이너로서의 열정과 자부심으로 맑게 빛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텅 빈 절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유현은 그 기괴하고 피폐해진 자신의 모습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꺼진 모니터에 비친 참담한 몰골을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 기괴한 잔상을 지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유현은 홀린 듯 CB 본사 빌딩을 나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번화가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온사인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활기찬 음악 소리가 밀물처럼 밀려드는 거리에 서면 이 끔찍한 소외감이 조금은 씻겨 나갈 것 같았다.하지만 화려한 도심의 불빛은 유현의 어둠을 밝혀주지 못했다. 오히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유현의 발걸음에는 최소한의 생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 드리워진 어둠은, 밤거리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보다 훨씬 더 짙고 차가웠다.“……어? 유현이 아니야?”번화가 한복판, 인근 술집 테라스에서 대학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입사 동기 민우가 눈을 두드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의 뒷모습과 파리한 옆태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민우는 반가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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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화 차가운 계산서

싱가포르의 밤을 수놓은 마리나 베이 샌즈의 야경이 통유리창 전체에 눈부시게 펼쳐진 펜트하우스 파티장.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현악 4중주의 클래식 연주 소리와 묵직한 고급 크리스털 잔이 부딪히며 나는 청아한 타악음, 그리고 세계적 명사들의 기품 있는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파티장은 그야말로 화려함과 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잔에 부어지는 샴페인의 미세한 기포마저 황금빛 조명 아래 보석처럼 반짝였고, 차려입은 하객들의 턱시도와 실크 드레스는 억 단위의 장신구들과 어우러져 공간 전체를 압도적인 럭셔리함으로 채우고 있었다.그러나 그 찬란한 빛의 대홍수 한가운데,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서늘하고 묵직한 정적이 흐르는 구역이 있었다.버건디색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강도진이 파티장의 장엄한 장식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였다. 훤칠한 키와 각 잡힌 어깨, 날카롭게 날이 선 턱선과 타협을 모르는 눈빛.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화려한 열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서서히 식어 내렸다. 도진의 곁을 바짝 따르는 정지상 실장의 표정 역시 비장함과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대표님, 1시 방향입니다.”정 실장의 낮게 깔린 음성에 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통유리창 너머 야경을 배경으로, 샴페인 잔을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숏컷 헤어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보는 이를 자연스럽게 압도하는 당당하고 오만한 태도. Investment firm '오션블루'의 대표이사이자, 현재 벼랑 끝에 선 CB그룹의 숨통을 쥐고 있는 인물, 사라였다.도진은 망설임 없이 구두굽 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진이 풍기는 거대한 중압감에 사라를 둘러싸고 있던 사교계 인사들이 흠칫하며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섰다.“호텔 스위트룸 대신 이런 파티장에서 뵙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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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화 흑막의 얼굴

A국 CB그룹 본사 대회의실. 대형 스크린 너머 싱가포르에 있는 강도진 대표와의 긴급 화상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화면 속 도진의 얼굴은 몰라보게 파리해져 있었지만, 이사들의 거친 고성은 도진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회의의 안건은 매년 공개 입찰을 거치는 ‘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원석 확보 및 내년도 사업 방향이었다.“강도진 대표! 당신 장담과는 완전히 딴판 아닙니까! 올해 '검은 태양' 프로젝트로 거둬들인 수익률이 당초 목표치의 반토막도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아스테리아 입찰에 또 거액을 쏟아붓는 게 말이 됩니까?”도진의 대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최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스크린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성을 질렀다. 그 옆에서 자신의 총괄 입지만 유지하면 그만인 찰스 라인의 이사가 적당히 거들었다.“말은 바로 하시오! 비록 수익률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제이아우라와의 협업을 통해 바닥을 치던 CB의 브랜드 신뢰도와 상징성은 완벽하게 회복하지 않았습니까!”“신뢰도가 밥 먹여 줍니까? 회사는 이윤을 남겨야 하는 조직입니다!”“그렇다고 이미 강 대표가 매년 새로운 '검은 태양'을 시장에 발표하겠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한 약속을 저버리자는 거요? 약속을 어기는 순간 CB의 주가는 고꾸라질 겁니다!”이사회 내부가 찬반으로 갈려 시끄럽게 대립하는 동안, 화면 너머 도진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경멸과 피로가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자금을 구하러 싱가포르에서 핏똥을 싸며 구르는 동안, 회삿돈 한 푼 보태주지 않은 이사진들이 한가하게 입찰 따위로 밥그릇 싸움을 하는 꼬라지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마침내 도진의 이성이 툭 하고 끊어졌다.“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도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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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화 진짜의 무게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 응접실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은한 앰버 빛 조명이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공간이 품은 온도는 극도로 차가웠다. 통창 밖으로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으나, 방 안의 누구도 그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지 못했다.질문조차 되지 못한 도진의 피맺힌 음성이 허공에 산산이 부서졌다.진우는 도진의 질문에 단 한 마디 대답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비참하게 주저앉아 있는 도진을 무심하게 지나쳐, 스위트룸 상석 소파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깊숙이 자리를 잡고 앉을 뿐이었다.진우가 느릿하게 턱을 괴며 낮게 읊조렸다.“내가 했다라…… 글쎄? 난 당신한테 아무것도 강요한 적 없는데.”“……!”낮게 깔린 진우의 목소리가 도진의 귓가를 울리는 순간, 도진은 뇌리가 쿵 하고 깨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그의 말이 맞았다.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자신에게 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공개 입찰을 따내기 위해 오션블루에, 그리고 RV은행에 손을 벌리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모든 것은 지수에게 지기 싫다는 오기, 그리고 이 정도 재력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세상에 과시하고 싶었던 자신의 오만한 욕망이 스스로 벌인 일이었다.‘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부정당하는 완벽한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도진은 짓눌리는 중압감을 뚫고 이를 악물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꼿꼿한 태도로 진우의 맞은편 소파에 정갈하게 앉았다. 일단은 이 300억, 아니 어쩌면 500억으로 불어나 버린 처절한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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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화 판을 다시 짜다

A국으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도진은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창밖으로 짙은 밤하늘이 지나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진우가 던진 단어 하나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난 숫자를 믿지, 사람은 믿지 않거든. 내가 만족할 만한 수치를 가지고 와.’그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사업가로서 자격을 증명하라는 진우의 서늘한 시험대였다.A국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은 휴식조차 마다하고 CB 본사 대표실로 직행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존에 기획실에서 올라왔던 '검은 태양' 관련 보고서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이었다. 포장만 화려하고 추상적인 장밋빛 전망으로 점철된 서류 따위는 진우라는 거인의 눈을 단 1초도 속이지 못한다."대표님, 밤을 새우신 상태입니다. 일단은 조금이라도...""됐어, 지상아."도진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매섭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처음부터 다시 짠다. 검은 태양 프로젝트의 초기 투자금 집행 내역부터 지금까지의 실질 수익률, 그리고 향후 5년간의 리스크 관리 및 수익 전망치까지 전부.""전부... 말씀이십니까?""그래. 단 1원 단위의 오차도 없어야 해. 숫자로 진우를 설득한다. 그 남자가 납득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기간 연장 따위는 없다."도진은 직접 펜을 들고 재무제표와 시장 분석 자료를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했다. 오만과 자존심을 털어낸 도진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남이 작성해 준 보고서에 도장만 찍던 예전의 도진이 아니었다. 완벽한 숫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의 밤샘 작업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도진이 '검은 태양'의 수치를 재정립하는 데 몰두하고 있던 며칠 뒤, 지상이 굳은 표정으로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보안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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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화 무너지는 버팀목

도진이 A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CB 사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그 소식을 들은 유현은 거의 뛰어갈 듯이 대표실로 향했다. 찰스에게 매번 "쓰레기"라는 비하와 폭언을 들으며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도진의 따뜻한 시선과 자신을 안심시켜 줄 다정한 확인뿐이었다. 자신의 작업물이 정말 쓰레기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줄 단 한 마디가 절실했던 것이다.하지만 대표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유현 씨,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외부 연락도 전부 차단하시고 중요한 재무 서류 작업에 집중하고 계십니다."지상이 대표실 앞을 가로막아서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아주 잠시라도... 잠시만 얼굴만 보고 가면 안 될까요?""죄송합니다. 지금 대표님께는 1분 1초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투자금 유지와 관련된 건이라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유현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도진에게 유현의 불안이나 감정적 결핍 따위를 받아줄 여유는 단 1그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우가 요구한 수치를 맞추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마당에, 당장의 투자금 유지가 도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사활이 걸린 명제였기 때문이다.결국 유현은 도진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도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도진과의 연결고리가 차단된 채 시간만 흐르는 동안, CB 내부의 분위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뒤숭숭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출처조차 불분명한 흉흉한 소문들이 사내에 찌라시처럼 퍼져나갔다.‘강도진 대표의 판단 실수로 CB 물류 라인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직전이라는데?’‘뉴스에만 안 나왔지, 실상 CB가 속으로 다 망해가고 있대. 당장 다음 달 자금 돌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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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화 달콤한 계산, 엉뚱한 답

세계적인 톱스타 클레어가 자신의 개인 SNS에 ‘제이아우라(#J_AURA)’를 태그한 후 폭풍이 몰아쳤다.암암리에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인지도를 올리고 있던 제이아우라는 그 한 줄의 태그로 인해 전 세계 패션계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각국에서 주문 문의와 관심이 폭발적으로 쏟아졌고, 브랜드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하지만 이 눈부신 성장의 그늘 아래, 지수에게는 새로운 중대 고민이 싹트고 있었다.바로 그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수요를 충족시켜 줄 ‘공급 및 물류 시스템’의 문제였다.‘지금까지는 괜찮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무리야.’지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까지는 THE MOON 지하에 비밀리에 마련한 물류 시스템과, CB의 물류센터 일부 사용 권한만으로도 아슬아슬하게 물량을 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려는 지금, 그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다.자체적인 대규모 물류망을 새롭게 구축하자니 막대한 자본과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렇다고 이 호재를 모른 척 지나치기엔 제이아우라의 미래에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고민이 깊어질수록 지수의 이마에는 옅은 주름이 잡혔고,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무슨 고민 있어요?"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지수의 귓가를 두드렸다. 옆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척하며 지수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까지 면밀히 살피던 진우였다."아니요, 없어요."지수가 황급히 표정을 다잡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진우의 뾰족한 눈길을 속일 수는 없었다."에이, 거짓말."진우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 가벼운 농담조의 어조에 꽁꽁 굳어 있던 지수의 얼굴에 피식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이 비로소 생기 있게 살아난 것이다.진우는 그 틈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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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화 스쳐 지나가는 인연, 교차하는 궤적

집으로 달려온 지수는 숨을 가쁘게 쉬며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진우가 말했던 '최고의 물류 전문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정작 너무 당연해서 떠올리지 못했던 존재, 바로 오빠 이지현이었다.수신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수화기 너머로 지현의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지수냐? 이 시간에 웬일이야?]-"오빠! 지금 통화 괜찮아? 나 진짜 급해서 그래!"-[무슨 일인데 그래? 누가 너 괴롭혔어?]-지현의 목소리에 단번에 경계심이 서렸다. K국의 세계적인 물류 네트워크를 쥐고 흔드는 수장이었지만, 하나뿐인 동생 지수의 일이라면 제쳐두고 달려오는 그였다."아니, 그게 아니라! 제이아우라 해외 물류 문제 때문에 그래. 지금 브랜드 인지도가 터져서 글로벌 거점이 필요한데... 사실 진우 씨한테 듣기로 CB의 A국 주요 거점 물류센터 3곳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거든. 근데 내가 물류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대형 센터 3곳을 어떻게 최대로 활용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그걸 직접 운영할 수 있을지도 너무 고민돼서..."지수의 진지한 고민을 듣던 지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오더니, 지현이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CB의 물류센터 3곳이라... 간단해. 그 3곳의 물류 시스템을 전부 우리 오닉스(Onyx)의 물류 시스템으로 교체하면 돼. 오닉스 표준 시스템을 이식하면 그 3곳을 시작으로 전 세계 오닉스 물류망과 바로 직결시킬 수 있으니까.]-"진짜? 그렇게 쉽게 연결이 돼?"-[그럼. 그리고 운영 걱정은 하지 마. 당장 오닉스 본사에서 검증된 베테랑 물류 전문가를 제이아우라 쪽으로 파견해 줄 테니까. 그 친구가 물류는 전담해 줄 테니까 넌 제이아우라의 다른 부분만 신경 쓰면 돼.]-"진짜지? 오빠 진짜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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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화 유리그릇 위의 판돈

도진은 싱가포르에서 진우가 요구했던 완벽한 수치 재정립 보고서를 품에 안고 The Moon으로 향하는 차 안에 몸을 실었다.그때, 품 안의 보안폰이 찌르르 진동했다. 얼마 전 남미 쪽 라인을 통해 연락을 취해 두었던 고위 공무원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도진은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에 부탁했던 건 말이야, 사실인 것 같아.]-서툴지만 명확한 어조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현재 남미에 개발 예정인 광산이 확실히 존재하더군. 그리고 아스테리아 측과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가 사적으로 접촉한 적도 있어. 하지만 그 이상 깊은 정보까지는 알아내기 힘들어. 아, 그런데 아스테리아와의 협상이 순조롭지만은 않은 것 같아. 들리는 소문으로는 다른 개발사와도 접촉하고 있는 것 같거든.]-"그거면 충분합니다.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죠."-[그럼 나야 고맙지. 그리고... 요즘 제이아우라인가? 그쪽에서 이런 건을 아주 깨끗하게 처리해 준다더군.]-도진은 그 말에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마 근육을 팍 찌푸렸다."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하하, 꼭 거기서 해달라는 건 아니야. 난 누가 하든 일만 깨끗하면 되니까.]-상대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눈치가 빠른 도진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 공무원이 원한 것은 제이아우라를 통해 발행된다고 암암리에 소문난 '아스테리아의 원석을 이용한 보석'이었다.최근 상류사회에서는 비자금 조성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을 깨끗하게 환원하고 싶다면 제이아우라의 이지수를 찾아가라는 암묵적인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지구 반대편 남미 정부의 고위층 귀에까지 퍼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 상대가 원해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 생겨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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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화 달콤한 독배, 빼앗긴 거점

도진의 초조함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진우는 여유로운 태도로 식어버린 차를 바꿔 오라며 비서실에 인터폰을 연결했다. 그러고는 태준에게 준비해 둔 서류를 들고 들어오라고 지시했다.잠시 후, 비서 태준이 새로 준비된 차와 한 뭉치의 서류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태준은 한때 자신의 상사였던 도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ネ, 도진의 곁에 서 있던 지상과도 조용히 눈인사를 나누었다. 찻잔을 다시 세팅한 태준이 진우에게 서류를 건네고 문을 나서자, 도진의 시선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태준의 뒤모습을 멍하니 쫓아갔다.진우는 도진의 그 흔들리는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옛 직원이 많이 반가우시죠? 저는 강 대표님께 참 고마운 게 많은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들을 제게 많이 보내주셨거든요."진우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곁에 앉아 있던 지수의 손을 자연스럽게 덮어쥐었다.지수는 순간 놀란 듯 진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르르 표정이 풀리며 진우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도진은 그 모습에 속에서 비틀린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 언제나 자신만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그 미소가,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슴을 찌적거렸다.지수가 은근슬쩍 진우의 손에서 제 손을 뺀 뒤 장난스럽게 쳐다보자, 진우는 아쉬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진은 두 사람 사이의 그 친밀한 분위기조차 견디기 힘들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어색해진 공기를 쇄신해보고자 도진은 애써 두 사람을 못 본 척하며 새로 들어온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하지만 입안에 퍼지는 유난히 쓴맛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진우는 그런 도진의 표정을 보며 설핏 실소를 터뜨리더니, 마침내 도진이 그토록 갈망하던 말을 꺼냈다."기간 연장, 해드릴 수 있습니다."도진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덜컥 내려놓았다.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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