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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장 잔인한 축복: Chapter 281 - Chapter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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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화 닻을 올리는 시선

제이아우라 대표실. '더 문' 2층의 폭발적인 열기와 길게 늘어선 줄을 내려다보던 진우의 비릿한 웃음에 지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강도진을 옥죄어 오는 300억 투자 연장 압박과 200억 RV은행 대출 만기. 그러나 도진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하지만 그에게는 파멸의 결정타가 될 무기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지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가를 부드럽게 올려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강도진이 잊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어요. '영원한 사랑' 디자인의 재계약 기간이 다가온다는 걸요."지수의 상큼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에 진우의 눈매가 유쾌하게 호선을 그렸다."또 한차례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군요.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올릴 거죠?"지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제이아우라의 향수를 사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 매장 속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그녀는 덤덤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젠 제가 만들 여력이 있는데, 아까운 내 새끼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없죠. 거기다 강도진은 에메랄드 광산까지 욕심을 내고 있으니…… 핑크 다이아몬드는 이제 그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겠어요?"도진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분신이자 최고 히트작, '영원한 사랑'을 이번 기회에 CB로부터 완전히 회수하겠다는 지수의 냉정한 결심이었다. 핑크 다이아몬드 신화에 가려진 채 남미 광산이라는 허황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도진의 앞날에, 지수는 이미 완벽한 퇴로 차단선까지 구축하고 있었다.늦은 저녁, 서초구의 한 조용한 빌라촌.유진의 집 안은 거실 가득 감도는 구수한 차돌된장찌개 냄새와 따스한 주황빛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착한 동생 유현이 저녁을 먹으러 온다는 연락에, 유진은 일찍 퇴근해 유현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정성껏 차려두고 기다리던 참이었다."어 왔어?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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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화 신기루의 진흙탕

남미 B국, 안데스 산맥 줄기 하단부에 위치한 에메랄드 채굴 예정지.CB 그룹과 강도진 대표의 최종 계약 전 현장 검증을 위해 이곳에 파견된 앤더슨은 수송용 SUV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고산지대의 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의 뒤로는 CB 본사 재무팀과 기획팀에서 파견된 행정 실무진, 그리고 앤더슨이 직접 대동한 전문 지질 스태프들이 연이어 차에서 내렸다.일단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유능한 투자자들의 눈을 속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갱도 초입에는 신식 고압 배수 펌프 라인과 균열 방지용 콘크리트 숏크리트 처리가 깔끔하게 도포되어 있었고, 최신형 유압식 굴착 장비와 광석 이송용 컨베이어 벨트가 마치 당장이라도 가동될 것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와…… 생각했던 것보다 설비가 훨씬 잘 갖춰져 있네요! 이 정도면 보고서 사진대로 바로 채굴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CB 본사 재무팀 실무진이 입을 떡 벌린 채 감탄을 연발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서류와 사진만 보며 투자를 망설이던 행정팀 직원은 단숨에 기대를 품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현지 관리팀장과 브로커들의 입꼬리가 은밀하게 올라갔다. A국에서 온 멍청한 엘리트들을 완벽하게 속여 넘겼다는 뿌듯함과 오만함이 그들의 눈빛에 번져 나갔다.그러나 앤더슨과 그가 데려온 지질 스태프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앤더슨은 겉포장에 감탄하는 본사 행정 실무진을 힐끔 바라보고는 카키색 작업용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용 초음파 암반 밀도 측정기와 정밀 지질 스캐너를 꺼내 들었다. 앤더슨의 짧은 턱짓 한 번에, 그와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지질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스태프들은 정돈된 장비들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신속하게 측정 장비를 설치하고 초입부 콘크리트 외벽의 미세 균열 수치와 흡수율을 측정했다."앤더슨 팀장님, 초입부 콘크리트 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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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화 통제력을 잃은 톱니바퀴

며칠 뒤, CB 그룹 대표이사실.강도진의 널찍한 집무실 책상 위에는 남미 에메랄드 광산에 대한 두 개의 각기 다른 현장 조사 보고서와 함께, 앤더슨 측에서 청구한 내역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담겨 있는 대금 청구서가 올라와 있었다.하나는 CB 본사 내부 조사단이 제출한 [투자 적격 및 사업성 우수] 보고서였다. 화려한 현장 사진과 최신형 굴착 장비, 완벽하게 정돈된 초입부 수치가 담긴 보고서는 도진이 원하던 바로 그 답을 보여주고 있었다.반면, 앤더슨이 제출한 보고서 하단에는 [현장 지질 밀도 및 지정 구역 외 암반 스펙트럼 재검토 필요 — 최종 투자에 신중한 판단을 요함]이라는 묵직한 경고성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정작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은, 지독히도 불친절한 보고서였다.도진은 앤더슨의 보고서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역시 세계 최고 전문가답게 기준이 깐깐하시군."도진은 본사 내부 조사단의 보고서에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앤더슨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원하는 100점짜리 대답은 해주지 않았지만, 이런 독보적인 인지도와 실력을 갖춘 전문가의 인정을 받아내야 투자자들과 이사진, 그리고 박진우를 완벽히 안심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앤더슨에게만큼은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처지임을 도진 역시 잘 알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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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화 빼앗긴 자리, 짙어지는 밤

CB 그룹의 명줄이자 대표 브랜드인 '영원한 사랑'의 디자인 사용 연장 거부 통보.내용증명 문서를 확인하자마자 허탈감과 경악에 빠졌던 강도진은 넋을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다음 시즌 주얼리 및 패션 라인의 메인 젖줄이 끊기는 것은 물론, 이 소식이 시장에 알려지는 순간 CB의 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락할 것이 분명했다.도진은 급히 제이아우라 본사로 향했다. 이지수를 직접 만나 어떻게든 설득하고, 필요하다면 판권료를 몇 배로 더 얹어주어서라도 마음을 돌려야 했다.하지만 제이아우라 로비에서 도진을 맞이한 것은 차가운 정적과 서늘한 안내 데스크 직원의 반응뿐이었다."죄송합니다, 강 대표님. 이지수 대표님께서는 사전 약속이 잡혀있지 않은 방문객은 일절 접견하지 않으십니다.""내가 그냥 방문객이야?! 이지수 대표한테 강도진이가 왔다고 직접 전해! 당장 내려오라고 해!"도진이 고성을 지르며 억지를 부렸지만, 경비원들이 냉정하게 그를 막아섰다. CB의 총수이자 과거 이지수의 남편이었던 그 화려했던 후광은 제이아우라 사옥 내에서 단 1g도 작동하지 않았다.결국 정문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도진은 이대로 돌아설 수 없었다. 제이아우라의 본사이자 플래그십 스토어인 '더 문(The Moon)' 건물 뒤편, 직원 전용 주차장 입구가 한눈에 보이는 외진 길목에 차를 대놓고 시동을 끈 채 지수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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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화 헛된 망상, 서늘한 칼날

전날 밤, 강도진이 리버파크 문밖의 차가운 차 안에서 질투와 집착에 휩싸여 처절한 좌절감을 맛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별개로, 이지수는 더없이 편안하고 아늑한 밤을 보냈다.아침 일찍 일어난 지수는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완벽한 컨디션으로 제이아우라 사옥에 출근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 '영원한 사랑'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지식재산권을 CB 그룹으로부터 단 1%의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회수해 오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제이아우라 대회의실. 지수의 앞에는 제이아우라와 Rv그룹의 통합 법률팀을 이끄는 박성재 변호사를 비롯해, 지수가 디자이너 'Z'로 활동하던 초창기부터 그녀의 디자인 저작권 조언을 전담해 온 베테랑 IP(지식재산권) 전담 변호사들이 서류 더미를 쌓아놓고 모여앉아 있었다.지수는 커피를 한 머그잔 들고 석상처럼 단정한 자세로 앉아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CB 측에 공식적인 내용증명 문서를 발송했지만, 강도진 대표는 자신들의 최대 매출원이자 대표 상품인 '영원한 사랑'을 절대로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쪽에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지를 부리며 버티려 들겠죠. 하지만 우리는 모든 법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완벽하게 뺏어와야 합니다."지수의 말에 박성재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변호사들은 CB 측이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들고 나올법한 온갖 가상의 공격 시나리오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박 변호사님, 저쪽에서 혹시 디자이너 Z 시절 CB 그룹의 자본과 마케팅 지원이 없었다면 '영원한 사랑'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형성되지 않았을 거라는 '기여도 지분' 논리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요?"한 젊은 변호사의 질문에 옆에 있던 선배 변호사가 허탈한 실소를 터뜨렸다."에이, 설마요. 원작자의 독점적 지식재산권이 명시된 계약서가 있는데 아무리 급하다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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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화 자신의 자리를 찾는 법

'영원한 사랑'의 디자인 사용권 종료 통보라는 메가톤급 악재로 CB 그룹 사내 법무팀과 주요 경영진이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상층부의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1층 플래그십 스토어와 이벤트 홀의 분위기는 완전히 딴세상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CB의 메인 디자이너 찰스가 주축이 되어 준비한 홀리데이 컬렉션 라인이 드디어 베일을 벗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아직 세계적인 명성가이자 정재계의 주목을 받는 클로이의 결혼식 날짜가 다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패션가 안팎에서는 이미 그녀의 웨딩드레스와 메인 주얼리, 그리고 연회용 액세서리 일체를 CB 그룹이 독점 협찬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브랜드의 이미지 추락을 막아야 하는 CB 입장에서도, 명성을 유지해야 하는 찰스의 입장에서도 이번 홀리데이 라인은 사활을 건 마케팅의 장이었다.여기에 찰스의 머리에서 나온 감질나는 영업 전략도 한몫했다. 찰스는 메인 피스를 한 번에 모조리 공개하는 진부한 방식 대신,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은 서브 피스들부터 총 5회에 걸쳐 순차적으로 발표하는 독특한 마케팅 방식을 취했다.그 전략은 완벽하게 시장에 먹혀들었다. 베일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패션 매체와 유명 인플루언서, 그리고 패션 피플들의 기대감은 마치 폭발하듯 최고조로 치솟았다. 각종 SNS와 패션 포럼은 CB의 새로운 홀리데이 라인에 대한 찬사로 도배되고 있었다.그리고 총 5번의 순차 공개 구조 중 정확히 한가운데인 세 번째 드롭(Drop) 날. 세상의 조명이 집중된 이벤트 홀 중앙 무대 위에서 문제의 디자인이 베일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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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화 외통수, 그리고 마지막 밧줄

며칠 동안 핏발 선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법적인 허점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강도진과 CB 사내 법무팀이 내린 결론은 결국 단 하나였다.법적으로는 승산이 0%에 가깝다는 것.원작자 이지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성된 독소 조항과 관련 대법원 판례, 그리고 박성재가 이끄는 제이아우라 법률팀의 철통같은 방어막 앞에서 CB가 내밀 수 있는 법적 카드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이제 도진에게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도진이 직접 지수를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고 지난날의 정에 호소하며 바짓가랑이라도 잡는 것.마침 도진이 진우에게 보여주고 설득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완성했던 남미 광산 투자 계획서도 작성이 끝난 참이었다. 도진은 자신의 비서실장인 정지상을 불러, 지수와의 직접적인 면담 일정을 어떻게든 잡으라고 애원하듯 지시했다.그러나 제이아우라 측에 연락을 넣고 돌아온 정지상 실장의 보고는 차갑다 못해 서늘했다."대표님…… 제이아우라 측에 직접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이지수 대표님의 향후 한 달간 미팅 일정이 해외 바이어 및 내부 신규 프로젝트 건으로 이미 풀로 차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당장 시간을 내어드리기는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나야, 강도진이라고! 내가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다시 전해!"도진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지만, 정지상 실장은 난감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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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화 불꽃의 연대

유현에게서 [선배, 제 디자인을 찾고 싶어요]라는 문자를 받은 유진은 한동안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거대한 공룡 기업 CB와 업계의 유명 디자이너인 찰스를 상대로 개인이 싸움을 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간 디자인을 찾기는커녕 업계에서 영원히 매장당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유현의 진심 어린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던 유진은 고민 끝에 제이아우라의 이지수 대표를 직접 찾아갔다.유진으로부터 유현의 상황과 찰스가 벌인 스티치 커플구두 표절 건을 상세히 전해 들은 지수는 한동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거 디자이너 'Z'로 활동하며 수많은 모방과 압박 속에서 외롭게 싸워야 했던 자신의 옛 모습이 유현에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지수는 결단을 내리고 전화기를 들어 제이아우라와 Rv의 통합 법률팀을 이끄는 박성재 변호사에게 연락을 취했다."박 변호사님, 실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 한 명을 법적으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그 친구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절대 제이아우라 법무팀이라는 소속을 밝히지 마시고, 개인 변호사 자격으로 친절하게 자문을 제공해 주세요."지수의 섬세한 배려 덕분에 유현은 비밀리에 대형 로펌급 베테랑 변호사인 박성재와 직접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유현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그동안 보관해 두었던 스케치북, 가죽과 실의 특성을 세밀하게 기록한 개인 작업 일지, 그리고 컴퓨터 원본 도면 파일과 작성 일자가 적힌 데이터들을 테이블 위에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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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화 자유의 형태, 그리고 서늘한 반격

회식 자리 구석, 주니어 디자이너들의 솔직한 고백과 찰스를 향한 억눌린 불만이 터져 나온 후 유현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져 있었다.유현은 자신에게 진심을 내어준 동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던 이곳에서, 사실은 자신과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숨죽이고 있던 아이들의 존재를 비로소 직시한 순간이었다. 유현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조심스럽지만 단호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퇴사하고도 여러분께 계속 연락드려도 될까요?"유현의 갑작스럽고도 조심스러운 질문에 디자이너들은 순간 말을 멈추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유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또 오지랖을 부린 것은 아닐까, 타인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아 부담을 준 것은 아닐까 싶어 유현은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황급히 덧붙였다."아…… 혹시 마음이나 상처에 부담이 되신다면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기분 내켜서 부린 탐욕일 수도 있으니까요."그러자 한 디자이너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특유의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아이구, 유현 씨! 그게 아니에요! 저희한테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신 게 오늘이 진짜 처음이라서 너무 낯설고 놀라워서 그래요. 저는 언제든지 연락 환영입니다!""맞아요! 저도요! 매일 스케치북만 들여다보시길래 우리가 말 걸면 싫어하실 줄 알았어요. 우리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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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화 피와 욕망의 그늘

남미 에메랄드 광산 사업.박진우를 향해 내밀었던 투자 제안과는 별개로, 강도진은 남미 광산 지분 독점 확보를 위해 사력을 다해 총력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 브로커들과 개발팀이 끊임없이 요구해 오는 말도 안 되는 액수의 로비 자금과 현장 개발 비용은 이미 CB 그룹의 가용 자산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회사 공금에 손을 대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컸기에, 도진은 결국 자신이 보유한 개인 실물 자산들을 하나씩 조용히 처분하기 시작했다. 급매 수준으로 내던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동산과 자산의 덩치가 너무 크다 보니 선뜻 사겠다고 나서는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믿었던 부동산 중개업소에서조차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다"는 절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문제는 아무리 입속의 혀처럼 조용히 자산을 정리하려 해도, 패션 및 재계에 소문은 새어나가기 마련이라는 점이었다.며칠 동안 핏발 선 눈으로 뛰어다니던 도진이 머리를 식힐 겸 자신이 즐겨찾던 강남의 고급 프라이빗 바(Bar)에 들어서자, 순간 웅성거리던 내부 소리가 뚝 끊기며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도진이 구석 바 테이블에 무거운 몸을 묻자, 바 주인이자 오랜 친구인 지철이 다가와 그가 즐겨 마시는 싱글몰트 위스키 한 잔을 슬그머니 내밀며 입을 열었다."야…… 너 요즘 힘드냐?"뜬금없는 질문에 도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위스키 잔을 잡아챘다."무슨 헛소리야.""아니, 요즘 너 고급 빌라랑 실물 자산들 급하게 정리하고 있다고 업계에 소문이 파다하길래."도진은 참았던 깊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잔을 들이켰다."아니야. 그냥 필요 없는 것들 깔끔하게 정리하던 중이야.""포스트 빌리지도 내놨다며?""거긴…… 지수랑 신혼집이었잖아. 그리고 수진이하고도 관련이 있고 해서 정리하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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