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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화 차가운 계산서

Author: 릴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0 17:01:51

싱가포르의 밤을 수놓은 마리나 베이 샌즈의 야경이 통유리창 전체에 눈부시게 펼쳐진 펜트하우스 파티장.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현악 4중주의 클래식 연주 소리와 묵직한 고급 크리스털 잔이 부딪히며 나는 청아한 타악음, 그리고 세계적 명사들의 기품 있는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파티장은 그야말로 화려함과 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잔에 부어지는 샴페인의 미세한 기포마저 황금빛 조명 아래 보석처럼 반짝였고, 차려입은 하객들의 턱시도와 실크 드레스는 억 단위의 장신구들과 어우러져 공간 전체를 압도적인 럭셔리함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찬란한 빛의 대홍수 한가운데,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서늘하고 묵직한 정적이 흐르는 구역이 있었다.

버건디색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강도진이 파티장의 장엄한 장식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였다. 훤칠한 키와 각 잡힌 어깨, 날카롭게 날이 선 턱선과 타협을 모르는 눈빛.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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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진이 A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CB 사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그 소식을 들은 유현은 거의 뛰어갈 듯이 대표실로 향했다. 찰스에게 매번 "쓰레기"라는 비하와 폭언을 들으며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도진의 따뜻한 시선과 자신을 안심시켜 줄 다정한 확인뿐이었다. 자신의 작업물이 정말 쓰레기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줄 단 한 마디가 절실했던 것이다.하지만 대표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유현 씨,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외부 연락도 전부 차단하시고 중요한 재무 서류 작업에 집중하고 계십니다."지상이 대표실 앞을 가로막아서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아주 잠시라도... 잠시만 얼굴만 보고 가면 안 될까요?""죄송합니다. 지금 대표님께는 1분 1초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투자금 유지와 관련된 건이라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유현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도진에게 유현의 불안이나 감정적 결핍 따위를 받아줄 여유는 단 1그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우가 요구한 수치를 맞추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마당에, 당장의 투자금 유지가 도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사활이 걸린 명제였기 때문이다.결국 유현은 도진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도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도진과의 연결고리가 차단된 채 시간만 흐르는 동안, CB 내부의 분위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뒤숭숭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출처조차 불분명한 흉흉한 소문들이 사내에 찌라시처럼 퍼져나갔다.‘강도진 대표의 판단 실수로 CB 물류 라인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직전이라는데?’‘뉴스에만 안 나왔지, 실상 CB가 속으로 다 망해가고 있대. 당장 다음 달 자금 돌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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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 응접실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은한 앰버 빛 조명이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공간이 품은 온도는 극도로 차가웠다. 통창 밖으로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으나, 방 안의 누구도 그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지 못했다.질문조차 되지 못한 도진의 피맺힌 음성이 허공에 산산이 부서졌다.진우는 도진의 질문에 단 한 마디 대답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비참하게 주저앉아 있는 도진을 무심하게 지나쳐, 스위트룸 상석 소파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깊숙이 자리를 잡고 앉을 뿐이었다.진우가 느릿하게 턱을 괴며 낮게 읊조렸다.“내가 했다라…… 글쎄? 난 당신한테 아무것도 강요한 적 없는데.”“……!”낮게 깔린 진우의 목소리가 도진의 귓가를 울리는 순간, 도진은 뇌리가 쿵 하고 깨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그의 말이 맞았다.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자신에게 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공개 입찰을 따내기 위해 오션블루에, 그리고 RV은행에 손을 벌리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모든 것은 지수에게 지기 싫다는 오기, 그리고 이 정도 재력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세상에 과시하고 싶었던 자신의 오만한 욕망이 스스로 벌인 일이었다.‘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부정당하는 완벽한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도진은 짓눌리는 중압감을 뚫고 이를 악물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꼿꼿한 태도로 진우의 맞은편 소파에 정갈하게 앉았다. 일단은 이 300억, 아니 어쩌면 500억으로 불어나 버린 처절한 협상

  • 가장 잔인한 축복   263화 흑막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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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잔인한 축복   262화 차가운 계산서

    싱가포르의 밤을 수놓은 마리나 베이 샌즈의 야경이 통유리창 전체에 눈부시게 펼쳐진 펜트하우스 파티장.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현악 4중주의 클래식 연주 소리와 묵직한 고급 크리스털 잔이 부딪히며 나는 청아한 타악음, 그리고 세계적 명사들의 기품 있는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파티장은 그야말로 화려함과 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잔에 부어지는 샴페인의 미세한 기포마저 황금빛 조명 아래 보석처럼 반짝였고, 차려입은 하객들의 턱시도와 실크 드레스는 억 단위의 장신구들과 어우러져 공간 전체를 압도적인 럭셔리함으로 채우고 있었다.그러나 그 찬란한 빛의 대홍수 한가운데,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서늘하고 묵직한 정적이 흐르는 구역이 있었다.버건디색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강도진이 파티장의 장엄한 장식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였다. 훤칠한 키와 각 잡힌 어깨, 날카롭게 날이 선 턱선과 타협을 모르는 눈빛.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화려한 열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서서히 식어 내렸다. 도진의 곁을 바짝 따르는 정지상 실장의 표정 역시 비장함과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대표님, 1시 방향입니다.”정 실장의 낮게 깔린 음성에 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통유리창 너머 야경을 배경으로, 샴페인 잔을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숏컷 헤어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보는 이를 자연스럽게 압도하는 당당하고 오만한 태도. Investment firm '오션블루'의 대표이사이자, 현재 벼랑 끝에 선 CB그룹의 숨통을 쥐고 있는 인물, 사라였다.도진은 망설임 없이 구두굽 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진이 풍기는 거대한 중압감에 사라를 둘러싸고 있던 사교계 인사들이 흠칫하며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섰다.“호텔 스위트룸 대신 이런 파티장에서 뵙게 될

  • 가장 잔인한 축복   261화 칠흑 속의 단서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알리는 사내 안내 방송이 조용히 꺼졌지만, 유현은 사위가 가라앉은 디자인실 한구석에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하루 내내 찰스의 서늘한 멸시와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낸 끝이었다. 스케치북을 감싸 안았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오도독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유현은 도망치듯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꺼진 모니터에 얼핏 비친 낯선 잔상이 발걸음을 턱 막아서게 했다.짙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앉고, 며칠 새 체중이 줄어 귀신처럼 볼이 홀쭉하게 패인 형태. 한때 디자이너로서의 열정과 자부심으로 맑게 빛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텅 빈 절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유현은 그 기괴하고 피폐해진 자신의 모습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꺼진 모니터에 비친 참담한 몰골을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 기괴한 잔상을 지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유현은 홀린 듯 CB 본사 빌딩을 나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번화가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온사인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활기찬 음악 소리가 밀물처럼 밀려드는 거리에 서면 이 끔찍한 소외감이 조금은 씻겨 나갈 것 같았다.하지만 화려한 도심의 불빛은 유현의 어둠을 밝혀주지 못했다. 오히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유현의 발걸음에는 최소한의 생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 드리워진 어둠은, 밤거리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보다 훨씬 더 짙고 차가웠다.“……어? 유현이 아니야?”번화가 한복판, 인근 술집 테라스에서 대학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입사 동기 민우가 눈을 두드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의 뒷모습과 파리한 옆태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민우는 반가운 마음

  • 가장 잔인한 축복   15화 원하지 않는 아이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

  • 가장 잔인한 축복   14화 너도 그 곳에 있구나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

  • 가장 잔인한 축복   13화 희망은 실망으로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

  • 가장 잔인한 축복   12화 D-5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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