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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축복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107 챕터

61화 지현의 기만

K국 '오닉스'사의 최상층, 지현의 사무실 안에는 그를 닮은 듯한 은은한 우드향과 시원한 바닷바람 같은 향이 조화롭게 감돌고 있었다. 차갑고 이성적이면서도 그 이면에 숲처럼 깊은 다정함을 숨긴 지현만의 고유한 체취였다. 슬비는 지현의 곁에서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금테 안경을 쓴 날카로운 눈매와 지수를 닮은 오똑한 콧날을 지나 얇은 입술에 눈길이 닿았을 때, 트리하우스에서의 고백과 첫 입맞춤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슬비의 뺨이 발그레해졌다.지현은 슬비의 감정 변화를 곁눈질로 훔쳐보고 있었다. 만족감에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그는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이 사무실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비서 박슬비가 아닌 '여자 박슬비'에게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슬비 씨, 지수를 힘들게 한 도진에게 약간의 심술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지현의 갑작스러운 말에 슬비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지현은 살짝 찌푸린 슬비의 미간과 그녀의 약지에 자리 잡은 커플링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아마도 오늘부터 각국의 세관에서 CB그룹의 물품에 대한 조사가 아주 정밀해질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그제야 슬비는 지현의 의중을 완벽히 이해했다. 배송 일자가 생명인 브랜드 론칭 시기에 무작위 세관 억류는 단순한 심술을 넘어 도진의 목을 조이는 치명적인 장난이 될 터였다."네, 대표님. CB사는 당분간 각국의 세관 문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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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지현의 선물

강도진은 책상 위에 놓인 어설픈 크레파스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 살배기 예인이 고사리 손으로 그린 '가족' 그림. 지수와 도진, 예인이 손을 맞잡은 조잡한 스케치에서 도진은 묘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예술품으로 가득 찬 사무실에서 그 도화지는 이질적이면서도 강렬했다. 어느새 그림은 집무실 중심을 차지했고, 매일 아침 이를 응시하며 업무를 시작하는 도진의 모습에 수진의 불안은 위험수위를 갱신하고 있었다.자신이 온갖 수단으로 빼앗은 도진의 일상이, 얼굴도 모르는 3살짜리 꼬마에게 침식당한다는 사실을 수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도진 씨, 내일 현수와 현지 유치원에서 ‘아트 페스티벌’을 하는데……”수진의 날 선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도진은 예인의 그림에서 눈을 떼고 수진의 허리를 습관적으로 안았다.“월차는 편하게 써. 그런 사소한 일까지 나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어.”“난 단순히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은 거예요.”수진은 도진의 머리를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낮게 읊조렸다. 순간 도진의 머릿속에 예인과 보냈던 평화로운 주말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예인의 행사였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행사는 수진의 아이들을 위한 자리였다. 도진의 아이를 품은 수진의 자존심을 건드려 득이 될 것은 없었다.“새로운 태양 팀이 막 론칭 준비 중이잖아. 잠깐 짬 내서 얼굴만 비칠게.”그것이 도진의 최선이었다. 돈으로 장난감을 사주는 것 외에, 진짜 아빠의 자리는 결코 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바쁜 거 알아요. 그 정도만 해줘도 충분해요.”수진은 미소 지었으나 눈빛에는 차가운 서리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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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승리의 도취

B국 세관의 요지부동한 태도 앞에 강도진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평소라면 오닉스의 이름값만으로도 통관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겠지만, 이번에는 마치 거대한 벽이 CB의 물류를 가로막고 있었다. 도진은 꼬박 사흘을 집무실 옆 휴식공간에서 쪽잠을 자며 B국의 고위직 인맥과 법무팀을 닦달했다.“무슨 수를 써서든 뚫어! 로비 자금을 두 배로 처넣든, B국 대사관에 줄을 대든 내 눈앞에 통관 확인서 가져오란 말이야!”도진의 고함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그는 지현이 이 상황을 설계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오닉스가 물류를 담당하는 수많은 화물 중 하필 운 없게 자신의 브랜드만 검역망에 걸려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전화 너머로 원칙을 운운하며 난처해하던 오닉스의 담당자 모습은 그저 오닉스의 무능함과 소심함으로 보였다. '오닉스도 결국 공무원들 앞에서는 별수 없군'이라는 비웃음만이 도진의 머릿속을 채웠다.결국, 도진은 CB가 보유한 비자금의 상당 부분을 B국 관료들의 로비 자금으로 쏟아부었다. 행정적 절차로 안 된다면 돈으로 길을 뚫으면 그만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사흘째 되던 날 오후, 마침내 태준이 환호성을 지르며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대표님! B국 세관에서 전수 검역 해제 통보가 왔습니다! 오늘 저녁 내로 전 물량 입고된답니다!”도진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역시 돈과 권력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오만한 확신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오닉스라는 배경이 힘을 못 쓸 때, 연 매출 2조에 달하는 CB의 수장인 자신이 직접 움직여 해결했다는 도취감이 차올랐다.“결국 해결하는 건 나군. 오닉스는.... 온실 속 화초였어.”도진은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며 오닉스를 향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장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경을 헤매다 살아 돌아온 전사처럼, 그는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고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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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스캔들

강도진은 B국 명품관 팝업스토어의 홍보 기사를 인터넷상에 쏟아부으며 수진과의 레스토랑 스캔들을 덮었다. 유능한 홍보팀은 이를 ‘열정적인 직원을 격려한 미담’으로 세탁했고, 언론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CB 그룹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복사해 날랐다.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은 곧 오만함으로 이어졌다. 도진은 자신의 자본력이면 어떤 구설수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홍보팀과 법무팀에 파격적인 특별 상여금을 하사하며 승취감에 젖었다.“앞으로 인스타에 올릴 때 내가 나오지 않게 조심해서 올려. 불필요한 노이즈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방금 전까지 샴페인을 나누던 달콤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도진의 경고에 수진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배려라는 듯 그들의 은밀한 보금자리인 ‘포스트 빌리지’ 안마당까지 차를 몰았다.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는 도진을 향해 수진은 조수석 문을 열기 전, 은밀하고 농염한 터치를 건넸다.“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당신과 온전히 시간을 보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설마 내가 임산부라 매력이 없어진 거예요?”수진의 노골적인 도발에 도진은 하체로 몰리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결국 그는 핸들을 잡았던 손을 풀고 차에서 내려 수진을 거칠게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는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수진의 입술을 탐욕스럽게 소유하며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그 시각, 지수의 휴대폰에는 전혀 다른 사진들이 실시간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며칠 전 도진이 수진과 함께 유명 산부인과를 찾아 그녀의 배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진료실을 나오던 적나라한 파파라치 컷들이었다. 화면을 넘기는 지수의 손가락은 서늘할 정도로 일정했다.[이 단계에서 바로 터뜨릴까요?][아니, 아직 조금 더 기다려. 우리에겐 이미 많은 패가 있는데, 한 번에 터뜨리기엔 아깝잖아.]지수는 무미건조하게 답장을 보낸 뒤 휴대폰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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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스캔들의 댓가

CB 그룹 본사 18층 홍보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전화기 소리와 날카로운 키보드 타격음이 뒤섞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집무실 안, 강도진은 대형 모니터에 떠 있는 자신의 산부인과 파파라치 사진을 핏발 선 눈으로 응시하다 결국 주먹으로 내리쳤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지만,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막으라고 했잖아! 내가 준 상여금이 아까워서 지금 단체로 태업이라도 하는 거야?”도진의 고함에 홍보실장이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 그의 얼굴은 사흘 밤을 새운 듯 퀭했다. “대표님, 단순히 사진 한 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해외 SNS 계정들을 통해 실시간 번역되어 퍼지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유포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조직적인 움직임입니다. 저희가 하나를 삭제하면 열 개가 새로 복제되어 올라오는 수준입니다.”돈과 권력으로 무엇이든 덮을 수 있다고 자만했던 도진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대중은 이제 ‘오직 아내만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이자 ‘가정적인 남자’라는 그의 위선적인 가면 아래 숨겨진 추악함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그때, 사색이 된 법무팀장이 서류 뭉치를 들고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RV가 보낸 투자금 회수 및 위약금 청구 공문이었다.향수 브랜드 ‘러빙유’의 론칭을 위해 투자받은 150억 중, 마지막 홍보비 명목의 50억이 도진의 목을 죄는 밧줄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스캔들만 아니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도덕적 결함’ 조항이 그의 발목을 단단히 잡은 것이다. 문득 도진의 머릿속에 가장 중요한 이름이 스쳤다. 이번 브랜드의 사활을 쥐고 있는 얼굴 없는 천재 디자이너, 'Z'였다.“투자금 회수? 수익도 내지 못했는데! 혹시... 'Z'에게서도 연락 왔어?” 도진의 물음에 태준이 태블릿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직 'Z' 측에서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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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수습

도진은 하염없이 흐르는 시계만 바라봤다. 사실 '스타게이트'를 넘기겠다는 결정은 사라의 제안을 받자마자 끝난 상태였다. 다만 조급함을 숨기고 어떻게든 몸값을 높여 흥정을 주도하겠다는 얄팍한 계산만이 대가리를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시간은 도진의 편이 아니었다.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초침이 그의 목을 옥죄었다. 마침내 자정을 단 5분 앞둔 시각, 도진은 짓눌린 한숨을 뱉으며 다시 전화를 들었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사라가 전화를 받았다."제가 스타게이트를 팔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도진이 먼저 전화를 건 순간부터 이미 흥정의 우위는 사라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대답 없이 서늘한 정적만이 흐르자, 초조해진 도진이 헛기침을 하며 구구절절 말을 덧붙였다.“그곳은 제 시간과 노력이 꽤 녹아 있는 곳이라…….”“50억.”도진의 옹졸한 핑계를 단숨에 자르고 들어온 것은 차가운 숫자였다.“그 정도면 껍데기뿐인 회사치고는 상당히 높은 가격이라고 생각하는데요?”사라의 제시액에 도진의 머릿속 계산기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한남동 독서당로의 작은 건물을 끼고 있는 스타게이트는 B, C급 모델들이 주류였지만 최근 몇몇이 해외에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건물과 미래 가치를 생각해서 100억으로 하시죠.” “대표님 욕심이 과하시네요. 정말 그곳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보세요?”사라의 일침에 도진은 자신이 철저히 ‘을’임을 상기했다. 그는 지수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실수했습니다. 80억. 제가 양보할 최대치입니다.” “70억. 더는 드릴 수 없습니다.”사라의 최후통첩에 도진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가용 현금 50억에 매각 대금 70억이면 120억이 해결된다. 150억 위약금 중 8할을 해결하는 순간이었다. 도진은 무력하게 담배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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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평온이라는 이름의 올가미

200억이라는 거금을 쏟아붓고 나서야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집무실을 가득 채웠던 비난의 화살들이 연기처럼 사라진 밤, 도진은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면서도 도진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지수에게 이 추잡한 스캔들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평소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던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구두를 벗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로 도진은 위축되어 있었다.하지만 어두운 거실에서 그를 맞이한 지수의 얼굴에는 예상했던 분노도, 멸시의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며 도진의 굳은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고생 많았어요. 당신의 선의를 사람들이 그렇게 비겁하게 이용하다니…… 속상해서 어떻게 해요.”도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수는 수진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기는커녕, 도진이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것이라며 그를 철저히 두둔하고 있었다.“난 당신 믿어요. 그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려던 것뿐인데, 세상이 참 잔인하네요. 스캔들 처리하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내가 다 마음이 아파요.”지수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위로에 도진은 무장해제되었다. 죄책감과 압박감으로 짓눌렸던 가슴이 뜨거운 안도감으로 차올랐다. 역시 지수뿐이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그녀밖에 없다는 오만과 착각이 도진을 감쌌다. 하지만 그 달콤한 평온함은 찰나에 불과했다. 지수는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서류 한 장을 부드럽게 밀어 놓았다. 그것은 지수가 직접 입양 기관에서 선택한 아이, 예인의 입양 동의서였다.“당신이 입양을 제안했을 때 깊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번 스캔들로 확실하게 알았어요. 우리에게 아이가 있는 완벽한 가족이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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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아빠라는 이름의 방패

진우는 수진과 이혼한 뒤 약 두 달 만에야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아이들을 다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유치원 복도 저 끝에서 아빠를 발견하고 달려와 안긴 아이들의 무게는 예전보다 가벼워진 듯해 진우의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저릿했다. 품에 들어온 아이들의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이 그간의 그리움을 겨우 달래주었다.현수와 현지는 진우와 함께 지낼 때보다 훨씬 철저하게 관리받는 모습이었다. 칼같이 다림질되어 주름 하나 없는 원생복, 은행원이었던 진우가 선뜻 사주기 힘들 정도로 비싼 해외 명품 브랜드의 가방과 구두들. 수진이 아이들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장식품으로 활용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겉모습은 화려했으나 아이들 특유의 천진난만한 생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사랑받는 아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당당함 대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리는 아이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진우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60일의 시간 동안 아이들이 어떤 공기를 견뎌왔는지, 수진의 히스테리와 강박 속에서 얼마나 숨을 죽였을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진우는 차가운 유치원 복도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현수와 눈을 맞췄다. 아이는 친구를 밀쳤다는 공포와 ‘내연녀의 자식’이라며 쏟아진 비난에 상처 입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진우는 떨리는 아이의 손을 단단히 맞잡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현수야, 아빠가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현수야, 아무리 화가 나도 친구를 밀친 건 잘못이야. 아빠는 우리 현수가 용기 있게 자기 잘못을 사과할 줄 아는 멋진 형아라고 믿어. 아빠랑 같이 사과하러 갈까?”진우는 다친 아이와 그 부모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여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이성적이고 품위 있게 상황을 정리하는 진우의 태도는 유치원 부모들 사이에서 금세 화제가 되었다. ‘아빠 없는 아이’라며 은근히 현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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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새로운 스캔들

도진은 ‘Z’의 새로운 디자인 초안이 담긴 메일을 확인하고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귀가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옥 끝에 서 있었으나, 200억이라는 거금을 치르고 나니 세상은 다시 그의 발밑에 놓인 듯했다. 비록 성수동 부지와 스타게이트를 잃었지만, 스캔들은 잠잠해졌고 새로운 라인업인 ‘새로운 태양’의 도안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사라 킴에게 스타게이트를 인계하며 보여준 자신의 건재함과 여유까지 생각하면, 오늘은 완벽한 승리의 하루여야 했다.“지수 씨, 나 왔어. 오늘 ‘Z’한테 연락이 왔는데 말이야…… 디자인이 예술이야. 이걸로 우린 다시 비상하는 거지.”자랑스럽게 입을 열며 거실로 들어선 도진의 말이 뚝 끊겼다. 거실에는 불도 켜지지 않은 채 지수가 소파에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지수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차갑게 늘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지수의 서늘한 기운에 도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테이블 위에는 낯익은 사진 몇 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왜 불도 안 켜고 이러고 있어?”도진이 의아해하며 테이블 위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어제 스타게이트 연습실에서 무명 모델 미나의 어깨를 감싸 쥐고 머리를 쓰다듬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도진은 피식 웃으며 사진을 다시 던져 놓았다.“겨우 이런 거 때문에 그래? 이건 어제 사라 씨한테 인수 인계해주다가 애들 격려 좀 해준 거야. 사진 참 묘하게 찍혔네.”“격려요?”지수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깊은 멸시와 지독한 피로감만이 서려 있었다.“내 명예와 우리 가정을 지키겠다며 200억이라는 피 같은 돈을 쏟아부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돈이 아깝지도 않게 또 이런 빌미를 제공해요? 당신은 지금 우리를 시궁창으로 밀어 넣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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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Z'의 계약파기

도진이 비명을 지르며 집을 뛰쳐나간 뒤, 거실에 남은 정적은 지수에게 완벽한 안식이었다. 지수는 바닥에 버려진 입양 동의서를 우아하게 주워 모았다. 도진의 서명이 채 완성되지 않은 서류 조각들을 보며 지수는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지금쯤 존재하지도 않는 ‘Z’의 마음을 돌리려 필사적이겠지만, 이미 태양은 졌고 그의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도진은 미친 듯이 차를 몰아 ‘Z’의 법인 대리인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은 축축한 땀으로 젖어 있었고, 비서 태준에게 연신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미팅을 잡아보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200억을 쏟아붓고 얻어낸 '새로운 태양'의 도안이 아직 품 안에 있었다. 이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 그 도안은 종잇조각이 되고 자신은 업계에서 영원히 매장될 터였다.“오해입니다! 그 사진은 악의적으로 연출된 거예요!”호텔 로비에서 만난 대리인들에게 도진은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매달렸다. 평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서늘한 눈빛과 단호한 목소리였다.“Z는 예술적 가치만큼 파트너의 도덕성을 중시합니다. 미성년자 스폰서 추문은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대리인은 도진이 내미는 서류조차 훑어보지 않은 채 계약 해지 통보서 확정본을 건넸다. '일방적이고 즉각적인 계약 파기'. 문구는 짧고 명확했다.“잠깐만요! 내가 계약금을 얼마나 냈는데, 이럴 순 없지!”도진의 절규에도 그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화려했던 ‘Z’와의 파트너십은 고작 사진 몇 장에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무너져 내리는 호텔 로비 한복판에서 도진은 깨달았다. 자신이 지켰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씻겨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같은 시각, 지수는 우아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자신의 진짜 수확을 위해 강 여사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여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지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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