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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장 잔인한 축복: Chapter 41 - Chapter 50

105 Chapters

41화 진정한 주인공

‘러빙유’ 시향회 전날, 수진의 거실에는 리버파크에서 공수해 온 ‘밤바다’ 드레스가 위용을 자랑하며 걸려 있었다. 드레스를 확인하러 온 도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우리 옷이 아닌 건 아쉽지만, 이제 이 정도는 알아서 잘 준비하네. 내가 따로 챙길 필요가 없겠어.”그의 말투에는 자신의 안목을 닮아가는 수진에 대한 기특함과, CB의 옷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미묘한 불쾌감이 공존했다. 수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진의 허영심을 영리하게 파고들었다.“필요 없다니 무슨 말이야. 전부 도진 씨가 가르쳐 준 것들이잖아. 그리고 나도 디자이너야. 설마 내게 드레스 보는 안목이 없겠어? 그리고 CB의 드레스는…… 평소에 당신이 직접 골라서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게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까.”도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수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진은 그의 품에 안겨 달콤하게 미소 지었지만, 도진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만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시향회 당일. 수진은 아침부터 전쟁을 치르듯 자신을 가꿨다. 오늘 시향회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시간 맞춰 도착한 민수는 다이아몬드 세트와 밤바다 드레스로 무장한 수진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오늘 너무 힘준 거 아냐? 누가 봐도 주인공은 너겠어.”민수는 짙은 밤색 벨벳 재킷에 타이를 매지 않은 여유로운 차림으로 수진을 에스코트했다. 파티장에 들어서는 순간, 수진은 승리를 확신했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던 지수가 먼저 수진을 발견하고 도진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카키 그레이 드레스를 입은 지수의 수수한 모습에 수진은 더욱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지수의 손짓에 고개를 돌린 도진의 안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수진의 팔을 다정하게 감싸 안는 척하며 그녀를 전시장 구석의 어두운 복도로 끌고 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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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제이아우라

시향회 후, 본격적인 친목의 시간이 다가왔다. 파티장 내부에는 '러빙유'의 잔향과 최고급 샴페인의 기포가 뒤섞여 기묘하고도 화려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민수의 팔짱을 낀 채 도진을 흘깃거리던 수진은 서운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도진은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물급 인사들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업적 환담을 나누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결국 참다못한 수진이 샴페인 잔을 든 채 도진에게 다가갔다. 도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오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수진은 오히려 턱을 치켜세웠다. 저 멀리서 다른 부인들과 우아하게 대화를 나누는 지수의 시선을 의식한 탓이었다. 수진은 보란 듯이 도진의 곁으로 파고들어 그의 손에 샴페인 잔을 쥐여주었다."강 대표님, 오늘 시향 정말 좋았어요. 도진 씨의 감각은 역시 최고예요. 사실… 다음 제품은 저도 조향사로 참여하고 싶네요."도진은 곁에 있던 파트너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파트너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조향사였습니까? 제가 이 분야 인맥이 좁아서 몰랐군요." "디자이너가 본업이긴 하지만 조향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도진 씨 곁에서 돕고 싶은 마음이 커서요."수진이 도진의 팔뚝을 은근하게 쓸며 대화를 독점하려던 찰나, 여성치고는 낮으나 또렷한 발음과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강 사장님, 오늘 시향회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화려한 드레스 일색인 파티장에서 홀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올 화이트 실크 수트를 입은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날카롭게 재단된 실루엣은 냉철한 카리스마를 극대화했고, 소매 끝으로 살짝 드러난 골드 스퀘어 워치는 묵직한 자본의 위엄을 과시했다."싱가포르에서 '블루오션'이라는 투자사를 운영하는 사라 첸입니다."사라는 자신의 블루 티타늄 명함을 꺼내 도진에게 내밀었다. 레이저로 각인된 푸른 금속 명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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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회 추락

수진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위층 휴게실로 향하는 지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파티장의 소음이 멀어지고 정적이 감도는 복도 끝, 지수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켜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수진은 샴페인 대신 노란 사과 주스가 담긴 잔을 쥔 채, 보석이 박힌 힐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이지수 씨, 즐거워 보이시네요. 사모님들 비위 맞추는 솜씨가 아주 보통이 아니던데요?"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지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수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수진을 담아냈다. 그 무심한 시선이 수진의 열등감을 더 날카롭게 자극했다."비위를 맞춘 게 아니라 안목을 나눈 겁니다." "안목? 웃기지 마. 네가 가진 그 모든 게 다 도진 씨 덕분인 거 잊었어? 자기 새끼가 없어 남의 새끼 뺏으려는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마."수진은 한 발짝 더 다가가 지수를 몰아세웠다. 그녀는 일부러 비어 있는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소중하게 감싸 쥐며, 지수의 가장 아픈 구석을 잔인하게 헤집었다. 하지만 지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의 위아래를 훑었다."역겨운 건 내가 아니라, 남의 자리를 가로채고도 불안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당신이죠. 당신이 입은 그 화려한 드레스가 오늘따라 참 무거워 보이네." "뭐…?" "도진 씨는 오늘 알았을 거야. 당신이 아무리 치장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천박함을. 그래서 당신이 아닌 나를 본 거고."지수의 말이 비수처럼 수진의 심장에 꽂혔다. 분노로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수진은 지수를 밀칠 듯 손을 뻗었지만, 지수는 가볍게 그 손을 피해 계단 위로 한 걸음 올라갔다."그만해. 여기서 더 추해지면 나도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까."지수가 등을 돌려 가려는 찰나, 수진은 제어할 수 없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지수의 어깨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급하게 몸을 틀던 수진의 높은 굽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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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상처

시향회장에서 달려온 지수의 손발은 차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만큼은 타는 듯 뜨거웠다. 지현이 준 하얀 손수건이 칭칭 감겨 있었지만, 그 너머로 번져 나온 선혈은 이미 붉은 꽃이 되어 하얀 천을 적시고 있었다.응급실 복도. 도진은 피 묻은 셔츠 차림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선고받은 사람처럼, 텅 비어버린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수진 씨는…….”지수의 목소리가 닿는 순간, 도진의 눈에 서려 있던 절망은 순식간에 증오의 불길로 타올랐다. 그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수진이를 찾아!”도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지수의 어깨를 낚아챘다.“우리의 아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 수진이 아이까지 죽이려고 해? 현지도 모자라서!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아이였어, 이 독한 여자야!”날 것 그대로의 폭언이 지수의 얼굴에 쏟아졌다. 지수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도진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찢겨 너덜너덜해진 지수의 손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악!”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도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수의 상처 난 손바닥을 짓이기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임산부를 계단에서 밀어? 네가 아이를 못 갖는다는 질투를 이런 식으로 나타내면 안 되지! 만약, 만약에 그 애가 잘못되면 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널 가만둘 줄 알아?”지수는 비명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통증 너머로 도진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했다. 삐뚤어진 넥타이, 핏자국이 튄 셔츠, 그리고 비겁함으로 가득 찬 눈동자.“강도진, 네가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가 뭐야?”지수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도진의 이성이 돌아왔다. 지수가 차갑게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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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벨라로즈

수진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온기에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병원의 창백한 하얀 천장이었다. 그와 동시에 시향회 계단에서 허공으로 휘청였던 끔찍한 감각이 되살아났다.“내 아이……!”수진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왼손을 뻗어 자신의 아랫배를 다급히 움켜쥐었다. 손바닥 끝에 평소처럼 살짝 부풀어 오른 배의 감촉이 느껴졌다. 안도감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수진의 비명에 곁을 지키며 쪽잠을 자던 도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어 왔다.“수진아, 괜찮아. 아이도 너도 모두 무사해. 정말 천만다행이야.”수진은 마치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구원을 발견한 사람처럼, 떨리는 손으로 도진의 손등을 맞잡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눈물로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럼 됐어요. 당신과 나의 아이가 무사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자신의 안위보다 아이를 먼저 챙기는 수진의 헌신적인 모습에 도진의 가슴은 난도질당했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를 찔렀다.“내가 미안해. 내가 너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아니에요, 도진 씨. 내가…… 내가 고집을 피워서 그곳에 갔기 때문에 생긴 일인걸요. 도진 씨 말을 안 들은 내 잘못이에요.”수진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도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련함을 극대화하는 수진의 모습은 도진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도진의 의식 속에서 두 여자의 잔상이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아이의 생사조차 불투명했던 검사실 앞, 자신의 아이가 맞느냐며 매몰차게 다그치고 모든 책임을 도진의 방탕함으로 돌리던 지수의 서늘한 얼굴. 그와 반대로 자신의 품에 무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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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고백

K국의 경제 지도를 움직이는 거대 기업 '오닉스'의 사옥 최상층. 평소라면 오차 없이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부하 직원들을 긴장시켰을 지현이, 오늘따라 헝클어진 머리와 살짝 풀어진 넥타이 차림으로 초조하게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나 급해. 제발 도와줘.]메시지를 전송한 지현이 마른세수를 하며 읊조렸다.“이 녀석들에게만은 절대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는데.”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10년 지기 소꿉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오~ 황태자 이지현이 우리에게 SOS를?][이건 백퍼 여자 문제다 ㅋㅋㅋ][이 형님들께 고하도록 허락하마.]친구들의 깐족거림에 지현의 잘생긴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건 10년 치 놀림감을 제 손으로 상납하는 꼴이었지만, 지금 그에겐 체면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고백 이벤트 아이디어가 필요해.]지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진동과 함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지현은 모든 전화를 무심하게 거절하고 차가운 텍스트만 남겼다.[메시지로만 소통해.][진짜 이지현이 여자가 생겼어? 야, 내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너의 성적 취향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는 줄 알아?]‘나도’, ‘나도’ 연이어 올라오는 친구들의 고백에 지현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놈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거야? 지현은 이 인간들과 인연을 끊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쏟아지는 아이디어들을 확인했다. 꽃길, 풍선, 공개 이벤트……. 지현은 그런 흔해 빠진 방식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결국 친구들을 차단하듯 밀어내고 지현이 선택한 마지막 비상구는 동생 지수였다.“오빠!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어.&r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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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비서 한수진

CB 그룹 대표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고, 수진이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들였다. 도진의 ‘개인 비서’라는 명찰을 단 첫 출근길, 그녀의 손에는 서류 가방 대신 직접 조향한 향료병들과 화려한 소품들이 가득했다. 수진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집무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이제 지수의 흔적을 지우고 오직 자신의 색으로만 채워질 공간이었다.수진은 가장 먼저 창문을 넓게 열어젖혔다. 지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수의 취향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형성되었던, 은은한 시더우드와 숲의 내음이 감돌던 사무실 공기를 사정없이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조향한 진한 장미 향 디퓨저를 곳곳에 배치했다. 머리가 아릿할 정도로 달콤하고 비릿한 향기가 순식간에 공간을 점령했다.이어 그녀의 손길은 도진의 집무 책상으로 향했다. 지수가 선물하여 도진의 손때가 짙게 묻어있던 만년필을 대신하여, 그곳에 자신이 새로 구입한 화려한 만년필로 채우고 수진은 만족의 미소를 띠었다.“이제야 진짜 도진 씨 방 같네.”수진은 자신의 향과 물건으로 채운 업무 공간을 지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지수의 세심한 손길이 닿아 칼같이 정리되어 있던 도진의 슈트 사이에서, 그녀가 골라준 무채색 넥타이들을 거칠게 뒤로 밀어버렸다. 그 자리에는 자신이 선물한, 채도가 높고 화려한 무늬의 실크 타이들이 전면에 배치됐다. 도진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을 자신의 취향으로 물들이겠다는 명백한 영역 표시였다. 도진의 일상이 오직 자신만을 향하도록 만드는 작업에 수진은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오후가 되어 외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도진은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진한 장미 향에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평정심을 유지해주던 차분한 향기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앉은 자극적인 냄새가 묘하게 그의 신경을 긁었다. 수진이 달려와 재킷을 받아냈지만, 도진의 시선은 책상 위 낯선 금장 소품들에 머물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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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블레싱 나이트

블레싱 나이트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도진과 수진이 발을 들였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미드나잇 블루 앤 실버’. 밤하늘의 깊은 청색과 은하수 같은 은빛이 어우러진 연회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보석함 같았다.도진은 수진이 고심해서 골라준 미드나잇 블루 수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장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도진은 주변의 시선이 비릿한 조소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저 패턴…… S&C의 시그니처 아닌가?” “맞네. CB 그룹 대표가 하필이면 합병 전쟁 중인 경쟁사 메인 컬렉션을 입고 오다니. 드레스 코드는 맞췄지만, 상도덕은 내다 버렸군.”수진은 당황한 도진의 안색도 모른 채, 제 허리에 감긴 실버 시퀸 드레스의 자락을 매만지며 우쭐거렸다. “도진 씨, 다들 우리만 봐요. 미드나잇 블루가 당신한테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수진은 몰랐다. 지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지수는 도진의 비즈니스 관계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넣고 의상을 골랐었다. 하지만 수진에게 의상은 그저 ‘예쁘고 비싼 것’일 뿐이었다.도진은 소매 끝단 단추 구멍에 미세하게 새겨진 S&C의 은색 심볼을 발견한 순간, 그것이 마치 살을 지지는 낙인처럼 느껴져 숨이 막혔다. 평소라면 지수가 수만 번 확인했을 그 작은 디테일이, 이제는 그의 무능과 수진의 무지를 폭로하는 지독한 증거가 되어 소매 끝에서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급하게 오느라 수진이 준비한 옷을 아무 생각 없이 걸친 제 잘못도 있었지만, 도진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치미는 수치심에 도진은 수진의 손을 날카롭게 뿌리쳤다.“우리가 S&C와 경쟁 중인 거 잊었어? 지금 날 망신 주려고 작정한 거야?”도진은 수진을 매섭게 비난하며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최태준 비서실장에게 급히 연락해 CB의 수트를 가져오라 명령했지만, 급조된 의상은 드레스 코드는 맞췄을지언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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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첫 고객

지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서울의 부와 권력이 응집된 성북동의 한 저택. 시향회에서 안목을 나눴던 정계의 거물, 강인주 여사와의 만남을 위해서였다.저택의 입구에서 검은색 슬랙스에 은회색의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지수는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점검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 있는 차림새는 상대에 대한 예우인 동시에, 스스로의 안목을 증명하는 명함과도 같았다.“여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지수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강 여사가 평소 수집에 열을 올린다는 정보를 입수해 공들여 구한 ‘달항아리’였다. 티 없이 맑은 백자의 유려한 곡선을 확인한 강 여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작은 성의입니다. 여사님의 공간에 이 항아리의 여백이 편안하게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지수의 화법은 강 여사의 꼿꼿한 자존심을 기분 좋게 충족시켰다. 지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여사님의 탁월한 안목이 오늘은 어떤 귀한 자리에 머물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지수의 말 끝에는 불필요한 서두도, 조급한 제안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응시만이 강 여사에게 전달될 뿐이었다. 강 여사는 지수의 그 기분 좋은 당당함에 화답하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석 달 뒤에 내 딸아이 결혼식이에요. 드레스나 턱시도는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내 의상이 문제네. 시향회 때 보여준 그 완벽한 스타일링이 필요해서 말이야. 혹시 한복 디자인도 가능한가?”지수는 강 여사에게 오기 전 파악했던 혼사 정보를 상기했다. 여당 중진 의원의 딸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포식자라 불리는 기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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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The Origin

전 세계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대한 해일, [The Origin] 쇼가 마침내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K국 최고의 보석 유통 기업이자 원석 공급의 거대 축인 ‘오닉스 사’의 수장 지현이 주최한 이번 쇼는 단순한 패션쇼 그 이상이었다. 자회사인 ‘아스테리아’가 보유한 희귀 원석의 압도적 위상을 각인시키기 위해, 양국을 대표하는 정상급 디자이너 20명이 선발되어 아스테리아의 원석으로 빚어낸 결정체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하지만 업계가 진정으로 술렁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쇼가 디자이너들의 경연장이자, 동시에 수년간 자취를 감췄던 전설적인 디자이너 ‘Z’의 복귀를 공식화하는 거대한 무대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행사장 로비는 선택받은 자들의 열기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그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도진과 수진이 발을 들였다.수진은 입구에서부터 한껏 어깨를 치켜세웠다. 지수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도진의 공식적인 파트너로 선 이 순간이 그녀에겐 인생의 정점이었다. 지수 일행이 서 있는 로비 한복판에 다다르자, 수진은 보란 듯이 어깨를 내리고 살짝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제 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도진의 아이를 가졌다는 강력한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비릿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지수 곁에 선 남자를 확인한 순간, 수진의 표정에 날카로운 금이 갔다.“……박진우?”경멸이 섞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기억하는 전 남편은 평범한 은행원의 틀에 갇힌 지루한 남자였다. 하지만 오늘 그곳의 진우는 달랐다. 최고급 비스포크 수트와 능숙한 매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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