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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장 잔인한 축복: Chapter 51 - Chapter 60

105 Chapters

51화. 첫 번째 회수(回收)

도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날 밤, [The Origin] 쇼의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영상 속 ‘Z’의 손길이 망막에 낙인처럼 찍힌 탓이었다. 핀셋을 쥐던 절도 있는 각도, 원석을 털어내던 미세한 습관까지. 그 익숙한 실루엣은 지독하리만큼 지수를 닮아 있었다.쇼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도진은 홀린 듯 지수의 손만을 쫓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비비며 일어난 지수의 손등 어디에도 세공사의 고단함이나 미세한 상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3년 내내 도진의 곁을 지키던, 결점 하나 없이 매끄럽고 정갈한 ‘사모님’의 손 그대로였다.‘그래, 내 괜한 오해였어. 그 여자가 무슨 수로…….’도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지수가 그 손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정교하게 흔적을 지웠는지, 그 부드러운 손끝 너머로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을 갈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였다.반면 수진은 탐욕으로 잠을 설쳤다. 스크린 위에서 타오르던 옐로 다이아몬드, 수백 개의 멜리 다이아몬드, 그리고 차가운 블랙 로듐으로 조형된 장미 줄기. 복귀작 ‘이별’이 뿜어내던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반드시 저 보석을 내 목에 걸고 말겠어.’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 목줄이 될지도 모른 채, 수진의 심장은 비뚤어진 소유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다음 날 아침, 지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도진의 출근 준비를 돕고 있었다. 무심한 듯 우아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만져주자 도진의 팽팽하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오늘 입양센터에 가볼 생각이야.”지수의 덤덤한 목소리에 도진의 눈이 커졌다. 최근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던 지수가 먼저 예전처럼 자신을 챙기며 ‘입양’을 언급하다니. 도진은 전날의 불안이 완전히 씻겨 내려가는 해방감을 느꼈다.“그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조심히 다녀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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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숨겨졌던 사실

최태준 실장의 하루하루는 절망에 가까웠다. 아스테리아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공급처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움직였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원석의 질이 준수하면 단가가 상상을 초월했고, 가격을 맞추려 들면 꺼내 드는 원석마다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시장가 70%’라는 지현의 호의가 단순한 배려가 아닌,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던 주춧돌이었음을 태준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한편, 아스테리아의 공문을 받은 후 심란해진 도진은 지철이 운영하는 클럽을 찾았다. 2층 VIP 룸에는 친구 민수와 지철이 이미 독한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오늘 수진 씨는 같이 안 왔어? 임신했다고 유세 부리더니.”민수가 짓궂게 안부를 물었지만, 도진은 피곤한 듯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야근한다고 늦게 들어갔어. 하루쯤은 일찍 가서 쉬어야지.”“오~ 수진 씨도 이제 일을 하는 거야? 그 비서직인가 뭔가?”“됐고, 술이나 마시자. 여자 부를 기분 아니니까 조용히 마셔.”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민수가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며 지철에게 말했다.“너 저번에 도진이네 행사 안 왔지? 내가 거기서 끝내주게 예쁜 연주자를 봤는데 너도 볼래? 여기 찍어놨어.”민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영상을 재생했다. 지철이 흥미로운 듯 화면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영상이 시작되자 지철의 눈이 커졌다.“어! 저거 제수씨랑 수진 씨 아니야?”도진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화면 속에는 연주자 뒤로 지수와 수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지수를 향해 수진이 히스테릭하게 화를 내다 스스로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지수는 그런 수진을 필사적으로 붙잡아 세우고 있었다.순간 도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얼마 전 병원에서 지수를 가해자로 몰아세우며 퍼부었던 독설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지수는 가해자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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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독이든 성배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지만, 도진은 지수가 잠든 안방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닫힌 문 너머로 느껴지는 지수의 숨소리가 마치 자신을 꾸짖는 환청처럼 들렸다. 수진의 아이, 그리고 지수가 데려오려는 이름 모를 아이. 두 생명 사이에서 도진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수진의 아이를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지수와 이혼해 가문을 등질 수도 없는 외통수였다.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다크서클이 튱튱하게 내려앉은 모습으로 서재를 나선 도진이 처음 마주한 것은 지수가 아닌 수진이었다.“니가…… 여긴 왜 있는 거야?”당황한 도진이 수진의 팔을 잡아 서재 안으로 급하게 끌어당기며 물었다. 하지만 수진은 당황한 기색 없이, 자신의 팔을 거칠게 쥐고 있는 도진의 손가락을 하나씩 여유롭게 풀어냈다. 그녀의 손길엔 묘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강 대표님, 오늘 비공개 입찰이 있는 날이라 대표님의 의상을 준비해 드리러 왔습니다.”수진은 연인 강도진이 아닌, 대표이사 강도진을 보필하는 완벽한 비서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공적인 태도와 빈틈없는 차림새에 도진은 오히려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였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진이 코디해준 3피스 스트라이프 수트에 폭이 좁은 넥타이, 그리고 붉은 선혈처럼 빛나는 루비 핀과 커프스링크까지 차려입은 도진은 아침을 먹고 있던 지수의 눈치를 보았으나, 지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하고 담담했다. 도진은 수진과 함께 마이바흐에 올라타 그녀가 준비한 샌드위치로 허기를 채우며 회사로 향했다.하지만 집무실에 도착한 이후부터 기묘한 위화감이 도진을 괴롭혔다. 서류를 검토하던 도진은 손에 쥔 만년필의 생소한 감촉에 미간을 찌푸렸다. 수진이 새로 준비한 한정판 만년필이었지만, 도진의 손엔 도무지 붙질 않았다.“수진아, 전에 있던 만년필 어디 갔어?”수진은 도진의 질문에 짧게 인상을 쓰더니, 책상 한구석 잡동사니를 모아둔 작은 상자에서 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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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여왕의 방패

성북동 강인주 여사의 저택. 지수는 인사동 장명숙 선생과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완성한 시안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단순한 디자인 스케치가 아니었다. 아홉 번 염색한 명주 원단의 조각들과, 그 위에 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가 어떻게 지는지 계산된 루비와 옥의 샘플들이 입체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단순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여사님이 움직이실 때마다 보석의 그림자가 옷감의 결을 타고 흐르도록 설계했습니다. 주얼리가 옷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여사님의 기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한 조각이 되어야 하니까요.”지수의 차분한 설명에 강 여사의 눈에 깊은 감탄이 서렸다. 수많은 디자이너를 만나봤지만, 옷의 ‘결’과 보석의 ‘그림자’까지 계산하는 이는 지수가 처음이었다.“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 ”강 여사는 만족스러운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곧 그녀의 미간에 미세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상류층의 혼사는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거대한 자산의 이동임을, 그리고 그 이면에는 늘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여사님, 혹시 혼례 준비 중에 더 마음 쓰이는 곳이 있으신지요?”강 여사는 잠시 망설이다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사돈댁인 글로벌 반도체 가문에서 보내온 ‘혼전계약서’ 초안이었다. 신부 측의 권리를 교묘하게 제한하고, 외도나 귀책 사유 발생 시에도 경영권 방어에만 치중된 독소 조항들이 숨어 있었다.지수는 3년 전, 도진과 결혼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도장만 찍었던 자신의 어리석은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는 서류를 훑어 내린 뒤 강 여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보석함의 자물쇠를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열쇠를 누가 쥐느냐입니다. 이 문제는 제가 도움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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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우리 아이었다면...

주말 아침, 거실로 나선 도진은 전신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매만졌다. 늘 몸을 갑옷처럼 죄던 날 선 수트가 아닌, 편안한 면바지에 부드러운 하늘색 니트 차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3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수진을 만나기 전, 아니 아이를 잃었던 그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기다림은 항상 도진의 몫이었다. 퇴근길 병원 문을 나서는 지수를 기다리고, 동기들과의 술자리 앞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몇 시간이고 서성이던 시간들. 그 기다림은 설렘이었고,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행복이었다.‘언제부터였을까. 그 고요한 기다림을 숨 막히는 굴레로 여기기 시작한 게.’도진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변심의 궤적을 훑으며 씁쓸함을 삼켰다. 지수의 깊은 시선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녀를 외면했던 지난날들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그때 드레스룸 문이 열리고 지수가 나왔다. 남색 슬랙스에 연한 민트색 니트.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톤의 옷을 입은 서로를 보며 묘한 정적이 흘렀다. 함께한 세월은 이토록 잔인하게 서로의 취향을 닮게 만들어 놓았다. 도진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지수의 핸드백을 받아 들며 그녀를 차로 에스코트했다.주차장에 내려온 도진은 자신의 마이바흐 조수석 문을 열었다. 지수는 바로 타지 못한 채 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은 지금까지 지수에게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도진의 철저하고 냉정한 공적 영역이었기 때문이다.“오늘은 내가 직접 운전할게. 오랜만에 너랑 드라이브하는 기분도 내고 싶어서.”머쓱하게 웃는 도진을 보며 지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지수가 안전벨트를 매려 손을 뻗자, 도진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내가 해줄게.”도진의 커다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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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거래

도진의 본가, 성북동 저택의 오후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거실 한쪽에서 난을 손질하던 강수한 회장과 소파에서 오침을 즐기던 김미자 사모님. 각자의 방식으로 평온한 주말을 보내던 두 사람의 적막을 깬 것은 집사의 조심스러운 보고였다.“회장님, 사모님. 한수진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감고 있던 김미자의 눈이 번쩍 뜨이며 날카롭게 강수한을 쏘아봤다.“한수진은 또 누구예요? 얼마 전에 유진인가 하는 여자가 다녀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한수진? 난 모르는 이름이야. 내 이름을 판 사기꾼이겠지.”강수한의 단호한 부정에도 김미자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두 사람 사이의 살벌한 기류에 위축된 집사가 식은땀을 닦으며 덧붙였다.“이번에는 회장님이 아니라, 사장님과 관련이 있으신 분입니다.”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집사에게 꽂혔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강수한이 무거운 입술을 뗐다.“……일단 들어오라고 해.”거실로 들어선 수진은 압도적인 분위기에 숨을 들이켰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골동품들과 고가의 가구들. 수진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곧 자신이 누리게 될 권력의 상징으로 비쳤다.“우리 도진이랑 아는 사이라고?”상석에 앉은 강수한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김미자는 수진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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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균열의 시작

입양 기관을 나온 도진이 지수와 함께 향한 곳은 한정식집 ‘소담’이었다.“강 사장님, 사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항상 준비해 드리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지배인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발을 들인 그곳은 작년까지만 해도 매달 찾던 부부의 아지트였다. 아담한 중정이 내다보이는 정갈한 방. 이곳에서 두 사람은 CB 그룹의 경영 위기를 논했고, 난임의 고통을 서로 보듬었으며, 지수의 생일을 축하했다.“음식은 늘 드시던 대로 준비하겠습니다.”단골의 식성까지 파악하고 있는 세심한 환대는 도진에게 묘한 평안을 주었다. 도진은 지수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여긴…… 오랜만에 와도 변한 게 없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무심함. 그 단어 뒤에 숨은 도진의 기만적인 이중성을 지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수는 다가오는 도진의 손을 자연스럽게 피하며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예인이…… 우리 아이로 받아들일 거지?”거절은 거절하겠다는 단호한 음성. 도진은 다시 숨이 막혀왔다.“그건 시간을 좀 더 줘. 이미 친구 와이프에게 입양 의사를 밝힌 상태이기도 하고…….” “그래, 알겠어. 그런데 그 친구 와이프라는 사람이 누구야? 당신이 말 못 하겠다면 내가 직접 연락해 볼게.”지수의 서늘한 추궁에 도진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할 때, 다행히 음식이 들어왔다. 도진은 화제를 돌리려 떡갈비를 집어 지수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이거 네가 좋아하던 거잖아. 많이 먹어.”지수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도진과 떡갈비를 번갈아 보았다.“나는 떡갈비보다 갈비찜을 더 좋아해. 하지만 당신이 준 거니까 맛있게 먹을게.”순간 도진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떡갈비는 수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수의 취향 위에 수진의 흔적을 덧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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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완벽한 이름의 대가

도진은 보안이 철저히 걸린 개인 회신 채널을 열었다. 암전된 화면 너머, 짙은 어둠 속에 잠긴 Z의 실루엣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화면에서 나오는 미약한 빛만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선을 희미하게 비출 뿐이었다. 도진은 테이블 위에 투명한 푸른빛의 안젤라이트 원석을 내려놓으며 입을 뗐다.“보내드린 기획안은 확인하셨겠지요. 브랜드 이름은 ‘새로운 태양’. 주재료는 안젤라이트입니다. 디자인 1팀은 이미 Z 씨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변조된 Z의 차가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기계적인 금속음이 섞인 목소리는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었다.“안젤라이트라… 치유와 평화라는 뻔한 수식어로 점철된 원석을 ‘태양’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흥미롭군요. 좋습니다. 이 프로젝트, 받아들이죠.”도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Z의 목소리가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해둘 게 있습니다, 대표님.”“말씀하시죠.”“원석 자체의 결함이나 수급 과정에서의 차질, 혹은 무리한 세공으로 인한 파손 책임은 전적으로 대표님과 공급사 측에 있습니다. 안젤라이트는 경도가 낮고 습기에 취약하죠. 내 설계가 완벽해도 원석의 질이 따라오지 못하면 결과물은 비명도 없이 바스라질 겁니다. 그걸 알고 제안하신 겁니까?”도진은 화면 속 Z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수의 손과 닮았다고 느꼈던 그 손의 곡선. 그는 홀린 듯 손에 들고 있던 원석을 화면 속 Z의 손 위치에 겹쳐 맞추어 보았다. 마치 화면 너머의 그녀에게 직접 원석을 건네주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CB는 그 부분에 대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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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심해의 거상

진우의 사무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정적은 평화가 아닌, 거대한 폭풍을 앞둔 바다의 침묵이었다. 밤새 도진의 복잡하게 얽힌 어둠의 자금을 추적하던 사라는 이른 새벽에야 푄 현상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했고, '블루 오션'의 덫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박성재와 김철수는 이미 외근을 나간 뒤였다.진우는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모니터 속 명멸하는 숫자들을 응시했다. 지수가 남겨준 RV의 시드머니 300억. 이 자금은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었다. 도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지수가 걸어온 처절한 인내와, 진우가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지불해야 할 복수의 판돈이었다."보스, 요즘 월가와 H국의 자금 흐름이 심상치 않아."에너지 드링크를 생수 마시듯 들이켜던 이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진우를 불렀다. 이현의 자금 흐름 파악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특출했다. 시장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거대한 해일의 징조를 읽어내는 그였기에, 진우는 이현의 분석을 무시할 만큼 무지하지 않았다.진우가 이현의 자리로 다가서자, 이현은 여덟 개의 모니터 중 하나를 가리켰다."여기 이 부분 보세요. 수상할 정도로 월가의 헤지펀드 자산이 H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어요. 이건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한 국가의 환율 지지선을 무너뜨려 통화 가치를 폭락시키려는 사냥꾼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에요."진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투자자로서의 감각이 서늘한 칼날처럼 벼려졌다."H국에 직접 가봐야겠어. 사라에게 연락하고 비행기 표 당장 준비해."진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출국 전, 그는 오피스텔에 들러 현지가 거부했던 토끼 인형을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인형에 남은 아이의 체취를 맡으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현수야, 현지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곧 너희를 데리러 갈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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