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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축복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107 챕터

71화 장인의 궤(櫃)

익선동의 낡은 기와지붕들이 서로 어깨를 맞댄 좁은 골목 끝. 지수는 빛바랜 나무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쾨쾨한 금속 냄새와 은은한 차 향이 뒤섞인 박종식 장인의 공방이 나타났다.“이제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뉘신지 몰라도 돌아가시오.”화덕 앞에서 미세한 정으로 은선을 두드리던 박 장인이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툭 내뱉었다. 지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가지도, 그렇다고 입을 열지도 않는 지수의 묵직한 기척에 박 장인이 결국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어르신의 오랜 숙원을 풀 답을 가지고 왔습니다."지수의 당돌한 한마디에 박 장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내 오랜 숙원? 어린 것이 뭘 안다고 감히 입을 놀리는 게야!"지수는 대답 대신 박 장인의 작업대 구석,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된 파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박 장인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자신이 수십 년째 풀지 못한 고대 비녀 조각에 머물렀다."어르신, 저건 붙이려 할수록 계속 부러질 겁니다. 금속의 피로도가 이미 한계를 넘어섰거든요. 현대 주얼리의 '레이저 정밀 용접'과 '냉간 압착' 기법을 섞어서 지지대를 안으로 숨기면, 겉으로는 은입사의 결을 유지하면서도 형태를 지탱할 수 있습니다."순간, 박 장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수많은 전수자가 다녀갔지만, 누구도 이 파편을 '예술적 혼'이 아닌 '금속의 성질'로 접근한 적은 없었다."애송이가 어디서 잔재주를 좀 배운 모양이구나. 지금 그것으로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게냐!""맞습니다, 어르신. 제 미천한 실력으로는 이 유물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현대 세공의 김인식 장인께서 제게 이런 조언을 해주셨습니다.""……김인식?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너한테 가르침을 줬다고?""네. 선생님께서도 우리 전통의 결을 현대 기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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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오빠의 선물

박종식 장인이 지수의 의뢰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이후, 지수의 하루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촘촘하게 돌아갔다.오전에는 매듭 장인 윤유선의 작업실에서 실의 꼬임과 매듭의 강도를 몸소 익혔고, 오후에는 익선동 박종식의 작업실 한구석에서 그의 서슬 퍼런 은입사 기법을 눈으로 훔쳤다. 그리고 해가 지면 자신의 밀실로 돌아와 낮에 배운 기술들을 피가 나도록 연습했다.박종식은 지수가 자신의 기술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지만,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험한 일들을 맡겼다. "손끝이 짓물러야 쇠의 마음을 아는 법이지." 그는 지수의 집요함에서 젊은 시절 자신의 광기를 보았다. 급기야 그는 백옥잠이 완성되는 날, 지수만의 감각으로 빚어낸 장신구를 하나 만들어 오라는 파격적인 숙제까지 내주었다. 그것은 박종식이 지수를 단순한 의뢰인이 아닌 '제자'이자 '동료 예인'으로 인정했다는 징표였다.강 여사가 가봉을 위해 자수 장인 장명숙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녀가 목격한 것은 화려한 디자이너 이지수가 아니었다. 작업실 구석, 수십 가닥의 명주실 사이에 파묻혀 묵묵히 수를 놓고 있는 야위고 단단한 여인만 남았있었다."지수 씨, 손이 왜 이래?"강 여사가 안쓰러운 듯 지수의 거칠어진 손끝을 붙잡았다. 곱게 관리받던 디자이너의 손은 어디 가고, 군데군데 밴드가 붙고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만 남은 탓이었다."자네는 디자인만 하면 장인들이 알아서 해줄 텐데,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나?"지수가 밴드가 붙은 손으로 매듭 실의 엉킨 부분을 조심스레 풀어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여사님, 제가 이 실의 무게와 질감을 모르면 장인 선생님께 어느 정도의 힘으로 매듭을 지어달라고 부탁드려야 할지 알 수가 없거든요.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그건 제 디자인이 아니라 그저 장인의 손을 빌린 기성품일 뿐이니까요."강 여사는 지수의 눈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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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벼랑 끝의 꼼수

강도진은 ‘Z’의 법률 대리인들을 직접 찾아가 사정했음에도 일방적인 계약 파기를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CB 그룹을 이룬 이후 맞이한, 인생 최초의 가장 크고 뼈아픈 첫 패배였다.숨이 막힐 듯한 불안이 엄습했다. 본사 로비를 걸어 들어올 때부터 자신을 바라보던 직원들의 눈빛에서 은밀한 불신이 읽히는 듯했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턱 막혀왔다. 도진은 습관처럼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셔츠 단추를 몇 개 뜯어내듯 풀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지만, 탁한 연기는 도진의 호흡을 안정시키기는커녕 허파를 찌르며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었다.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던 그때, 뇌리 속에서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나가 속삭였다.‘천천히 호흡해, 도진 씨. 하나에 깊게 숨을 들이쉬고, 둘에 끝까지 내뱉는 거야.’지수의 목소리였다. 8년 동안 공황이 찾아올 때마다 제 곁을 지키며 호흡을 가다듬어 주던 지수의 온기가 기억의 심해에서 떠올랐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목소리의 템포에 맞춰 가쁜 호흡을 하나씩 다스려 갔다. 들이쉬고, 내뱉고. 가까스로 산소가 뇌로 돌기 시작하자 지독한 현실이 다시 선명해졌다. 지금은 불안해하며 뇌를 낭비할 시간이 아니었다. 천재 디자이너 Z를 대체할 완벽한 '새로움'이 필요한 골든타임이었다.태준이 조심스럽게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잔뜩 굳어 있는 도진의 안색을 살피며 그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사회에서 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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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수진의 디자인

한수진은 넓은 펜트하우스의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제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임신 5개월 차. 이제는 옷 위로도 살짝 부푼 티가 나는 배는 수진에게 이 화려한 세상을 약속하는 동아줄이자, 동시에 언제 밀려날지 모른다는 공포를 자극하는 서늘한 칼날이었다.최근 도진의 태도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지수와 그녀가 입양하겠다던 아이, 예인의 존재를 언급할 때마다 도진의 눈동자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동요를 포착한 뒤로 수진은 매일 밤잠을 설쳤다. 자신이 겨우 손에 쥐기 시작한 완벽한 안주인의 자리가 언제든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수 있다는 조바심이 목을 죄어왔다. 그 불안의 한복판에서 CB 그룹이 대대적으로 선포한 ‘새로운 태양 디자이너 공모전’ 소식은 수진의 심장을 세차게 뒤흔들었다.‘Z의 자리를 대신할 총괄 디자이너.’그 왕관만 차지할 수 있다면. 내가 도진의 가장 아픈 구멍을 메워주고 그의 비즈니스적 구원자가 된다면, 도진의 곁에서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다질 수 있을 터였다. 수진은 수입 명품 펜을 쥐고 거실 테이블 가득 고가의 드로잉 북을 펼쳤다. 방안에 틀어박혀 밤을 새워가며 선을 긋고 색을 칠했다. 이번 공모전의 핵심 원석은 안젤라이트였다.그 누구보다 이 원석의 가치를 잘 아는 수진이었다. 각도에 따라 핑크와 블루가 오묘하게 교차하는 그 압도적인 화려함에 반해, 루체른과의 원석 공급 계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밀어붙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수진은 자신이 반했던 그 화려한 색감을 어떻게든 제 도안 위에 구현해 내려 애썼다. 하지만 원석에 매료된 욕심이 과했던 탓일까. 수진은 안젤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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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수진의 각성

수진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경리단길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진의 뺨이 수치심과 고양감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전날 밤, 도진에게 들었던 가차 없는 악평에 자존심이 바닥을 치다 못해 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수진 자신도 완벽히 만족하지 못한 조잡한 디자인을 급한 마음에 내보인 것이 패착이었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안온한 가정주부로 지내며 자신의 트렌디한 감각이 뒤떨어졌다는 차가운 현실 자각은 쓰디썼다. 한때 촉망받던 디자이너로서 제 실력에 자부심을 품고 있던 수진이었기에, 그 패배감은 뼈아픈 분노가 되어 가슴을 짓눌렀다.‘딸랑.’낡은 공방의 현관을 여는 맑은 종소리에, 연필로 대충 머리를 틀어 올린 채 작업에 열중하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완벽한 미인상은 아니었지만 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닌 귀염상의 얼굴이었다. 다만 눈가에는 숨기지 못한 짙은 피로가 묻어나고 있었다.“어서 오세요. 물건은 편하게 구경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이 없으시면 개별 디자인도 해드리니 언제든 이야기해 주세요.”ARS 기계음처럼 내뱉는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유진은 제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고 태블릿 화면 위로 드로잉 펜을 바삐 놀렸다. 수진은 저 여자가 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계산대의 높이가 살짝 높은 데다 태블릿이 절묘한 각도로 놓여 있어 화면을 훔쳐볼 수는 없었다. 수진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공방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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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각성의 순간

수진은 거칠게 드로잉 펜을 놀렸다. 머릿속에서 유진의 진열장에 놓여 있던 침수정과 러프 다이아몬드의 파편들이 깨지며, 수진의 정형화된 도안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매끄럽게 깎고 다듬을 생각만 하니까 안젤라이트가 그저 평범한 돌덩이처럼 죽어버렸던 거야.’수진의 날카로운 디자이너 본능이 연필 끝을 타고 무섭게 폭발했다. 차가운 백금을 얇고 정교한 실처럼 뽑아내어, 손목과 귀끝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덩굴 줄기를 거침없이 그렸다. 귀걸이는 귓가를 타고 섬세하게 드롭되는 백금 덩굴 끝에 우아한 꽃망울이 맺힌 형상이었다. 수진은 안젤라이트 꽃수술을 움켜쥐는 백금 프레임을, 유진의 공방에서 보았던 가느다란 바늘 내포물처럼 무질서하게 뻗어 나오도록 설계했다. 가시 돋친 침 사이 깊숙한 곳에 안젤라이트를 가두듯 박아 넣자,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가시 틈새로 일렁이는 광채가 극도로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텐션을 뿜어냈다.이어 팔찌 도면 위로 펜촉을 굴렸다. 손목을 감싸는 덩굴 위로 잎사귀들을 얹으며, 매끄럽던 백금의 표면을 지워냈다. 대신 그 자리에 정제되지 않은 러프 다이아몬드의 단면들을 촘촘히 흩뿌려 서늘한 질감을 부여했다. 그 차가운 어둠 위에 아침 이슬처럼 투명하고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안젤라이트를 세팅했다. 러프 다이아몬드의 거친 질감과 대비되는 안젤라이트 본연의 신비로운 광채가 비로소 눈이 시리게 타올랐다.유진의 뼈대를 훔쳐 제 살을 붙여 완성해 낸, 수진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각성의 순간이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수진의 태블릿에는 전날과는 전혀 다른 오직 수진만의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도진 씨!”수진은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도진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도진은 태준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다 노크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수진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태준은 굳은 얼굴로 서류를 정리해 일어섰고, 수진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들으라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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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새로운 매듭

작업대 위에는 미세하게 늘어난 은사와 금사 실타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얇고 날카로운 금속 선에 쓸리고 찔려 살갗이 허옇게 일어난 지수의 손끝은 이미 성한 곳이 없었다. 손끝의 통증이 머리를 찌를 때마다 지수는 짓무른 손가락에 밴드를 칭칭 감아가며 다시 정을 쥐고 선을 골랐다.지수는 박 장인에게 배운 전통 세공 기법과 조밀한 매듭법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조립했다.‘현대의 세공은 원석을 깎아 고정하는 프레임에만 집착해. 하지만 전통 매듭은 품어 안는 법을 알지.’지수는 가느다란 은사와 부드러운 금사를 양손에 쥐고 손가락을 정교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장인에게 배운 격자 모양의 ‘가시 매듭’과 전통 장신구의 기품을 더하는 ‘국화 매듭’의 원리가 지수의 손안에서 엉키고 설켰다. 금속 선은 실과 달라서 조금만 힘을 잘못 주면 꺾이거나 끊어지기 십상이었다. 수십 번 은사가 툭 끊어져 나가고 손끝에 날카로운 통증이 박혔지만, 지수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다시 첫 선을 고정했다.한 올, 또 한 올. 밤이 깊어갈수록 지수의 손끝에서 정교한 은빛과 금빛의 매듭 그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기계로 찍어낸 완벽한 대칭이 아니었다. 손의 압력과 호흡에 따라 미세하게 굵기가 달라지는, 오직 사람의 손으로만 자아낼 수 있는 비정형의 유연한 주머니였다. 지수는 주머니 모양으로 얼기설기 짜인 매듭 망 안으로 안젤라이트 원석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화덕의 은은한 불빛 아래로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스스로 벼려낸 차가운 은사와 금사의 그물망 틈새로 안젤라이트의 거친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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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유진의 사정

수진은 퀵으로 배달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서류 봉투를 거칠게 뜯었다.윤유진의 뒷조사 결과였다. 하얀 종이 위를 빽빽하게 메운 문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수진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띠며 점점 크게 번뜩였다.윤유진. 지방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당시에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CB의 모회사에서 강도진의 아버지 강수한 회장의 비서로 비참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여자. 유순하고 귀염성 있는 미모를 가졌던 유진에게 더러운 검은 손길을 뻗은 것은 다름 아닌 강수한이었다. 회식을 빙자해 억지로 술을 먹이고 저지른 성폭행, 그리고 그 끔찍한 비극의 대가로 세상에 태어난 원치 않는 핏줄이 바로 유진의 딸 가온이었다.가온은 현재 신경모세포종으로 수진과 도진이 아이의 성별을 확인하러 다니는 바로 그 대학병원의 소아청소년과에서 하루하루 숨을 헐떡이며 치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유진이 감당할 수 없는 비싼 치료비 때문에 제 딸의 목숨을 담보로 핏줄이라는 명목 하에 강수한을 찾아갔지만, 강수한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기는커녕 단돈 1억 원을 쓰레기처럼 던져주며 비참하게 내쫓았다는 비하인드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이러니 내가 도진 씨 본가에 갔을 때, 그 아줌마가 그렇게 발작하듯 예민하게 굴었네.’수진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진의 생모인 김미자가 왜 수진을 처음 대할 때부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며 경계했는지, 왜 사생아나 첩의 존재에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발작했는지 비로소 모든 퍼즐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평생 남편 강수한의 유구하고 지저분한 여성편력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 김미자였으니, 젊은 비서 출신으로 도진의 아이를 덜컥 임신해 안방을 차지하겠다고 기어들어 온 수진이 고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동시에 수진의 입가에 묘한 승리감과 함께 거대한 우월감이 차올랐다.자신에게는 아들이면 200억, 딸이어도 100억이라는 거액의 정착금을 조건으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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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진짜와 진짜의 밤

경리단길에서 살짝 벗어난 후미진 골목의 공방. 유진은 어두운 작업대 조명 아래 홀로 앉아 핀셋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작업대 구석에는 수진이 던져두고 간 현금 천만 원이 담긴 봉투와, 제 영혼의 처분권을 넘기겠다는 불공정 계약서가 비참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태블릿 화면 속에는 수진이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그려놓은 백금 덩굴과 잎사귀 도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유진의 눈앞에 불과 3개월 전,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그날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심장병을 앓는 가온이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유진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강수한 회장의 저택을 찾았었다. 비에 젖은 몸으로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유진은 가온이가 회장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내밀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서늘한 멸시였다. 강 회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1억이 든 봉투를 발치에 던지며 짧게 뱉었다.“이 돈이면 아이 수술비는 충분할 터이니, 다시는 이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그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회장님, 여기 친자 확인 서류가……!”유진의 처절한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강수한의 곁을 지키던 김미자가 달려들어 유진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낚아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그 서류가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 있어? 그리고 너 같은 것들을 내가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아이가 아프다는 것도 거짓말일지 내가 알게 뭐야. 어디서 감히 근본도 모르는 핏덩이를 들이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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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새로운 태양' 공모전

CB 그룹의 신규 브랜드 '새로운 태양' 메인 컬렉션 공모전의 최종 심사 날. 본사 대회의실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고, 장내를 가득 채운 국내외 주얼리 학계의 권위자들과 명품 브랜드 디렉터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출품작들을 훑었다. 비슷비슷한 화려함에 지쳐가던 심사위원단의 눈동자가 일순간 멈춘 것은, 수진이 제출한 안젤라이트 '빛의 정원' 세트가 베일을 벗은 순간이었다.“……경탄스럽군요.”심사위원장의 나직한 한마디에 도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사위원들의 시선은 수진이 직접 그렸다는 귀걸이와 팔찌를 지나, 가슴 중앙을 유려하게 흐르는 메인 목걸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현대 주얼리 공학의 한계를 시험하듯, 백금 거울 프레임 안에서 수천 번 굴절되며 새벽빛을 뿜어내는 안젤라이트의 광채는 장내를 완전히 압도했다.“이 비대칭 덩굴의 흐름과 굴절률 계산은 그야말로 천재적입니다. 한수진 디자이너, 이번 공모전의 우승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겠군요.”수진은 쏟아지는 박수갈채 속에서 단상 위로 올라가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도진은 터져 나오는 환희를 감추지 못한 채 수진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수진의 우승으로 CB의 주가는 요동칠 것이며, 자신이 선택한 가치가 옳았음을 증명하는 완벽한 순간이었다.수진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트로피를 쥔 수진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극찬한 그 압도적인 목걸이의 선은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었다. 박수 소리가 커질수록, 제 목을 죄어오는 가짜 왕관의 무게가 서늘하게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같은 시각, 고즈넉한 전통 한복 공방의 안방.은은한 향묵 내음이 감도는 이곳에 전통 복식의 최고 권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장여사의 의뢰에 지수가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한복 2차 가공’ 단계였다. 한복의 격조를 최종 완성하기 위해 대삼작노리개와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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