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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축복의 모든 챕터: 챕터 81 - 챕터 90

107 챕터

81화: 균열의 시작

새로운 브랜드 ‘새로운 태양’의 정식 론칭을 앞두고, 강도진과 한수진은 극도의 흥분 속에서 원석 1차 열처리 공정 시찰에 나섰다. 가공 장비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돌아가는 루체른 측의 핵심 공정 라인이었다.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두 사람의 눈앞에서, 가공을 마친 안젤라이트 원석 몇 점을 꺼내는 순간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수십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얇은 균열들이 조명 아래서 푸르스름하게 떠올랐다. 원석의 열팽창률 문제로 내부 미세 균열이 발생한 것이었다.균열이 보이는 순간 만족으로 가득했던 도진의 얼굴에 팽팽한 균열이 생겼다."이 균열은 뭐죠? 분명 계약할 당시 이 부분은 완벽하게 해결해야만 납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명시한 것 같은데요!"도진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며 낮게 가라앉았다. 옆에서 공정을 설명해 주던 루체른의 기술 책임자가 도진의 손에 든 '안젤라이트'를 빼앗듯 가져갔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완벽하게 해결했지만 수만 분의 일로 발생하는 변수까지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필이면 대표님이 오신 자리에서 이런 일이 생겼군요. 계약 이후 처음 생긴 균열입니다.”루체른의 기술 책임자가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도진에게 설명했다."확률적으로 완벽한 균열 방지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납품하는 제품에는 이런 문제가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드립니다."도진 역시 가공 과정에서 열팽창률에 따른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아와 거래하며 최고 등급의 원석만을 공급받아 온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원석 문제로 사고가 터진 적이 없었다. 그 철옹성 같던 무사고의 기록이 도진의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지난 3년의 경험은 원석 유통이란 그리 복잡할 것 없는 영역이라는 오만을 심어주었고, 새로 손을 잡은 루체른 역시 아스테리아처럼 당연히 완벽한 원석만을 납품할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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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실력의 의심

CB 그룹 디자인 1팀 회의실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공모전 우승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한수진에게, 실무 디자이너들이 기성 판매용으로 기획한 ‘새로운 태양’ 파인 주얼리 라인업 시안들을 보고하는 첫 자리였다. 회의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이들은 과거 진짜 천재 ‘Z’와 호흡을 맞추며 눈이 머리끝까지 높아진 베테랑들이었다. 수진은 날카로운 피드백으로 첫 단추를 멋지게 끼우고 싶었다.“디렉터님, 이번 ‘새로운 태양’ 파인 라인의 기획 시안입니다.”디자인 1팀 팀장이 화면에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독자적으로 변형해 기획한 시안들을 띄웠다. 도안들을 꼼꼼히 살피던 수진이 나름대로 안목을 보여주기 위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전체적인 무드는 좋은데, 실무진 관점에만 갇혀서 기성 라인의 본질을 놓친 부분이 보이네요.”수진은 턱을 살짝 괴고 화면 속 ‘프로미넌스 드롭 이어링’ 도안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이 귀걸이요. 상단 태양 불꽃을 감싸는 백금 가시 프레임이 너무 거칠고 두꺼워요. 게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드롭 체인의 휨 각도가 비대칭이라 얼핏 보면 불량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기성 라인은 대중적인 안정감과 착용감이 우선이에요. 침의 백금 프레임 두께를 조금 더 줄이고, 체인 각도도 깔끔한 대칭형으로 다듬는 게 어떨까요?”그럴듯한 지적이라 생각한 수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메랄드 컷으로 화려하게 세공된 ‘솔라 이클립스 펜던트’ 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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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스타게이트

자신의 무지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저 잘난 체하는 디자이너들의 질문을 대신 받아쳐 줄 진짜 대필 작가. 유진을 당장 제 발밑에 묶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정말 매정하네, 유진 씨. 애가 병실에서 저렇게 꺼져가고 있는데 자존심이 밥 먹여 줘?”늦은 밤, 가온이 입원해 있는 대학병원 VIP 병실 안. 수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울어 지친 유진의 눈앞에 거액의 수술비 보증 수표와 비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숨이 가빠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딸 가온을 바라보는 유진의 가슴은 이미 난도질당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진은 그런 유진의 모성애를 가장 잔인한 도구로 삼아 숨통을 죄었다.“가온이 병원비랑 앞으로 들어갈 수술비, 내가 전부 책임져 줄게. 대신 유진 씨는 당장 오늘부터 내 개인 어시스턴트로 들어와. 디자인실 직원들이 묻는 기술적 질문들, 그리고 파인 주얼리 대량 가공 수치 조정까지 조용히 밑바닥에서 나 대신 처리해 주는 거야. 알겠지?”딸의 목숨값을 들고 흔드는 수진의 악랄한 협박에 유진은 무너져 내렸다. 평생을 지켜온 예인으로서의 긍지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유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명란에 덜덜 떨리는 펜을 대고 자신의 영혼을 넘겼다.수진은 유진이 서명한 계약서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병원을 나섰다. 한편, 병실에서는 유진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가득했다.내부의 치명적인 균열을 악랄하게 메운 수진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제, CB 그룹의 꼭대기 층에서는 수진이 미처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스타게이트가…… 기어이 사고를 쳤군.”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강도진의 미간이 거칠게 좁혀졌다.도진이 귀찮은 짐덩어리처럼 여겨 처분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모델 에이전시, 스타게이트. 그저 그런 삼류 에이전시로 소멸할 줄 알았던 그 작은 회사가 최근 사교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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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월가식 복수법

그의 머릿속에 스타게이트의 현 사장으로 알려진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교계에서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재미교포 출신의 사업가, 사라 킴.‘사라 킴…… 그 여자가 대체 어디서 이런 막대한 자금을 끌어와 업계를 평정했단 말인가.’배후에 진우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도진은 오직 사라 킴이라는 화려한 페르소나만을 떠올리며 이빨을 갈았다. 하지만 이번 론칭 쇼는 CB 그룹의 미래가 걸린 판이었다. 여기서 일정이 틀어지거나 모델들의 격이 떨어지면 투자자들과 이사회에 도진의 무능함을 광고하는 꼴이 된다.결국 기 싸움을 벌일 시간조차 없었다. 도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지시했다.“……스타게이트 사라 킴 사장실에 연락해서 약속 잡아. 내가 직접 움직이지.”도진은 제 발로 진우와 사라가 쳐놓은 거미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같은 시각, 리버파크 지수의 안식처.탁자 위에는 스타게이트의 세 개 에이전시 최종 합병 보고서와 함께 이혜진, 도진경의 전속 계약서가 올려져 있었다. 지수는 따뜻한 홍차를 잔에 따르며 맞은편에 앉은 진우와 사라를 바라보았다. 사라는 붉은 입술을 쏘옥 내밀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수 언니, 방금 강도진 비서실에서 연락 왔어. 당장 만나고 싶대. 완전히 똥줄이 탄 모양이야.”사라의 경쾌한 목소리에 진우가 나직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이혜진 씨와 도진경 씨 카드가 제대로 먹혔네요. 강도진은 스타게이트의 진짜 소유주가 저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하고, 오직 사라 씨만 보고 매달릴 겁니다.”“지수 씨, 정말 대단해요. 시장 지배력이 막강한 대형 에이전시 세 곳을 이 짧은 시간 내에 동시에 흡수해 버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지수의 진심 어린 감탄에 진우가 지수를 똑바로 응시하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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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은밀한 소문

며칠 뒤, 지수는 다시 오 사모와의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장 여사의 저택 안, 오 사모는 지난번보다 한층 더 핼쑥해진 얼굴로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지수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 사모는 체면도 잊은 채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지수 씨……! 어떻게 되었나? 그 갤러리 놈들 꼬리는 잡은 건가?”지수는 아무런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가죽 가방에서 깔끔하게 밀봉된 흰색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안에는 정식 자산 수탁 증서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투자 수익 내역서가 들어있었다. 오 사모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역서를 펼쳤다. 그리고 맨 아랫줄에 선명하게 찍힌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사색이 되어 있던 그녀의 두 눈이 터질 것처럼 확장되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자릿수인가? 지수 씨, 액수가 잘못 적힌 것 같은데……?”오 사모가 헛숨을 들이켜며 물었다. 수탁 증서에 찍힌 금액은 그녀가 사기당했던 20억 원이 아니었다.[최종 회수 및 운용 자산: 5,000,000,000원 (금 오십억 원)]“잘못 보신 게 아닙니다, 사모님.”지수가 우아하게 의자에 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사기단 일당은 오늘 오전, 또 다른 밀항 건과 금융사기 혐의로 해경과 검찰에 의해 현장에서 긴급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사교계에는 사모님의 성함은 물론, 털끝만 한 소문도 나가지 않게 깔끔하게 입을 막아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 그런데 이 50억은 대체 어디서 난 돈이란 말인가?”오 사모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역서를 움켜잡았다.“놈들이 다른 유령 법인을 통해 은닉해 둔 무기명 채권과 세탁 자산이 있었습니다. 제 투자 파트너가 그 흐름을 아주 영리하게 역이용해 숏(공매도)을 걸어 자산을 흡수했고, 일주일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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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짓밟힌 모성

유진이 수진과의 비밀 서류에 서명한 이후, CB 그룹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실에는 기이한 형태의 공생이 시작되었다.수진이 전체적인 트렌드와 파인 라인의 세련된 실루엣, 컬러 매칭 같은 거시적인 디렉션을 주도하면, 그 뒤편 어두운 대기실 공간에서 유진은 대량 생산을 위한 물리학적 데이터와 초정밀 역학 수치 같은 미시적인 실무 설계를 받쳐주었다. 수진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실무진들이 올린 기획안을 수진의 안목으로 먼저 1차 스크리닝한 뒤, 도저히 제 손으로 풀리지 않는 안젤라이트의 미세한 장력과 공학적 한계 수치들만을 패드로 넘겨 유진의 뇌를 빌리는 방식이었다.그 기묘한 공생 속에서 수진은 무섭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유진이 대기실 안에서 도출해 전송해 주는 완벽한 수학적 공식과 세공 대안들을 실시간으로 흡수하면서, 가라앉아 있던 수진의 날카로운 디자이너 감각이 기적처럼 깨어난 것이다.‘아, 대칭 구조에서 생기는 응력을 이런 식으로 분산시킬 수도 있구나…….’유진의 천재적인 물성 데이터를 지표 삼아 선을 긋다 보니, 어느새 수진 본인의 손끝에서도 예전의 감각을 넘어선 유려한 응용 도안들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유진의 뼈대 위에 수진의 감각이 얹어지며 가짜 왕관은 점차 수진의 머리 위에서 진짜처럼 굳건해지고 있었다.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수진의 사내 위상과 달리, 대기실의 공기는 매일 밤 진흙탕처럼 가라앉았다. 유진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내쉬던 딸 가온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억지로 펜을 쥐었다. 제 긍지가 난도질당할 때마다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았지만, 아이의 병원비 영수증을 떠올리면 수치심마저 사치였다.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 수진은 가온의 1회 치료비인 3,000만 원의 딱 절반인 1,500만 원만을 유진의 계좌로 입금시켰다. 당장 눈앞의 급한 불을 끄고 치료를 시작할 수는 있지만, 그다음 단계의 치료는 감히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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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패션 성전

같은 시각, 강도진은 제 발로 스타게이트 본사 로비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과거 자신이 '절세용 구멍가게'라며 헐값에 던져버린 에이전시의 문을, 이제는 론칭 쇼의 목줄을 구걸하기 위해 찾아온 처지가 지독하게 비참했다. 사라에게 넘긴 후 제대로 들여다본 적조차 없던 스타게이트의 모습은 도진의 기억과 판이하게 바뀌어 있었다.로비를 통과하는 동안 도진의 시선에 닿은 회사 분위기는 낯설 만큼 생경했다. 과거의 어둡고 칙칙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자유롭고 세련되게 변해 있었고, 삭막했던 공간은 이혜진과 도진경을 필두로 한 소속 모델들의 압도적인 포트폴리오 사진과 글로벌 패션위크의 메인 포스터들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었다. 스타게이트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패션 성전이었다.“어머, 강 대표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대표실 층에 들어서자, 사라의 비서가 도진을 알아보며 정중하게 다가왔다. 도진은 당연하다는 듯 마호가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비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사장님께서는 중요한 외부 일정 중이시라 바로 뵙기는 어렵습니다.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거대 기업 CB의 수장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비서의 태도에는 일말의 위축됨조차 없었다. 철저하게 사라 킴의 주인의 격을 지키는 모습에 도진은 속에서 천불이 치밀었지만, 당장 아쉬운 쪽은 자신이었기에 힘의 우위를 인정해야만 했다.“……기다리겠습니다.”도진의 묵직한 대답에 비서는 대표실 옆에 마련된 고급스러운 영빈 공간으로 그를 안내했다. 하늘색 패브릭 쇼파 정면의 대형 디스플레이에서는 스타게이트 모델들이 뉴욕과 파리의 런웨이를 질주하는 영상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그녀들이 표지를 장식한 전 세계 패션 잡지들이 책장에 앤티크하게 꽂혀 있었다.도진은 타오르는 속을 진정시키려 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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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도진의 부탁

도진은 오랜만에 자신의 신혼집으로 발을 들였다.일주일 중 3~4일은 한수진의 아파트에서 보내고 있던 터라, 제 집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어색함이 먼저 감돌았다. 하지만 그 어색함도 잠시, 온 집안을 감싸는 시원한 삼나무 향과 그 위를 부드럽게 덮는 달콤한 프리지아 향을 맡자마자 비로소 완벽한 안식처에 온 듯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뒤이어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참기름과 알싸한 마늘 향이, 최근 배달 음식과 거친 외식으로 지쳐 있던 도진의 위장을 사정없이 자극했다.도진이 구두를 벗을 때, 오랜만에 들리는 문소리에 지수가 식사를 멈추고 거실로 나왔다.“어? 도진 씨? 어쩐 일이야?”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 못 본 사이 예전의 생기와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되찾은 지수의 모습을 마주하자, 도진은 순간 자신들이 가장 행복했던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어쩐 일이라니? 내가 내 집에 온 건데. 그동안 회사 일이 바빠서 자주 못 들어왔지만, 여기는 엄연히 ‘우리 집’이잖아.”오랜만에 도진의 입가에 가식 없는 편안한 미소가 퍼졌다. 지수의 바뀐 분위기에 취한 그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슬그머니 다가갔다.“나도 마침 배고팠는데. 오랜만에 우리 여보가 해준 저녁 먹고 싶다.”도진은 자연스럽게 지수를 품에 안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지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도진의 손길을 매끄럽게 피했다.“알았어, 일단 씻고 와. 저녁…… 새로 준비할게.”도진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반신욕을 겸한 샤워를 마친 뒤, 가벼운 옷차림으로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제 앞에 놓인 웰던으로 구워진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확인한 순간, 좋았던 기분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나는 왜 스테이크고, 당신은 왜 비빔밥이야?”도진의 날 선 질문에 지수는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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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혜진과 진경

“언니~”고요하던 지수의 리버파크 펜트하우스에 발랄한 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만으로 일반 주택의 복도마저 단숨에 런웨이로 만들어버리는 두 사람, 이혜진과 도진경이었다.“어서 와.”지수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차례로 안아주었다. 지수와 눈을 맞춘 혜진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얼굴이 많이 상했네. 언니, 우리가 CB랑 계약 안 한다고 그 인간이 언니 괴롭히진 않았어?”“언니, 그래서 그 인간이 우리가 CB랑 계약 안 한다고 언니 괴롭히진 않았어?”진경이 지수의 손을 끌어 소파에 앉히며 걱정스레 묻자, 지수는 그녀들이 좋아하는 차를 챙겨 와 마주 앉으며 맑게 웃었다.“괴롭히긴. 오히려 쩔쩔매면서 나한테 구걸하더라. 너희를 반드시 ‘새로운 태양’ 론칭 쇼에 세워달라고, 나보고 다리 좀 놓아달라면서 내 손을 붙잡고 애원을 해.”“기가 막혀. 지가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언니한테 매달려?”혜진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자, 진경이 지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언니는? 언니는 우리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우리가 그 쇼에 올라가길 원해?”두 사람의 질문에 지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이제 그곳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혜진이 담담하게 말하는 지수를 말없이 바라보다 씁쓸하게 읊조렸다.“언니 정말 상처가 컸구나. 강도진은 몰라도 CB에 대한 애착은 컸잖아.”“그랬지. 그래서 ‘영원한 사랑’도 고스란히 넘겨줬었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보다는 그냥 그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미련을 떨었던 것 같아.”“언니……”감수성이 풍부한 진경이 결국 눈물을 글썽였다. 지수가 손사래를 치며 진경에게 티슈를 쥐어주었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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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서윤의 결혼식

주말 아침, 오랜만에 늦잠을 자며 피로를 풀고 거실로 나온 도진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지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곳에는 평소 집안에서 보던 수수하고 편안한 아내의 모습 대신, 결혼생활 중 단 몇 번밖에 보지 못했을 만큼 우아하고 압도적인 자태를 한 지수가 서 있었다. ‘중요한 스케줄이 있나?’ 하는 의문과 함께, ‘왜 내게 아무런 말도 없었지?’라는 묘한 불안감이 도진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소외감이 그를 덮쳤다.도진의 흔들리는 눈빛을 느꼈는지, 지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무심히 흘깃 보았다. 그리고 현관에서 우아하게 구두를 신으며 덤덤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강 여사 따님 결혼식 가요.”도진이 미처 대답을 가다듬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수의 당당한 뒷모습을, 도진은 멍하니 선 채 쓸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정·재계의 거물들이 총출동한 최고급 호텔의 웨딩홀은 숨 막힐 듯 화려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로라하는 사교계의 명사들이 서로 연줄을 대기 바쁜 공간. 그 번잡한 소란스러움을 단숨에 침묵시킨 것은, 신부 어머니인 강인주 여사가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식장에 들어선 순간이었다.하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강 여사가 입은 한복은 전통의 격식과 가문의 위엄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저고리는 묵직하고 정조 있는 진홍색 양단(洋緞)으로 지어져, 은은하게 깔린 전통 문양 위로 빛이 닿을 때마다 짙은 윤기를 흘려보냈다. 그 강렬한 저고리 아래로 매끄럽게 떨어지는 회백색 명주(明紬) 치마는 강 여사의 존재감을 한층 더 고고하게 받쳐주었다. 자연스러운 미색이 감도는 회백색 명주는 걸음마다 우아하게 일렁였다.혼주의 품격을 완성한 것은 가슴팍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대삼작(大三作) 노리개였다. 세 가지 최고급 원석과 정교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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