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00억이라는 거금을 쏟아붓고 나서야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집무실을 가득 채웠던 비난의 화살들이 연기처럼 사라진 밤, 도진은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면서도 도진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지수에게 이 추잡한 스캔들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평소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던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구두를 벗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로 도진은 위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거실에서 그를 맞이한 지수의 얼굴에는 예상했던 분노도, 멸시의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며 도진의 굳은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고생 많았어요. 당신의 선의를 사람들이 그렇게 비겁하게 이용하다니…… 속상해서 어떻게 해요.”
도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수는 수진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기는
집으로 달려온 지수는 숨을 가쁘게 쉬며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진우가 말했던 '최고의 물류 전문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정작 너무 당연해서 떠올리지 못했던 존재, 바로 오빠 이지현이었다.수신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수화기 너머로 지현의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지수냐? 이 시간에 웬일이야?]-"오빠! 지금 통화 괜찮아? 나 진짜 급해서 그래!"-[무슨 일인데 그래? 누가 너 괴롭혔어?]-지현의 목소리에 단번에 경계심이 서렸다. K국의 세계적인 물류 네트워크를 쥐고 흔드는 수장이었지만, 하나뿐인 동생 지수의 일이라면 제쳐두고 달려오는 그였다."아니, 그게 아니라! 제이아우라 해외 물류 문제 때문에 그래. 지금 브랜드 인지도가 터져서 글로벌 거점이 필요한데... 사실 진우 씨한테 듣기로 CB의 A국 주요 거점 물류센터 3곳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거든. 근데 내가 물류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대형 센터 3곳을 어떻게 최대로 활용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그걸 직접 운영할 수 있을지도 너무 고민돼서..."지수의 진지한 고민을 듣던 지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오더니, 지현이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CB의 물류센터 3곳이라... 간단해. 그 3곳의 물류 시스템을 전부 우리 오닉스(Onyx)의 물류 시스템으로 교체하면 돼. 오닉스 표준 시스템을 이식하면 그 3곳을 시작으로 전 세계 오닉스 물류망과 바로 직결시킬 수 있으니까.]-"진짜? 그렇게 쉽게 연결이 돼?"-[그럼. 그리고 운영 걱정은 하지 마. 당장 오닉스 본사에서 검증된 베테랑 물류 전문가를 제이아우라 쪽으로 파견해 줄 테니까. 그 친구가 물류는 전담해 줄 테니까 넌 제이아우라의 다른 부분만 신경 쓰면 돼.]-"진짜지? 오빠 진짜 최고야!"-[
세계적인 톱스타 클레어가 자신의 개인 SNS에 ‘제이아우라(#J_AURA)’를 태그한 후 폭풍이 몰아쳤다.암암리에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인지도를 올리고 있던 제이아우라는 그 한 줄의 태그로 인해 전 세계 패션계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각국에서 주문 문의와 관심이 폭발적으로 쏟아졌고, 브랜드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하지만 이 눈부신 성장의 그늘 아래, 지수에게는 새로운 중대 고민이 싹트고 있었다.바로 그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수요를 충족시켜 줄 ‘공급 및 물류 시스템’의 문제였다.‘지금까지는 괜찮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무리야.’지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까지는 THE MOON 지하에 비밀리에 마련한 물류 시스템과, CB의 물류센터 일부 사용 권한만으로도 아슬아슬하게 물량을 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려는 지금, 그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다.자체적인 대규모 물류망을 새롭게 구축하자니 막대한 자본과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렇다고 이 호재를 모른 척 지나치기엔 제이아우라의 미래에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고민이 깊어질수록 지수의 이마에는 옅은 주름이 잡혔고,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무슨 고민 있어요?"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지수의 귓가를 두드렸다. 옆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척하며 지수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까지 면밀히 살피던 진우였다."아니요, 없어요."지수가 황급히 표정을 다잡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진우의 뾰족한 눈길을 속일 수는 없었다."에이, 거짓말."진우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 가벼운 농담조의 어조에 꽁꽁 굳어 있던 지수의 얼굴에 피식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이 비로소 생기 있게 살아난 것이다.진우는 그 틈을 놓
도진이 A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CB 사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그 소식을 들은 유현은 거의 뛰어갈 듯이 대표실로 향했다. 찰스에게 매번 "쓰레기"라는 비하와 폭언을 들으며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도진의 따뜻한 시선과 자신을 안심시켜 줄 다정한 확인뿐이었다. 자신의 작업물이 정말 쓰레기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줄 단 한 마디가 절실했던 것이다.하지만 대표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유현 씨,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외부 연락도 전부 차단하시고 중요한 재무 서류 작업에 집중하고 계십니다."지상이 대표실 앞을 가로막아서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아주 잠시라도... 잠시만 얼굴만 보고 가면 안 될까요?""죄송합니다. 지금 대표님께는 1분 1초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투자금 유지와 관련된 건이라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유현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도진에게 유현의 불안이나 감정적 결핍 따위를 받아줄 여유는 단 1그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우가 요구한 수치를 맞추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마당에, 당장의 투자금 유지가 도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사활이 걸린 명제였기 때문이다.결국 유현은 도진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도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도진과의 연결고리가 차단된 채 시간만 흐르는 동안, CB 내부의 분위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뒤숭숭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출처조차 불분명한 흉흉한 소문들이 사내에 찌라시처럼 퍼져나갔다.‘강도진 대표의 판단 실수로 CB 물류 라인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직전이라는데?’‘뉴스에만 안 나왔지, 실상 CB가 속으로 다 망해가고 있대. 당장 다음 달 자금 돌리기도
A국으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도진은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창밖으로 짙은 밤하늘이 지나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진우가 던진 단어 하나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난 숫자를 믿지, 사람은 믿지 않거든. 내가 만족할 만한 수치를 가지고 와.’그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사업가로서 자격을 증명하라는 진우의 서늘한 시험대였다.A국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은 휴식조차 마다하고 CB 본사 대표실로 직행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존에 기획실에서 올라왔던 '검은 태양' 관련 보고서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이었다. 포장만 화려하고 추상적인 장밋빛 전망으로 점철된 서류 따위는 진우라는 거인의 눈을 단 1초도 속이지 못한다."대표님, 밤을 새우신 상태입니다. 일단은 조금이라도...""됐어, 지상아."도진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매섭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처음부터 다시 짠다. 검은 태양 프로젝트의 초기 투자금 집행 내역부터 지금까지의 실질 수익률, 그리고 향후 5년간의 리스크 관리 및 수익 전망치까지 전부.""전부... 말씀이십니까?""그래. 단 1원 단위의 오차도 없어야 해. 숫자로 진우를 설득한다. 그 남자가 납득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기간 연장 따위는 없다."도진은 직접 펜을 들고 재무제표와 시장 분석 자료를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했다. 오만과 자존심을 털어낸 도진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남이 작성해 준 보고서에 도장만 찍던 예전의 도진이 아니었다. 완벽한 숫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의 밤샘 작업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도진이 '검은 태양'의 수치를 재정립하는 데 몰두하고 있던 며칠 뒤, 지상이 굳은 표정으로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보안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대표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 응접실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은한 앰버 빛 조명이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공간이 품은 온도는 극도로 차가웠다. 통창 밖으로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으나, 방 안의 누구도 그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지 못했다.질문조차 되지 못한 도진의 피맺힌 음성이 허공에 산산이 부서졌다.진우는 도진의 질문에 단 한 마디 대답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비참하게 주저앉아 있는 도진을 무심하게 지나쳐, 스위트룸 상석 소파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깊숙이 자리를 잡고 앉을 뿐이었다.진우가 느릿하게 턱을 괴며 낮게 읊조렸다.“내가 했다라…… 글쎄? 난 당신한테 아무것도 강요한 적 없는데.”“……!”낮게 깔린 진우의 목소리가 도진의 귓가를 울리는 순간, 도진은 뇌리가 쿵 하고 깨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그의 말이 맞았다.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자신에게 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공개 입찰을 따내기 위해 오션블루에, 그리고 RV은행에 손을 벌리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모든 것은 지수에게 지기 싫다는 오기, 그리고 이 정도 재력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세상에 과시하고 싶었던 자신의 오만한 욕망이 스스로 벌인 일이었다.‘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부정당하는 완벽한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도진은 짓눌리는 중압감을 뚫고 이를 악물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꼿꼿한 태도로 진우의 맞은편 소파에 정갈하게 앉았다. 일단은 이 300억, 아니 어쩌면 500억으로 불어나 버린 처절한 협상
A국 CB그룹 본사 대회의실. 대형 스크린 너머 싱가포르에 있는 강도진 대표와의 긴급 화상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화면 속 도진의 얼굴은 몰라보게 파리해져 있었지만, 이사들의 거친 고성은 도진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회의의 안건은 매년 공개 입찰을 거치는 ‘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원석 확보 및 내년도 사업 방향이었다.“강도진 대표! 당신 장담과는 완전히 딴판 아닙니까! 올해 '검은 태양' 프로젝트로 거둬들인 수익률이 당초 목표치의 반토막도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아스테리아 입찰에 또 거액을 쏟아붓는 게 말이 됩니까?”도진의 대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최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스크린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성을 질렀다. 그 옆에서 자신의 총괄 입지만 유지하면 그만인 찰스 라인의 이사가 적당히 거들었다.“말은 바로 하시오! 비록 수익률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제이아우라와의 협업을 통해 바닥을 치던 CB의 브랜드 신뢰도와 상징성은 완벽하게 회복하지 않았습니까!”“신뢰도가 밥 먹여 줍니까? 회사는 이윤을 남겨야 하는 조직입니다!”“그렇다고 이미 강 대표가 매년 새로운 '검은 태양'을 시장에 발표하겠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한 약속을 저버리자는 거요? 약속을 어기는 순간 CB의 주가는 고꾸라질 겁니다!”이사회 내부가 찬반으로 갈려 시끄럽게 대립하는 동안, 화면 너머 도진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경멸과 피로가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자금을 구하러 싱가포르에서 핏똥을 싸며 구르는 동안, 회삿돈 한 푼 보태주지 않은 이사진들이 한가하게 입찰 따위로 밥그릇 싸움을 하는 꼬라지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마침내 도진의 이성이 툭 하고 끊어졌다.“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도진이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