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31 - Chapter 40

100 Chapters

제31화

“알고 있었어요.”허서령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알면 두꺼운 옷을 입고 나왔어야지.”지강산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다정하게 들려왔다.허서령은 코끝이 찡해졌다. 문득 지강산과 함께 살기로 한 게 잘못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상적인 남자라면 그를 배신한 전 여자친구에게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대할 리가 없었다.‘지강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왜 이런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는 건데? 혹시 나한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나? 나를 홀려서 마음을 빼앗은 뒤 비참하게 차버리려고? 그때 배신당한 복수를 하려는 거 맞지?”“고마워요.”허서령은 짧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의 곁을 지나쳐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지강산이 허서령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허서령이 구석으로 바짝 붙어 지강산과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내린 후에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 들어가 외투를 벗어 소파에 던지더니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집으로 들어온 지강산이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허서령이 벗어둔 신발을 신발장에 넣었다.그가 몸을 일으키고 굳게 닫힌 허서령의 방 문을 쳐다봤다. 두 눈에 알아차리기 힘든 쓸쓸함이 스쳤다. 느릿느릿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앉은 다음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은 채 두 눈을 감았다. 천근만근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몸이 깊은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그날 밤 허서령은 더 이상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다음 날은 월요일이었다.허서령이 아침 일찍 일어나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고 출근하려고 지하철에 올랐다. 늘 업무가 바빠 야근이 일상이었다.저녁에 지강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저녁 집에 와서 먹을 거야?]‘집’이라는 단어가 허서령에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지강산이 잘해줄수록 그녀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 그리고 지강산이 분명 다른 의도를 품고 복수를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의심 때문이었다.허서령이 짧게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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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허서령이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쌀국수가 절반 넘게 남았지만 입맛이 떨어져 더는 넘어가지 않았다.휴지를 뽑아 입가를 닦았다. 허서령의 태도가 지나치게 덤덤해서 오히려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저 올해 스물일곱이에요. 열일곱 살 어린애가 아니라. 대체 무슨 근거로 제가 엄마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하세요? 인권이라는 게 뭔지는 아세요?”오정화가 시골 출신이라 배움이 적었고 구시대적인 관습에 젖어 평생을 살아온 전통적인 여성이었다. 사고방식이 고루하기 짝이 없었고 남존여비 사상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다.여자라면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동생을 뒷바라지하며 시집가서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식구들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건 물론이고 친척들을 챙기며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여자의 숙명이라 믿었다.오정화의 세계관에서 딸은 반드시 부모의 결정에 따라 결혼해야 했다. 이건 어머니의 특권이자 당연한 일이었다.“법이고 뭐고 나한테 그딴 소리 하지 마. 안 먹혀.”오정화가 상을 내리쳤다. 쾅 하는 굉음에 식당 안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하지만 허서령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차분하기만 했다. 무력함과 처량함이 뒤섞인, 영혼이 조금씩 죽어가는 것 같은 기색만이 감돌았다.“이번 설에 집에 안 가면 묶어서라도 끌고 갈 거야. 이 결혼 싫어도 무조건 해.”오정화가 으름장을 놓았다.“힘들게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줬으면 이제는 부모한테 은혜를 갚아야지.”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허서령이 가방과 휴대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오정화가 뒤를 쫓아가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행인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너 지금 어디 살아? 주소 알려줘. 그리고 전화번호도 알려주고 카톡 차단도 풀어.”허서령이 못 들은 척하며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오정화가 달려들어 허서령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잡아당겼다.“이제 머리 좀 컸다고 엄마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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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경찰은 일반적으로 가정 내 다툼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모녀 사이의 다툼이었고 허서령이 입은 상처라곤 피부의 멍 자국뿐이었으니 더욱 그랬다.경찰이 훈방 조치한 뒤 오정화를 돌려보내려 했다.그때 허서령이 직업이 변호사임을 밝히며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만약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경찰을 직무유기로 고소하겠다고 했다.결국 오정화는 단순 훈방에서 구류 10일과 벌금 10만 원이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경찰서에 갇힌 오정화가 분노로 날뛰었다. 그녀가 낳은 딸이 이렇게까지 매정할 줄은 몰랐다.‘고작 몇 대 때린 걸 가지고 경찰에 신고해서 열흘이나 가둬? 게다가 벌금까지 내게 하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아주 은혜도 모르는 년을 키웠어.’허서령이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이미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점심에 몇 입 먹은 쌀국수가 진작 소화되어 속이 텅 비었다.위장이 감정에 가장 예민한 장기였다. 억눌린 울분과 지독한 우울함이 몰려오자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아파트에 도착했을 즈음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안색이 창백했으며 한 걸음 떼기도 버거웠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배를 움켜쥔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아픈 나머지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허서령이 벽을 짚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고개를 들자마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코끝이 찡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참았던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지강산이었다.찰나의 순간 정말 그의 품에 뛰어들어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며 억울함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녀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지강산의 어두운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툭 떨구었다.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달려들어가 허서령의 두 팔을 잡고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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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허서령은 순간 멍해졌다.‘강산 씨가 지금 날 걱정하고 있는 거야?’진짜든 아니든 지강산이 안달복달하며 애태우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오해했어요, 강산 씨. 회사 근처에서 엄마를 만났는데 이거 엄마한테 맞은 상처예요. 엄마가 날 바닥에 제압하고 막 때렸거든요.”그 말에 지강산이 멈칫하더니 복부를 감싸 쥐고 있던 허서령의 손을 떼어냈다.“아랫배도 다쳤어?”허서령은 어이가 없었다.‘난 분명 위쪽을 누르고 있는데.’아마도 그녀가 웅크리고 있어서 시각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상태가 엉망이었기에 이런 오해를 한 것이었다.“위가 아파서 그래요.”지강산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으나 걱정하는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네 팔을 때렸어?”“꼬집었어요.”허서령이 덤덤하게 답했다. 위장의 경련 때문에 통증이 밀려와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위장약 있어요?”“있어.”지강산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약과 물을 가져와 소파에 앉은 다음 약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았다.허서령이 물컵을 쥐고 약을 먹으려는데 지강산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저녁 먹었어?”그녀가 몇 초간 망설였다.“아직도 안 먹었어?”지강산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먹었어요.”사실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끼니를 거른 채 극심한 감정 소모까지 겹치면서 위장 통증이 찾아온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뭐라도 먹어 속을 달랜 뒤 약을 먹을 여유가 없었다. 이 통증을 당장 멈춰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말을 마친 허서령이 서둘러 약을 삼키고 물을 들이켰다. 컵을 내려놓자마자 지강산이 그녀의 외투를 벗겼다.당황한 허서령이 다시 여미면서 일그러진 얼굴로 지강산을 쳐다봤다.“뭐 하는 거예요?”지강산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다.“상처 좀 보자.”“불편해요.”“네 몸을 내가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허서령은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렸다. 수치심과 당혹감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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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허서령은 지강산의 말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았다.지강산이 궁금증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나저나 왜 널 이렇게까지 때린 거야?”허서령이 입을 꾹 다물자 의사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에 지강산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이미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기에 사적인 영역을 파고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지강산이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잠시 후 아이스팩을 들고 와 허서령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허서령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멍든 부위에 아이스팩을 대주었다.가뜩이나 바깥 날씨가 추운데 차가운 얼음까지 닿으니 허서령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조금만 참아.”지강산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다. 혹여나 그녀가 더 아플까 봐 아이스팩을 대는 시간을 짧게 조절했다. 몇 초 댔다가 떼기를 반복하며 세심하게 챙겼다.어느덧 위장의 통증이 잦아들었고 얼음의 냉기가 팔의 열감을 식혀주었다.소파에 기대어 있던 허서령은 밀려오는 피로에 서서히 눈이 감겼다. 지강산이 그녀의 멍든 부위를 정성껏 얼음찜질하며 당부했다.“처음 이틀 정도는 얼음찜질해야 해. 서너 시간 간격으로 반복하고 48시간이 지나면 그때부턴 계란으로 온찜질하면 돼.”허서령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그렇게나 번거로워요?”“내가 어릴 때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머리가 퉁퉁 부은 적이 있었거든.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해주셨는데 정말 빨리 낫더라고.”그 말에 허서령은 마음이 서글퍼졌다.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얻어맞아 채찍 상처와 꼬집힌 멍이 생겼을 때마다 그녀는 늘 혼자서 낫기를 기다려야 했다.예전에는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 알았다. 어머니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어머니에게 허서령은 자식이기 이전에 경계해야 할 경쟁자였다.어릴 적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면 그런 상스러운 짓을 하지 말라며 욕했고 아버지의 볼에 뽀뽀라도 하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뻔뻔한 년이라고 욕했다.그리고 아버지 품에 안겨 자기라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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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허서령이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렸다. 잠시 후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맞은편을 쳐다봤다.이은경네 집이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위가 다시금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뭔가 조금이라도 먹고 자야지 이대로 잠들었다간 밤새 위병이 또 도질 게 뻔했다.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가 지강산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허서령, 자?”순간 화들짝 놀란 허서령이 문으로 걸어가 문을 사이에 두고 대답했다.“아직요.”“야식 좀 만들었는데 먹을래?”“야식이요?”허서령이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보다 배가 더 고픈 것 같았다.“소고기죽이야.”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군침이 절로 돌았다.“네, 금방 나갈게요.”그러고는 옷장에서 얇은 겉옷을 꺼내 걸치고 방을 나섰다.그런데 거실과 주방을 둘러보았지만 지강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식탁 위에 뚜껑 덮인 그릇이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스쳤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죽이야.’허서령은 자리에 앉아 미리 준비된 그릇에 죽을 덜어 담았다.찰기 있게 퍼진 쌀알과 야들야들한 소고기, 노란 계란 고명이 어우러진 모양새가 일품이었다.마음 한구석에서 따뜻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주변을 둘러봐도 지강산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왠지 그녀만을 위해 특별히 끓여놓은 죽인 것 같았다.허서령이 한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후후 불어 입안에 넣자마자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입안을 부드럽게 감쌌다.‘너무 맛있잖아.’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나 맛있었다. 허겁지겁 먹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 뚝딱 비웠다. 위장도 한결 편안해졌고 기분도 좋아졌다.깨끗이 설거지한 뒤 방으로 돌아가 양치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불을 끄고 누운 허서령이 휴대폰을 꺼내 지강산과의 대화창을 열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한 줄을 적었다.[고마워요. 야식 정말 맛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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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소유하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더니 주먹을 꽉 쥐고 허서령을 쏘아보았다.“강산 오빠랑 대체 무슨 사이야? 왜 오빠랑 같이 사는 건데?”“룸메이트야. 셰어하우스라고 생각하면 돼.”“허.”소유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바보로 보여?”허서령이 방으로 들어가 서랍에서 셰어하우스 임대 계약서 사본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소유하는 확 낚아채고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계약서를 훑어봤다. 그들이 단지 룸메이트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계약서를 티테이블 위에 던지면서 강압적인 태도로 명령했다.“당장 이 집에서 나가. 이사 비용에 월세, 그 외 손해까지 다 따져서 열 배로 배상해 줄 테니까.”“강산 씨더러 나가라고 해. 나도 그 사람이랑 같이 살고 싶지 않거든.”말을 마친 허서령이 식탁으로 돌아가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소유하가 성큼성큼 다가가 식탁을 내리쳤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허서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가락 마디도 점점 하얘졌다.그녀가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허서령, 네가 무슨 속셈인지 모를 줄 알아? 남자한테 차이고 나니까 이제 와서 오빠랑 다시 합치려는 거잖아. 이 집 원래 시욱 오빠가 강산 오빠한테 세를 준 거야. 네가 친구랑 짜고 일부러 들어온 거 맞지? 어쩜 이렇게 더럽고 비겁한 수단을 쓸 수가 있어?”허서령이 대꾸하지 않고 계속 아침을 먹었다.“지금 그게 입에 넘어가? 내 말 안 들려?”화를 참지 못한 소유하가 손을 뻗어 식탁 위의 그릇을 바닥에 던져버렸다.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이 산산조각이 났고 국물이 바닥에 흘러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허서령이 젓가락을 쥔 채 바닥에 쏟아진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지강산이 직접 만들어준 아침 식사였기 때문이었다.허서령은 원래 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이라 어렸을 적부터 감정을 크게 드러낸 적이 없었고 감정 기복도 심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런데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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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대단하다, 너? 어디 두고 봐.”소유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허서령에게 삿대질하면서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네가 강산 오빠랑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빠 부모님께 당장 알릴 거야. 그분들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소유하의 단골 레퍼토리인 일러바치기 협박에도 허서령의 마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그저 차분하고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소유하를 응시했다.소유하가 씩씩거리며 나가려던 찰나 허서령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쏘아붙였다.“왜? 할 말이라도 남았어?”허서령이 바닥에 흩어진 국물과 사방으로 튄 그릇 파편을 가리켰다.“깨끗이 치우고 가.”“풉.”소유하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팔짱을 낀 채 오만한 태도로 허서령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허서령, 네가 뭔데?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명령질이야?”허서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서류 가방을 들고 소유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안 치워도 돼. 강산 씨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두지, 뭐. 내가 강산 씨 앞에서 널 뭐라 할지만 지켜봐.”“이게 감히!”소유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어둡게 가라앉았고 눈알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으며 이가 부서질 정도로 꽉 악물었다.허서령이 소유하의 옆을 스쳐 지나가다 멈춰 서서 그녀와 반대 방향을 보며 나란히 섰다. 그러고는 차갑고 무덤덤한 말투로 경고했다.“이 녹음 장기적으로 유효해. 내가 마음먹고 고소하면 널 처벌하는 건 식은 죽 먹기야. 난 너의 부모도 아니고 강산 씨도 아니야. 너의 버릇없는 태도를 받아주거나 오냐오냐할 이유가 없어. 지난번에 날 쓰레기라 욕했고 오늘도 또 욕했지? 다음번엔 널 재판에 세워서 전과 기록을 남기게 할 거야. 그러고도 강산 씨랑 결혼할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화가 난 소유하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기 싸움에서만큼은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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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지강산이 실험실에서 나왔다.사무실로 돌아와 작업복을 벗어 던진 뒤 서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머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지강산이 의자에 앉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되자마자 깍듯하게 말했다.“어머니, 전화하셨어요?”하선희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강산아, 유하한테 들었는데 울심에서 서령이를 만났다며? 지금 동거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니?”“동거가 아니라 셰어하우스예요. 집을 나누어 쓰는 거죠.”지강산의 말투가 한없이 다정했다.“셰어하우스라니? 울심에서 집까지 샀으면서 왜 세를 맡고 살아?”“말하자면 길어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너 혹시 서령이를 용서했어?”“어떻게 하는 게 용서인데요?”“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용서했다는 뜻이지.”“글쎄요, 아마도요.”“남자랑 한집에 사는 걸 보면 서령이도 아직 혼자라는 건데... 그래서 다시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니?”“아니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지강산이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넌 내 아들이야. 내가 너를 몰라?”“엄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하선희가 답답한 나머지 한숨을 쉬었다.“네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지독한 사랑꾼들이셨어. 너도 그 피를 물려받았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이번 설에 너랑 유하를 제산에서 약혼시킬 생각이었는데.”“제발 그러지 마세요. 엄마 친구 딸이라서 제가 지금까지 참아온 거예요. 전 유하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하나도 없어요.”“하지만...”“제 결혼에 간섭하지 마세요.”하선희가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았어. 네 인생이니 네가 결정해야지. 부모로서 바라는 건 그저 네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야.”“고마워요, 어머니.”지강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참, 서령이가 예전에 배를 참 좋아했었지?”하선희의 말투가 한결 다정해졌다.“마침 뒷마당 배나무에 열매가 아주 잘 열렸더라. 주소 보내주면 한 상자 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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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허서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결국 가져온 석류를 벤치 위에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허서령?”한 남자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허서령이 고개를 돌려보니 진성호가 개를 끌고 흥분한 기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목줄을 한 험상궂게 생긴 거대한 도사견을 보자마자 허서령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진성호는 허서령이 개를 아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사견을 꽉 잡고 가만히 서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나 만나러 왔어?”“아니.”“심인혜도 시집간 마당에 네가 여기에 나 말고 아는 사람이 누가 있어?”진성호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목줄을 쥔 채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면서 허서령을 훑어보았다.“허서령, 그냥 솔직하게 인정해. 나 보러 온 거 맞잖아.”가소로운 소리였지만 허서령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가 곧장 집으로 향했다.허서령의 고고하고 차가운 태도를 진성호는 오랫동안 참아왔다. 사실 그는 허서령을 좋아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했다.또다시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난 진성호가 목줄을 놓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떡대야, 가서 물어.”떡대라는 이름의 이 도사견은 세계에서 사납기로 소문난 맹견 중 하나였다. 하여 외출 시에는 반드시 입마개와 목줄을 착용해야 했다.주인의 명령을 받은 떡대가 바로 흥분하더니 폭발적인 기세로 허서령에게 달려들었다.어릴 적부터 개를 무서워했던 허서령은 맹견이 덮치려 하자 놀란 나머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으악.”허서령이 바닥에 넘어진 채 온몸을 벌벌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살려... 살려주세요..”떡대가 그녀의 외투를 물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허서령에게는 도사견이 실로 무서운 존재였다.진성호가 그의 개에게 옷이 물린 채 질질 끌려가면서 바닥을 뒹구는 허서령을 내려다봤다. 언제나 고고하고 차갑던 여신이 발밑에서 짐승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에 그는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그가 음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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