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순간 움찔한 허서령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일부러라니요? 내가 뭘 어쨌는데요?”지강산이 입술을 살짝 벌려 뜨거운 숨을 내뱉더니 깊고 어두운 두 눈으로 허서령의 맑은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목소리에 욕구 불만 때문에 생긴 짜증이 가득했다.“모르는 척 내숭 떨지 마. 오늘 밤 내 앞에서 몇 번이나 알짱거린 거야? 하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 만족시켜 줄지 고려는 해볼 테니까.”허서령은 그제야 지강산이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혹시나 그의 뜻을 오해했을까 봐 이렇게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화가 난 지강산이 몸으로 그녀를 눌렀다.“이래도 모르겠어?”몸이 맞닿은 순간 허서령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경악과 긴장감이 동시에 몰려와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강산이 왜서 짜증을 내는지 온몸으로 실감했다. 단단한 몸과 가슴,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거친 숨소리...‘내가 그걸 까먹다니.’과거 지강산은 슬립 차림의 허서령에게 아주 취약했다. 하여 그녀의 잠옷 대부분이 보수적인 긴 팔과 긴 바지였다.그들에게 슬립은 무언의 유혹이자 신호였다.“그 뜻이 맞아?”지강산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허서령을 쳐다봤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몸으로 그녀를 누른 채 침을 꿀꺽 삼켰다.5년 동안 금욕적인 삶을 살아온 허서령이라고 해서 아무 느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몸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묘한 갈증이 일었지만 이성이 차갑게 경고했다. 끝이 뻔한 일에 다시 휘말리지 말라고.성인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다. 게다가 지강산과 소유하의 관계도 마음에 걸렸다. 허서령은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제3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허서령이 손목을 빼내고 지강산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 그러자 지강산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해요. 오해했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그녀는 서둘러 사과한 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챙겨 방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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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태풍이 하루 종일 몰아쳤고 폭우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아파트 단지가 쑥대밭이 되었다. 얼마 전에 새로 심은 어린나무들은 물론 수많은 가지를 뻗은 오래된 큰 나무들까지 모두 힘없이 쓰러지거나 부러졌다.낮은 지대의 도로와 지하 주차장이 물에 잠겼다.에버그린 힐도 이번 재해를 피하지 못했다.지강산은 이른 아침에 관리사무소로부터 지하 주차장이 침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뜻밖에도 지강산의 표정이 아주 태연했다.어제 점심에 이미 차를 2km 떨어진 고층 건물 주차장에 옮겼기 때문이었다.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빗줄기는 여전히 맹렬하게 쏟아졌다. 바깥이 온통 흐린 회색빛이었고 물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지강산은 평소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냉장고에서 계란과 국수, 채소, 그리고 파를 꺼냈다. 허서령이 파를 먹지 않는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방 안.허서령이 휴대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완전히 정신이 든 게 아니었기에 몽롱한 상태로 휴대폰을 더듬어 귀에 갖다 댔다.휴대폰 너머에서 나정민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허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 상표권 침해 사건 의뢰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허변 업무 처리가 미흡하고 성격이 매우 나쁘며 태도가 아주 무례하다고 컴플레인을 걸었어요. 의뢰인한테 뭘 어쨌길래 이렇게 펄쩍 뛰는 거죠? 이젠 우리한테 사건도 의뢰하지 않겠대요. 설명 좀 해봐요.”설명하기도 귀찮았던 허서령이 천천히 말했다.“나변, 그 여자 명의로 된 회사가 없어서 상표권 침해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냥 저한테 개인적인 적대감이 있어서 저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예요.”“그런 거였군요.”나정민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어쩐지 허변을 콕 집더라니. 트집 잡으려고 작정한 거였네요.”“네.”허서령이 눈을 비볐다.“됐어요, 그럼. 태풍이 막 지나갔으니 조심하고요.”“네, 나변도 조심해요.”전화를 끊은 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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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히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5년 전 함께 동거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지강산이 요리와 설거지, 청소 등 힘쓰고 손에 물을 묻히는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허서령은 더러워진 옷을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널고 개고 쓰레기를 버리는 가벼운 일들만 맡았다. 가끔 귀찮아 투정을 부리면 지강산이 대신 해주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함께 식탁 앞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어도 마음가짐과 관계가 이미 오래전에 달라졌다.먼저 식사를 마친 지강산이 입가를 닦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허서령이 식사를 마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어두운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허서령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치우려 했다.“그냥 둬.”지강산의 덤덤한 한 마디에 허서령이 식기를 다시 내려놓았다.“하룻밤 재워줘서 고마워요. 태풍도 그쳤고 이제 돌아가 봐야겠어요.”“밖이 물에 잠겼어.”“너무 깊지 않아서 갈 수 있어요.”“걸어서 가려고?”“검색해보니까 지하철이 운행 재개됐더라고요.”지강산이 차갑게 웃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목에 뭔가 걸리기라도 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허서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었다.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정돈한 뒤 서류 가방과 휴대폰을 챙겨 나왔다.그가 여전히 식탁 앞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 짙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거실을 지나가던 허서령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강산을 돌아보았다.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리고 아쉬웠지만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만날 때마다 아플 것이고 아무런 결과도 없기 때문이었다.“우산 좀 빌려줄 수 있어요?”허서령의 질문에 지강산이 쳐다보지도 않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신발장 옆에 있어.”“고마워요.”허서령이 마음을 다잡고 신발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신발로 갈아 신고 우산을 챙겨 나간 다음 문을 닫았다.실내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차갑고 깊은 구렁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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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허서령이 우산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다행히 물이 무릎 아래 정도까지만 차올랐다. 신발과 바지가 흠뻑 젖긴 해도 지강산과 단둘이 집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거센 빗줄기를 헤치며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위층, 지강산이 베란다 난간에 기대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빛이 깊고 어두웠으며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백시욱이었다.“무슨 일이야?”“내 결혼식 있잖아. 정말 올 시간이 없어?”지강산이 고개를 돌려 다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우산을 쓴 채 천천히 걸어가는 허서령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갈게.”백시욱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정말? 잘생긴 네가 오면 들러리 평균 비주얼이 좀 올라가겠어.”“끊는다.”통화를 마친 지강산이 급히 거실로 들어가 다른 우산을 챙겨 문을 나섰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그 소리를 듣고 나온 소유하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지강산을 발견하고 물었다.“오빠, 어디 가?”지강산은 그녀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멈춰버린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소유하가 다급하게 외쳤다.“오빠, 어디 가는데?”하늘이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폭우가 쏟아졌다.흙탕물로 뒤덮인 넓은 도로 위에 검은 우산을 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약 2, 3m 간격을 두고 나란히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허서령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맨홀 뚜껑이 열려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한참을 걸은 끝에 드디어 물웅덩이를 벗어나 약간 높은 지대로 접어들었다. 자꾸만 누군가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했다.태풍의 끝자락에 남은 거센 비바람에 옷과 바지가 조금 젖긴 했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한 뒤 우산을 접어 물기를 힘껏 털어냈다.허서령이 경계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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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심인혜가 진지하게 말했다.“그래. 네가 안 오면 나 이 결혼 안 할 거야.”허서령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시욱 씨가 날 가만두지 않겠는데?”심인혜도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알아서 잘 판단해.”허서령이 머리를 짚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아껴주는 친구라도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결혼식 당일.태풍이 지나간 하늘에 눈 부신 햇살과 함께 무지개가 떠 있었다.허서령이 아침 일찍 과일과 영양제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과 심인혜의 집 사이의 거리가 100m도 되지 않았다.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그들의 동네 근처에 지하철역이 생겼고 주변이 상업 지구로 개발되었다.덕분에 그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집집마다 3~4층짜리 유럽식 단독 주택에서 살게 되었다.허서령의 집 역시 3층짜리 건물이었다. 실내 인테리어가 다소 심플했고 가구들도 저렴한 것들이었다.사실 법률 사무소로 출근하기엔 그녀의 집이 더 가까웠고 지하철로 환승 없이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서령은 이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허서령이 집 안으로 들어가 가져온 물건을 티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식탁 앞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어머니 오정화에게 인사를 건넸다.“엄마, 저 왔어요.”옷차림은 수수하지만 기품이 남아 있는 오정화가 허서령을 힐끗 보더니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와? 인혜는 오늘 시집가는데 넌 대체 언제 갈 거야?”허서령이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잔소리였기에 대꾸하지 않고 물을 따라 천천히 마셨다.그녀가 대답이 없자 화가 난 오정화가 콩나물을 던져버리고 얼굴을 찌푸린 채 목소리를 높였다.“너 이제 스물일곱이야. 더 늦으면 노처녀 딱지 붙는다고. 서른 넘으면 널 데려가려는 남자도 없어. 그때가 되면 남자보다 혼수를 더 장만해야 해. 제발 네 주제를 좀 알고 살아. 아직 젊고 외모도 그럭저럭 괜찮을 때 빨리 시집가.”오정화가 잔소리를 멈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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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허서령이 심인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정신없이 바쁜 신부 측 어른들과 달리 심인혜는 아직도 꿀잠을 자고 있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 사진작가, 그리고 신부 들러리들이 속속 도착하여 각자 할 일을 시작했다.요즘 젊은이들답게 평범한 결혼식은 거부했다. 더욱 특별하고 뜻깊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호텔 예식장에 가기 전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과정을 추가했다.신부 들러리들은 신랑이 쉽게 신부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며 다양한 게임을 준비했다. 신랑 들러리들도 쉽지 않을 걸 예상하고 돈 봉투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점심 무렵 들러리들이 갖가지 즙을 짜내느라 분주했다. 깻잎즙, 후추즙, 생강즙 등 세상에서 가장 기괴하고 역겨운 식재료로 만든 즙을 준비해 신랑과 신랑의 들러리들을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왔습니다...”누군가의 외침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신부 들러리들이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서령아, 네가 먼저 나가서 시간 좀 끌어줘. 최소 10분은 끌어야 우리도 준비가 끝나.”그렇게 허서령이 첫 번째 관문을 막기 위해 밖으로 내몰렸다.심인혜의 집에 작은 마당이 있었고 2m 높이의 담장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다.허서령이 황급히 마당으로 달려가 철문을 잠그고 열쇠를 꽉 쥐었다. 밖에서 신부를 데리러 온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신부를 데리러 왔습니다.”문밖에서 신랑 들러리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문 열어 주세요.”허서령이 철문에 몸을 기대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녀에게 맡긴 임무는 10분을 끄는 것이었다. 10분 동안 절대 문을 열어줘선 안 되었다.그녀가 시간을 벌기 위해 다정하게 말했다.“문을 열어줄지는 여러분의 성의를 봐야겠죠?”“허서령 씨군요.”백시욱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인혜 친구 중에 제일 상냥하고 말이 잘 통하는 친구야. 다들 준비됐지? 들어가자!”그 말에 허서령이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문이라도 부수고 들어오려는 줄 알았는데 문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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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안 돼요. 몇 분만 더 기다려요.”허서령이 문에 딱 붙어서서 고개를 저었다.“더는 못 기다려. 오죽하면 담을 넘었겠어? 비켜줘.”지강산이 허서령을 훑어봤다. 몽환적인 핑크빛 드레스가 바닥에 닿을 듯 길게 늘어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와 가느다란 팔이 눈부시게 하얬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의 일부분을 풀었고 일부분은 땋았다. 거기에 앙증맞은 꽃으로 귀여움을 더했다.그리고 옅은 메이크업이 신부의 주인공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청초하고 청순한 매력을 물씬 풍겼다.허서령의 은은한 아름다움에 지강산이 가슴에 고인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낮게 읊조렸다.“시작한다?”허서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지?’바로 그때 지강산이 성큼 다가오더니 허서령의 팔을 잡고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가 힘을 조금밖에 쓰지 않았는데도 허서령이 힘없이 옆으로 밀려났다.철문이 굳게 잠긴 걸 확인한 지강산이 미간이 찌푸렸다.“열 수 있겠어?”밖에서 기다리던 신랑 들러리들의 다급한 질문에 지강산이 답했다.“잠겼어.”“열쇠 뺏어. 서령 씨한테 있을 거야.”지강산이 허서령을 돌아보자 허서령이 재빨리 손을 등 뒤로 숨기고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허서령, 우리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두자. 내 친구가 지금 신부를 데려가려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거든? 그러니까 비켜줘.”“딱 몇 분만 더 기다려주면 안 돼요?”허서령이 나지막이 부탁했다.“1분이라도 지체했다간 친구들이 내가 무능하다고 생각할 거야.”지강산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돈 봉투를 전부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봉투 더미를 본 허서령이 입술을 깨물더니 신나게 받았다.“열쇠는?”지강산이 손을 내밀었다.돈 봉투를 챙긴 허서령이 다시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5분만 더요.”지강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돈만 받고 입을 싹 닫아? 이러면 반칙인데? 거칠게 나가는 수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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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집 안.신부를 데리러 온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신랑 들러리들과 친척들, 그리고 소유하도 있었다.소유하는 허서령이 신부 들러리인 걸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살짝 꾸몄을 뿐인데 천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허서령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심통이 났다.신부의 방 앞에 수십 개의 빨간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검은 뚜껑이 덮인 작은 잔들이 놓여 있었다.한 신부 들러리가 말했다.“이 음료들 중에 술이 딱 석 잔 섞여 있어요. 술을 못 찾으면 돈 봉투를 내야 하고 운 좋게 석 잔을 다 마시면 신부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냄새 맡는 건 안 돼요.”사실 술이 담긴 잔이 하나도 없었다. 신부 들러리들이 신랑 측을 골탕 먹이고 돈 봉투를 더 받아내기 위해 꾸민 작은 장난이었다.게임이 시작되었다. 정체 모를 괴상한 음료들을 마신 신랑 들러리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신부 들러리들이 신나게 돈 봉투를 챙겼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배를 잡고 웃었다.옆에 서 있던 허서령 역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갑자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강산이 그윽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지강산이 눈짓으로 앞에 놓인 잔 하나를 슬쩍 가리켰다.4년이나 사귀었던 사이답게 허서령은 그 눈빛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다만 전 여자친구에게 도움을 청할 줄은 몰랐다.‘순진하긴. 전 여친이 얼마나 뒤끝 있는 여자인지 잊었어?’허서령이 옆에 있던 신부 들러리와 귓속말을 나누더니 천천히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지강산을 쳐다봤다가 잔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지강산이 망설임 없이 그녀가 힌트를 준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뚜껑을 연 순간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깻잎즙의 비릿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하마터면 헛구역질할 뻔했다.“마셔라, 마셔라!”신부 들러리들이 받은 돈 봉투를 흔들며 부추겼다.지강산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잔을 들고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숨을 참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옆에서 보던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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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왜 밖에서 같이 게임 안 하고 들어왔어?”심인혜의 질문에 허서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허서령이 심인혜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오늘 정말 예뻐.”심인혜가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허서령의 마음 한구석에 묘한 느낌이 일렁거렸다.만약 그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와 지강산도 이토록 아름답고 축복받는 결혼식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었을지도...방 밖.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낸 지강산이 다시 게임 현장으로 돌아갔다. 주변을 훑어봤지만 허서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이리저리 둘러봐도 허서령이 어디에도 없자 결국 흥미를 잃고 옆으로 물러났다.마지막 잔까지 술이 한 잔도 나오지 않은 걸 보고서야 신랑 들러리들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게임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일행이 신부의 방으로 들어갔다.그 뒤로도 다양한 절차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허서령이 구석에 서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행복에 젖은 친구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때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다.신랑과 신부가 신부 측 부모님에게 절을 올리고 드디어 집을 나섰다. 허서령도 뒤따라 차에 올라탔다.지강산이 조수석 문을 굳게 잠그고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몇몇 신부 들러리들이 조수석 문을 열려 했지만 열지 못했다.결국 소유하도 포기하고 뒷좌석에 올라탔다.허서령이 지강산의 차 옆을 지나가던 그때 지강산이 재빨리 차에서 내리더니 팔꿈치를 차 지붕에 걸치고 말했다.“허서령, 타.”뒷좌석에 앉아 있던 소유하가 차가운 얼굴로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허서령이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언제부터인지 처음 재회했을 때 보여줬던 싸늘한 눈빛이 사라지고 이젠 뜻을 알 수 없는 깊고 고요한 빛이 감돌았다.“아니요. 괜찮아요.”허서령이 덤덤하게 거절한 뒤 뒤로 걸어가 다른 신랑 들러리의 차에 올라탔다.지강산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다시 운전석에 탔다. 조수석이 그렇게 계속 비어 있었다.웨딩카 행렬이 위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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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결국 허서령이 마지못해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안전벨트를 매자 그제야 지강산이 휴대폰을 돌려주었고 차도 매끄럽게 출발했다.차 안의 공기가 무겁기 그지없었다.백미러 속 소유하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노골적인 혐오와 분노가 서린 눈으로 허서령을 쏘아보고 있었다.허서령과 지강산이 금방 연애를 시작했을 때 소유하가 고등학생이라 지금처럼 지강산에게 매달릴 시간이 없었다.대학교를 졸업한 뒤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그녀는 지강산을 따라 울심시까지 왔다.아무리 봐도 두 사람이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마음이 넓은 여자라고 해도 남자친구가 전 여자친구와 이렇게 얽히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소유하가 화를 참으며 아무 말도 못 하는 태도 자체가 두 사람 사이가 결백하다는 증거였다. 적어도 소유하가 지강산을 통제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차가 정적 속에서 넓은 대로를 달렸다. 길이 이상한 걸 눈치챈 소유하가 다급하게 말했다.“오빠, 먼저 서령 언니부터 데려다주는 게 낫지 않아? 그래야 시간도 아끼고 기름값도 아낄 텐데.”지강산은 운전에만 집중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소유하가 씩씩거리면서 입을 삐죽 내밀더니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댔다.다시 정적이 흘렀다.허서령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내다봤다. 차가 향하는 방향이 에버그린 힐 쪽이었다.20분 후 차가 에버그린 힐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실내등이 켜졌는데도 소유하가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소유하, 내려.”지강산의 말에 소유하가 씩씩거리며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문을 쾅 닫았다. 어찌나 힘껏 닫았는지 문이 다 부서질 것만 같았다. 노골적인 분풀이였다.지강산이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거치대에 끼운 다음 소유하의 카톡을 눌러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차 사든지 택시를 타고 다니든지 해. 앞으론 내 차 탈 생각 하지 마.”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차갑고 위엄 있는 말투였다.소유하의 답장이 도착하자 지강산이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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