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41 - Chapter 50

100 Chapters

제41화

사람들이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허서령을 짓누르던 개가 2m 밖으로 나가떨어졌다.압도적인 속도와 힘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개가 나가떨어짐과 동시에 다부진 체격의 한 사내가 허서령을 가로질러 개를 향해 돌진했다.바닥에 처박힌 도사견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경련하는 사이 남자가 들고 있던 몽둥이로 개의 머리를 내리쳤다.연거푸 가해진 일격에 개의 머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개의 사지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지켜보던 이들은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성호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애견이 처참하게 맞아 죽은 것을 본 진성호가 두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포효하듯 외쳤다.“그만두지 못해? 넌 뭐야? 감히 내 떡대를 때려죽여?”허서령이 떨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눈물로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앞을 가로막아 선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순간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남자가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짚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등이 넓고 듬직했으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사람들 모두 겁을 먹었다.그리고 사람을 공격하던 도사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오히려 통쾌해했다.“내 개를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너 오늘 죽었어.”진성호가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목구비가 차갑기 그지없었고 깊고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몽둥이를 쥔 손등 위로 푸른 힘줄도 튀어나왔다.그가 몽둥이를 들어 진성호를 가리켰다.은은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선 그의 모습이 먹잇감을 노려보는 굶주린 사자와 같았다. 생존을 위협하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에 진성호가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그 남자가 지강산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허서령은 억눌러왔던 서러움이 터져 나와 눈물을 쏟아냈다. 동시에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며 두려움이 서서히 물러갔다.“네 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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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도시 밤거리의 정체가 조금 심했다. 붉게 물든 자동차 꼬리등이 길 위를 길게 늘어선 채 느릿하게 움직였다.조수석에 앉은 허서령이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지강산을 바라봤다. 왠지 무거운 안개가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정체가 조금 풀리자 지강산이 속도를 올렸다. 차선을 바꿔 가며 몇 대의 차량을 빠르게 추월했다.반대로 허서령은 점점 차분해졌고 조금 전의 두려움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도시 반려견 관리법을 꼼꼼히 살펴봤다. 복수 준비를 슬슬 시작해야 했다.20분 뒤 차가 병원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허서령이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던 그때 지강산이 재빨리 차 앞을 돌아서 그녀 앞으로 오더니 번쩍 안아 올렸다.“괜찮아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뜨자 당황한 허서령이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지강산의 품이 따뜻하고 단단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솔향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가만히 있어.”목소리가 낮고 진지했다. 지강산이 거의 뛰다시피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허서령의 마음이 완전히 흔들리기 시작했다.응급실 안이 유난히 조용했다.“선생님, 간호사님, 이 사람이 개한테 물렸어요.”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허서령의 상태를 살폈다. 찢어진 바지를 걷어 올리자 하얀 허벅지 위로 상처가 드러났다.“이쪽으로 오세요. 우선 응급처치부터 할게요.”간호사가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허서령이 지강산의 단단한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에서 울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눈동자가 깊고 짙어서 속을 알 수 없었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으며 호흡도 거칠었다.지강산이 이렇게까지 다급해하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봤다.마지막으로 봤던 건 5년 전이었다. 생리통 때문에 기절할 정도로 아팠던 날 지강산이 지금처럼 얼굴이 새파래진 채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었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잘못될까 봐 소리를 치며 의사를 불렀다.처치실 안으로 들어가자 지강산이 조심스럽게 허서령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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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지강산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간호사가 걱정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보고 미리 귀띔했다.“지금 막 상처를 소독하면서 보니까 환자분이 통증에 꽤 예민하더라고요. 주사 맞을 때 울고 소리 지를 수도 있는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정상 반응입니다.”지강산이 고개를 끄덕였다.“주사 맞는 거랑 아픈 걸 정말 무서워하는 사람이니까 최대한 안 아프게 해주세요.”“네.”간호사가 대답한 뒤 백신과 면역글로불린을 들고 문을 닫았다.침대 커튼 안, 지강산과 간호사의 대화를 들은 허서령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간호사가 너무 과장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그냥 백신 하나 맞는 것뿐인데. 어릴 때부터 자주 맞았던 거라 괜찮을 거야. 주사랑 아픈 걸 무서워하긴 해도 이 정도 통증은 참을 수 있어.’간호사가 다시 침대 앞으로 돌아와 백신을 놓을 준비를 시작했다.허서령이 침대 머리에 기대어 다리를 펴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광견병 백신과 면역글로불린 주사가 이렇게 아플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날카롭고 긴 주삿바늘이 허벅지 상처 근처에 들어갔다. 바늘 길이만큼 깊숙이 찔러넣었다.가득 찬 약물이 근육과 피부층으로 천천히 주입되었다. 근육이 부풀어 더 이상 약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바늘을 피부 아래에서 돌려 다른 곳에 주입했다.근육과 피부밑이 빨갛게 부어올랐다.정말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이었고 쑤시기까지 했다.허서령이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참았다. 어느새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그때 간호사가 바늘을 뺐다.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간호사가 부어오른 근육을 문질러 약물을 퍼뜨린 뒤 다른 부위의 정상 근육에 다시 긴 바늘을 깊숙이 찔러넣었다. 이번에도 바늘 길이만큼 찔렀다.“으악...”허서령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한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얘졌다.다른 손은 입에 넣어 엄지를 물었다.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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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허서령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고마워요.”지강산이 운전하느라 전방을 주시하면서 말했다.“별말을 다 하네.”“병원 영수증 아직 있어요?”“응.”“나한테 주면 안 될까요?”“알았어.”“나중에 저 사람들 고소하고 돈 받으면 병원비 돌려줄게요.”“돌려줄 필요 없어.”허서령이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녀가 번 돈 중에 집세와 식비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진성호 아버지의 치료비로 나갔다.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나 다름없었다.진성호는 아버지가 이미 뇌사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식물인간인 걸 알면서도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녀를 옭아매서 그와 결혼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바로 그때 지강산의 휴대폰이 울렸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하고 전화를 받았다.“네. 알았어요.”덤덤하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더니 갑자기 차를 돌렸다.허서령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어디 가요?”“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 나더러 경찰서 좀 오래.”허서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차라리 잘됐어요. 안 그래도 내일 가려 했는데 연락이 왔으니 오늘 밤에 해결하는 게 낫겠어요.”“걱정하지 마.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지강산의 진지한 목소리에 허서령이 흠칫 놀랐다.‘나한테 하는 말 맞아?’하지만 차 안에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무서워하지 말라고?’이 세상에서 개 말고는 허서령이 두려워하는 게 없었다.경찰서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따로 분리되어 조사를 받았다.조사실 안의 조명이 밝게 빛났다. 사복 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가슴에 신분증과 경찰 번호가 있었다.[진성재.]지강산이 자리에 앉자마자 진성재가 사진 몇 장을 건넸다.“이 개 지강산 씨가 죽였어요?”그가 사진을 힐끗 쳐다봤다.“네. 제가 죽였어요.”진성재가 영수증 몇 장을 또 건넸다.“이 개의 가격, 항공 운송비, 평소 예방접종과 건강검진 비용, 사육 비용이에요. 그리고 지강산 씨가 개를 죽인 바람에 개 주인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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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말을 마친 뒤 진성재가 문을 잠그고 나갔다.지강산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밖에서 잠가버린 것이었다.다시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조사실 안에 신호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 핸드폰이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27년을 살아오면서 공직자가 이렇게 뻔뻔하게 편법을 쓰는 걸 처음 봤다.‘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이구나.’문밖.허서령이 아픈 다리를 끌며 천천히 차 옆으로 다가갔다. 차 안이 칠흑처럼 어두웠고 지강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돌아서며 진성재에게 물었다.“같이 온 남자는 어디 있어요?”진성재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대답했다.“형수님은 다리만 조금 다쳤을 뿐이에요. 이렇게 작은 상처로는 입건하기 어려우니까 일단 돌아가세요. 나머지는 형수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허서령이 의아해했다.“형수님이라니요?”“우리 사촌 형의 예비 신부니까 당연히 형수님이라고 불러야죠.”“그쪽이 진성호의 사촌 동생이에요?”“네.”허서령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고 흥분되면서도 화가 났으며 만감이 교차했다.‘역시 죽으라는 법이 없어. 새로운 단서가 생긴 걸 보면.’5년 전 아버지의 사건을 진성재가 맡았다면 허서령이 판을 뒤집을 가능성이 조금 더 커질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를 꺼낼 시기가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정보만 새어 나갈 수 있으니까.허서령은 지강산이 진성재에게 붙잡혀 있다고 확신했다. 아마도 개 주인이 요구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풀어줄 것이다.감히 지강산의 앞에서 편법을 쓰다니, 그의 경찰 생활이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허서령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경찰관님, 충고 하나 해드릴게요. 지금 당장 지강산 씨를 풀어주세요. 그 사람 앞에서 편법을 쓰면 정말 큰코다치게 됩니다.”진성재가 피식 웃었다. 웃긴 얘기라도 들은 듯 허서령에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형수님, 시간이 늦었네요. 안 가시면 제가 성호 형한테 전화해서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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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풀어줄게요...”진성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속으론 불안했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바로 풀어줄게요. 그런데 형이 왜 형수님이 변호사인 걸 얘기 안 해줬을까요?”허서령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온 저녁 고생한 데가 주사 맞은 다리도 아직 욱신거렸다.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지강산이 풀려났을 땐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깊은 밤이라 기온이 낮고 바람이 살을 에듯 차가웠다. 도시가 무척이나 한산했고 길 양쪽의 누런 가로등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허서령이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차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그때 지강산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너랑 진성호 무슨 사이야?”허서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강산에게 아버지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자는 척하지 마. 듣고 있는 거 다 알아.”들키고 나서야 허서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앞만 보며 한참 고민하다가 덤덤하게 말했다.“엄마가 마음에 둔 예비 사위인데 올해 설이 지나면 그 사람이랑 결혼하래요.”지강산이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허서령, 남자 보는 눈이 왜 이렇게 없어? 왜 항상 쓰레기만 골라?”허서령이 씁쓸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봤다.외로운 가로등이 텅 빈 길을 비추었다.그녀의 마음도 소리 없이 가라앉았다.“너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했잖아.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지강산의 목소리가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가웠고 분노가 섞여 있었다.“개로 널 괴롭히고 두려움에 떨게 했어. 그런데도 결혼하겠다고? 너 혹시 피학적인 성향이 있어?”허서령은 진성호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그녀가 눈을 감고 머리를 창문에 기댔다.“강산 씨, 오늘 구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말아요.”지강산이 갑자기 핸들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얘졌다.창밖의 네온사인 빛이 소리 없이 뒤로 밀려났다.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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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허벅지가 아직 조금 부어 있었고 바지가 스치면 통증이 느껴졌다. 하여 두꺼운 긴 치마를 입었다.이제 허서령은 그녀와 지강산이 당했던 걸 갚아주는 싸움을 시작할 예정이다.‘나 만만한 여자 아니야.’허서령이 서류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거실을 지나가다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지강산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지강산도 책을 내려놓고 허서령을 올려다봤다.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멈칫했다.“회사 안 나가요?”“데이트 있어?”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는 민망한지 시선을 피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지강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휴가 냈어. 집에서 다친 룸메이트를 돌보려고.”허서령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고 마음이 흔들렸다.‘어떻게 해야 하지? 강산 씨는 날 미워하면서도 나한테 잘해주고 있어. 혹시 원래 주변 사람들한테 똑같이 잘해주는 스타일인가? 룸메이트나 ‘못된’ 전 여친한테도?’다행히 허서령의 마음이 차갑고 단단했다.“그냥 주사 맞은 다리가 조금 아플 뿐이지, 걸어 다니는 데는 문제 없으니까 돌봐줄 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향했다.지강산이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점심 차렸는데 먹고 가지?”“괜찮아요. 시간 없어서요.”“누구랑 데이트하는데?”허서령이 문손잡이를 잡고 멈칫했다가 지강산을 돌아봤다.“여자가 화장하고 꾸민다고 꼭 데이트 가는 건 아니에요. 때로는 ‘전쟁터’에 가는 걸 수도 있어요.”지강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정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어젯밤에 많이 억울했죠? 이제부터는 내가 해결할게요.”“다리가 불편하잖아. 데려다줄게.”“괜찮아요.”허서령이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미소가 정말 아름다웠다.당당하게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강산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발코니로 나가 단지 내 도로를 내려다봤다.잠시 후 허서령이 대로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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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이것이 바로 허서령이 지강산과 헤어진 지 5년이 지나도록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였다.이 세상에서 지강산보다 더 좋은 남자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평생 혼자일 운명일지도 모른다.허서령이 단지 안으로 들어선 그때 옆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맞혀 봐. 내가 누구게?”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니 가로등 아래 한 여자아이가 뒤에서 남자아이의 눈을 가리고 신나게 묻고 있었다.남자아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말했다.“내 친구 진서우.”여자아이가 손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었다.“하하. 정답.”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 미끄럼틀 타러.”두 아이의 뒷모습을 보던 허서령은 마음이 씁쓸해졌다. 기억이 필름처럼 되감기듯 머릿속에 떠올랐다.기억이 대학교 시절로 돌아갔다.허서령과 소꿉친구 윤성이 제산시의 같은 대학교에 진학했다.여름방학 내내 보지 못했던 탓에 개강 첫날 캠퍼스에서 윤성과 비슷한 뒷모습을 본 순간 너무 반가웠다.잔디밭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어릴 때처럼 뒤에서 눈을 가리고 물었다.“맞혀 봐. 내가 누구게?”남자가 허서령의 손등, 손가락, 손목을 더듬었다.“모르겠는데.”굵고 따뜻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허서령이 손을 뗐다.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 미소가 5월의 햇살처럼 밝고 따뜻했다.햇빛이 그의 몸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고 있었다.남자가 물었다.“우리 아는 사이야?”그 순간의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사과부터 하고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때의 허서령은 이상하게도 끝까지 아닌 척했다.“나 허서령이야. 잊었어? 됐어. 그냥 절교하자.”그때 그 남자의 미소가 참으로 따뜻하고 다정했다.도저히 더는 거짓말을 이어갈 수 없었던 허서령은 도망치듯 급히 돌아섰다. 그리고 얼마 뒤 그가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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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구름타워가 꽤 컸고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한밤중이 되면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숲길 쪽으로 들어갈수록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그곳에는 CCTV도 없고 가로등조차 없었다.늦가을의 찬바람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서늘하다 못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나뭇잎이 어둠 속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흔들렸는데 뭔가가 옆을 맴도는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허서령이 미신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둠에 유난히 약했다. 이런 상황은 솔직히 그녀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앞서가던 두 사람이 이 길이 익숙한 듯 점점 속도를 올리더니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달빛에 숲이 흐릿하게 보였다.바로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순간 두려움이 온몸에 퍼졌고 머리가 쭈뼛 섰다.당황한 상태에서 급히 뒤를 돌아봤다.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허서령을 덮쳤다. 훤칠하고 곧고 단단한 체구였는데 죽음의 사신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허서령은 귀신인 줄 알고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바람에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조심해, 허서령.”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허서령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그 힘에 이끌린 허서령이 따뜻하고 단단한 가슴에 그대로 안겼다. 익숙한 솔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에 순식간에 마음이 놓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름 아닌 지강산이었다.허서령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대체 언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식은땀이 다 날 정도로 놀랐다.“여기서 뭐 해?”지강산이 물었다. 허서령이 재빨리 가까이 다가가 발끝을 들고 그의 입을 손으로 막은 뒤 긴장한 얼굴로 숲속을 둘러봤다.“사람이 있어.”덤불 속에서 이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황한 허서령이 급히 지강산의 팔을 잡아당겨 옆이 있는 나무 뒤로 밀었다.어안이 벙벙한 지강산이 뭐라 말하려 하자 눈치 빠른 허서령이 다시 그의 입을 막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쉿, 말하지 말아요.”지강산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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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민망해서 미치겠네.’지강산이 내뿜는 체온이 허서령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허서령이었는데 갑자기 지강산의 몸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다리에 힘이 풀렸고 아랫배가 허전해졌다.허서령이 마른 입술을 적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나 지금 중요한 일 때문에 온 거예요. 그러니까 강산 씨는 그냥 가요.”“중요한 일?”허서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더니 귓불과 목까지 전부 뜨거워졌다.그때 덤불 뒤쪽에서 남자의 낮고 거친 신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허서령이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벌써 끝났어? 이제 몇 분 됐다고.”그러고는 지강산을 밀어낸 뒤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쓰고 손전등을 켠 채 그대로 뛰쳐나갔다.한 손에는 휴대폰을, 다른 한 손에는 녹음기를 들었다.허서령이 갑자기 나타나자 몸이 얽힌 상태였던 두 사람이 혼비백산하더니 급히 주변을 더듬으며 옷을 찾았다.허서령이 카메라를 두 사람의 얼굴에 들이댔다.“공공장소인 아파트 단지 내에서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있죠? 창피한 줄도 몰라요?”두 사람이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었다.옷을 다 입은 남자가 벌떡 일어나 허서령에게 삿대질했다.“너 뭐야? 너랑 무슨 상관인데?”“이 아파트의 주민입니다. 당연히 상관이 있죠.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고소할 거고 당신들이 한 더러운 짓을 아파트 주민들한테 싹 다 알릴 겁니다.”남자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어디 해봐. 절대 가만 안 둘 테니까.”이은경이 당황한 얼굴로 옷을 급히 정리하며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촬영하지 마세요.”허서령이 그제야 촬영을 멈추고 손전등도 껐다.“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번엔 넘어갈게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얼른 가세요.”이은경은 더 큰 일이 나기 전에 서둘러 남자의 손을 잡고 숲을 빠져나갔다.숲이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허서령이 고개를 숙여 영상에 두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찍혔는지 확인했다.그때 지강산이 다가왔다.“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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