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여기사에게 미친 대공님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Chapter 1 - Chapter 10

20 Chapters

1

* 전쟁은 끝났으나, 겨울은 오지 않았다피 냄새는 비누로도 지워지지 않는다.로젤린은 거친 수세미로 손등을 문질렀다. 하얀 거품이 붉게 물들 정도로 박박 문질러도, 손톱 밑에 낀 검붉은 잔재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살점 타는 냄새, 쇠와 쇠가 부딪치는 비명, 그리고 전우들의 마지막 숨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웅웅거렸다."단장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욕실 문 밖에서 부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거울을 보았다.거울 속에는 여인이 없었다.그저 7년의 전쟁이 빚어낸, 흉터 투성이의 살인 병기가 서 있을 뿐이었다.오른쪽 눈썹 위에서 관자놀이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 햇볕에 그을려 거칠어진 피부. 귀족 영애들이 흔히 바르는 향유 대신 쇠 냄새를 풍기는 몸. 로젤린 드 칼리스. 제국의 최연소 소드 마스터이자, 북부 전선을 평정한 '하얀 사신'.그것이 나였다."……금방 나가지."로젤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복을 걸쳤다. 화려한 드레스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검은색 정복, 허리춤에 차갑게 닿는 검의 감촉만이 그녀에게 유일한 안정을 주었다.오늘, 제국은 승전을 선포했다.그리고 나는, 이제야 멈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황궁의 연회장은 눈이 멀 정도로 화려했다.천장 높이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별처럼 쏟아졌고, 악사들의 연주는 전쟁의 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경쾌했다. 귀족들은 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들었다. 그들의 붉은 와인이 로젤린의 눈에는 갓 흘러나온 피처럼 보였다."오, 보게나. 칼리스 경이네.""저 여자가 그 북부의 도살자라지?""가까이서 보니 정말… 사내 같군. 저런 몸으로 시집이나 갈 수 있겠어?"부채 뒤에 숨은 영애들의 속삭임이 예리한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로젤린은 익숙하게 그 시선들을 무시했다. 전장에서는 화살을 피하는 법을 배웠고, 사교계에서는 모욕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그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Read more

2

"대공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기꺼이 그대를 맞이하겠다고 했다."황제가 로젤린을 내려다보며 쐐기를 박았다."로젤린 드 칼리스 백작. 짐은 그대를 빈터발트 대공의 비(妃)로 임명한다. 이것은 황명이다."황명.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로젤린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약속은? 내 자유는?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소망은? 그 모든 것이 권력자의 혀끝에서 산산이 조각났다.그녀는 충동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뻗을 뻔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황제의 목을 벤다면? 아니, 그건 개죽음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부하들이 있었고, 인질로 잡혀 있는 병약한 남동생이 있었다.로젤린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그녀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바닥을 짚은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결국, 나는 전장을 벗어나 또 다른 지옥으로 끌려가는구나.***결혼식은 초라했다. 아니, 초라하다기보다는 기이했다.신랑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신랑의 대리인이라는 창백한 안색의 집사가 검은 예복을 입고 서 있었다. 하객도 없었다. 황제가 보낸 감시역 몇 명과, 로젤린의 부관만이 눈물을 훔치며 자리를 지켰다."이게 무슨 결혼식입니까! 단장님을 이렇게 대우하다니…!"부관 제롬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로젤린은 덤덤했다."상관없어, 제롬.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까."그녀는 순백의 드레스 대신 하얀 예복을 입었다. 레이스보다는 빳빳한 옷깃이, 보석보다는 훈장이 그녀에게 더 익숙했다.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돌아서는 길, 그녀는 더 이상 '칼리스 백작'이 아닌 '빈터발트 대공비'가 되었다.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마차에 실려 제국 서쪽 끝으로 보내졌다.빈터발트 영지는 듣던 대로 삭막했다. 거대한 성벽은 검은 돌로 쌓여 있었고, 성 주위에는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만이 앙상한 손가락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성문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이는 아무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Read more

3

"하지만 부인, 하나 알려드릴까요? 이 빈터발트 성에 들어온 이상, 나가는 문은 없습니다."그가 로젤린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죽어서 나가거나, 아니면 내 것이 되거나. 둘 중 하나지."로젤린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테오도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그럼 다행이네요.""……?""전장에서 돌아온 이후로, 저는 이미 반쯤 죽어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곳이 제 무덤으로 딱 알맞겠습니다."그녀는 테오도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이 여자는,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삶조차도.그 순간, 성의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뎅, 뎅, 뎅."밤이 늦었습니다. 방을 안내해 주시죠."로젤린이 짐 가방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녀의 태도는 마치 여관에 투숙하러 온 나그네처럼 건조했다.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황제가 보낸 개가 아니라, 상처 입은 늑대였나."집사! 부인을 별관으로 모셔라. 제일 춥고, 먼지 많은 방으로."테오도르의 심술궂은 명령에도 로젤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까딱하고는 집사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홀에 남겨진 테오도르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그녀의 검을 바라보았다. 낡고 투박한 검집. 하지만 그 안에는 제국을 구한 서슬 퍼런 칼날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로젤린 드 칼리스…."그는 자신의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저주받은 심장이, 아주 오랜만에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별관의 방은 테오도르의 명령대로 엉망이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먼지가 수북했고, 창문 틈으로는 황소바람이 들이닥쳤다. 침구는 눅눅했고 벽난로에는 땔감조차 없었다.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을 것이다.하지만 로젤린은 덤덤하게 방을 둘러보았다.'참호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Read more

4

배가 고팠다. 전장에서는 곰팡이 핀 빵 한 조각을 먹기 위해 며칠을 굶기도 했다. 자존심 같은 건 배부른 돼지들이나 챙기는 것이다. 그녀는 직접 식당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자 드넓은 홀이 나왔다. 먼지가 쌓인 샹들리에, 색이 바랜 카펫. 빈터발트 성은 주인을 닮아 창백하고 병들어 보였다.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빵 굽는 냄새였다. 로젤린은 냄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녀들의 뒷모습이 보였다.“이봐, 정말 그 여자한테 아무것도 안 갖다줘도 돼?”“집사님이 그러셨잖아. 대공 전하께서 투명 인간 취급하라고 하셨다고.”“그래도 황제 폐하가 보내신 분인데….”“황제? 흥, 그 작자가 우리 빈터발트에 한 짓을 잊었어? 그 여자는 첩자야. 북부의 도살자라며? 그런 여자가 대공비라니, 말도 안 되지.”수군거리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로젤린은 문틀에 기대어 그들의 대화를 잠시 감상했다. 적대감. 경멸. 두려움. 익숙한 감정들이었다.끼익.로젤린이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수다를 떨던 하녀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안녕들 한가?”로젤린이 건조하게 인사를 건넸다.“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가장 앞에 있던, 체격이 건장한 주방 하녀가 식칼을 쥐고 뒷걸음질 쳤다. 로젤린의 시선이 그 식칼에 잠시 머물렀다. '날이 무디고 녹이 슬어 있었다. 저런 걸로는 사람을 찌르기도 힘들겠군.' 직업병적인 분석이 스쳐 지나갔다.“밥은 어디서 먹으면 되지?”그녀의 물음에 주방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앞치마를 꽉 쥐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독살스러웠다.“대, 대공비 전하께 드릴 식사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별관의 식사는 금지하셨….”“그래? 그럼 여기서 먹지, 뭐.”로젤린은 주방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식탁 위에 놓인 갓 구운 바게트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Read more

5

“차라도 한잔하지. 부인의 그 땀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을 해서 비위를 상하게 하니, 씻고 오는 게 좋겠어.”“초대 감사합니다. 그런데 씻을 물이 없어서요. 하녀들이 제 방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스에 남은 테오도르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물이라….'그의 손가락이 휠체어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로젤린이 안내받은 곳은 테오도르의 집무실이었다. 벽면 가득 꽂힌 고서들, 바닥에 깔린 최고급 털카펫,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그녀가 묵는 별관의 창고 같은 방과는 딴판이었다. 테오도르는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로젤린이 들어오자 시선을 주지 않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앉아요.”로젤린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몸을 감쌌다. 익숙하지 않은 안락함에 오히려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테이블 위에는 찻잔 두 개와 3단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독은 안 탔으니 안심하고 마셔도 됩니다.”테오도르가 비아냥거렸다.“독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내성이 있거든요.”로젤린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향긋한 홍차였다. 그녀가 한 모금 마시자, 테오도르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당신, 정말 재미없는 여자군.”“칭찬으로 듣겠습니다.”“황제는 당신을 감시역으로 보냈을 텐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굴어도 되나? 내 목을 따거나, 내 비밀을 캐내서 보고해야 할 것 아닌가?”그는 집요하게 로젤린을 자극했다. 그녀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 밑에 숨겨진 추악한 본성을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로젤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은퇴하고 싶어서 왔다고. 황제 폐하께는 적당히, 대공 전하께서 매우 건강하고 성격이 고약해서 접근하기 힘들다고 보고할 생각입니다.”“성격이 고약하다?”“사실이니까요.”로젤린의 직설적인 화법에 테오도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Read more

6

* 사냥개에게는 목줄이 필요하다대공의 집무실에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의 장작 소리와, 째깍거리는 괘종시계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로젤린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다.'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등에는 자잘한 흉터들이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귀족 영애의 섬섬옥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을 죽이는 손.'하지만 그 손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청명했다. 마치 뼛속을 갉아먹는 구더기 떼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지난 수년간 그를 괴롭혀온 저주, 마력 역류의 고통이 로젤린과 접촉하고 있는 동안에는 거짓말처럼 잠잠했다.'이게, 대체….'테오도르는 혼란스러웠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들도, 신성력을 가진 고위 사제들도 해결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그런데 고작 황제가 보낸 사냥개, 칼만 휘두를 줄 아는 무부가 내 손을 잡은 것만으로 진정된다고? 그는 시험하듯 슬그머니 손을 빼보려 했다. 손바닥이 떨어지는 순간, 억눌려 있던 통증이 다시금 독사처럼 고개를 들었다.“읍.”그는 반사적으로 로젤린의 손을 다시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통증은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 나나가나갔다. 확실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걸어 다니는 진통제, 아니 그 이상이었다.“이제 좀 놓으시죠, 전하. 손에 땀 차십니다.”로젤린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배가 고프니 빨리 식당으로 가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조금만. 조금만 더.”테오도르는 자존심도 잊은 채 매달렸다. 이 평온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금단현상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는 로젤린의 체온을 갈구했다.“고기.”“예?”“고기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소 한 마리로.”로젤린은 단호했다.“그 약속 안 지키시면 이 손, 당장 놓겠습니다.”테오도르는 기가 막혔다. 제국의 대공인 자신을 상대로, 고작 고기 따위를 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Read more

7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하하하! 걱정 마. 내 취향은 당신처럼 뻣뻣하고 흉터 투성이인 여자가 아니니까. 안심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테니.”“그럼, 계약 성립이군요.”로젤린이 잡고 있던 손을 흔들며 말했다. 테오도르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래. 잘 부탁해, 나의 안식처.”그 말이 묘하게 로젤린의 가슴을 울렸다. '안식처. 평생 전장을 떠돌던 자신이 누군가의 안식처가 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똑똑.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고 하녀들이 들어왔다. 가장 앞에는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중년 여인, 시녀장 마르타가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드레스와 세숫대야를 든 어린 하녀들이 따라왔다.“전하, 분부하신 물건들을 가져왔습니다.”마르타는 테오도르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로젤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였다.“거기 두고 나가봐.”테오도르는 로젤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턱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마르타의 시선이 맞잡은 두 손에 머물렀다. 그녀의 눈매가 날카워졌다.“전하, 외람되오나 식사 준비를 하려면 부인께서 씻고 환복을 하셔야….”“알아서 할 테니 나가라니까.”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마르타는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알겠습니다. 식당에 준비해 두겠습니다.”하녀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테오도르는 아쉽다는 듯 로젤린의 손을 놓아주었다. 통증이 미약하게 다시 올라왔지만, 아까처럼 견딜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잔열이 남아있는 덕분이었다.“씻고 와. 기다릴 테니까.”테오도르는 턱으로 파티션을 가리켰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파티션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가 아니라, 고작 대야 하나와 찬물, 그리고 비누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로젤린은 헛웃음을 지었다.'이거였군.'시녀장 마르타. 그녀는 대공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 교묘하게 비틀어버린 것이다. '씻을 물을 가져오라 했지, 따뜻한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Read more

8

“여주인을 능멸하는 건 나를 능멸하는 것과 같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네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알겠나?”“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마르타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하녀들도 벌벌 떨었다. 로젤린은 고기를 씹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지.'로젤린은 착각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로젤린을 아껴서 화를 낸 게 아니다. 자신의 '소유물'인 로젤린이 무시당하는 것이 곧 자신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것이라 판단했을 뿐이다. '하지만 뭐, 나쁘지 않네.' 덕분에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이용해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로젤린은 남은 고기 한 점까지 깨끗하게 비웠다.---식사가 끝나고 밤이 깊었다. 로젤린은 배를 두드리며 별관으로 돌아가려 했다.“어디 가?”테오도르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자러 갑니다. 졸려서요.”“누가 보내준대?”테오도르가 휠체어를 돌려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계약서 잊었어? 내 곁에 있으라고 했잖아.”“잠잘 때는 터치 안 하기로 했잖습니까.”“터치는 안 해. 그냥 같은 공간에만 있어 달라는 거야. 통증이 도지면 잠을 못 자니까.”테오도르의 눈 밑이 거무죽죽했다. '만성적인 불면증. 그는 로젤린이라는 진통제를 두고 또다시 고통 속에서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았다.'“내 침실에 보조 침대를 놔줄게. 거기서 자.”“하…. 전하. 남녀가 유별한데 한방을 쓰다니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이미 부부인데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소문? 소문나는 게 두려웠으면 당신이랑 결혼도 안 했어.”테오도르는 막무가내였다. 로젤린은 한숨을 쉬었다. '밥값을 하려면 어쩔 수 없나.'“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잠버릇이 좀 험합니다. 자다가 칼을 휘두를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걱정 마. 내가 당신보다 잠귀는 밝으니까.”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대공의 침실은 운동장처럼 넓었다. 테오도르의 거대한 침대 옆에, 간이침대가 놓였다. 로젤린은 눕자마자 3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Read more

9

“으음….”침대 쪽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테오도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눈을 뜨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초점을 찾지 못하고 잠시 허공을 헤매다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로젤린에게 멈췄다.“…일찍도 일어나는군.”“군인에게 늦잠은 사치니까요. 푹 주무셨습니까?”로젤린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자고 일어났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지 않아. 심장도, 멀쩡하고.”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몇 년간, 아침은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밤새 뒤척이다 쪽잠을 자고 일어나면, 마력이 역류해 온몸의 혈관을 짓누르는 통증과 함께 하루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놀라울 정도로 상쾌했다.'“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테오도르가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실크 잠옷 사이로 마른 쇄골이 드러났다.“말씀드렸잖습니까. 퇴역 군인이라고. 밥값은 한 것 같으니 아침이나 주십시오.”로젤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자 눈 덮인 빈터발트 영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설원. 평화로워 보이지만, 저 눈 아래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테오도르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인터폰을 눌렀다.“조식 준비해. 그리고 마담 퐁파두르를 불러.”“[마담 퐁파두르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요?]”“지금 당장. 내 아내가 입을 옷이 없어서 알몸으로 돌아다니게 생겼다고 전해.”“전하, 과장이 심하십니다. 어제 만든 튜닉도 꽤 쓸 만한데.”로젤린이 항의했지만 테오도르는 콧방귀를 꼈다.“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걸레 조각을 다시 입는 꼴은 못 봐. 얌전히 있어. 당신을 빈터발트의 안주인답게 만드는 것도 내 의무니까.”“의무라기보다는 전하의 자존심 문제겠죠.”“정답이야.”테오도르는 씩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휠체어를 타지 않고 두 발로 섰다. '다리가 불편한 게 아니라, 그저 몸이 약해 걷는 것조차 귀찮아했던 것뿐이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Read more

10

“제국을 구한 훈장이지. 황제가 하사한 깡통 메달보다 이 상처 하나가 더 가치 있어. 이 흉터가 없었으면 지금쯤 자네들은 북부 야만족의 노예가 되어 있었을 텐데?”그는 마담 퐁파두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싸늘한 비소.“내 아내의 훈장을 모욕한 죄, 어떻게 물을까?”“저,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마담 퐁파두르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조수들도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테오도르는 쯧, 하고 혀를 찼다.“알았으면 제대로 해. 이 흉터들을 가리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돋보이게 만들어. 강인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빈터발트의 안주인은 연약한 꽃이 아니라, 눈보라를 견디는 철목(鐵木)이어야 하니까.”'철목이라….' 로젤린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꽃이 되려 하지 말고 나무가 되라. 그 말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일어나서 일해.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마담 퐁파두르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디자이너로서의 도전 의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알겠습니다, 전하. 세상에서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내겠습니다.”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마담 퐁파두르는 로젤린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레이스를 덕지덕지 붙이는 대신, 과감한 커팅과 짙은 색감의 원단을 선택했다. 검붉은 벨벳, 차가운 실크, 그리고 가죽. 로젤린은 인형처럼 서서 그들의 손길을 받아냈다. 테오도르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간간이 훈수를 두었다.“등은 더 파도 돼. 등 근육이 예쁘니까.”“치마는 너무 길지 않게. 움직일 때 거슬린다고 싫어할 거야.”“거기에 단검을 숨길 수 있는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줘.”“전하, 제발 주머니 얘기는 그만하시죠. 드레스에 주머니라니요.”마담이 울상을 지었지만 테오도르는 완강했다. 결국, 로젤린의 드레스 허벅지 안쪽에는 단검을 꽂을 수 있는 비밀 주머니가 만들어졌다.---옷 치수를 다 재고 나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테오도르는 집무실로 가서 업무를 봐야 했고, 로젤린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Read more
PREV
1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