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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4-30 09:20:39

“차라도 한잔하지. 부인의 그 땀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을 해서 비위를 상하게 하니, 씻고 오는 게 좋겠어.”

“초대 감사합니다. 그런데 씻을 물이 없어서요. 하녀들이 제 방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스에 남은 테오도르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물이라….'

그의 손가락이 휠체어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

로젤린이 안내받은 곳은 테오도르의 집무실이었다. 벽면 가득 꽂힌 고서들, 바닥에 깔린 최고급 털카펫,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그녀가 묵는 별관의 창고 같은 방과는 딴판이었다. 테오도르는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로젤린이 들어오자 시선을 주지 않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앉아요.”

로젤린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몸을 감쌌다. 익숙하지 않은 안락함에 오히려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테이블 위에는 찻잔 두 개와 3단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독은 안 탔으니 안심하고 마셔도 됩니다.”

테오도르가 비아냥거렸다.

“독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내성이 있거든요.”

로젤린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향긋한 홍차였다. 그녀가 한 모금 마시자, 테오도르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 정말 재미없는 여자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황제는 당신을 감시역으로 보냈을 텐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굴어도 되나? 내 목을 따거나, 내 비밀을 캐내서 보고해야 할 것 아닌가?”

그는 집요하게 로젤린을 자극했다. 그녀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 밑에 숨겨진 추악한 본성을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로젤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은퇴하고 싶어서 왔다고. 황제 폐하께는 적당히, 대공 전하께서 매우 건강하고 성격이 고약해서 접근하기 힘들다고 보고할 생각입니다.”

“성격이 고약하다?”

“사실이니까요.”

로젤린의 직설적인 화법에 테오도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고 터져 나온 웃음은 건조했지만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그때였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창백했던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리고, 붉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큭….”

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숙였다.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뜨거운 찻물이 카펫을 적셨다.

“전하?”

로젤린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도르의 몸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병이 아니었다. 마력 폭주, 혹은 저주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오지… 마! 나가!”

테오도르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몸 주변으로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책장의 책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유리창이 덜덜 떨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압에 눌려 숨조차 쉬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젤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소드 마스터였다. 마력의 흐름을 읽고 베어내는 것은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테오도르에게 다가갔다.

“물러가라니까! 이 괴물 같은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죽고 싶어?!”

테오도르가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로젤린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만히 계세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로젤린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검붉은 아지랑이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성난 파도가 방파제를 만나 부서지듯, 테오도르를 괴롭히던 고통이 로젤린에게로 흘러 들어가 흩어졌다.

“어…?”

테오도르의 붉은 눈이 커졌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따뜻하고 안정적인 기운이 채워졌다. 그것은 로젤린의 체온이었다.

“당신… 뭐야?”

그는 멍하니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로젤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저 눈앞의 부상자를 처치하는 의무병의 눈빛이었다.

“숨, 쉬어지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그제야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놓으려 했다.

“가지 마.”

테오도르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은 그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제국의 괴물, 살인귀라 불리던 대공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한 마리 짐승만이 거기 있었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잡힌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비싸게 굴지 않을 테니 잡고 계시죠. 대신.”

“대신?”

“오늘 저녁은 빵 말고 고기로 주십시오. 굽기는 미디엄 웰던으로.”

그녀의 엉뚱한 요구에 테오도르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래.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주지.”

테오도르는 로젤린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이었지만,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구원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빈터발트의 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의 집무실 안은, 아주 미세하게나마 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

그 시각, 황궁. 알렉산드로 3세는 북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빈터발트 대공, 로젤린 드 칼리스와 혼인. 첫날밤부터 별관에 유폐.]'

“역시. 그 미친개 테오도르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지. 서로 물어뜯고 죽일 때까지 싸우거라.”

황제는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붉은 와인이 핏빛으로 일렁였다.

“나의 충실한 사냥개가 어디까지 망가질지, 기대되는구나.”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버린 녹슨 검이, 괴물의 유일한 구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검이 다시 날카롭게 벼려져 자신의 심장을 겨누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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