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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30 09:16:59

"하지만 부인, 하나 알려드릴까요? 이 빈터발트 성에 들어온 이상, 나가는 문은 없습니다."

그가 로젤린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죽어서 나가거나, 아니면 내 것이 되거나. 둘 중 하나지."

로젤린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테오도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로, 저는 이미 반쯤 죽어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곳이 제 무덤으로 딱 알맞겠습니다."

그녀는 테오도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삶조차도.

그 순간, 성의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뎅, 뎅, 뎅.

"밤이 늦었습니다. 방을 안내해 주시죠."

로젤린이 짐 가방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녀의 태도는 마치 여관에 투숙하러 온 나그네처럼 건조했다.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황제가 보낸 개가 아니라, 상처 입은 늑대였나.

"집사! 부인을 별관으로 모셔라. 제일 춥고, 먼지 많은 방으로."

테오도르의 심술궂은 명령에도 로젤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까딱하고는 집사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에 남겨진 테오도르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그녀의 검을 바라보았다. 낡고 투박한 검집. 하지만 그 안에는 제국을 구한 서슬 퍼런 칼날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로젤린 드 칼리스…."

그는 자신의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저주받은 심장이, 아주 오랜만에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

별관의 방은 테오도르의 명령대로 엉망이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먼지가 수북했고, 창문 틈으로는 황소바람이 들이닥쳤다. 침구는 눅눅했고 벽난로에는 땔감조차 없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로젤린은 덤덤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참호보다는 낫군.'

진흙탕 속에서 시체와 뒤엉켜 자는 것에 비하면, 지붕이 있고 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녀는 익숙하게 짐을 풀었다. 옷 몇 벌, 어머니의 유품인 펜던트, 그리고 비상용 단검.

그녀는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삐그덕, 낡은 스프링이 비명을 질렀다.

창밖에는 달빛도 없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북부의 밤은 길고 혹독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 고요가 축복이었다. 더 이상 기상나팔 소리에 놀라 깨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이걸로… 된 거야."

로젤린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비록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고, 남편이라는 작자는 성격 파탄자 같았지만, 적어도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딱딱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피로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 빈터발트 성이, 전장보다 더 치열하고 위험한, 그리고 무엇보다 뜨거운 '감정의 전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날 밤, 로젤린은 7년 만에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성의 주인인 테오도르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새도록 그녀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 빈터발트의 겨울은 시리도록 투명하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한기가 뺨을 찔렀다. 로젤린은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침대 옆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아야 할 차가운 검자루 대신, 눅눅한 솜이불의 감촉만이 느껴졌다.

'아. 여기는 전장이 아니지.'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지난 7년 동안 매일 아침 그녀를 깨우던 것은 기상나팔 소리거나, 적의 기습을 알리는 비명, 혹은 막사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였다. 이렇게 완벽한 침묵 속에서 눈을 뜨는 것은 너무나 낯선 경험이었다.

로젤린은 상체를 일으켰다. 낡은 침대가 끼익 비명을 질렀다. 밤새 덮고 잔 이불은 얇아서 체온을 거의 지켜주지 못했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부인을 별관으로 모셔라. 제일 춥고, 먼지 많은 방으로.'

어젯밤 테오도르가 내뱉었던 심술궂은 명령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방 안의 공기는 바깥과 다를 바 없이 차가웠고, 탁자 위에 놓인 물병은 꽁꽁 얼어 있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였다면 이 푸대접에 모욕감을 느껴 눈물을 흘리거나, 당장 본관으로 달려가 항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젤린은 덤덤하게 얼어붙은 물병을 집어 들었다.

챙.

손날로 병 주둥이를 가볍게 치자 얼음이 깨지며 물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그 얼음물로 세수를 했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수건도 없어서 소매 끝으로 물기를 훔쳐냈다.

'오히려 좋아.'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따뜻하고 안락한 침대, 시중드는 하녀들의 손길, 향기로운 목욕물. 그런 것들은 로젤린에게 사치이자 불안요소였다. 너무 편안하면 감각이 무뎌진다. 무뎌지면 죽는다. 그것이 뼈에 새겨진 생존 본능이었다.

로젤린은 간단히 옷매무새를 다듬고 방문을 열었다. 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시중드는 하녀 하나 보내지 않은 걸 보면 이 성의 사용인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우할지는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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