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Chapter 51 - Chapter 60

92 Chapters

제51화. 감금 당하기 딱 좋은 날씨? (1)

​​태양궁의 집무실은 낮보다 밤이 더 위험했다.​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분명 특별 보좌관이라는 이름으로 온 것 같긴 한데…​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카엘루스의 집무실 책상, 그것도 바로 옆에 앉아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엘리노아 , 집중력이 흐트러졌군.”​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에 쓸모없이 들려있는 깃펜을 툭-! 건드렸다.​나도 모르게 스르륵 감기던 눈이 번쩍 뜨이며 심장이 아래로 톡 떨어졌다.​“폐하! 멀쩡한 사람도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견디지 못할 거예요… 차라리 제 방에 가면 안 될까요?”“방에서 또 누구랑 엮이려고? 안돼. 내 눈앞에 있는 것도 네 임무 중 하나야.”​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손을 올려 자연스럽게 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떨어졌던 심장이 이번엔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너를 특별 보좌관으로 앉힌 건 일이나 시키려고 그런 게 아니라 합법적으로 가둬 두기 위해서다. 잊지 말길.”​붉게 반짝이는 그의 눈빛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그때 품 안에 있던 알에게서 기묘한 진동이 느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달빛이 환하게 비칠 때쯤이야 겨우 카엘루스의 마수(?)를 벗어나 내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탁자에 있는 바구니 위에 알을 내려놓은 후 조용히 병풍형 가림막 뒤로 몸을 옮겼다.​오늘도 열심히 구른(?) 나를 칭찬하며.​천천히 옷을 벗으려던 찰나 갑작스러운 릴리의 비명이 들려왔다.​“어??? 내가 분명히! 조금 전에 둔 건데! 아가씨 간식으로 둔 마카롱이랑 최고급 마력석 정제수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물론 멀리 찾지 않아도 되었다.​범인은 바로 앞에 있었으니…​바구니 위에 올려두었던 검은 알이 어느샌가 내 침대 위 한가운데에서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서는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이 녀석은 이제 엄청난 식성을 숨길
Read more

제52화. 감금 당하기 딱 좋은 날씨? (2)

자는 척 눈을 감았으나 코끝을 스치는 이 시원하고 상쾌한 숲향기가 바로 누군지 노골적으로 알리고 있었으니 말이지.​“폐하? 이 시간에 여긴 왜…? 저녁에 오신다 들었습니다만.”​그의 체향이 짙어지는 걸 보니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모양이다.​“재미있는 보고를 받았거든. 그대가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건지 궁금해 참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지.”​말을 마치며 엘리노아와 검은 알이 함께 팩을 얼굴에 붙인 채 소파에 널브러진 꼴을 보던 황제는 어이없어 픽-! 웃었다.​“폐하, 아름다움은 거저 오지 않는답니다.”​말은 당당하게 했으나 조금 민망해진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려 했다.​물론 황제의 제지로 그대로 다시 제자리에 눕게 되었지만.​그러고 나서 내 무릎 위에 놓인 소설책으로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오늘은 감금당하기 딱 좋은 날씨?”​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는 그의 목소리가 얄밉다.​아, 망했다.​“여전히 엉뚱하군, 내 보좌관은.”​책을 집어든 그는 스르륵 책장을 넘기다 하필이면 조금 전 내가 읽었던 그 페이지에서 손가락을 멈췄다.​“내 눈을 벗어나지 마. 넌 내 눈앞에서만 숨 쉴 수 있…”‘그만!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눈까지 가리는 팩을 하지 못한 걸 땅을 치며 후회했다.​지금 할 수 있는 건 눈을 꼭 감고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하는 것.​비록 그게 가능하지 않더라도 말이다.​하아, 눈을 감기 직전 그의 묘한 미소를 마주치고 말았다.​감은 그 순간에도 사라지지가 않는다.​“작가가 누군지 한번 알아봐야겠군. 아주 훌륭해.”“???”​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 훌륭하다고?​알고 보니 나보다 더 로판 덕후인 거 아냐 이거??​그래… 그럴 리가 없지.​잠시 내가 괜한 생각을 했다.​아, 오늘 날씨는 그냥 맑고 청량했던 게 아니었다.​정말 도망치기 딱 좋은 날씨었다. 책
Read more

제53화. 조각난 기억의 잔상 (1)

​​카엘루스 황제가 닫았던 문이 다시 열리며 릴리가 들이닥쳤다.​그녀는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병사처럼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양팔에 가득 안고 있었다.​“아가씨! 폐하께서 준비를 서두르라 하셨어요!”​달리듯 빠르게 내 곁으로 오는 릴리가 외쳤다.​“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이 이렇게 빨갛지? 어디 아프세요?”​내 이마에 손을 얻는 릴리가 말했다.​“아, 아니야! 그냥 날씨가 좀 덥네, 하하.”​나는 대충 둘러대며 릴리의 손에 이끌려 화장대 앞에 앉았다.​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내 입가에 닿았던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멍하니 있었다.​입가에 닿았던 그의 뜨거운 숨결이 여전히 피부 위를 맴도는 것 같아 자꾸만 입술을 깨물었다.​길고 가느다란 카엘루스의 손가락이 간지럽히던 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눈을 감으면 이 느낌이 사라지려나?​천천히 눈을 감아보았으나, 오히려 남겨진 그의 싱그러운 숲 향기가 진하게 타고 올라와 코끝을 간지럽힐 뿐이었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올라오는 그의 진한 향기에 심장이 다시금 요동쳤다.​‘미쳤어… 이건 소설 따위가 아니라고.’​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마음속에서 이미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과거에 읽었던 수많은 로판들이 스쳐 지나가며​‘왜 남주들이 들이대면 여주들은 항상 도망치고 피하는 가?’에 대해 현실성 없다며 맘 놓고 비웃던 예전의 나 자신이 후회되었다.​당해보니 이건 도망 따위로 끝날게 아닌 것 같다.​마치 영혼이 탈곡기에서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을 때, 바구니에 있던 검은 알이 데구르르 구르기 시작했다.​생각해 보니 아까 소파에서 같이 널브러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바구니까지 갔지? 싶었는데 알 상태를 보니 기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솜뭉치? 무슨 일 있어? ”​순간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 알을 향해 손을 뻗었다.​매끄럽고 따뜻한 껍질이 손에 닿자 평소와는 다른 강렬한 마
Read more

제54화. 조각난 기억의 잔상 (2)

​​나는 밖에 나가자마자 황제 카엘루스의 손에 이끌려 태양궁 가장 깊숙한 비밀 구역으로 향했다.​다짜고짜 내 팔을 잡아챈 그의 손길은 환상 속 누구와 다르게 거침없고 오만했다.​“보좌관, 넋을 놓고 도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거지? 내게 집중하도록.”​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카엘루스가 나른하게 웃으며 물었다.​시선이 마주친 나는 화들짝 놀라 피하며 답했다.​“아니 그냥… 지금 보니 폐하께서 아스테리온 황제와 좀 닮으신 것 같습니다?”“… 뭐?”​그래,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수 백 년 하고도 한참 전 초대 황제의 이름을 생뚱맞게 언급하고 있으니, 누군들 웃지 않으리.​조금 의아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카엘루스는 대답 없이 그렇게 내 손을 잡은 채 거대한 장미 넝쿨을 지나, 은밀하게 숨겨진 한 정원으로 도달했다.​“그대의 입술에서 아스테리온 황제의 이름이 나오다니, 별일이군.”​그는 말을 이었다.​“이곳이 바로 그가 직접 여신 루세티아를 기리기 위해 만든 안식처, ‘달빛의 연못’이거든”“아스테리온?”​나도 모르게 친근하게 초대 황제의 이름을 불러버려 스스로 입을 막았다.​‘아니, 초대 황제가 이렇게… 감수성이 높았나?’​주변을 살펴보니 온갖 것들이 여신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여신 조각상,​여신 꽃말이 담긴 은방울꽃들,​왠지 저 연못도 그럴 것 같다.​“여신 광신도도 아니고…”​카엘루스는 그런 내 옆에 서서 잔잔한 수면을 응시했다.​“이곳은 대대로 황제 외에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금기 구역이다 보니, 아무래도 잘 모를 수도 있겠군.”“초대 황제는 여신 루세티아를 여러모로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 온통 그의 업적을 보면 여신을 기리는 것 투성이거든. 이 연못도 그렇고.”​문득 조금 전 보게 된 행복한 그들의 표정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멍한 내 표정이 탐탁지 않은 듯 카엘루스 황제는 내 팔을 좀 더 그의 곁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곳
Read more

제55화. 심연을 건너는 기록자 (1)

​​수도 중심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요즘 유명한 베이커리인 ‘화이트 헤이즈’는 오늘도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평화로운 곳이다.​하지만 이곳 지하로 들어가 보면 루체른 공작가 차남인 카시안이 운영하는 제국 최대 정보 길드인 ‘이클립스’의 심장부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제길! 또 실패인가?”​묘한 기름 냄새와 진한 마력의 잔향이 섞여 코를 찌르는 이 밀실 안에서 카시안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카사노바처럼 해사한 웃음도, 여유로움 넘치던 옷차림도 온데간데없었다.​그저 소매를 거칠게 걷어붙인 셔츠는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졌으며, 눈가의 퀭한 모습이 며칠밤을 지새웠는지 보여주고 있었다.​카시안은 그의 모습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그의 앞에 묘하게 얽힌 태엽과 은빛 마력석들이 복잡한 마법진 위에서 위태롭게 빛내고 있는 것만 바라볼 뿐이었다.​이게 바로 수년동안 전력을 쏟아부어 만들고 있었던 ‘기억 복원 아티팩트’였다.​“길드장님, 제발 좀 쉬십시오. 벌써 며칠째입니까?”“시간이 없어…”​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연 카시안은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그의 머릿속은 온통 14년 전 그날, 부모님을 앗아갔던 그 묘하고 서늘했던 안개의 기억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사고가 아니었다. 그 찝찝한 안갯속에서 난 분명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고.”​당시 일곱 살 밖에 안되었던 카시안의 기억에 박혀 사라지지 않은 그 누군가의 미소를, 그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루체른 공작부부가 그렇게 어이없이 사라졌는데 그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되돌아보거나 의아해하지 않았다.​오직 카시안 만이 진실을 파헤치며 ‘망나니 차남’으로 위장해 어둠 속에서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작업대 위에서 도통 움직이지 않던 아티팩트가 쩍-! 소리를 내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안돼!”​이번에 깨지면 또 수개월동안 기다려야 했
Read more

제56화. 심연을 건너는 기록자 (2)

역시 부모님의 마차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리고, 그 ‘누군가’가 어쩌면 가시왕관과 연결되었을지도, 그리고 엘리노아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카시안의 눈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들어찼다.​“가시왕관, 개새끼들.”​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카시안은 부서진 아티팩트 앞에서 맹새했다.​부모님을 위험에 빠뜨린 저 가시왕관 추종자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개박살 내리라고.​카시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하 밀실을 빠져나왔다.​그의 손에는 부서신 아티팩트 조각을 쥐고 있었다. 카시안은 곧장 칼라일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형님.”​평소라면 ‘노크도 없이 무례하군’이라며 호통을 쳤겠지만, 카시안의 처참한 몰골과 살기 가득한 눈을 보고는 칼라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카시안? 도대체 그 꼴은…?”“성공했어요. 형님.”“도대체 무얼?”“14년 전 마차 사고에서, 부모님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고야 말았습니다.”“뭐?”​칼라일의 손에 들렸던 깃펜이 똑, 소리를 내며 부러지며, 순식간에 집무실에 한기로 가득 찼다.​카시안 역시 개의치 않고 칼라일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진실을 쏟아냈다.​​​**​​​카시안의 보고가 끝나자 칼라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미 집무실 바닥은 칼라일로 인해 하얗게 얼어버린 상태였다.​“그러니까 네 말은, 부모님께서 그 가시왕관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들로부터 우리들을, 막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건가?”​칼라일의 목소리에서 제국 전체를 얼려버릴 것만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형님,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아마도 엘리노아가 황궁에서 가지고 있는 그 검은 알이 부화할 때를 노려 놈들은 움직이려 할 것입니다.”“카시안, 이클립스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 미친놈들의 근원지를 파악하도록. 루체른가의 이름으로 명한다. 반드시 찾아라.”​칼라일은 본인의 명검인 ‘리베르’ 검자루를 꽉 쥐며 창밖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Read more

제57화. 숨결이 닿는 거리, 예고된 그림자 (1)

​​보름달이 뜨기까지 남은 시간 단 3일.​시간은 지나고 지나 어둠으로 가득했고, 태양궁 집무실만이 마력등으로 인해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딱 기분 좋은 서늘한 밤공기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뚫어질 듯 쳐다보는 황제의 시선으로 인해 바비큐 통구이가 될 것 같은 엘리노아만 빼고…​“보좌관, 거기서 뭐 하나?”​서류를 검토하던 카엘루스 황제가 한 손으로 떨어지는 안경을 살짝 추켜올리며 물었다.​살짝 흐트러진 셔츠 소매와 코끝에 걸린 안경이 왠지 지독한 지성미를 내뿜고 있었다.​‘미쳤네, 미쳤어. 저건 또 뭐야.’​소파 구석에 처박혀 책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눈만 바라보며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벨리안에 대해 자꾸 물어보길래 안경 쓴 지적인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했더니, 이게 뭔가. 왜 갑자기 네가 안경을 쓰는데?!​“그냥 독서 좀… 하고 있었습니다.”“ ‘악당의 목을 치고 퇴사하겠습니다’라, 그대의 책 제목은 항상 흥미롭군, 그래.”​소파까지 다가와서는 어느새 내 손에 있던 책을 낚아챈 그가 말했다.​‘그냥 일하라고, 쫌! 나한테 왜 그래!’​마음속 자아가 실컷 비명을 지를 수 있도록 두 눈을 감고 있던 엘리노아는 실눈을 뜨다가 심장 폭행을 당하고야 말았다.​“폐, 폐하. 너무 가까워요.”​순식간에 코끝에 닿을 듯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숨이 턱 막혔다.​“난 분명 내 눈앞에 있으라고 말했네, 보좌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안경 너머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내 심장처럼 느껴졌다.​그의 긴 손가락이 내 빰을 타고 내려와 턱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안경 쓴 남자가 좋다고 했던가?”“아 그… 그냥 취향일 뿐이에요.”“앞으로 그대의 취향을 좀 맞춰 볼까 싶어.”​그의 낮은 저음이 귓가를 울릴 때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이 정도 거리라면 다 들릴지도 모르겠어!’​그는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더 거리를 좁혀왔다.
Read more

제58화. 숨결이 닿는 거리, 예고된 그림자 (2)

​​벨리안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사라짐으로 혼란을 느꼈던 엘리노아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솜뭉치에게 ‘여신의 파편’ 임을 강조했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며 가슴을 짓눌렀다.​‘후우…’​떨리는 숨을 내쉬며 솜뭉치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탁자 위 바구니에 올려놓았다.​그런데 알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솜뭉치?”​평소 은은하게 빛나거나 아무 변화가 없던 검은 알이 웬일인지 선명한 보랏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손을 가까이 대니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처럼 뜨거운 열기가 확 끼쳐 왔다.​순간, 방 안의 풍경이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온 세상이 피처럼 붉게 물든 노을 아래로 바뀌었다.​눈앞에는 한 때 찬란했던 신전의 모습이 펼쳐졌다.​그리고 그 중심에, 얼마 전 잠시나마 보았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여신 루세티아로 추측되는 여인이 무너져 있었다.​“아아, 아스테리온… 안돼. 제발…!”​여신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한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이전 기억을 통해 보았던 그녀의 전부였던 초대 황제 아스테리온이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 한참 젊은 모습을 한채 심장이 멈춰진 것 같았다.​“그만두십시오, 루세티아 님.”​그때 등뒤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필멸자의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섭리입니다. 신께서 한낱 인간의 죽음에 슬픔을 내 비추는 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자하크, 그만! 네가 뭘 알아. 그를 잃은 내 마음을 너 따위가…!”“저는 그저 당신의 보좌관으로서, 당신의 빛이 흐려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을 뿐입니다.”“잊으셔야 합니다. 그에 대한 기억이 당신의 신성을 갉아먹는 독이 되게 두어선 안됩니다. 제발, 당신의 고결함을 위해 그 슬픔을 거두십시오.”“내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자하크.”“세상의 축인 당신이 고작 인간 한 명 때문에 휘둘려서는 안
Read more

제59화. 잠에서 깨어났을 때 (1)

아티팩트가 바닥으로 추락하며 내뱉은 마지막 불꽃이 꺼지자, 방 안은 지독한 어둠에 잠겼다.​‘절대로 혼자 있지 마. 황제 옆에 딱 붙어 있어.’​카시안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평소라면 분명 “미친놈 옆이 더 위험해!"라고 맞받아 쳤겠지만, 방금 본 자하크의 그 서늘한 눈빛과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알을 보니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창밖으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조차 누군가 창문을 긁는 소리처럼 들려 등줄기가 오싹했다.​“그래, 일단 살고 봐야 퇴사도 하고 퇴직금도 받지!”​나는 결심한 듯 솜뭉치를 가슴팍에 소중히 밀어 넣고는, 방금 전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황제의 침실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복도를 지나는 내 발소리가 평소보다 열 배는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쾅—!​숨을 몰아쉬며 황제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카엘루스는 막 샤워를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얇은 가운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팍과 안경을 벗어 더 날카로워진 눈매가 나를 향했다.​“… 보좌관?”​카엘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당황함도 잠시, 그의 입가에 비스듬히 승자의 미소가 걸렸다.​“3일은커녕 30분도 못 버티고 내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역시 내 소유욕이 그대에게도 옮은 모양이지?”​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다 저 독침 같은 황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저 인간은 저 입이 문제다. 늘! 항상!​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금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폐, 폐하! 제발… 오늘만 여기서 같이 있게 해 주세요!”​내 절박한 외침에 카엘루스가 수건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복도의 어둠보다는 눈앞의 미친 황제가 백배는 나았다.​‘아니 근데, 제발 옷 좀 입고 오라고!!!!
Read more

제60화. 잠에서 깨어났을 때 (2)

어제까지만 해도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작은 알이 아니었다.​눈을 비비고 다시 본 침대 중앙에는 어제보다 몇 배는 더 커진 수박만 한 크기의 검은 알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보랏빛 광채는 이제 육안으로 보일 만큼 진해졌고, 껍질 너머로 들리는 고동 소리는 마치 북소리처럼 웅장했다.​“폐, 폐하! 폐하, 이것 좀 보세요! 솜뭉치가…… 솜뭉치가 수박이 됐어요!”​다급한 내 외침에 옆에서 잠들어 있던 카엘루스 역시 눈을 떴다.​그러고는 침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해진 알을 보며 그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엘리노아는 수박이 되어버린 솜뭉치를 보자니 황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장성한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랄까.​“솜뭉치… 뭐야. 예고도 없이 크지 말라고…”​공명하듯 떨려대는 솜뭉치가 평소보다 더 강력한 마력을 뿜어댔다.​아무래도 덩치가 커져서 그런 듯하다.​카엘루스는 표정이 구겨지며 침대 중앙을 당당히 차지한 이 검은 수박(?)을 마치 침입자를 보듯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보좌관.”​“네, 폐하.”“내가 어제 내 품을 허락한다고 했지, 이 수박 덩어리와 3인용 가족 침대를 꾸리겠다고 한 기억은 없는데.”​​그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의 투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내 팔에 안긴 이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껍질 너머로 느껴지는 박동은 이제 단순한 태동을 넘어, 방 안의 공기를 진동시킬 만큼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우웅— 우웅—!​​“이거, 설마 지금 나오려는 건 아니겠죠? 아직 보름달이 뜨려면 멀었는데!”​솜뭉치 녀석은 주인의 당황스러움도 모르는지 수박만 한 몸집을 들썩이며 내 품을 파고들었다. 마치 봐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보좌관, 그건 단순히 커진 게 아니다. 네 마력을 흡수해서 폭주하려는 거야.”​​카엘루스가 내 어깨를 잡아채며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알의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보랏
Read more
PREV
1
...
45678
...
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