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Chapter 51 - Chapter 60

100 Chapters

제51화

채아는 미처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설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내리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그래서 하설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도 채아는 운전석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선바이저 거울을 내린 채 립스틱을 덧바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심지어 하설을 향해 새빨간 입술을 살짝 끌어 올려 보인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화장을 이어 갔다.하설은 망치를 들어 올렸다.어금니를 꽉 깨물고,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앞 유리를 향해 내리쳤다.굉음이 터졌다.차체가 크게 흔들렸다.채아의 손이 떨리며 립스틱이 차 안으로 떨어졌다.채아가 겁에 질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하설은 검은 망치를 움켜쥔 채, 이미 크게 금이 간 앞 유리 한가운데를 다시 사정없이 내리쳤다.또 한 번 둔탁한 소리가 터지고, 거미줄처럼 번진 금이 빠르게 퍼졌다. 잘게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채아는 그제야 충격과 공포에서 정신을 차렸다.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미친 여자! 진짜 미쳤어!”채아가 차 문을 밀고 나가려 하자, 하설은 곧바로 차 문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채아가 뒤쪽으로 몸을 피하자, 하설은 뒷유리 쪽으로 돌아가 다시 망치를 들었다.마침내 와장창, 유리가 깨졌다. 산산이 튄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몇 조각은 차 안으로 파고들어 채아의 뺨을 스쳤다.채아는 허둥지둥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문교 오빠, 살려줘! 언니가 미쳤어! 언니가 나 죽이려고 해!”하설의 가슴속은 기이할 정도로 후련했다.오랫동안 쌓여 있던 감정이 망치질 한 번, 한 번과 함께 찌그러진 차체 속으로 박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땀이 뺨을 타고 흘렀고, 반동 때문에 팔이 저릿저릿했다. 위장도 은근히 아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만큼은 숨이 트였다. 아주 잠깐이라도...“심하설!”문교가 빌라 안에서 뛰쳐나왔다. 슬리퍼를 신은 채 성큼성큼 하설 앞으로 다가왔다.문교는 하설의 손에 있던 망치를 빼앗아 화단 쪽으로 던졌다.곧장 하설의 팔을 붙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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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문교는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어 소파 위로 던졌다.채아는 몸을 낮춘 채 조심스럽게 문교의 옷자락을 잡았다.“내가 잘못했어. 언니 물건에 손대면 안 되는 건데. 언니가 안 쓰는 물건도 내가 넘보면 안 됐어. 언니는 오빠 아내잖아. 제일 좋고, 제일 비싼 것만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문교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문교는 채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야.”채아는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처럼 문교의 어깨에 기대었다.“근데 요즘 언니 진짜 이상해. 처음에 오빠가 나를 회사 비서로 들였을 때도 언니가 이틀 정도 삐졌을 뿐이잖아. 사흘째에는 먼저 오빠한테 풀릴 계기를 줬고. 그런데 이번엔 너무 달라.”문교가 채아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채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조용히 말했다.“언니가 BY그룹 상장을 믿고 그러는 것 같아. 오빠의 결혼 상태가 BY그룹 주가랑 연결돼 있으니까, 오빠가 절대 이혼 못 한다고 확신하는 거지.”문교는 대답하지 않았다.채아는 말을 이어 갔다.“내가 오빠 비서가 된 뒤로 언니 마음속에 계속 불만이 쌓였을 거야. 마침 회사도 상장했으니, 이제 예전 일까지 한꺼번에 들춰서 계산하려는 거겠지.”“겉으로는 세상일에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생각보다 머릿속이 복잡하네. 사실 언니는 예전부터 그랬잖아.”“오빠가 회사 규모 키우려고 할 때, 길이 막히니까 바로 돈 많은 회장님한테 붙었잖아. 오빠 사업자금 10억 원을 벌어 왔다고 포장했지만, 결국 투자처를 찍은 거나 다름없지.”문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문교는 채아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함부로 생각하지 마. 하설이는 그런 사람 아니야.”채아가 눈을 내리깔았다.아주 짧게, 눈 안쪽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오빠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지.”문교가 몸을 돌렸다. 손을 들어 채아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삐졌어?”채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오빠가 그랬잖아. 결혼은 언니랑 하지만, 오빠 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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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문교는 마침내 눈을 떴다.어둠 속에서 문교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오빠?”채아가 잠에서 깼다. 문교가 평소와 다른 것을 느끼고 급히 불을 켰다.환한 조명이 침실을 채웠다.그 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도 내려앉았다.문교는 눈앞 가까이에 있는 채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자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곧바로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 했다.채아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아직 새벽 4시밖에 안 됐어. 어디 가려고?”문교는 이미 가운을 벗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며 짧게 대답했다.“집에 좀 가 보려고.”채아의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너무 이르잖아. 날 밝고 가면 안 돼?”채아에게 돌아온 대답은 문교의 바쁜 발걸음뿐이었다.문이 거칠게 닫혔다.채아는 베개 두 개를 집어 들어 벽을 향해 던졌다.푹신한 베개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카펫 위로 떨어졌다.채아는 분한 듯 가슴을 들썩였다.‘이게 대체 뭐야?’‘정말 심하설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게 맞아?’...하설은 이른 아침 하율을 데리러, 또 아침을 챙기러 집으로 돌아왔다.문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성순이 신비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들뜬 미소를 띠고 하설의 손을 잡았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침부터 주방에 계세요. 사모님 드시라고 직접 아침 준비하신대요.”“영숙 어르신께 드릴 국도 끓이신다고 했어요. 식재료도 대표님께서 이른 아침 직접 사 오셨는데, 제가 보니 전부 신선한 것들이더라고요.”하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마침 문교가 몸에 맞지 않는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상을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문교의 시선이 하설의 귀에 닿았다. 보청기를 낀 것을 확인한 뒤 문교가 입을 열었다.“네가 좋아하는 새우야채죽이랑 계란찜 만들었어. 와서 먹어.”문교가 직접 만든 아침.예전이었다면, 아직 청력을 잃은 채 지내던 시절의 하설이었다면 얼마나 감동했을지 모른다.하지만 하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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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2년의 결혼생활, 24년의 인연.그 긴 시간을 벗겨 내고 보니, 남은 건 상처투성이 거짓말뿐이었다.이틀 뒤 오후.하설은 회사로 가야 했다. 지원자 두 명의 면접이 잡혀 있었다.차를 몰고 빛담불꽃기획 건물 아래에 도착했다.차에서 막 내리려는 때, 누군가 하설의 팔을 붙잡았다.하설은 놀라 뒤돌아보았다. 오혜정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엄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네가 병원에서 나온 뒤부터 쭉 따라왔어.”“할머니 입원한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병문안 안 왔어?”“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오혜정은 매몰차게 말을 끊었다. 눈빛이 날카로웠다.“배 서방이 우리 민 대표 회사에 넣어 주겠다고 한 자금이 아직도 안 들어왔어. 오늘 문교한테 전화했더니, 너한테 물어보라더라. 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하설은 오혜정을 바라보았다.자신을 낳았을 뿐, 한 번도 제대로 품어 준 적 없는 어머니.하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을 사람들의 뒷말을 통해 알고 있었다. 오혜정은 아버지와 이혼하기도 전에 이미 바람을 피웠다. 도시에서 온 돈 많은 남자와 엮이자 망설임 없이 가족을 버렸다.원래라면 하설은 오혜정과 완전히 끊어낼 수 있었다.하지만 하설이 7살이던 해, 혈액응고장애를 앓았다. 그때 오혜정이 골수를 기증했다. 오혜정과 재혼한 남편 민규제는 치료비 1억 8천만 원도 대신 냈다.그때의 오혜정은 하설에게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러다 훗날 문교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드러났다.오혜정은 다시 연락해 왔고, 어머니라는 자리를 앞세웠다.주영숙은 하설에게 친정이라는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며, 오혜정과 왕래해 보라고 권했다.하지만 하설은 알고 있었다.하설과 오혜정 사이에 놓인 길은 두껍게 쌓인 돈다발로 포장되어 있었다.하설은 오혜정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몇 년씩 남의 지원 없이는 버티지도 못하는 회사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어. 그냥 정리하는 게 나아.”오혜정이 멍해졌다.하설이 가방을 들고 건물 안으로 걸어가자, 오혜정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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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 봐.”하설의 분위기는 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혜정도 뜻밖의 기세에 움찔했다.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오혜정은 팔짱을 끼고 차갑게 웃었다.“나는 네 엄마야. 지금 나를 치기라도 하려고?”하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죽을힘으로 눌렀다.“그동안 엄마와 아저씨가 내게서 가져간 것만으로도 충분해. 내가 갚아야 할 빚은 이미 다 갚았어. 이제 나는 엄마한테 빚진 거 없어.”하설은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오혜정은 그냥 보내 주지 않았다. 하설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좋아! 좋아!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높은 데 올라앉더니 가족도 몰라보는구나. 완전히 끊고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그럼 지금 당장 10억 원 보내. 그 돈이면 앞으로 길도 따로, 인생도 따로야.”하설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길도 따로, 인생도 따로?’‘좋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엄마를 가진 건 아니니까.’‘어떤 엄마는... 자기 아이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오랫동안 스스로 속여 왔던 사실을, 하설은 오늘에야 인정했다.이상하게도 슬프기보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좋아. 내일 이 시간 전까지 돈 보낼게. 그 뒤로는 나 같은 딸 없었다고 생각해.”하설은 오혜정이 잡은 자기 팔을 내려다보았다.“놔!”오혜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하설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문이 닫히는 그때, 오혜정은 하설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 한줄기를 본 것 같았다.오혜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가슴을 눌렀다. 그러고는 입속으로 욕을 뱉었다.“차라리 남의 집 개를 키우는 게 낫지, 자식이라고 키워 봐야 다 소용없어.”...하설은 화장실로 들어가 뺨에 남은 손자국을 컨실러로 겨우 가렸다.두 지원자의 면접을 마친 뒤, 하설은 직접 그들을 배웅했다.지원자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조문강, 다른 한 명은 양태찬. 둘 다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다.조문강은 시각디자인 전공,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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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하설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길가에 천천히 주저앉았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빛담불꽃기획 건물 안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났다. 입구의 조명만 외롭게 켜져 있었다.마치 하설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하설은 스스로 생각했다.‘태어나기 전에 누가 알려 줬다면 좋았을 텐데...’‘반평생만 살아도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빚지고, 이렇게 많은 마음의 빚을 짊어져야 한다고.’‘그랬다면 사람으로 태어나기로 선택하지 않았을 건데...’‘차라리 길고양이로, 풀 한 포기로, 아니면 돌멩이로 태어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하설은 허리를 숙였다.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눈물이 쏟아졌다.얼마나 울었을까... 하설은 곁에 누군가 다가온 것을 느꼈다.곧 이어 경계하듯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건 낯선 할머니였다. 인상은 인자했지만, 어딘가 현실감 없이 멍한 기색이 있었다.할머니는 하설을 향해 웃었다.하설은 그 할머니를 보자 주영숙이 떠올라 함께 미소를 지었다.“할머니, 이렇게 늦었는데 혼자 여기서 뭐 하세요?”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웃었다.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하설에게 건넸다.“울지 마. 닦아.”손수건과 함께 작은 이름표가 주머니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외롭게 놓여 있었다.하설은 궁금해하며 그것을 주웠다.앞면에는 할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반원주. 뒷면에는 핸드폰 번호 세 개가 있었다.하설은 그제야 이해했다.할머니는 아마 치매 같은 병을 앓는 것처럼 보였다. 이름표는 가족이 맞춰 준 것이고, 길을 잃었을 때 좋은 사람이나 경찰이 가족에게 연락할 수 있게 해 둔 것이었다.하설은 핸드폰을 꺼냈다.“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가족분께 전화할게요. 곧 데리러 오실 거예요.”할머니가 흐릿하게 중얼거렸다.“건이...”하설은 번호를 누르며 맞장구쳤다.“할머니 가족분 이름이 건이예요? 할머니 정말 똑똑하시네요. 그런 것도 기억하시고. 제가 지금 바로 건이한테 전화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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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하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차에서 급히 내린 사람이 우건과 윤재일 줄은...‘건이?’하설의 마음속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피어올랐다.“회장님, 댁 어르신이세요?”우건은 아직도 바닥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에야 짧게 대답했다.“제 외할머니예요. 알츠하이머가 있으세요.”하설은 고개를 끄덕였다.우건은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외할머니, 집에 가요.”할머니는 멍하니 우건을 노려보았다. 한참 뒤 고개를 저었다.“건이 찾아야 해.”우건은 다른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래도 참을성 있게 말했다.“제가 건이입니다.”할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때만큼은 전혀 치매 환자 같지 않았다.“아니야. 건이를 잃어버렸어.”우건이 윤재를 바라보았다.윤재는 급히 다가와 달래듯, 반쯤 부축하듯 할머니를 차에 태웠다.할머니는 차창을 내리고 하설을 불렀다.“아가씨, 얼른 타.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하설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할머니, 저는 제 차 있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집에 가시면 회장님 말씀 잘 들으시고, 다시는 혼자 나오시면 안 돼요. 길 잃으면 큰일 나요.”할머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두 손으로 차창을 붙잡고 턱을 올려놓은 채 하설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나 외손자 있어. 너 우리 외손자랑 결혼해.”하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달빛 아래 우건은 키가 훤칠하게 서 있었다. 급하게 나온 듯 코트도 걸치지 않았다.“감사합니다.”하설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누구라도 도왔을 거예요.”우건의 시선이 하설의 얼굴에 머물렀다.하설이 아무리 가렸어도 완벽하진 않았다.더구나 뺨이 조금 부어 있었다.하설은 무의식적으로 왼쪽 뺨을 가렸다.“회장님, 다른 일 없으시면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하설은 급히 차에 올랐다.하설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본 뒤에야 우건은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눈으로 반원주를 바라보았다.반원주는 괜히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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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반원주는 조용히 쿠션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겁먹은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우건은 깊게 숨을 골랐다.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반원주는 재빨리 쿠션을 내렸다. 우건의 뒷모습을 향해 혀를 살짝 내밀었다.“저렇게 무서우면 아무도 널 안 좋아해.”그 목소리는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딱 윤재와 우건의 귀에 들릴 정도였다.윤재가 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우건이 싸늘하게 물었다.“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윤재는 헛기침했다.“방금 재미있는 농담이 생각났습니다. 들으시겠습니까?”...하설은 며칠 전 문교에게서 받은 10억 원을 전부 민규제에게 송금했다.민규제가 전화를 걸었다.하설은 받지 않았다.오혜정과 민규제를 모두 차단했다.주영숙은 유준을 보러 가고 싶어 했다.마침 같은 병원이었다.다만 유준이는 요양동 쪽에 있었고, 유준에게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외래동을 통과해야 했다.하설은 전에 할머니에게 약속했으므로 거절하지 않았다.“제가 휠체어 빌려 올게요.”하설이 휠체어를 가져왔다.주영숙이 앉으며 말했다.“휠체어 안 타도 돼. 내 발로 걸을 수 있어.”하설이 차갑게 한 번 바라보았다.주영숙은 얌전히 담요를 들어 다리에 덮었다.“설아, 할미 다 준비됐어.”하설도 외투를 입었다.하설은 주영숙을 밀고 병동 1층으로 내려갔다. 잔디밭과 외래동을 지나 요양동 입구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유준의 병실 벽은 한쪽이 통유리였다. 밖에서도 안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할머니와 손녀 두 사람은 유리 밖에 섰다.주영숙은 유리 너머로 창백하게 누워 있는 유준을 보았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하설은 조용히 주치의를 찾아가 유준의 최근 상태를 물었다.주영숙은 혼자 입을 틀어막고 손자를 바라보다가, 결국 소리 없이 흐느꼈다.“이 죽은 사람, 너희 집 사람이야?”뜬금없는 말이 들렸다.주영숙은 방금 넣은 심장 스텐트가 빠질 만큼 화가 치밀었다.“그쪽은 누구야? 말을 왜 그렇게 못되게 해! 우리 동네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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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윤재가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이마에는 땀이 가득했다.그런데 반원주는 태연하게 사과를 베어 물고 있었다.윤재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하설 앞으로 다가왔다.“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어르신 검사 때문에 모시고 왔는데, 제가 물 한 잔 떠오는 사이에 사라지셨습니다.”하설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마침 제가 봤을 뿐이에요. 그래도 이렇게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하시면 더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아요. 요즘 길에 차도 많아서 위험하잖아요.”윤재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하설의 말이 맞다고 했다.몸을 돌려 반원주를 데려가려 했다.그런데 반원주가 병상 머리맡을 붙잡고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안 가! 집에 가면 나를 깜깜한 방에 가둬. 쇠사슬로 묶고 밥도 안 주고 때려.”하설은 놀라 윤재를 바라보았다.주영숙도 마찬가지였다.윤재는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기분이었다.“저희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하설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았다.알츠하이머가 사람을 이렇게까지 허튼소리까지 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하설은 웃으며 다가가 반원주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할머니, 이렇게 고운 피부에 좋은 옷 입으신 분을 누가 괴롭혀요? 이렇게 밖에 오래 계셔서 집에서 다들 걱정하고 계세요.”반원주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주영숙을 가리켰다.“저 사람은 왜 여기 있어?”주영숙이 헛웃음을 쳤다.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나하고 경쟁이라도 하려고? 그럼 여기 누워 봐.”그 말을 듣자마자 반원주가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가려 했다.윤재와 하설이 양쪽에서 팔을 잡아 말렸다.하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할머니, 저희 할머니는 아프셔서 병원에 계신 거예요. 저는 할머니를 돌보는 중이고요. 할머니는 몸이 멀쩡하시잖아요. 건강하신 분에게 병원은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에요.”반원주는 이상한 표정으로 하설과 주영숙을 번갈아 보았다.그러다 두 사람을 밀어내고,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영숙에게 내밀었다.“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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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하설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영숙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듯 말했다.“네. 그래도 윤채아 때문이에요. 윤채아가 지금 배 서방의 비서잖아요.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요.”주영숙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네가 그 애 싫어하는 거 나도 싫어. 그런데 일은 일이지. 만약 그 애가 자기 능력으로 배 서방의 비서가 된 거라면, 우리가 배 서방한테 그만두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잖니?”하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그게 왜 당연하지 않아요? 할머니, 배 서방은 제 남편이에요. 남이 아니라고요. 저는 배 서방에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어요. 제 남편을 낯선 사람과 마찬가지 기준으로 대하라고 하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이죠.”주영숙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말하지 않았다.하설은 자신이 고용한 요양보호사가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몇 가지를 당부한 뒤 나갈 준비를 했다.하지만 하설이 나가자마자 주영숙은 문교에게 전화를 걸었다.“배 서방, 할미가 퇴원했다. 오늘 저녁에 와서 같이 축하해 주면 안 되겠니? 우리 식구끼리 밥 먹은 지도 오래됐잖아.”문교는 잠깐 침묵하다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주영숙은 여전히 부부 사이에 밤을 넘기는 원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빨리 풀어야 했다.원래 간단한 일도.끌고 또 끌다 보면 복잡해지기 일쑤였다....빛담불꽃기획 사무실.하설은 야근 끝에 입찰서 초안을 완성했다.컴퓨터를 끄고 두 손으로 목뒤를 받친 채 좌우로 돌렸다. 관절에서 뻐근한 소리가 났다.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벌써 밤 9시였다.하설은 책상을 간단히 정리하고 노트북을 챙겨 아래로 내려갔다. 차를 몰아 구름바다 아파트단지로 돌아왔다.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요양보호사 장현영이 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르신 기분이 안 좋으세요. 저녁도 한 숟가락도 안 드셨어요.”하설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어요. 시간이 늦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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