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Chapter 91 - Chapter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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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1

“언니…! 나 드디어 첫 일자리 구했어! 알바!”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씩씩했다.그 명랑함이 되려 서글퍼서, 유정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어디? 도대체 어디로 구한 거야?”“아파트 근처에 새로 생긴 브런치 레스토랑인데, 주방 알바. 매일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 조건으로 한 달에 400 주기로 했어. 원래 알바는 시급제잖아? 근데 사장님이 내 조리 자격증 보더니 일단 3개월만 계약으로 근무해 달라고 붙잡더라고.”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동생의 덤덤한 설명에, 유정은 실소가 섞인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결혼한다고 신부 수업으로 배웠던 스위스 쿠킹스쿨 디플로마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어쨌든 축하해.”“응. 당장 있는 남은 돈 까먹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야.”“……집에서 들고 나온 돈은 얼마나 남았어?”숨을 죽인 채 묻는 유정의 질문에 유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이내 수화기 너머로 작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처음 가지고 나온 명품이랑 보석 전부 처분한 돈 1억에서, 지난 1년동안 2천 썼고. 지금 타고 다니는 차, 그거 중고 시세 확인해 보니까 한 2천 정도 나오더라고. 그럼 지금 총 재산이 1억인데 이제 살 집도 알아봐야 하고, 이것저것 들어갈 돈이 많아서 턱도 없네.”“집은 걱정하지 마, 내가 구해 줄 테니까. 내 세이빙(Saving) 자금으로 전세 얻어두면 나도 돈 잃는 거 없고 깔끔해. 그리고 엄마가 네 대학 등록금은 내주기로 나랑 이미 합의 끝냈으니까 돈 쓸 생각 하지 말고.”“……고마워, 언니. 염치없지만 이번엔 그냥 받을게.”자존심 강하던 유진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유정은 되려 속이 상해 목소리를 높였다.“가족끼리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네 아빠가 진짜 이상한 거지. 어떻게 새 마누라 가족밖에 모르니? 그런 아빠 말 곧이곧대로 듣고 류 회장 같은 바람둥이한테 팔려 갈 뻔했다고 생각하면…… 야, 난 지금도 자다가 피가 거꾸로 솟아.”“됐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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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2

지독한 편두통이 뇌를 찌르는 것 같았다.에구치는 이마를 짚은 채 스마트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퍼렇게 빛나는 화면 위로 박힌 유정의 글자들이 잔인하게 시야를 파고들었다.거친 입술 사이로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관자놀이를 부서질 듯 세게 문지르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평생을 온실 속 화초처럼 고결하게,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여자였다.분명 숨 막히는 현실을 마주한다면,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제 발로 원래의 화려한 세계로 도망칠 줄 알았다.아니, 도망치기를 바랐다.하지만 기어이 그녀는 마지막까지 오고야 말았다.자신과의 그 찰나 같았던 하룻밤.그 짐승과도 같았던 실수 하나로 인해, 그녀는 가문도 배경도 모든 것을 잃었다.그저 껍데기를 남은 유진을 마주할 때마다.에구치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 지는 것처럼 아려왔다.죄책감이 뒤섞인 자신의 뜨거운 감정이 그의 목을 졸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매 순간 미친 듯이 흔들렸다.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자신의 눈앞에 있는 유진을 당장이라도 자신의 침대에 짓누르고 안고 싶었다.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어서.매일 밤 터질 것 같은 통증을 쥐어짜며 잠을 설쳤다.하지만 다시는 실수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그녀를 원래 있어야 할 그 고결한 자리로 돌려보내려면.지금 자신의 안에 꿈틀대는 이 더러운 욕망을 절대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됐다.그리고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다시 한번 더 이성을 잃고 그녀를 안게 된다면.다시는 자신의 감정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다시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자신을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할 것을 알았다.*유진은 캐리어의 지퍼를 굳게 닫았다.마침내 마지막 짐을 쌌다.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에구치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어색하고 불편했던 이 좁은 방도 이젠 끝이었다.후회는 없었다.가문을 버린 것도, 류에게서 도망친 것도 전부 자신이 자초한 결과였으니까.시계를 확인하니 이미 새벽 1시를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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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3

“미치도록… 후회해… 네가 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될 줄 알았다면……”에구치의 그 피 맺힌 고백이 유진의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죄책감으로 짓물러 터진 그의 음성이 폐부 깊숙이 박혀 아프게 찔러왔다.눈물이 가득 차 흐려진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에구치는 더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아니, 정확히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없는 삶은 지옥과 다름없음을.그녀를 처음 만나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이미 이 가녀린 여자에게 자신의 영혼이 저당 잡혔음을 너무도 뼈저리게 알게 됐다.에구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장미빛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읍……!”유진이 뱉어내는 떨리는 숨결 전부를 거칠게 장악해 들어갔다.완벽하게 밀착된 서로의 입술 안에서 은밀하게 뒤엉키는 혀의 마찰음이 어두운 거실의 정적을 사정없이 깼다.그리고 그녀를 터질듯 움켜쥔 그의 거친 손길에도 단 한 뼘의 틈새도, 자비도 없었다.마치 한순간이라도 손을 놓으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신기루를 붙잡은 사람처럼.그는 유진을 자신의 단단한 품 안에 가둔 채, 너무도 간절하게 그리고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사랑했다.사정없이 쏟아지는 그의 거친 손길과 숨조차 쉴 수 없는 진한 키스.유진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술에 취해 기억조차 희미했던 9개월 전 그 첫날밤과는 완전히 달랐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너무도 맨정신이었다.그리고 그의 거침없는 손길에 의해 유진이 걸치고 있던 후드티와 속옷이 한꺼풀씩 처참하게 벗겨져 나갔다.어둠 속에서 드러난 유진의 희고 매끄러운 나신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이윽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은밀한 체온이 그녀의 몸 안으로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었다.둘은 엉망으로 얽힌 실타래처럼 차가운 거실 바닥 위에서 다시 한번 거칠게 뭉개지며 하나가 되었다.에구치는 완전히 미쳐버린 제 자신을 더는 통제할 수가 없었다.이 대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해도.내일 당장 파멸한다고 해도.상관없을 만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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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4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마지막 순간,멀어지려던 유진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에구치의 거친 손길이었다.가문도, 배경도, 화려한 명예도 전부 내던진 채 껍데기만 남은 서유진.모든 것을 잃고 텅 비어 시릴 정도로 쓰라렸던 그녀의 가슴을 채운 것은,자신의 육체를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매달리는 이 남자의 뜨거운 품이었다.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탐하는 그 남자에게서 난생처음으로 온전한 위로를 받았다.어쩌면 그저 한낱 짐승 같은 욕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어쩌면 자신의 비겁한 도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제 발로 걸어 들어온 얄팍한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자조 속에서도.유진은 기대조차 하지도 않았던 구원을 그에게서 받았다.류에게 억압된 여자로서의 부족함 때문이었을까.그가 자신을 온전한 여자로 느끼게 해주자 그녀의 영혼이 흔들렸다.그리고 그런 그에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끌렸다.자신의 추악함과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거짓의 장막일뿐이었던 변명이.어느새 진실이 되어 그녀를 속였다.마치 세상 모든 왕관을 다 내던지고 오직 이 남자만을 바라보는 순애보인 양.그녀는 진짜로 매일매일 시시각각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서.그의 온전한 마음을 쥐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그렇게 에구치는 그녀의 찬란한 첫 남자가 되었고 지독한 첫 사랑이 되었다.*서리가 낀 어느 날 새벽 6시.겨울 한기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남자의 손이 침대 위 유진의 가녀린 살결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유진은 밀려드는 잠결 속에서도 그의 차가운 손을 제 몸 깊숙이 당겨 더욱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오늘 많이 추웠죠?”잠이 덜 깨 가라앉은 유진의 속삭임에 에구치가 낮게 읊조렸다.“아니. 생각보다 괜찮았어.”매일 새벽.수산시장의 살을 에는 얼음 배달 아르바이트를 힘들게 끝내고 돌아온 그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있었다.애써 자신의 고단함과 힘든 내색을 그녀에게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그런 그의 붉어진 손마디를 볼 때마다 유진은 가슴이 아리도록 안쓰러웠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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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5

고작 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친어머니에게 에구치는 쓰레기처럼 버려졌다.그리고 어머니라는 거대한 존재가 남긴 낙인이 채 아물기도 전인 열한 살.유일한 버팀목이라 믿었던 친아버지마저 그를 차갑게 길바닥으로 밀어냈다.그 이후로 소년의 세계는 고아원이 전부였다.그런 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자식이 없던 양부모의 가문으로 입양되며.드디어 외로움이라는 지옥이 끝나는 줄 알았다.하지만 입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에게 기적처럼 친아들이 태어났다.그리고 양부모에게 쓰임이 다한 에구치는 낡은 장난감을 폐기하듯 곧바로 파양돼, 또다시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내던져졌다.그렇게 열일곱살이 되었다.처절한 고독에 몸부림치던 그에게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에 살고 있다던 친척들이 뒤늦게 찾아왔다.이제라도 핏줄의 정을 나누며 함께 살자는 구원.그 손길이 눈물겹게 따뜻한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그해 겨울은 세상이 소년에게 선사한 가장 잔인한 배신이었다.피비린내 나는 수술실.엄마의 친척이라는 인간들이 원했던 것은 오직 그의 건강한 신장뿐이었다.겨우 6개월 만에 장기 적출 테이블 위에 눕혀진 소년은 신장을 빼앗겼고,거액의 수술비와 보험금마저 탈탈 털린 채, 또다시 차가운 문밖으로 버려졌다.또 다시 혼자가 됐다.소년은 흐르는 피눈물로 심장에 칼을 새겼다.다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겠다고.내 인생에 그 누구도 사랑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을 거라고.그런데 그 척박하고 메마른 세계 위로.서유진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걸어 들어왔다.미칠 것처럼 정말 죽을 것 같이 심장이 짓겨지듯 아파왔다.침대 위 낡은 이불 속에 유진의 새하얀 나신을 가두고 미친 듯한 수컷의 포효를 내질렀다.너무도 사랑했다.자신의 보잘것 없는 목숨을 다 갈아 넣어도 모자랄 만큼.너무 많이 사랑해서 도리어 사랑한다는 그 평범한 말조차 입 밖으로 감히 꺼낼 수가 없었다.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린 이 거대한 사랑을 꺼내어 보여주는 순간.신의 저주처럼 그녀가 연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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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6

끼이익.문이 열렸다.어둠 속에서, 에구치의 실루엣이 달빛을 등지고 유진을 잠식했다.침대 위, 얕은 잠에 빠져 있던 유진이 인기척에 눈을 떴다.그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에구치는 짐승처럼 그녀 위를 덮쳤다."선배……?"유진의 목소리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그의 입술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집어삼켰다.그건 키스라기보다는 마치 굶주린 포식자가 먹잇감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듯 집요했다.에구치의 뜨겁고 묵직한 몸이 유진을 침대 시트 아래로 눌러 뭉갰다.그의 거친 손길이 유진의 파자마 바지와 속옷을 한숨에 찢듯이 벗겨버렸다.하얀 가슴 위로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새겨졌다.그것은 소유라는 이름의 흉터였다."하아, 유진……."에구치의 낮고 굵은 신음이 유진의 귓가에서 터졌다.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손이 유진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은밀한 속살을 가차 없이 갈랐다.유진의 몸이 찌릿한 전율로 크게 휘었다.그는 유진을 거칠게 뒤집어 눕혔다.유진의 가녀린 어깨가 그의 묵중한 체구 아래에서 나비의 날개짓처럼 파닥거렸다.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모든 갈증을 투영하듯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사정없이 꿰뚫었다."아……! 윽, 으, 선배……."유진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은 아픔과 쾌감이 뒤섞인 비명이었다.그는 그녀의 고개를 강제로 돌려, 혀를 얽어매며 깊숙이 빨아올렸다.그의 키스는 그녀의 뇌를 마비시켰고, 참았던 신음이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거칠어지는 그의 호흡, 짐승 같은 포효.그리고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질척한 파열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그는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갉아먹을 기세로 그녀를 장악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짧은 포효와 함께 그의 근육질 몸이 크게 요동치다 멈췄다.그는 유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헐떡이는 가쁜 숨과 젖은 이마를 그녀의 뺨에 기댔다.에구치의 뜨거운 체온이 유진의 피부를 타고 흘러들었다.유진은 그의 손에 가늘게 떨리는 손을 얹고 깍지를 꼈다.1년이라는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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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7

갑자기 들어온 문자 알람.좁은 거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유정의 뺨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놓는 유정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유진아…… 너, 혹시 소식 들었어? 엄마가 방금 문자했는데.”“무슨 소문?”유정의 놀란 표정에도 유진은 전처럼 화들짝 놀라지 않았다.모든 화려함과 가족들의 협박을 내려놓은 지 1년.이제 웬만한 자극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어진 유정의 말은 유진의 손을 그대로 굳게 만들었다.“KL그룹…… 지금 부도설 돌던데. 근데 횡령 사건에 연루돼서 서 회장님 사법 처리될 거라는데.”“……알아.”유진은 나직하게 한숨을 삼켰다.“아빠, 며칠 전에 나 찾아왔었어.”“뭐?! 서 회장님이 여길 왔었다고? 미쳤네, 진짜 미쳤어! 지가 너한테 뭐 더 뜯어 먹을 게 남았다고 감히 여길 기어들어 와?”유정이 테이블을 탁 치며 경악으로 목소리를 높였다.유진은 쓴 약을 삼키듯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이모한테 도와달라고, 중간에서 다리 좀 놔달라고.”“미쳤네. 어떻게 1년 6개월 만에 말아 먹을 수가 있냐고. 소문으로는 정실장 그 여자가 재산이랑 회사 맘대로 쥐락펴락 했다는데. 너한테 충성했던 인사들 다 자르고”“그 분들은 창업 때부터 있던 분들이라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면 안되는데.”유진의 황금빛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그때 유정은 목이 타는 듯 물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한층 더 낮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건 우리 엄마가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너 16살 때 기억나? 너 렉스 그룹 류 회장이랑 너 정식으로 교제 시작하기도 전에……”“…….”“그때 이미 KL은 이미 부도나서 공중분해 될 운명이었대. 그걸 류 요스케가 전면에서 다 막아줬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KL의 모든 재무 흐름을 렉스 그룹에서 직접 틀어쥐고 관리해 왔대.”유진의 숨이 턱 막혔다.투명한 유리잔을 쥔 그녀의 손가락 끝에 핏기가 하얗게 가셨다.“류 회장이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했었어… 그래서 우리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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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8

“임신 12주네요”“네?”산부인과 진료실의 기계적인 적막을 깨고 흘러나온 담당 의사의 덤덤한 진단.그 한마디의 파괴력에 유진과 유정은 동시에 허파의 숨이 멎은 듯 굳어버린 채 의사를 쳐다봤다.유진이 핏기가 완전히 가셔 하얗게 질린 입술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반박했다.“저… 피임 했는데요”“뭘로요?”“경구피임약이요. 그리고 생리도 했고…”“생리는 아마… 부정출혈이었을 확률이 높고요. 경구 피임이 가장 안전한 피임 방법이긴 하지만 100%는 아니에요. 여기 작은 점 보이시죠? 아기 심장이에요”세차게 요동치는 작은 빛의 파편.유진은 초음파 화면 속에서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뛰고 있는 기이한 생명의 흔적을 멍하니 응시했다.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다 못해 산산조각이 나는 충격 속에서도,유진은 이내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의사를 똑바로 직시했다.“저 중절 수술을 받고 싶습니다”“유진!”유정이 기겁하며 유진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지만,유진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단 한 조각의 흔들림도 없었다.의사는 이내 초음파 사진을 프린트해서 유진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너…… 진짜 미쳤어? 제정신이야?!”병원 복도를 빠져나오자마자 유정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지금 아이 가지면, 선배 다음 학기에 복학 못 해. 벌써 한 학기 휴학 했는데. 그럼 졸업도 인턴도 다 엉망이 돼. 아파트 청약도 있는데. 아이는 나중에 다시 가지면 돼. 나 아직 고작 22살이야. 다음에 다시 가질 수 있어.”“너… 고작 그 돈 때문에, 요스케와 네 아이를 네 손으로 죽이겠다고? 당장 쓸 생활비가 부족해서 그래? 아니면 두 사람 대학 등록금 때문이야? 내가 몇 번을 말해, 그깟 돈 몇 푼 내가 다 대줄 테니까 제발 그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싫어. 나 언니 도움 더 이상 안 받아… 허구한 날 남들에게 피해주고, 민폐 끼쳐가며 비참하게 빌어먹고 사는 거… 나 진짜 지긋지긋해.”“내가 왜 남이야?! 내가 네 언니잖아!”“정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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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9

유정의 당부에도 유진은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유진아… 딱 한번만 부탁할게… 임 전무가 네 사람이었잖아. 한번만 네가 설득해서 회사로 돌아오게만 해 줘. 그 친구가 세팅했던 사업들 인수 인계가 제대로 안돼서 상황 파악이 안돼. 우리가 회수해야 할 금액이 상당한데… 이것만 받으면 이번 어음은 넘길 수 있거든”수화기 너머로 피를 말리듯 매달리는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다음 날 오후.유진은 여전히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몸살 기운을 있는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아버지와 임 전무를 만나기로 약속된 청담동 KL 호텔로 향했다.최고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 스위트룸.육중하고 거대한 방문 앞에 선 유진은 땀이 배어 축축해진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스르륵ㅡ.정적을 깨고 문이 열렸다.하지만 그 거대한 스위트룸의 조명 아래 서 있는 사람은.유진이 예상했던 아버지도, 가문의 오랜 심복이었던 임 전무도 아니었다.“오랜…… 만이네, 서유진.”바람을 집어삼킨 듯 서늘한 음성.바로 류였다.새하얀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가볍게 풀어 내린 노타이 차림에.몸에 칼같이 들어맞는 네이비 수트를 걸친 그가 서 있었다.2년 전보다 조금 더 날렵해지고 서늘할 정도로 샤프해진 압도적인 모습.그리고 그의 깊은 눈동자를 다시 정면으로 마주보자.유진의 심장은 어김없이 쿵 소리를 내며 저 깊은 지옥 바닥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낙태 수술 이후, 앓고 있는 원인 모를 현기증과 호흡 곤란에 다시금 숨이 가쁘고 답답해져 왔다.“네.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여기는 어떻게?”“네 아버지 서 회장과 중요한 재무 회계 관련 이슈로 정리할 게 있어서 만나기로 했는데.”류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적인 실소를 터트렸다.“하아…… 서 회장 대신 껍데기뿐인 네가 또 이 자리에 기어 나온 걸 보니. 네 아버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나보네.”순간 유진은 목구멍으로 타고 올라오는 지독한 수치심과 창피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가문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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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00

“유진씨 음식 맛있다고 난리야… 여기 계속 나와 주면 안될 까?”“저도 그러고 싶은데… 방학 끝나면 학기 시작 해서요. 대신 주말에는 나올 수 있어요”“그럼 그렇게라도 와 줘요. 혹시 다른데서 스카우트 와도 가면 안돼. 내가 제대로 페이 줄 테니까”“네”“이거… 이번 달 월급. 다음에도 부탁한다는 의미로 조금 더 넣었어”“감사합니다”유진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브런치 카페의 여주인에게 감사인사를 드렸다.“언니! 나 오늘 월급 탔는데… 나와라”유진은 통화를 하며 조잘조잘거렸다.그리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봤다.일몰의 마지막 햇살에 유진의 황금빛 눈동자가 눈부시게 반짝였다.그녀는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브런치 카페 건너편.류의 얼굴은 너무도 어둡게 변했다.[모든 것을 다 잃고도 뭐가 그렇게 행복한 거니? 이제는 나 때문에 아무 것도 포기할 필요도 통제 당할 일도 없으니까. 이제야 마음이 가볍고 후련하니? 역시 그때 내가 널 보내 줬어야 했던 게 맞았던 거지? 너에게 난…… 아무 필요도 없는 남자인 거니?]그의 시선에는 절망이 가득했다.그때 그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떴다.‘서유진씨 첫 급여 전달 완료했습니다’*지독하리만큼 아프고 시렸던 그날의 일몰.그 기억이 깨진 황금빛 파편이 되어 류의 가슴 깊은 곳을 여전히 찔러대고 있었다.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오직 가혹한 정적만이 무겁게 감도는 VIP 병실.의식을 잃은 유진의 얼굴만을 아프게 바라보며 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단 한 순간도 포기라는 단어를 배워본 적 없는 완벽한 제왕.그가 엉망으로 부서진 채 있었다.[지난 2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참고 또 참았는데. 널 놓으려고 놔주려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알아? 단 한번도 포기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던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게 하필 너였는데…… 그게 쉬웠을 것 같냐고……]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안색.브런치 카페 앞에서 반짝이던 그 생기는 온데간데없이.금방이라도 모래성처럼 부서져 버릴 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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