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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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1

스위스 제네바의 명문 기숙 고등학교 졸업식장.예상했던 대로.유진은 홀로 주위의 찬란하고 소란스러운 축제를 유령처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그리고 당연히 그녀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친부 서 회장의 모습은 졸업식장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서 회장은 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순간에 참석하지 않았다.그리고 직접 보러 오는 수고를 들이는 대신.유진의 심장에 비수보다 날카롭게 박힐 딱 한 통의 이메일만을 던져주었다.[아무래도 한국이나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게 나을 듯 싶어서 네 하버드 입학은 내가 취소했다. 계속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지내다가 바쁜 류 회장 눈밖에 나면 어떻게 하니? 일본과 한국에도 좋은 대학들이 널렸으니 그쪽으로 진학하도록 해라.]아버지가 보낸 그 잔인한 메일 한 조각에, 유진의 온 영혼과 자존심을 잔인하게 부서졌다.10살때부터 지금껏 혼자 이 타국에 버려졌지만 열심히 살았다.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가문의 인질이라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삶의 유일한 해방구이자.그 한심한 자신을 지탱해준 유일한 꿈이자 목표였던 하버드 진학마저.류 요스케의 충실한 인질로 박제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의 손에 무참하게 꺾여 부서져 버렸다.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동기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플래시 세례.축제 분위기로 한껏 들뜬 학부모들의 소음.영혼이 나간 유령처럼 고독하게, 유진은 가장 마지막으로 어두워진 졸업식장 강당을 빠져나왔다.바로 그 순간.누군가의 억센 손아귀가 허공을 가르고, 유진의 가녀린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눈앞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넋이 나간 거야?”이런 사소한 졸업식 같은 행사에.절대 나타날 리 없는 오만한 남자가 자신을 붙잡아 세웠다.*기상 악화로 인한 난기류.류의 전용기는 예상보다 훨씬 늦게 공항에 착륙했다.그는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경호원들을 제치고, 자신의 람보르기니를 미친 듯이 거칠게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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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2

류의 거친 걸음에 이끌려 마침내 당도한 곳은 아주 작고 아담한 차이니스 레스토랑이었다.삼엄한 경호원들이 문 앞을 지키는 정적 속에서.류가 메뉴판을 덮으며 나직하게 말했다.“어디서 들었는데… 한국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 무조건 가족끼리 짜장면이라는 걸 먹으러 간다더군. 근데 안타깝게도 여기 근처에는 한국 짜장면을 파는 곳은 없어서 대신 중국 음식이라도 먹으려고.”그는 그 작은 차이니스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조리할 수 있는 모든 코스 메뉴를 단 한 장도 빠짐없이 전부 주문했다.둥근 테이블 위로 쉴 새 없이 접시들이 깔리기 시작했다.“이 많은 음식을…… 우리 둘이 다 어떻게 먹어요?”“이 정도는 시켜야 여기 전체 대관한 비용이 나오지”“아……”“다 먹으라고 안할테니까 입맛에 맞는 것만 먹어.”류가 그녀의 앞에 음식들을 밀어주었다.유진은 그저 앞에 놓인 화려한 요리들을 기계적으로 입에 넣었다.젓가락을 쥔 그녀의 손끝에 생기가 없었다.“네 사촌 언니, 오유정은 오늘 왜 안 보이지?”“이모부가 오셔서… 언니 파리 아파트 계약 때문에 급하게 먼저 갔어요. 졸업식 끝나고 대신 제가 곧바로 파리로 넘어가기로 했는데……”“그럼 보스턴은 거기서 곧바로 갈 거야? 아님 한국 들렀다 가?”그때 음식을 입으로 나르던 유진의 가녀린 손길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유진은 이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단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한 채.목구멍으로 도무지 넘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난폭하게 입안 가득 꾸역꾸역 쑤셔 넣기만 했다.질식이라도 할 것 같이 위태로웠다.순간 류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때 씹히지도 않는 음식을 억지로 삼켜내며, 간신히 무너진 마음을 정리한 유진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그리고 자신의 꿈이 찢겨 나간 슬픔을 감추기 위해, 지독할 정도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한국 가요. 보스턴 말고. 갑자기 아빠도 너무 보고 싶고 한국이 그리워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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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3

“저…… 파리에서 딱 하루만, 정말 딱 하루만 더 있다가 한국행 비행기 탈게요. 아빠 몰래…… 진짜 대단히 죄송한데…… 단 하루만 시간을 벌어 주시면 정말 안 될까요, 비서님?”스위스 제네바 기차역 대합실.핏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가녀린 손가락 끝을 쥐어뜯으며, 유진이 눈물 어린 얼굴로 수행비서에게 간곡히 사정했다.지금 온 힘을 다해 바라는 그 단 하루라는 유예의 시간은.어쩌면 온전한 서유진으로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화려한 새장 안에서 들어가기 전, 간절하게 부려보는 마지막 발악이자 흐느낌.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는 바로 그 순간부터.자신에게는 그 어떤 사소한 자유도, 어떤 선택의 권리도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자신의 숨통을 조여 올… 아버지 서 회장의 매서운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될 한국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단 하루만이라도, 누구에게도 침해당하지 않는 온전한 해방을 누리고 싶었다.차가운 기차역사 조명 아래.눈물을 삼키는 유진의 너무도 간절하고 서글픈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하자.그녀가 어린 꼬마였을 때부터 9년을 모셔왔던 수행비서의 단정했던 안면이 무겁게 어두워졌다.지독할 정도로 불쌍했다.상류층 가문의 탐욕스런 이권 싸움 속에서도, 언제나 예쁘게 말 잘 듣는 세상 최고의 모범생으로만 살았던 그녀.그 아이가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정략의 현실이 가슴 아프도록 처참했다.“아가씨… 그럼 그동안, 파리에 계시는 오유정 아가씨의 숙소에 함께 계실 건가요?”유진은 잠시 머뭇거렸다.“……내일 오전 11시에 샤를 드 골 공항 에어 프랑스 체크인 카운터 정문 앞에서 뵐게요. 비서님도 그동안 달콤한 휴가 보내신다고 생각하세요.”수행비서는 여전히 불안한 듯, 선뜻 유진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채 손만 떨었다.“그럼…… 제 개인 폰에 당장 실시간 GPS 위치 추적 앱 깔아서, 비서님 폰이랑 24시간 실시간 위치 완벽하게 공유해 드릴게요. 언제든 제가 어디 있는 지 아시도록.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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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4

프랑스 파리의 리옹 기차역 플랫폼 한복판.기차에서 내려 역사의 밀려드는 인파 속에.자신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소유욕의 갈증을 숨긴 채.우뚝 멈춰 선 류는 애써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어떻게 할래? 오유정한테 데려다 줘? 아님 오늘 밤은 그냥 나랑 있을래?”사실 유정에게 갈 생각이 아니었다.그냥 혼자 있고 싶었을 뿐이다.그저 단 하루만이라도 가문의 인형이 아니라, 혼자 숨쉬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그런데 그가 갑자기 동선 확인을 하자, 유진의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미세하게 망설였다.류는 그녀의 표정 위로 스쳐 지나간 그 짧은 찰나의 망설임과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그는 지체 없이 유진의 가녀린 손목을 움켜쥐듯 틀어잡았다.거의 반 강제적인 힘으로.그녀를 플랫폼 바깥에 대기 중인 자신의 차량 조수석 내부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이내, 차 문이 둔탁하게 탁 닫혔다.[지금 너 혼자 있고 싶은 거 알겠는데…… 미안해. 마지막으로 너와 하루는 온전히 함께 보내고 싶어. 아무 것도 안해도 좋고. 바쁘게 지내고 싶다고 해도 좋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네 곁에서 하루만……]유진은 묵직한 차량 가죽 시트에 갇힌 채, 언제나 그러했듯, 그 어떤 반발이나 저항의 몸짓도 취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3년 전 뉴욕에서 처음 그에게 약속했던 계약대로.원치 않는 일방적인 포획이었지만, 입술을 짓씹을 뿐 아무런 거부의 말도 하지 않았다.이윽고 그의 차량이 파리의 심장부에 도착했다.샹그릴라(Shangri-La) 호텔, 복층 테라스 스위트룸.객실 문이 열리고, 류는 유진을 아늑한 침실 내부 안쪽 소파에 안전하게 데려다 놓았다.그리고 그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유진은 스위트 룸에 혼자 남아, 잠시 에펠탑이 보이는 밖의 경치를 멍하니 바라봤다.띵동.한참 동안 정적 속에 파묻혀 있던 바로 그 순간, 문 밖의 도어벨이 날카롭게 정적을 깨뜨렸다.스위트룸 방문이 열리자마자.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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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5

“미안한데, 너무 급하게 일정을 잡아서… 근데 하필 파리 전역에 축제가 겹쳤는지 이 호텔이 오늘 풀북이라네. 어쩔 수 없이 같이 방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불편하면 내가 지금이라도 다른 호텔로 옮기고.”류는 유진의 맑은 눈을 응시하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뱉어냈다.물론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테라스 위로 펼쳐진 에펠탑의 환상적인 전망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에게 하찮은 전망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그저 자신의 시야에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운 물리적인 공간에서 그녀를 가두고 소유하고 싶었다.오늘 하루만큼은……그래서 그는 기꺼이 구차한 변명과 거짓을 꺼냈다.그리고 평소와 달리 호텔의 가장 큰 프레지덴셜 스위트 대신 일부러 두 사람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좁은 복층 스위트를 예약했다.“아…… 그럼 제가 2층 쓸게요”다행히 유진은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류는 속으로 타들어 가던 안도의 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아니. 내가 2층에 있는 게 편해. 일본과 시차 때문에 밤에 일도 좀 해야하고, 계속 연락이며 외출 할 일도 생길 수 있으니까.”“네. 그럼 편한대로 하세요.”“그럼 나부터 얼른 씻고 2층으로 올라가 줄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있어. 침대 위에 있는 쇼핑백에 이것저것 넣어뒀으니까 필요하면 쓰고.”“네.”창밖의 파리 전경은 짙고 푸른 잉크를 사정없이 풀어놓은 듯, 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류는 자신이 조금 전 뱉어놓았던 말 그대로.정확히 30분 만에, 2층 계단 너머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져 주었다.그의 실루엣이 계단 위로 사라진 뒤에도.유진은 차가운 야외 테라스 소파 자리에 홀로 앉아있었다.그저 밤하늘 아래 주황빛으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에펠탑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마침내 2층 공간에서도 그 어떤 기척도 없는 완벽한 정적이 내려앉았다.그제야 유진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겨, 1층 침실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넓고 단정한 킹사이즈 침대 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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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6

다음 날 아침 정각 9시.파리의 투명하고 맑은 햇살이 침대 시트 위로 하얗게 부서져 쏟아져 내렸다.유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느릿하게 두 눈을 떴다.지난 몇 달간, 스위스 학교 기숙사에서 잠들지 못했던 밤들과는 다르게.단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깊고 아늑한 평온한 밤이었다.오랜만에 맛보는 개운하고 달콤한 단잠 덕분인지, 머릿속이 투명하게 맑았다.그래서인지 어제와는 다르게, 파리의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기분 좋게 하얀 이불 속에서 막 상체를 일으키려던 바로 그 찰나.정확한 타이밍에, 최고급 조식 트레이가 방 안으로 배달되어 들어왔다.동시에 복층 계단의 따라, 류가 느릿하게 걸어 내려왔다.그는 벌써 완벽한 수트 차림이었다.지난 밤 그녀의 숨소리에 핏줄이 터지도록 밤을 지새웠을 거라곤 상상조차 안되는 모습.그때 유진이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언제 일어나셨어요?”“한참 전.”여전히 엉망으로 헝크러지려는 파란의 불씨.그는 일부러 더 건조하게 말했다.그리고 특유의 오만한 장난기를 장착한 채,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네가 전에 말한대로, 진짜 9시 전에는 못 일어나던데. 내가 너 깨우려고 얼마나 계단을 쿵쾅거리며 걸어다녔는지 알아? 근데도 완전 한 밤 중……”순간 유진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꼬맹이 하기 싫다며? 근데 무슨 아기도 아니고. 이렇게 남자 앞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긴장감 하나도 없이. 그래서…… 지금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냐?”순간, 유진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타들어 갔다.그때 류의 뜨거운 시선이 자신의 파자마 위로 노골적이면서도 아주 느릿하게, 살점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렸다.그가 예전의 그로 돌아왔다.자신을 놀려 먹으려는 오만한 남자로.부끄러움과 당황함에 뺨부터 목덜미까지 장미색으로 붉어진 하얀 얼굴.순백색의 코튼 파자마 너머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녀린 실루엣.그리고 지난 밤의 달빛 대신.아침 햇살 아래, 무방비하게 벌어진 탐스런 붉은 입술이 지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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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7

아열대의 습한 밤바람이 밀려드는 제주 프라이빗 빌라의 야외 정원. 프랑스 파리의 샹그릴라에서 헤어진 지 정확히 두 달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3년간 이어져 온 두 달의 한번이라는 그의 일정대로. 류는 다시 그녀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언제나 사전 연락도 없이 나타나던 그가, 이번만큼은 서 회장을 통해 사전 연락을 취하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래서 매일 2시간도 자지 못할 만큼 수능 준비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유진은 어쩔 수 없이 류를 만나러 KL 제주 리조트까지 날아왔다. 그녀의 세상은 철저히 그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었다. 겨우 열 여섯에,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워 난생 처음 감행한 무모한 치기. 그렇게 발목 잡힌 3년 동안. 유진은 사춘기의 사소한 반항도, 어떤 사생활도, 미래조차도 꿈꾸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열 아홉, 그녀는 원하든 원치 않든. 오직 이 남자가 쥐고 흔드는 거대한 타임라인에 맞춰 그녀의 모든 일상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결정됐다.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휘둘리는 자신의 인질 인생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현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언제나처럼 그의 앞에 인형처럼 얌전히 마주 앉았다. 새하얀 목덜미 위로 커다란 리본이 우아하게 묶인 리본 블라우스에, 우아한 각선미가 돋보이는 미니 스커트 복장. 낯선 한국에서 마주하는 그녀의 미색은. 스위스에서 보아왔던 순수한 느낌과는 지독하리만치 결이 달랐다. 가문의 압박 탓인지, 뭔가 더 어색해지고 딱딱하게 굳어진 분위기.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파괴적일 만큼 치명적이었다. “미국으로 대학 못 가게 되서 여전히 화 난 건 아니지?” 류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침묵을 깨뜨렸다. “괜찮아요. 물론 수능 공부를 갑자기 준비 하느라 시간이 좀 빠듯하기는 해서 원하시는 대학은 못 갈 수 있으니, 기대는 크게 하지 마세요.” “서 회장님은 너 천재라고… 걱정 안해도 된다고 큰 소리 치시던데?” “다행이네요. 아버지가 제 학교 성적에 만족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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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8

지독한 분노가 화마처럼 일었다.류는 나약한 자신을 완벽하게 지우듯, 더욱 더 독한 비수를 사정없이 내리꽂았다.“그래? 잘 됐네. 하기사 솔직히 네 친구들 중에 남친 있는 애들은 이미 다 했을 테고 이미 중학교 때 한 애들도 좀 있을 거고.”[오늘이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야. 못하겠다고… 싫다고 한 마디만 해.]“너도 중학교 때 남친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걱정 할 필요는 없어. 난 첫 경험에 그렇게 크게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거든. 아무튼 3년이나 만나고 그 생각을 전혀 안 했다면 솔직히 거짓말이지. 안 그래?”[내가 너에게 가지 못하게…… 최소한 내 의지를 지킬 수 있는 핑계와 최소한의 변명꺼리 정도는 나에게 달라고. 그럼 네가 원하는대로 널 놔 줄 테니까.]“아! 그리고 내가 사귀던 여자들은 이미 다 정리 했으니까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내가 아무리 바람둥이여도 동시에 두 명과 잠자리를 하는 건 별로 거든. 난 한 여자와 질릴 만큼 집중력 있게 즐기고 끝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너무나도 뻔뻔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지저분한 여자 관계를 정리했다는 사실을 잠자리 조율 조건처럼 내뱉었다.“그리고 피임 준비라면 내가 할 테니 네가 따로 준비 할 필요는 없어. 가족 계획은 내 상속 문제이니까, 내 쪽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너도 동의해야 할 거고. 뭐… 네가 임신을 원하지 않아 네 쪽에서도 준비하는 게 맘 편하다면 얼마든 해. 난 모성애도 없는 여자가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일단 오늘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준비하고 있어.”아무런 인간적인 감정도 애정도 없다는 듯, 그저 비즈니스 업무 서류를 처리하듯.정면에 앉은 열아홉의 정혼자를 향해, 첫날밤의 그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조건들을 낱낱이 나열해 내렸다.그렇게 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폭군이 되어, 유진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청혼으로 포장해 잔인하게 주었다.자신을 버리고 이제는 세상으로 날아가라고.마지막 선물을 주었다.하지만 유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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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9

3년의 정략 연애. 그리고 2주 후 결혼.하지만 도쿄에서 유진은 류에게 파혼을 선언했다.그리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유진은 급하게 평창동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부터 정리했다.류에게서 받은 선물들을 빼고 나니 생각보다 챙길 것도 없었다.간단하게 짐만 챙겨서 자신의 차에 실었다.쾅 하고 트렁크 문이 닫히고 유진은 자신의 저택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을 인형으로 박제해 가차 없이 짓누르던 ‘KL’이라는 이름의 잔인한 제국.지금 생애 처음, 타인이 짜놓은 삶이 아닌 진짜 삶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유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그리고 자신의 저택을 뒤로 하고 가속페달을 밟았다.*밤 12시 30분.도매시장 납품 아르바이트의 고단한 노동을 마쳤다.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자신의 임대 아파트의 문 앞으로 돌아왔다.그런데 문을 열자, 평소의 서늘하고 정적만 감돌던 집안 공기와는 전혀 달랐다.코끝을 따스하게 자극하는 구수한 밥 냄새가 주방 안쪽에서 은밀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에구치는 순간 잠시 문 앞에 머뭇거렸다.이내 집안의 불 켜진 주방으로 조심히 걸어 들어왔다.그 순간, 식탁 위로 따스한 뚝배기를 내려놓던 유진이 고개를 돌려 화사한 황금빛 미소를 피워내며 그를 다정하게 맞이했다.“오카에리.”에구치는 잠시 넋이 나갔다.그의 거친 손가락이 굳어 들어갔다.“너…… 뭐 야?”“저녁 먹었어요?”유진은 그의 날 선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조용히 접시 위의 반찬들을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내기 시작했다.에구치는 자신의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하는 그녀의 태평한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초조함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그리고 가슴이 조여왔다.그는 즉시 유진의 가녀린 하얀 팔목을 거친 손길로 붙잡아 강제로 그녀를 저지해 세웠다.“너 왜 여기 있냐고?”“밥부터 먹고 얘기하죠. 선배 언제 오는 줄 몰라서 벌써 밥만 4번을 데웠어요.”유진은 자신을 저지하는 그의 단단한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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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0

“뭐? 진짜… 파혼 했다고?”낮게 가라앉은 카페 안쪽 테이블.사촌 언니 오유정은 제 귀로 흘러든 단어의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한 채.완전히 얼이 빠진 멍한 표정으로 맞은편의 유진을 한참 동안이나 빤히 바라봤다.태어난 순간부터 평생을 KL 가문의 온실 속 화초처럼.단 한 번도 반항조차 해본 적 없던 유순한 모범생 서유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거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파멸적인 선언.“응.”“하아……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지? 그럼 평창동에서도 그렇고 완전 난리가 나 뒤집어질 텐데… 그래, 무서워하지 말고. 일단 우리 엄마랑 다 같이 상의부터 좀 해보자. 일은 터졌으니, 일단은 KL그룹을 어떻게 지킬 지가 우선이고.”“괜찮아. 나 KL그룹 포기할 거야.”유진의 포기 선언에 유정의 눈동자가 다시금 경악으로 확장되었다.“뭐? 서유진, 너 미쳤어?!”“다 포기하면 난…… 이제 KL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그럼 우리 아빠와 아빠의 다른 가족들에게 더는 위협이 아니니. 그럼 아빠도 날 완벽하게 풀어주실 거야. 그걸로 대가를 치른 셈 치려고.”“야! 네 건데 왜 그걸 포기해? 우리 엄마도 그건 절대 그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으실 거야. 우리 외가 기업을 우리와 상관도 없는 네 아빠 사생아 아들에게 줄 수는 없어.”유정이 상체를 바짝 들이밀며 윽박질렀다.하지만 유진은 오히려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미안해. 나 이제 내 생각만 하기로 했어. 다 가지려고 하면 다 잃게 될 테니까. 아직 내게는 아무 힘도 없으니까… 나 하나 지키기도 버거워.”순간 유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 난 너 요스케와 잠깐 썸 타다 결국 결혼 할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한번도 선 밟을 생각조차 못하는 얘가 선 밖으로 점프할 줄이야. 이렇게 크게 사고를 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더니. 내가 널 과소평가했다.”유진이 테이블 위로 유정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눈빛을 반짝였다.“응원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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