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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형수의 밤: Chapter 151 - Chapter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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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놓치는 스타일은 아니었잖아

건우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하나는 식탁 옆에 서 있었다. 편한 니트 차림에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고, 방금 물을 마시다 말았는지 컵 하나가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현관 쪽을 돌아보며 짧게 웃었다.“생각보다 늦었네.”그 말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문장이었는데, 건우는 이상하게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굴리던 수많은 숫자와 파일명들이 전부 다른 결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자료 속에 적혀 있던 ‘정리’라는 단어와, 지금 조용히 서 있는 하나의 모습이 같은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견디기 어려울 만큼 선명해졌다.하나는 컵을 내려놓으며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무슨 일 있었어?”건우는 대답하기 전에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일부러 동작을 천천히 했다. 너무 빨리 입을 열면,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흘러나올 것 같았다.“최준석 씨 만났어.”하나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컵을 놓는 동작은 끝났는데, 손이 곧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짧아서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지금의 건우는 그런 종류의 멈춤을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그래서?”하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묻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그 안쪽에 아주 얇은 긴장이 스며 있다는 걸 느꼈다.“자료 좀 더 봤어.”건우는 식탁 쪽으로 걸어가며 노트북 가방을 내려놨다.“이상한 부분이 많더라고.”하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어떤 부분이.”건우는 노트북을 꺼내지 않은 채, 그냥 식탁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지금은 자료를 바로 들이밀고 싶은 마음보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이 말을 듣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흐름이.”하나는 눈을 깜빡였다.“흐름?”“돈 흐름, 승인 흐름, 정리되는 방식 같은 거.”건우는 잠깐 말을 골랐다가, 하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처음엔 다 따로따로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까 누가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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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정리

그날 밤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전처럼 요란하게 들리진 않았다. 창밖에 물소리가 깔려 있긴 했으나, 집 안까지 밀고 들어와 공기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애매한 빗소리일수록 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귀에 붙어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침묵의 일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건우는 식탁에 마주 앉은 하나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둘 사이에도 지금 비슷한 게 흐르고 있었다.말은 오가고 있었다. 하나가 늦은 시간이라 간단하게라도 먹고 자라고 말했고, 건우는 대충 괜찮다고 답했다. 그 뒤로도 컵을 옮기는 소리, 식탁 위 작은 접시가 밀리는 소리, 전자레인지가 한 번 짧게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들이 이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건 대화가 아니라 말을 대신하는 소음처럼 느껴졌다.건우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한참 만에야 반찬에 손을 댔다.“입맛 없어?”하나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밥그릇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눈 밑이 약간 어두워 보이는 걸 제외하면, 겉으로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건우는 오늘 하루 내내, 그녀를 볼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인데, 평소와 똑같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얼굴.“그냥 좀 늦어서.”건우가 대충 둘러대듯 말했다.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앞에 놓인 국그릇을 자기 쪽으로 조금 끌어당기며 숟가락을 집었다.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건우는 괜히 그 움직임을 오래 보고 있다가, 스스로 민망해져 시선을 접시 쪽으로 내렸다.한동안은 정말 별다른 말이 없었다.건우는 몇 숟갈 뜨지도 못한 채 식탁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 하나는 그런 그를 모른 척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 안에서 건우는 계속해서 몇 시간 전 최준석과 나눈 대화를 되짚고 있었다.쫓은 게 아닙니다.정리하려고 했던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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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누가 더러워질지 아는 사람

정말 잠깐이었다. 물컵을 들다 놓을 때 누구나 생길 수 있는 정도의 떨림이었고, 눈을 다른 데 두고 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지금 건우는 그 미세한 떨림조차 너무 선명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그건 놀람 같기도 했고, 익숙한 말을 다시 들었을 때 오는 반사 같은 것이기도 했다.“정리…”하나가 아주 낮게 따라 말했다.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했지만, 건우는 그 짧은 한 단어 안에 묘하게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묻어 있는 걸 느꼈다. 그건 단순히 단어를 되묻는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어떤 기억과 맞닿아 있는 말에 잠깐 손을 댄 사람의 반응에 가까웠다.하나는 금세 시선을 들었다.“그 사람, 원래 그런 스타일이었잖아.”“그런 스타일?”“문제 생기면 오래 두는 사람 아니었잖아.”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건우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형은 애매한 걸 싫어했고, 질질 끄는 걸 더 싫어했다. 뭔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그걸 놔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하나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건우는 이상하게도 안도보다는 불편함을 먼저 느꼈다.하나는 마치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건우는 무심한 척 물었다.“형수님도 그렇게 느꼈어?”그 질문에 하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이번에는 떨림이 아니라, 표정 쪽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먼저 보였다. 눈빛이 잠깐 멀어졌다가 돌아왔고, 입술 안쪽을 한 번 눌렀다가 놓는 짧은 버릇이 따라왔다.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의 얼굴이었다.하지만 그건 금세 사라졌다.“느꼈다기보다…”하나는 말을 고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 사람은 늘 먼저 알아차리는 쪽이었으니까.”건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오래전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소한 일로 집안 분위기가 한동안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누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넘길 수도 없는 종류의 일. 그때도 형은 가장 먼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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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기억의 방향

그 정적이 너무 짧아서, 어쩌면 건우 혼자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이후 하나가 다시 움직였을 때, 건우는 분명히 알았다. 방금 자기 말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문장이 아니었다.하나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그녀의 시선이 건우를 향해 올라왔다.“그렇게까지 했을까.”그 말은 얼핏 보면 부정처럼 들렸다. 하지만 건우는 이상하게 그 안에서 진짜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믿고 싶어서 묻는 사람의 말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두려워서 한 번 돌아가는 문장처럼 들렸다.건우는 하나를 가만히 바라봤다.“너는?.”그가 물었다.“어때 보여?”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창밖에서 빗소리가 아주 얇게 이어지고 있었다. 식탁 위 조명은 따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빛 아래 있는 사람들 얼굴은 전혀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그 작은 원 안에 둘이 마주 앉아 있는데도, 서로가 서로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한참 뒤에야 하나가 입을 열었다.“모르겠어.”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건우는 그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하나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근데…”건우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하나는 손끝으로 컵에 맺힌 물기를 한 번 훑었다. 손끝에 묻은 물이 투명하게 번졌다.“놓치는 스타일은 아니었잖아.”그 말은 이미 조금 전에도 들었던 문장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건우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윤신우는 무언가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 말은 곧 무언가를 끝까지 쥐고 놓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그게 사람이라면.그게 관계라면.그게 하나라면.그리고, 그게 자신이라면.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얕게 들이마셨다.식탁 위로 시선을 내리자, 하나의 손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과 달리 떨림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고 단정한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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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정리라는 이름의 덮음

그는 밥을 먹던 손을 멈추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목소리는 높지 않았고, 특정 누군가를 지목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상황 전체를 향해 던진 문장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한마디 이후로 식탁 위 공기가 바뀌었다.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누군가는 숟가락을 내려놨고,누군가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그 문제는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건우는 눈을 떴다.그 장면은 오랫동안, 형이 집안을 정리해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먼저 선을 긋고, 더 이상 번지지 않게 막아준 사람. 그게 윤신우였고, 그게 든든하다고 생각해왔다.그런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그 장면 안에는 다른 부분도 있었다.그날 이후로,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다시 말하지 않았다는 것.누가 어떻게 생각했는지,그게 정말 해결된 건지,아니면 그냥 덮인 건지.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 건우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그 기억은 분명 예전과 똑같은 장면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르게 읽히고 있었다. 보호처럼 느껴졌던 말이, 사실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선처럼 들렸고, 해결처럼 보였던 결과가, 실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건우는 이마 위에 팔을 올렸다.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또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병원 복도였다.누군가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응급실에 한 번 들렀다 나온 뒤라 다들 조금씩 예민해져 있던 상태였다. 건우는 그때도 별 생각 없이 형 옆에 서 있었다. 형이 먼저 접수하고, 형이 먼저 의사랑 얘기하고, 형이 먼저 상황을 정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시기였다.윤신우는 그날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의사와 몇 마디 나누고,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누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리한 뒤, 복도 한쪽에 서서 건우를 불렀다.“이쪽은 이제 신경 안 써도 돼.”그는 그렇게 말했다.건우는 아무 의심 없이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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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웃고 있던 사람

다음 날 아침, 비는 그쳐 있었다.밤새 창문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고 나자 세상은 오히려 더 조용해졌다. 비가 오지 않는 아침은 대개 숨통이 트이는 쪽에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공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젖은 도로 위로 옅은 햇빛이 번지고 있었고,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은 분명 맑았는데, 건우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몸 안쪽이 더 무겁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았다.밤새 눈을 붙인 시간이 아주 없진 않았을 텐데, 머릿속은 마치 한 번도 쉬지 못한 것처럼 둔하고 예민했다. 꿈을 꾼 기억은 없는데, 기분만은 꿈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어수선했다.그는 한동안 침대에 앉아 있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늦어 있었다. 알람은 이미 여러 번 울렸다가 멈춰 있었고, 화면에는 새로 온 메시지 몇 개가 떠 있었다. 대부분 업무 관련이었고, 급한 건 없어 보였다.건우는 무심코 복도 쪽을 바라봤다.집 안은 조용했다. 하나가 이미 일어났는지, 아직 방 안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이후로 그녀와 나눈 말은 많지 않았다. 식탁 앞에서 짧게 오간 대화, 그 안에 스쳐 지나간 미세한 반응들, 그리고 끝내 확인하지 못한 것들만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건우는 세수를 마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커피 향이 먼저 났다.하나는 이미 깨어 있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머그컵 두 개를 꺼내고 있는 모습은 어제와 다를 것 없이 평범했다. 집에서 늘 입던 얇은 니트에, 대충 묶은 머리, 손목까지 걷어 올린 소매. 너무 일상적인 풍경이라서 오히려 건우는 문득 어젯밤의 대화가 전부 자기 혼자만의 과민한 해석이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늘 오래 가지 못했다.하나는 돌아서며 짧게 웃었다.“일어났어?”건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커피 마실래?”“응.”짧은 대화였다.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아침에 흔히 오갈 수 있는 문장들. 그런데도 건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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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아무도 더 못 들어오게

하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건우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무심코 꺼낸 추억처럼 들리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형에 대한 아주 사소한 문장 앞에서, 하나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한참 뒤에야 하나가 낮게 말했다.“그랬지.”“좋은 의미였다고 생각했어.”건우는 자기 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어릴 땐 특히 더 그랬어. 형은 늘 뭔가 알고 있는 사람 같았고, 다 정리돼 있는 사람 같았고. 그래서 나는 그냥 형 말 들으면 되는 줄 알았거든.”그 문장은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지만, 말하고 나서야 건우는 자기 안에 묘한 씁쓸함이 남는 걸 느꼈다. 그건 후회라기보다는 너무 오랫동안 어떤 방식으로 길들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을 때 오는 종류의 불편함에 가까웠다.하나는 손끝으로 컵 손잡이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그 사람이 원래… 그런 쪽이었으니까.”“어떤 쪽이.”하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잠깐 컵 안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는 쪽.”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건우는 이상하게도 그 대답이 너무 조심스럽게 고른 말처럼 들렸다. 마치 진짜 하고 싶은 문장이 따로 있는데, 그걸 그대로 꺼내지 않기 위해 조금 돌아서 말하는 사람처럼.건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하나는 그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미세하게, 눈빛이 피곤해졌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한 사람의 얼굴과는 조금 달랐다. 오래된 걸 자꾸 꺼내보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피로였다.건우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형이 웃고 있을 때, 형수님은 그 얼굴이 어떻게 보였어요.'하지만 끝내 그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지금 그걸 물으면,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흔들릴 것 같았다.대신 그는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근데 이상하더라고.”하나가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뭐가?”“형 생각을 하면 예전에는 든든했던 장면들이 먼저 떠올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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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남겨진 결재선

오전 내내 건우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중요한 일정이 없는 날이긴 했지만, 평소 같았으면 어지간해선 집에 눌러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노트북을 다시 열었고, 파일 몇 개만 확인하고 움직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오전을 전부 잡아먹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머그컵이 두 개 놓여 있었다.하나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그녀가 마시다 남긴 커피 자국이 컵 안쪽에 옅게 말라붙어 있었고, 건우의 컵은 식은 지 한참 지나 표면 위로 얇은 막 같은 게 뜨기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비가 그친 뒤의 흐린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식탁 위 공기는 전혀 밝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빛이 오히려 방 안을 더 메마르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는 한참 동안 같은 엑셀 파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처음엔 숫자들만 보였다. 계좌 번호, 승인 일자, 금액, 이관 처리 내역, 정산 보류 표시. 그다음엔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락된 칸들이 비슷한 위치에서 반복되고 있었고, 중간 승인 없이 바로 넘어간 항목들이 특정 시기마다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손이 보였다.누군가가 중간에서 흐름을 잡고 있었다.그건 대단한 조작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익숙해서, 처음 보면 그냥 원래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구조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누군가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건우는 화면을 확대했다.결재 라인.승인 단계.이관 처리자.최종 검토.그 항목들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 채 조용히 놓여 있었다. 겉으로 보면 그저 여러 사람이 나눠 맡아 처리한 흔적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볼수록, 이상하게 특정 선을 기준으로 모든 게 정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시작했든, 누가 실무를 움직였든 결국 마지막에는 꼭 한 번 그 선을 거치고 있었다.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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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여기서부터는 보지 마

윤신우는 늘 서류를 빠르게 넘기는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오래 붙잡지 않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걸 순식간에 가려내는 것처럼 보였다.그때 건우는 그걸 능력이라고 생각했다.판단이 빠른 사람.머리가 좋은 사람.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사람.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건 단순한 효율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형은 서류를 읽는 게 아니라,그 안에서 어디를 남기고 어디를 지울지 먼저 보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다.건우는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이니셜 하나.짧은 메일 한 줄.중간에 비워진 칸.지워지다 만 전달 기록.그건 전부 아주 작고, 개별적으로 보면 별것 아닌 흔적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건우는 그 작은 흔적들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형은 직접 하지 않았다.하지만, 어디까지 가도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누가 움직여야 하는지도,어디서 끊어야 하는지도,무엇이 밖으로 새면 안 되는지도.그리고 그 모든 걸 자기 이름이 남지 않는 방식으로,혹은 남더라도 의심받지 않는 방식으로 관리해왔을 가능성.건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노트북 화면 아래쪽에서 새 메일 알림이 하나 떴다. 업무 관련 참조 메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습관처럼 눌러봤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런 일상적인 알림조차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는 지금도 회의를 하고, 누군가는 점심 약속을 잡고, 누군가는 결재를 올리고 있을 텐데, 자기만 이상하게 오래된 구조물 안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그는 알림창을 닫고 다시 파일 목록으로 돌아갔다.그때 눈에 띈 건, 이름 없는 PDF 하나였다.파일명은 단순했다.final_v2_2.pdf이런 종류의 파일명은 대개 누군가 굳이 찾지 않길 바랄 때 붙는다.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름일수록, 정작 열어보면 중요한 경우가 많다. 건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파일을 열었다.처음 두 페이지는 평범했다.외주 비용 정산 요약, 항목별 분류표, 내부 검토용 코멘트. 그런데 세 번째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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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남겨진 목소리

오후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건우는 식탁을 떠나지 못했다.한 번 노트북을 덮었다가도 다시 열었고, 자료 창을 닫았다가도 같은 파일을 몇 번씩 다시 클릭했다. 같은 숫자와 같은 문장들이 반복해서 눈에 들어왔는데도, 이상하게도 볼 때마다 다른 뜻이 따라붙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흔적으로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사람의 습관처럼 보였고, 습관처럼 보이던 것들은 다시 의도처럼 읽혔다.건우는 화면 속 신우 확인이라는 네 글자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결국 노트북을 닫았다.더 보고 있으면 뭔가가 명확해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서 혼자 끝까지 밀어붙이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은 분명해지고 있었다. 형은 이 구조를 몰랐던 사람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직접 자기 손으로 움직였는지를 아직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건우는 의자에 기대 앉아 두 눈을 잠시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도 글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지나치게 뜨거웠고, 반대로 손끝은 계속 차가웠다. 피곤한데 쉬어지지 않는 상태가 오래 이어지자, 감정도 생각도 어느 순간부터는 묘하게 둔해졌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낯선 번호는 아니었다. 예전에 사고 조사 과정에서 몇 번 연락이 오갔던 사람, 형 회사의 보안실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다. 건우는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네.”상대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으로 인사를 건넨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예전 자료를 정리하다가 신우 전무 관련 백업 폴더 하나를 추가로 찾았는데, 폐기 전에 혹시 확인할 생각이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원래라면 형 개인 자료는 가족 동의 없이 열 수 없는 것이 맞지만, 이미 수사 협조 차원에서 한 차례 분류가 끝난 폴더 안에 섞여 있었고, 그중 일부가 오디오 파일이라 내용 확인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건우는 잠깐 말이 없었다.오디오 파일.이상하게 그 말 하나에 먼저 몸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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