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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형수의 밤: Chapter 1 - Chapter 10

29 Chapters

1. 형이 죽었다.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강하나.윤신우의 아내.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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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 안쪽의 사람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트는 젖어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오늘은… 혼자 못 있겠어.”말이 낮게 떨어졌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형의 집은 통제선 안에 갇혀 있었고,현관은 여전히 밝았다.“여기 남을 거예요?”그녀가 다시 물었다.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건우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짧게 대답했다.“일단 우리 집으로 가요.”그 말이 나온 뒤에야 이 밤이 길어질 거라는 걸 알았다.건우는 하나와 한때 연인이었지만,그렇다고 ‘형수’라는 무게감이 말 끝에서도그녀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차 안은 조용했다.와이퍼가 일정하게 빗물을 밀어냈다.하나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흐릿했고, 그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건우는 형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려 했지만,거실 바닥에 놓인 하얀 천만 계속 겹쳐졌다.“경찰이 뭐래요.”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강도 가능성이 있대.”짧은 대답.“창문이 깨져 있었잖아.”건우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깨진 창문. 유리 조각이 안쪽에 더 많이 흩어져 있었던 장면이 스쳤다.“비가 많이 와서… 소리도 묻혔을 거고.”하나는 덧붙였다.그 말이 설명처럼 들렸다.집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흘러나왔다.정돈된 거실. 제자리에 놓인 가구들.형의 집과 달리, 아무 일도 없었던 공간.그 대비가 이상하게 선명했다.하나는 젖은 구두를 벗고 잠시 멈춰 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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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지막 통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커피 마실래?”“네.”“근데 건우 왜 나한테 계속 존대해?”“....형수니까.”“내가 불편하구나. 너 편한대로 해. 나도 내가 편한대로 할테니까.”하나는 컵을 건넸다. 손은 안정돼 있었다.떨림도, 흔들림도 없이.“경찰에서 오늘 다시 연락 올 거야.”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출근은…”“당분간 쉬기로 했어.”검사라는 직함이 그 말 뒤에 붙어야 할 것 같았지만,하나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건우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폈다.어제, 거실에서 했던 말들.창문. 유리 조각. ‘넌 내가 이상하지 않아?’그 문장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어젯밤에…”건우가 말을 꺼내자, 하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왔다.“왜?”목소리 톤이 맑았다.남편을 잃은 아내가 저렇게 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가“아니에요.”말을 삼켰다.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셨다.“형 장례 절차는 오늘 상의해야 할 것 같아.”현실적인 문장.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쪽에서도 연락 올 거야. 신우 씨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들, 정리해야 할 게 많거든.”그 말에 건우의 시선이 멈췄다.“프로젝트요?”“응. 해외 투자 건.”짧은 대답.그는 어젯밤 현장에서 들었던 감식 요원의 말을 떠올렸다.강도 가능성. 침입 흔적.-그런데 왜 자꾸 회사 얘기가 먼저 나오는 걸까.“형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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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장 사이의 공백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건우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대표님과 저는 해외 법인 구조를 같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투자 건이 복잡했거든요.”그녀의 손가락이 파일 위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이 법인. 대표님이 직접 설계하셨죠.”건우는 그 이름을 읽었다.낯선 해외 법인. 지분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형이 갑자기 정리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갑작스럽진 않았어요.”유림의 시선이 창밖으로 잠시 향했다가 돌아왔다.“이미 오래 고민하셨던 것 같았습니다.”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미세한 금이 있었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형이 고민하던 게, 회사 문제였습니까.”“회사만은 아니겠죠.”짧은 대답. 회의실 공기가 조용히 식었다.“어제 통화에서, 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제 정리해야 할 게 있다.”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정리라니.”“정리.”그녀는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사람도, 구조도.”그 말이 애매하게 걸렸다.사람.건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형이 누구를 정리하려 했다는 겁니까.”유림은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그건… 대표님만 아셨겠죠.”침묵이 길어졌다.회의실 문 밖에서 누군가 발걸음을 멈췄다가 지나갔다.회사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대표가 죽었는데도.“대표님은 어제… 평소와 달랐습니까.”건우가 물었다.서유림은 잠시 생각했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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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리다 말고 잠깐 그의 얼굴을 봤다.“괜찮아?”“괜찮…은 것 같아요.”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그런데도 그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오늘 경찰서 다시 가야 해.”건우의 손이 잠깐 멈췄다.“왜요.”“기록 열람 신청해놨어. 유족이면 일부 볼 수 있대.”‘유족’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입 안에서 굴렀다.불과 며칠 전까지, 그들은 가족이었고, 지금은 ‘유족’이 되었다.“같이 갈 거지?”하나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끝이 조금 단단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같이 가요.”하나는 커피잔을 하나 더 꺼내려다 멈췄다.그리고 그 잔을 다시 찬장에 넣었다.그 행동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그녀가 자신을 배려하는 건지,자신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건지,분간하기 어려웠다.경찰서는 여전히 건조했다.형광등 아래서 종이 냄새가 났고,복도 벽에는 누군가 급히 붙여놓은 안내문들이 삐뚤게 흔들렸다.담당 형사는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하지만 말투는 매뉴얼처럼 일정했다.“현장 출입은 아직 통제 중입니다.”그는 파일을 넘기며 말했다.“침입 흔적은 명확합니다. 후면 창 파손, 외부 신발 자국 일부 확보.지문은 채취했고, 분석 결과 기다리는 중입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살해 도구는요.”“부엌 쪽에서 발견된 칼입니다. 집에서 쓰던 물건으로 추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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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주 앉았다.잠시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공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주문이 끝난 뒤, 하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대표님이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유림 씨라고 들었어요.”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9시 조금 넘어서였습니다.”“무슨 얘기였죠?”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지만, 톤은 부드러웠다.유림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회사 구조조정 건이었습니다.”“구조조정이요?”건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대표님이 정리해야 할 인원이 있다고 했습니다.지금은 안 된다고도 하셨고요.”‘지금은 안 된다.’그 말이 다시 공기 위로 떠올랐다.하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누굴 정리하려고 했는지… 들으셨나요?”“아니요.”유림은 바로 대답했다.“이름은 말씀 안 하셨습니다.”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건우는 컵을 잡았지만, 마시지 않았다.“통화는 누가 먼저 끊었습니까.”이번에는 건우가 물었다.유림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대표님이요.”“왜요.”“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급한 일이라면… ?”유림은 그 질문에 아주 잠깐 멈췄다.“그건 모르겠습니다.”하나는 유림의 표정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통화 중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이상한 점이요?”“목소리라든지.”유림은 고개를 저었다.“평소와 같았습니다. 다만”그녀가 말을 멈췄다.“다만 뭐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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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부는 아닌 것 같지.”하나의 말이 겹쳐왔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하나는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투자자 얘기, 처음 듣는 거였어.”“형이 따로 말 안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회사 일은 대부분 공유했어.”그 문장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다.\건우는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걸렸다.“그날… 집에 들어가셨을 때.”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하나는 시선을 들었다.“형수가 본 건… 거실이었죠?”“응.”“부엌 쪽은 어땠어요?”하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서랍이 열려 있었어.”“칼꽂이는요.”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기억 안 나.”짧은 대답.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칼은 부엌에서 나온 걸로 추정된다고 했다.칼꽂이가 비어 있었는지,흩어져 있었는지,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그럴 수 있다.충격 속에서는 많은 것이 흐릿해진다.그런데 9시 18분의 부재중 통화는 오늘 확인했다면서,부엌 서랍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기억은 선택적으로 선명해진다.건우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저녁이 지나고 밤이 깊었다.하나는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통화 기록 화면이 잠깐 비쳤다.건우는 괜히 눈을 돌렸다.“9시 18분.”그가 낮게 말했다.하나가 고개를 들었다.“응.”“그때… 어디쯤에 있었어요?.”“집 앞”“현관 앞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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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잠긴 문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오늘 일정 있어요?”건우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전에 청사 들렀다가… 오후엔 시간 비워놨어.”“왜요.”“현장 다시 보고 싶어.”건우의 손이 멈췄다.“출입 통제 아직 안 풀렸어요.”“형사한테 부탁했어. 잠깐만 들어가게 해달라고.”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속이 보이지 않았다.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저도 같이 가요.”하나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형의 집 앞은 여전히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고,비는 그쳤지만, 바닥은 아직 젖어 있었다.현관문 앞에서 건우는 잠시 숨을 멈췄다.여기서 모든 게 멈췄다.문이 열리고, 익숙한 냄새가 흘러나왔다.소독약과 피 냄새가 섞인,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였다.하나는 먼저 들어갔다.거실은 그대로였다. 바닥은 정리됐지만, 가구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여기.”하나가 낮게 말했다.“내가 처음 본 자리.”건우는 그 자리를 바라봤다.형이 쓰러져 있었던 위치.“그날… 현관 문은.”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잠겨 있었어.”“안에서요.”“응.”“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갔어요?”“응.”“문 열렸고요?”“열렸지.”그녀의 답은 빠르지 않았다.그런데 확신은 있었다.건우는 현관 안쪽 잠금 장치를 바라봤다.자동 잠금. 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잠긴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려 있었어야 해요.”그는 거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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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진동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꼈다고 했죠.”하나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응.”“9시 18분.”“그래.”“현관 앞이었어요?”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때쯤이었던 것 같아.”‘그때쯤.’건우는 그 단어에 걸렸다.“집 앞 복도였어요? 아니면 엘리베이터 안이었어요?”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왜 그렇게 자세히 묻는 거야?”“그냥 확인하려고요.”그녀는 잠시 생각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었어.”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다.오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다.아주 작은 차이였다.그런데 기억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건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어요.”하나는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물소리가 계속 흘렀다.“그랬어?”“네.”그녀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정확히는… 복도였던 것 같아.”‘정확히는.’기억은 점점 수정되고 있었다.밤이 깊어지자, 하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화면이 잠깐 켜졌다 꺼졌다.건우는 망설이다가 말했다.“통화 기록… 한 번만 봐도 될까요.”하나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왜.”“시간이… 정확히 궁금해서요.”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건넸다.건우는 화면을 켰다.9:12 - 서유림 (1분 4초)9:18 - 신우 씨 (부재중)9:37 - 112그는 스크롤을 내렸다.9:05 - 부장검사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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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심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흔들리고, 문은 잠겨 있었고, 통화는 조용했다.그리고 이제 의도라는 단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길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건우는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식탁 위에는 어제 적어둔 숫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왜.’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아무리 들여다봐도 숫자는 바뀌지 않는다.하나는 방에서 나왔다.출근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오늘 회사 안 가?”“오후에 잠깐.”건우는 짧게 답했다.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건우야.”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다시 시험 볼 생각은 없어?”질문은 담담했지만, 피하지 않았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검사.”“응.”잠깐 정적이 흘렀다.그는 시선을 식탁 위 숫자에 두었다.“지금은 아니에요.”“왜.”짧은 질문. 건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제가 검사가 되면… 이 사건 못 건드려요.”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이건 네 사건이 아니야.”그녀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았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럼.”“제 형 사건이에요.”말이 낮게 떨어졌다.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이어 말했다.“검사가 되면… 감정 개입 금지잖아요.”“당연하지.”“지금은 안 돼요.”건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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