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정말 잠깐이었다. 물컵을 들다 놓을 때 누구나 생길 수 있는 정도의 떨림이었고, 눈을 다른 데 두고 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지금 건우는 그 미세한 떨림조차 너무 선명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그건 놀람 같기도 했고, 익숙한 말을 다시 들었을 때 오는 반사 같은 것이기도 했다.“정리…”하나가 아주 낮게 따라 말했다.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했지만, 건우는 그 짧은 한 단어 안에 묘하게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묻어 있는 걸 느꼈다. 그건 단순히 단어를 되묻는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어떤 기억과 맞닿아 있는 말에 잠깐 손을 댄 사람의 반응에 가까웠다.하나는 금세 시선을 들었다.“그 사람, 원래 그런 스타일이었잖아.”“그런 스타일?”“문제 생기면 오래 두는 사람 아니었잖아.”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건우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형은 애매한 걸 싫어했고, 질질 끄는 걸 더 싫어했다. 뭔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그걸 놔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하나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건우는 이상하게도 안도보다는 불편함을 먼저 느꼈다.하나는 마치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건우는 무심한 척 물었다.“형수님도 그렇게 느꼈어?”그 질문에 하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이번에는 떨림이 아니라, 표정 쪽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먼저 보였다. 눈빛이 잠깐 멀어졌다가 돌아왔고, 입술 안쪽을 한 번 눌렀다가 놓는 짧은 버릇이 따라왔다.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의 얼굴이었다.하지만 그건 금세 사라졌다.“느꼈다기보다…”하나는 말을 고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 사람은 늘 먼저 알아차리는 쪽이었으니까.”건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오래전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소한 일로 집안 분위기가 한동안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누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넘길 수도 없는 종류의 일. 그때도 형은 가장 먼저 상
그날 밤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전처럼 요란하게 들리진 않았다. 창밖에 물소리가 깔려 있긴 했으나, 집 안까지 밀고 들어와 공기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애매한 빗소리일수록 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귀에 붙어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침묵의 일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건우는 식탁에 마주 앉은 하나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둘 사이에도 지금 비슷한 게 흐르고 있었다.말은 오가고 있었다. 하나가 늦은 시간이라 간단하게라도 먹고 자라고 말했고, 건우는 대충 괜찮다고 답했다. 그 뒤로도 컵을 옮기는 소리, 식탁 위 작은 접시가 밀리는 소리, 전자레인지가 한 번 짧게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들이 이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건 대화가 아니라 말을 대신하는 소음처럼 느껴졌다.건우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한참 만에야 반찬에 손을 댔다.“입맛 없어?”하나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밥그릇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눈 밑이 약간 어두워 보이는 걸 제외하면, 겉으로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건우는 오늘 하루 내내, 그녀를 볼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인데, 평소와 똑같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얼굴.“그냥 좀 늦어서.”건우가 대충 둘러대듯 말했다.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앞에 놓인 국그릇을 자기 쪽으로 조금 끌어당기며 숟가락을 집었다.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건우는 괜히 그 움직임을 오래 보고 있다가, 스스로 민망해져 시선을 접시 쪽으로 내렸다.한동안은 정말 별다른 말이 없었다.건우는 몇 숟갈 뜨지도 못한 채 식탁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 하나는 그런 그를 모른 척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 안에서 건우는 계속해서 몇 시간 전 최준석과 나눈 대화를 되짚고 있었다.쫓은 게 아닙니다.정리하려고 했던 겁니
건우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하나는 식탁 옆에 서 있었다. 편한 니트 차림에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고, 방금 물을 마시다 말았는지 컵 하나가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현관 쪽을 돌아보며 짧게 웃었다.“생각보다 늦었네.”그 말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문장이었는데, 건우는 이상하게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굴리던 수많은 숫자와 파일명들이 전부 다른 결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자료 속에 적혀 있던 ‘정리’라는 단어와, 지금 조용히 서 있는 하나의 모습이 같은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견디기 어려울 만큼 선명해졌다.하나는 컵을 내려놓으며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무슨 일 있었어?”건우는 대답하기 전에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일부러 동작을 천천히 했다. 너무 빨리 입을 열면,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흘러나올 것 같았다.“최준석 씨 만났어.”하나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컵을 놓는 동작은 끝났는데, 손이 곧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짧아서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지금의 건우는 그런 종류의 멈춤을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그래서?”하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묻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그 안쪽에 아주 얇은 긴장이 스며 있다는 걸 느꼈다.“자료 좀 더 봤어.”건우는 식탁 쪽으로 걸어가며 노트북 가방을 내려놨다.“이상한 부분이 많더라고.”하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어떤 부분이.”건우는 노트북을 꺼내지 않은 채, 그냥 식탁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지금은 자료를 바로 들이밀고 싶은 마음보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이 말을 듣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흐름이.”하나는 눈을 깜빡였다.“흐름?”“돈 흐름, 승인 흐름, 정리되는 방식 같은 거.”건우는 잠깐 말을 골랐다가, 하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처음엔 다 따로따로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까 누가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그
형이 몰랐을 리 없다.그 생각이 다시 올라왔다.아까까지만 해도 그 문장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까웠다. 형 정도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면 이런 흐름을 아예 모를 수는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윤신우는 이 구조를 몰랐던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흐름이 끊기지 않게 유지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그 순간 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유지한 사람.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누군가를 직접 밀어 떨어뜨린 사람이 아니라, 떨어지도록 바닥을 닦아둔 사람.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피가 어디로 흐를지는 알고 있었던 사람. 리고 그 흐름이 밖으로 새지 않게, 필요한 만큼만 열고 필요한 만큼만 막아둔 사람.건우는 고개를 들었다.앞유리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아까보다 더 두꺼워져 있었다. 와이퍼를 켜지 않은 유리창 위에서 빗물이 서로 엉기고 흩어지며 불규칙한 자국을 만들었다. 그걸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는 다시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엑셀 파일 하단, 승인란에 들어간 이니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YSW.윤신우.그 세 글자가 갑자기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건우는 화면을 확대했다. 서류상으로는 단순한 승인 표시였지만, 문제는 그 이니셜이 찍혀 있는 위치였다. 직접 결제나 송금이 아니라, 구조상 굳이 형이 관여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중간 단계들. 누군가 밑에서 처리하고 올리면 그냥 넘어가도 될 만한 부분들에 이상하리만치 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건 책임감일 수도 있었다.꼼꼼함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건우 눈에는 그게 다르게 보였다.흐름을 알고 있던 사람의 표시처럼.건우는 그 파일을 저장한 뒤, 다른 폴더를 열었다. 그 안에는 계약서 초안 몇 개와 수정본, 그리고 삭제되다 만 메모 파일이 들어 있었다. 파일명은 의미를 숨기려는 것처럼 애매했고, 문장들은 중간중간 잘려 있었다. 하지만 애매하게 지운 흔적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는 법이었다.…이관 후
최준석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체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숨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창문을 때리던 빗소리가 한층 더 거세졌다.건우는 손안의 USB를 내려다보며, 그제야 아주 또렷하게 하나의 생각을 했다.형은 정말 피해자였을까.그건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머릿속으로조차 끝까지 밀어붙여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너무 쉽게 피해자가 된다. 특히 그 죽음이 피로 얼룩져 있을수록,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의 얼굴보다 마지막 순간의 얼굴을 더 오래 붙잡게 된다.하지만 지금 건우는 처음으로, 형의 죽음을 슬픔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었다.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건우는 USB를 손에 쥔 채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번지는 도시의 불빛이 빗물 사이로 일그러져 보였다. 마치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어떤 풍경이, 이제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려는 것처럼.그날 밤, 건우는 아주 늦게서야 알았다.끝난 줄 알았던 일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최준석과 헤어진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건우는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특별한 이유가있어서라기보다, 자꾸 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시각이든, 날짜든,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위치든. 방금 전까지 최준석과 마주 앉아 있었던 시간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걸, 눈에 보이는 숫자 같은 것으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았다.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화면 위 시간은 차갑게 흘러가고 있었고, 바깥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건우 손 안에 쥔 USB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그는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앞유리 위로 빗물이 쉴 새 없이 번져내렸고, 그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전부 윤곽이 흐려져 있었다. 세상이 흐려진
그 말은 곧,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고, 결과도 아니고, 그저 흔적이 남지 않는 것. 누군가 다치든, 누군가 사라지든, 누군가 망가지든 겉으로만 조용하면 되는 방식.건우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긋나는 걸 느꼈다.“아니죠.”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최준석을 향한 말인지, 자신을 향한 말인지 건우도 분간하지 못했다.“형이 그런 식으로까지 했을 리는…”끝까지 문장을 잇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부터가 이미 그럴 리 없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형의 사고도, 형의 죽음도, 하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밤도,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지금 이 남자 앞에서 형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최준석은 그 미완성 문장을 굳이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건우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말을 이어갔다.“직접 손대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건우의 눈이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최준석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그런 일은 본인이 안 했어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늘 다른 사람 손을 썼습니다.”“…….”“근데 누가 움직일지, 어디까지 가야 할지는 정했죠.”그 순간 건우는,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감각을 느꼈다. 형에 대한 기억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끔찍한 건, 지금까지는 보호처럼 보였던 몇몇 장면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어릴 적, 형은 늘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먼저 움직이던 사람이었다.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빨리 개입했고, 건우가 보기엔 늘 정리하는 쪽이었다. 그땐 그게 든든함으로 보였다. 형은 늘 한발 앞서 있었고, 집 안에서 무언가 흔들리려 하면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그런데 만약 그 손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통제하기 위한 손이었다면. 그 순간부터 건우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장면을 다시 봐야 했다.“그 사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