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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형수의 밤: Chapter 11 - Chapter 20

29 Chapters

11. 미등록

형의 휴대폰 데이터는 일부만 복구됐다.통화 기록은 이미 확인했지만, 메시지 복구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건우는 수사관이 넘겨준 파일을 조용히 열었다.대부분은 업무였다.보고. 일정. 계약 수정.익숙한 형의 문장들.그러다 한 줄이 눈에 걸렸다.6시 42분.발신자 - 미등록 번호.오늘 얘기, 직접 듣고 싶어요.건우의 손이 멈췄다.형의 답장이 바로 아래에 있었다.-9시 전후. 집으로 와.-집으로 와.그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그날 9시 전후 약속은 투자자 일정이 아니라 이 문자였다.형은 누군가를 집으로 불렀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숫자를 다시 떠올렸다.9:12 - 유림과 통화.9:18 - 하나에게 부재중.9:37 - 신고.그리고 6:42.-직접 듣고 싶어요.그 문장은 업무적인 어투가 아니었다.감정이 들어간 문장이었다.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은 조용했다.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늦었네.”“휴대폰 복구됐어요.”건우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하나의 눈이 잠깐 멈췄다.“뭐 나왔어?”그는 휴대폰 화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하나는 문장을 읽었다.짧은 침묵.“누구야?”“번호 저장 안 돼 있어요.”“답장은?”건우는 아래를 가리켰다.-9시 전후. 집으로 와.하나는 눈을 깜박였다.“그럼… 약속 있었네.”“네.”“투자자?”“아니요.”건우는 고개를 저었다.“말투가 달라요.”하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형이… 형수한테 그 얘기 했어요?”고개가 천천히 저어졌다.“아니.”짧고 단단한 대답.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그날 약속, 취소됐다고 들었어요.”“그래?”“네. 오후 늦게.”하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그럼 집에 혼자였겠네.”그녀의 말이 너무 자연스러웠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아니요.”그는 낮게 말했다.“형은 누군가를 집으로 불렀어요.”공기가 조용히 식었다.하나는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그 사람이 온 거라고 생각해?”“모르겠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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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젖은 발자국

창밖이 흐려질 즈음, 건우는 다시 신우의 집 쪽으로 향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 며칠 전 폭우가 남긴 얼룩이 아직 아스팔트에 남아 있었다.그날 밤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흔적이었다.건물 관리사무소에서 받은 출입 기록은 여전히 허술했다.“폭우로 일부 서버가 다운됐다”는 설명뿐이었다.차량 번호도, 방문자 로그도 불완전했다.하지만 건우는 포기하지 않았다.지하 주차장 쪽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며, 그날의 동선을 머릿속에 다시 그렸다.형은 6시 42분에 메시지를 받았고, 9시 전후에 오라고 했다.그렇다면 그 사람은, 최소한 8시 50분쯤에는 이 근처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다.폭우가 쏟아지던 밤. 우산을 쓰고 걸어 들어온 사람.그는 경비실 안 CCTV 백업 하드가 별도로 남아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메인 서버는 고장났지만, 로컬 저장은 일부 복구 가능하다고.“그날 8시 반 이후 영상만 확인 가능합니까.”경비원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화질은 좋지 않습니다.”건우는 모니터 앞에 섰다.흐릿한 화면. 빗물이 렌즈를 타고 흐르던 장면.시간은 8시 57분.건물 입구 쪽에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우산을 접는 동작이 보였다.긴 머리.검은색 계열 코트.얼굴은 보이지 않았다.9시 03분.엘리베이터 앞.같은 인물로 보이는 실루엣이 다시 찍혔다.경비는 메모를 확인했다.“저 시간대, 외부 방문 기록은 없습니다.”건우는 화면을 멈춘 채 바라봤다.기록은 없지만, 사람은 있다.그 사람은 출입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형이 직접 내려와 문을 열어줬을 가능성.그는 심장이 조금 느려지는 걸 느꼈다.그날 밤, 형은 기다리고 있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말없이 운전했다.머릿속에는 젖은 우산을 접던 손의 움직임이 남아 있었다.여자일 가능성이 높다.그 생각은 이상하게도 차갑지 않았다.오히려 명확했다.집에 들어섰을 때, 하나는 창가에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다녀왔어요.”건우가 먼저 말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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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보이지 않는 사람

통화가 끊긴 뒤에도, 건우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이제, 들을 준비 되셨나요.”그 목소리는 차분했고, 흔들림이 없었다.자신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아는 사람의 말투였다.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구야.”조금 뒤에야 물었다.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그날 집에 왔다고 하는 사람.”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뭐라고?”“9시 전에 왔다고.”짧은 정적.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장난 아닐까.”그 말이 너무 빨리 나왔다.건우는 고개를 저었다.“그 문장… 알고 있었어요.”“무슨 문장.”“약속 어기는 사람 아니었다고.”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말은 둘만의 대화에서 나왔던 표현이었다.형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그걸 저 여자가 알고 있었다.밤이 깊어졌지만, 집 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건우는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발신 기록은 남아 있었다.추적은 시간 문제였다.하나는 창가에 서 있었다.“다시 연락 올까.”“올 거에요.”건우의 대답은 낮았다.“왜 그렇게 확신해.”“저 사람은… 도망치는 사람이 아닙니다.”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하나는 돌아보지 않았다.그녀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다음 날 오후, 번호는 다시 진동했다.이번에는 메시지였다.'오늘 밤, 같은 시간. 혼자 오세요.'주소가 함께 적혀 있었다.형의 집 근처 작은 골목.건우는 메시지를 오래 바라봤다.하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갈 거야?”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혼자?”“네.”“위험할 수도 있어.”“위험했다면… 어제 바로 끊지 않았겠죠.”그는 차분하게 말했다.“저 사람은… 말하려는 겁니다.”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낮게 물었다.“내가 가면 안 돼?”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안 되요.”“왜.”“저 사람… 당신을 알고 있어요.”그 말은 단정적이어서 하나는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밤 8시 50분. 골목은 어둡고 조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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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식탁 위의 잔

해가 천천히 기울 무렵, 건우는 형의 집 앞에 다시 섰다.경찰의 출입 통제는 여전했지만, 현관 내부 사진은 이미 수차례 확인한 상태였다.그는 그날 밤의 거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쓰러진 형. 깨진 유리. 뒤집힌 의자.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두 개의 잔.그는 그걸 처음엔 지나쳤었다.그날은 비가 쏟아졌고,피가 바닥을 적셨고, 그게 더 눈에 들어왔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잔이 두 개였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는 부엌에서 조용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건우는 잠시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이 집의 부엌.이 집의 식탁.이 집의 잔.“형 집… 식탁 위에 잔 두 개 있던데.”그가 말했다. 물소리가 멈췄다.하나는 천천히 돌아섰다.“그래?”“네.”“손님 오면… 둘 다 쓰겠지.”그녀의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러웠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혼자 술 마시진 않았겠죠.”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그날… 비 많이 왔잖아.”“네.”“젖은 사람 왔을 수도 있겠지.”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그는 단지 그 반응을 기억해두었다.밤이 깊어가자, 건우는 그날 현장 감식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와인 잔 두 개. 지문 일부 훼손.폭우로 인해 창문 파손 흔적은 외부 침입 가능성으로 분류.그는 보고서 하단을 오래 바라봤다.지문 일부 훼손.-고의일까. 아니면 비 때문이었을까.다음 날 오전, 건우는 형이 자주 가던 와인샵을 찾았다.“그날 저녁, 대표님 오셨나요.”직원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후 6시쯤.”“두 병 사갔습니까.”“아니요. 한 병이요.”“두 잔은 왜 꺼냈을까요.”직원은 어깨를 으쓱했다.“손님 오면 그렇죠.”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그건 확실해졌다.집으로 돌아오는 길,그는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9시 18분의 부재중 전화가 떠올랐다.형은 그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그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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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모른다는 말

녹음 파일을 들은 다음 날,집 안의 공기는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말은 평소처럼 오갔지만, 둘 사이에 놓인 침묵의 밀도가 달라졌다.건우는 아침 식탁에서 하나를 오래 보지 않았다.그녀도 마찬가지였다.“오늘 어디 가.”하나가 먼저 물었다.“회사요.”“또?”짧은 반응.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사고 전부터 확인하던 게 있는지… 보려고요.”하나는 물컵을 내려놓았다.“사고 전?”“네.”그녀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건 왜.”건우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녹음에서… 형이 ‘확인하기 전까진’이라고 했잖아요.”“그래서?”“그 확인이 사건 당일에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회사 재무팀에서 확인한 자료는 의외로 단순했다.3개월 전부터, 소규모 금액이 반복적으로 빠져나갔다.회삿돈은 아니었다.형 개인 계좌.누군가에게 송금된 기록.수취인은 개인 명의. 이름은 낯설었다.건우는 계좌 흐름을 오래 바라봤다.사고 2개월 전부터 시작.사고 한 달 전, 금액이 커짐.그리고 사건 일주일 전, 마지막 송금.그 이후는 없다.집으로 돌아오는 길,건우는 형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형은 누군가를 믿으려 했다.그리고 확인하려 했다.확인.그 말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의심의 끝이었다.집 문을 열자, 하나는 거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검사다운 표정.“뭐 나왔어.”그녀가 물었다.건우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형 계좌에서 3개월 전부터 송금 기록이 있습니다.”하나의 시선이 멈췄다.“얼마나.”“크진 않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입니다.”“누구한테.”“개인 명의.”건우는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당신 이름 아닙니다.”그 말은 일부러 덧붙였다.하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그럼.”“그 사람이 형을 만나러 온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잠시 정적.“협박?”하나는 낮게 물었다.“가능성 있습니다.”“그래서 나를 의심했다고 생각해?”질문이 곧장 돌아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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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낮의 사람

메시지는 짧았다.-낮에 봅시다. 사람 많은 곳에서.건우는 답장을 오래 쓰지 않았다.-장소 보내세요.주소는 형의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카페였다.그는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했다.카페 안은 평범했다.낮은 음악, 대화 소리,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위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그래서 오히려 더 긴장됐다.문이 열렸다.그리고,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어젯밤 골목에서 본 실루엣과 비슷했다.긴 머리. 단정한 차림. 이번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그녀는 주위를 한 번 훑고는 건우를 정확히 찾아냈다.망설임 없이 맞은편에 앉았다.“윤건우 씨.”목소리는 같았다.낮고 또렷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밤, 집에 왔던 분이죠.”“네.”짧은 인정.“이름은.”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지금은 굳이 필요 없겠죠.”건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필요합니다.”여자는 잠시 건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명으로 하죠. 편하게 부르세요.”“본명은.”“나중에.”선은 분명했다.“왜 온거죠?.”건우가 물었다.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대표님이 뭘 확인하려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그걸 말하러 온 겁니까.”“반은.”건우는 눈을 떼지 않았다.“나머지 반은.”“확인하려고.”“무엇을요?”여자는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당신.”짧은 단어였다.건우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저를.”“네.”“왜.”“대표님이 마지막까지 믿으려 했던 게 당신이었으니까.”공기가 묘하게 느려졌다.“무슨 뜻입니까.”여자는 고개를 기울였다.“사고.”그 단어가 낮게 떨어졌다.건우의 심장이 아주 천천히 뛰었다.“사고가 왜 나옵니까.”“대표님은… 사고를 우연으로 보지 않았어요.”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는 이어 말했다.“누군가 일부러 만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죠.”“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자료를 봤어요.”“무슨 자료.”“보험 처리 흐름. 운전자 과실 기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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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삭제된 것

블랙박스 기록은 생각보다 허술했다.건우는 사고 당시 차량 정비 업체를 찾아갔다.차량을 인수해 처리했던 곳이었다.“블랙박스 메모리 카드 따로 보관 안 했습니까.”정비사는 고개를 저었다.“보험사에서 바로 가져갔습니다.”“복구 시도 기록은요.”“침수로 손상됐다고 들었습니다.”“비는 안 왔습니다.”정비사는 잠시 멈칫했다.“전면 파손이 심했으니까요.”같은 말.같은 흐림.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보험사 기록을 재요청하자 답은 짧았다.원본 데이터 폐기.복구 불가.폐기.그 단어가 묘하게 걸렸다.형이 사고를 다시 보려 했다면 그도 이 기록을 봤을 것이다.그리고, 폐기된 데이터를.집으로 돌아오는 길,건우는 트럭 운전자 진술서를 다시 읽었다.졸음 운전.전방 주시 태만.과속 없음.역주행 약 200미터.200미터.그는 도로 구조를 떠올렸다.사고 지점 전 300미터 구간에는 중앙 분리대가 있었다.역주행 200미터라면 이미 분리대를 넘어야 한다.진술서에는 그 과정이 없다.단순 실수처럼 적혀 있다.건우의 손이 문서 위에서 멈췄다.형은 이걸 본 걸까.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섰을 때,하나는 거실 불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또 사고야?”그녀의 목소리는 지친 기색이 있었다.“네.”건우는 대답을 늦추지 않았다.“트럭 운전자 진술, 이상해요.”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어디가.”“역주행 구간 설명이 없어요.”“그게 뭐.”“분리대를 넘어야 해요.”짧은 침묵.“넌 지금… 누가 일부러 들이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야?”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아직은...확신할 수는 없어요”“그럼 왜.”“형이 이걸 다시 보려 했습니다.”그는 낮게 말했다.“단순 사고면 다시 볼 이유 없습니다.”하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고 직후…”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신우 씨가 나한테 물은 적 있어.”건우의 시선이 움직였다.“뭘.”“건우가… 누구랑 다툰 적 없었냐고.”공기가 조용히 식었다.“왜 그런 질문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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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같은 집, 다른 시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다음 날 아침부터 집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보기 불편했다.눈이 마주치면 어제의 말들이 그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난 선택권도 없었어.-난 네가 무서웠어.아침 식탁에는 이미 정리된 컵만 남아 있었고,하나는 부엌을 정리한 뒤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건우는 일부러 집을 일찍 나섰다.갈 곳이 정해져 있진 않았지만, 그 집 안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마치 마주치는 시간을 단절시키기 위해서건우는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를 피하고 있었다,“나갈게.”“응.”짧은 대답. 그 이상은 없었다.저녁은 더 조용했다.하나는 먼저 씻고 들어갔고, 건우는 거실에서 사고 기록을 펼쳤다.대화를 이어가려는 시도조차 없었다.같은 공간에 있지만 마치 다른 시간대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소파에 앉아 있어도 등을 기대지 않았고,식탁에 마주 앉아도 시선이 오래 머물지 않았다.그렇게 열흘이 흘렀다.열흘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 안의 온도는 충분히 식을 만큼 길었다.건우는 사고 기록을 더 깊게 파고들었고,형의 마지막 통화, 송금 내역, 사고 지점 도로 구조까지 다시 확인했다.하지만 집 안에 들어오면 그 모든 생각은 묘하게 흐려졌다.하나의 존재 때문이었다.말을 하지 않는데도 존재가 무거웠다.열흘째 밤.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눈을 감지 못했다.거실에서 발소리가 났다.천천히, 맨발로 걷는 소리. 그는 숨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발소리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문 앞이었다.노크는 없었다.잠시 정적.그리고, 문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건우는 상체를 일으켰다.문이 조금 열렸다.어둠 속에서 먼저 들어온 건 익숙한 향이었다.하나였다.“안 자?”목소리는 낮았지만 낯설게 또렷했다.건우는 눈을 좁혔다.“무슨 일이야.”하나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얇은 실크 잠옷 차림이었다.평소보다 화장이 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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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지워지지 않는 향

비는 새벽녘에 그쳤다.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희미하게 방을 적셨다.밤이 끝났는데도 가슴이 편해지지 않았다.'차라리 꿈이라면 편했을 텐데.'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침대 끝을 바라봤다.어젯밤, 그녀가 앉았던 자리.그곳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시트가 아주 조금 구겨져 있었다.그는 숨을 멈췄다.본인이 움직이며 생긴 주름일 수도 있었다.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하지만, 어젯밤 그는 침대 끝에 앉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저었다.“과민해.”스스로에게 말했다.그러나 몸이 먼저 반응했다.그는 시트를 걷어 올렸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낯선 향이 남아 있었다.낮의 하나가 쓰는 향수와는 달랐다.어젯밤의 향이었다.짙고, 조금 더 단 냄새. 그 순간, 건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꿈이 아니었다.거실로 나왔을 때 하나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단정한 셔츠,묶은 머리,옅은 화장.낮의 얼굴.“오늘 일찍 일어났네.”그녀가 말했다.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렇게 봐.”“어제.”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하나는 미묘하게 굳었다.“또 그 얘기야?”“향수 바꿨어?”그녀의 눈이 흔들렸다.“무슨 소리야.”“어젯밤에.”그는 낮게 말했다.“지금이랑 다른 향이었어.”짧은 정적. 하나는 아주 잠깐 시선을 피했다.“너 진짜 피곤해보여”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얇은 긴장이 섞여 있었다.“난 밤에 네 방 안 들어갔다고.”“근데 향이 남아 있어.”건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설명보다 더 불편했다.“건우야.”그녀가 천천히 말했다.“나 무섭게 하지 마.”그 말은 어제와 같았다.건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무섭게 하지 마.-무섭다는 건 무엇일까.그녀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출근하겠다고 말한 뒤 하나는 현관을 나섰다.문이 닫히고 나서도 건우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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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모르는 얼굴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작됐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엌에 서 있었다.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옅은 화장에, 늘 입는 셔츠 차림.커피를 내리는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건우는 식탁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밤의 그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걔는 미안해해. 난 안 해.같은 얼굴인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왜 그렇게 봐.”하나가 먼저 물었다.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더 건우는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대신 그녀에게 다가가 천천히 물었다..“어제 밤에.”하나는 손을 멈췄다.“또 그 얘기야?”“어제 몇 시에 잤어.”“열한 시쯤.”“중간에 안 깼어?”하나는 잠시 생각했다.“깬 기억 없어.”그녀의 눈은 맑았다.거짓말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어서 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그녀는 모른다.-정말 모른다.그 사실이 오히려 숨을 막히게 했다.“요즘.”하나가 말했다.“네 눈빛이 무섭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무섭다고? 뭐가”“계속 뭔가 계산하는 사람 같아.”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계산 안 해.”그는 낮게 말했다.“확인하는 거지.”“뭘.”짧은 침묵.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하나는 컵을 내려놓았다.“건우.”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사고 말고… 나 좀 봐.”그 말은 낮게 떨어졌지만 무게가 있었다.건우의 숨이 멈췄다.밤의 그녀가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하지만, 결이 달랐다.낮에 보이는 하나의 눈빛은 간절했다.그에 비해 밤의 하나는 확신에 차 있었다.“난.”하나가 말을 이었다.“열흘 동안 네가 나 피하는 거 다 느꼈어.”“피한 거 아니야.”“그럼.”그녀의 눈이 흔들렸다.“왜 그렇게 멀리 있어.”그 질문은 도발이 아니라 상처였다.건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형의 얼굴이 스쳤다.병실 침대.반지.거실 바닥의 피.그 사이에 하나가 있었다.그리고. 밤의 그녀가 겹쳤다.“너.”하나가 낮게 말했다.“나 미워해?”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럼 뭐야.”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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