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는 두 번 죽지 않는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위씨 저택 앞에서는 수행인 둘이 손이 얼얼해질 정도로 후작부 시종들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바닥에는 후작부 노복들이 이리저리 나뒹굴었고, 그중 가장 처참하게 얻어맞은 이는 단연 유 어멈이었다.온 소실은 분하고 수치스러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집안의 처첩들과는 온갖 수단을 다해 겨룰 수 있었으나, 정작 대감만큼은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그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구경꾼들도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저녁밥도 미룬 채 이 광경을 지켜보며 수군거렸는데, 남의 집 망신거리를 씹는 재미가 밥보다 더 구수한 모양이었다. 어떤 아낙들은 손에 해바라기씨까지 들고 와 까먹으며, 껍질을 후작부 시종들 몸 위로 툭툭 뱉어댔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이가 없었다.서안하는 서성현 앞으로 다가가 낮게 물었다.“아버님도 함께 돌아가실 건가요?”서성현은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그래. 너와 한 수레를 타고 돌아가마.”사실 그는 기회를 봐서 강 대인이 이번 일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방금 자신의 태도가 혹시라도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부녀가 한 수레에 함께 오른 것은 살아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레는 그대로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갔고, 뒤에 남겨진 온 소실은 낭패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속이 문드러질 듯 이를 갈았다.*한편, 그날 오후.노부인은 풍수사 양현 선생의 말에 완전히 넋이 빠져 있었다.양현 선생이 손가락으로 점괘를 짚어 보더니, 둘째 아들 서성현이 머지않아 승진할 운세이며 앞으로 벼슬길이 활짝 열려 권세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라 말한 것이다.노부인은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흡족해했다. 그녀의 평생 한은 무능한 아들이었다. 아무리 떠밀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자식이 가장 큰 근심이었으니까.그런데 양현 선생은 말했다. 본래 후작부 둘째 대감의 명은 진작 크게 피어났어야 했다고. 다만 집안에 ‘변수’가 생겨 누군가 억지로 명줄을 뒤틀었고, 그 탓에 풍수가 흐트러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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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서성현은 연달아 면박만 당하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화제를 죽은 아들 이야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차라리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당초령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내쫓을 듯한 기세였다.서성현은 괜히 민망해져 슬쩍 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서안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단정하게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집어 올리는 모습이 어찌나 차분한지, 그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자신의 딸이 이토록 훌륭하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몸가짐 하나하나에 귀한 규수다운 품위와 절제가 배어 있었다. 감히 말하건대, 저 기품은 궁 안의 비빈들조차 쉽사리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서성현의 마음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이 정도 용모에, 이 정도 가문이라면 황자비 자리조차 충분히 넘볼 수 있지 않겠는가.누가 후작부가 자기 대에서 몰락할 거라 했단 말인가.물론 그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바로 그때, 수행인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큰일입니다, 둘째 대감! 큰일 났습니다!”서성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젓가락을 움켜쥔 손까지 떨렸다.“또 무슨 일이냐?”“온 소실이 품삯을 주지 않아 사람들이 관아에 고발하러 갔답니다!”서성현은 버럭 짜증을 냈다.“무슨 품삯? 누가 누구를 고발해?”“아까 둘째 대감께서 후작부 시종들을 거리에서 벌하지 않으셨습니까. 온 소실이 구경하던 백성들을 불러 그들을 업어 오게 했는데, 한 사람당 열 문씩 주겠다고 해놓고 막상 데려오고 나서는 돈을 안 줬답니다…”서성현의 눈꺼풀이 사납게 떨렸다.“이 미친 여편네가 대체 뭘 하자는 거야!”사람 하나당 고작 열 문이었다. 백 명을 불렀다 한들 은자가 얼마나 든다고 저걸 아까워한단 말인가.서성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인사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그대로 해당원을 박차고 나갔다.당초령은 딸을 바라보았다. 서안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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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서안하는 일부러 한참 떨어진 곳에 선 채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 혹여 몸에 밴 찬 기운이 안으로 옮을까 조심하는 모습이었다.“할아버지, 할머니께 문안드립니다. 아버님께도 인사드립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무릎 꿇고 있는 온 소실을 제외하면 누가 그녀의 냉기를 꺼리겠는가.서성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안하야, 방금 일이 해결됐다고 했느냐?”서안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아버님께서 마음 급해하시는 걸 보고 일이 시급하다 싶어 제가 직접 사람을 데리고 다녀왔습니다.”노후작과 노부인은 철든 손녀를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손짓해 그녀를 가까이 부르며 곁에 앉으라 했다.서안하는 먼저 남연에게 망토를 벗기게 한 뒤, 미소 띤 얼굴로 노부인 곁에 가 앉았다.노부인은 자연스럽게 제 손난로를 서안하 품에 안겨주었다.그 광경은 온 소실의 눈에 몹시도 거슬렸다..고작 며칠 사이 자신은 하늘 위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어째서 서안하는 오히려 노부인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된 것인가.무엇보다 노부인과 서성현, 저 두 사람은 본래 이득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었다.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이었다.예전에는 서안하를 제대로 본 적조차 없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홀린 사람들처럼 그녀를 손에 쥔 보물처럼 애지중지했다.온 소실은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음산하게 물었다.“안하야, 그 천것들을 어떻게 처리한 것이냐?”서안하는 가만히 온 소실을 바라보았다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소실 신분으로 적녀의 이름을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난 거 아닙니까? 우리 후작부가 예전만 못하다 해도 지켜야 할 규율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아버님의 후택이 어지럽다고 수군댈 테고, 그건 곧 아버님의 앞길에도 흠이 되겠지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성현을 바라보았다.“아버지, 제 말이 틀렸습니까?”강 대인에게 단단히 경고를 들은 직후라 그런지, 서성현은 지금 이런 체면과 규율에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그는 엄숙히 고개를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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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해시가 어느새 지나고 자시가 깊어졌다.서안하는 하서원 안을 둘러보았다. 어멈들과 시녀들은 모두 방 안으로 들어와 각자 작은 탁자 앞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다과를 먹고 있었다.모두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 대신 생기가 돌았다.서안하 역시 두툼한 융단 위에 다리를 접고 앉아 눈웃음을 지었다.“자, 오늘 맡은 일들 다들 어떻게 처리했는지 이야기해보거라.”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동리였다.“아가씨께 아룁니다. 저와 사 어멈은 남교 장복도 근처 장원으로 갔습니다.”그녀들은 사람을 구해준 농가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방한용 솜옷과 흑설탕을 전했고, 집집마다 은자 두 냥씩을 보태주었다.인색해서 그런 액수를 준 것은 아니었다. 은자 두 냥이면 농가에서는 몇 달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입막음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도 있었다.그리고 집에 들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물에 빠진 이는 후작부 적녀였고, 함께 물속에 뛰어든 이들은 모두 위 아가씨의 시녀들이었다는 사실을 반복해 강조했다.또 위채린이 당시 풍한에 걸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직접 마차에서 내리진 못했지만, 시녀들을 보내 사람을 구하게 했으니 충분히 의롭고 선한 행동이었다고 덧붙였다.백성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위채린을 칭찬했다. 심지어 눈치 빠른 이들은 자기가 직접 봤다며 거들었다. 위 아가씨가 마차 안에서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사람을 구해냈는지 물었다는 것이다.이 사람 저 사람 말이 보태지면서, 그날 현장의 모습은 어느새 또렷하게 짜 맞춰져 갔다.서안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잘했다.”동리는 민망한 듯 곁에 앉은 사 어멈을 바라보았다.“전부 사 어멈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입니다. 곁에서 일일이 짚어주시지 않았으면 저 혼자선 그렇게까지 세심하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서안하는 웃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사 어멈은 살아온 세월이 너보다 훨씬 깊다. 그러니 배워야 할 게 아직 많겠지.”동리는 얼른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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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서안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소년 시절 진왕의 기품 있고 준수한 모습이 아닌 병상에 누운 채 숨을 몰아쉬던 영광제의 모습이었다.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든 채 말했다.“황후, 짐은 이 생에 네 사랑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하지만 그때의 천요국은 이미 국고가 바닥나 있었고, 여러 성이 함락된 뒤였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서안하는 얼굴을 차갑게 굳힌 채 그의 손을 떼어냈다.“폐하께선 착각하고 계십니다. 제 사랑은 이미 오래전에 닳아 없어졌어요. 이제는… 더는 사랑하지 않습니다.”영광제는 격분했다.“아니다! 너는 분명 짐을 사랑했다! 짐을 우러러봤고, 의지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짐 곁을 떠나지 않았어! 헌데 왜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인정해라! 어서 인정하란 말이다! 그러면 짐이 네 죄를 사해주겠다!”서안하는 한 걸음 물러섰다.“무능한 군주는 부인도 지키지 못하고, 자식도 지키지 못하고, 신하와 백성도 지키지 못합니다. 폐하께선 차라리 직접 일어나 보세요. 천요국이 지금 어떤 꼴이 되었는지! 그런 얼굴로 어찌 선조들을 뵈려 하십니까?”“닥쳐라! 입 다물어!”서안하는 탁자 위 주접을 집어 들고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막주 함락, 강성 함락, 단하 연안의 성진 전부 함락…”“읽지 마라! 안 된다! 안 돼!”지금도 그녀는 그때를 선명히 기억했다. 주접을 들고 있던 자신의 손이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를.군주를 향해 저토록 대드는 것은 죽을죄였다.그때 그녀는 적어도 황후 자리만큼은 폐위될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영광제는 그러지 않았다.며칠 뒤, 그는 다시 그녀를 불러들였다.태의는 말했다. 황제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서안하는 전각 안으로 들어가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았다.영광제는 전례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안하야, 다음 생에도 짐은 너와 부부가 되고 싶구나.”서안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끊어냈다.“다음 생엔 폐하께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영광제가 숨을 거둘 때까지도 그의 눈은 끝내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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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노부인은 미간을 부드럽게 풀고는 딱히 언짢은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듣자 하니 네가 어제 운민이 처소의 시종들을 전부 팔아버렸다던데?”서안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제가 영당을 치우고 오라버니를 영산으로 보내드린 일 때문에 어머니께서 몹시 마음 아파하셨어요.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그 사람들이 계속 저택 안에 남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도 자꾸 지난 일을 떠올리시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괜히 몸만 더 상하실 테니까요.”노부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그 시종들 이야기가 나온 이상, 자연스레 어제 일도 언급될 수밖에 없었다.“처음엔 그 시종들이 운민이가 위 아가씨 때문에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헌데 어제는 또 말을 바꿨더구나. 네가 시켜서 입을 맞춘 것이냐?”서안하는 고개를 저었다.“할머니, 애초에 위 아가씨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종들이 처음엔 책임을 피하려고 남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뿐이지요.”밖에서 한참 말을 듣고 있던 온 소실은 끝내 참지 못하고 휘장을 젖히며 들어와 쏘아붙였다.“어찌 상관이 없단 말입니까!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멀쩡히 있다 왜 물에 빠진 겁니까? 운민이가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게 사실이라면, 시종들이 왜 겁에 질려 아무한테나 뒤집어씌우겠습니까? 분명 그 위씨 계집이…”서안하는 차갑게 온 소실을 한 번 흘겨보았다.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곧장 노부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할머니, 굳이 위씨 가문과 엮자면 위 아가씨는 저와 조금 안면이 있어 시녀들을 시켜 저를 구하게 했다는 정도겠지요.”익숙한 말이었다. 흑백을 뒤집고 사실을 비틀어버리는 저 태도까지도.온 소실은 충혈된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아닙니다! 운민이는 분명 위 아가씨를…”서안하는 서늘하게 말을 끊었다.“온 소실, 말조심하세요. 망자는 존중받아야 하는 법입니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죽은 뒤에도 더러운 소문에 휘말리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죠? 오라버니 명성이 조금 상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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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노부인은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맑은 향이 입안 가득 번지며 혀끝에까지 은은한 감미가 감돌았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과 만족감이 절로 밀려왔다.“음, 좋은 차로구나. 역시 호국공부는 복도 많아. 궁중 진상품까지 이렇게 늘 맛볼 수 있으니.”그 차 한 잔은 다시금 그녀를 일깨워주었다.며느리 당초령의 친정인 호국공부는 결코 자신들의 몰락한 후작부 따위와 견줄 수 있는 집안이 아니라는 사실을.그 순간, 권세를 향한 갈망이 가슴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는지, 노부인의 시선이 조용히 한켠에 서 있는 서안유에게 향했다.어젯밤 진왕이 직접 이 손녀를 후작부까지 데려다주었다.혹시 다른 뜻이라도 있는 걸까?노부인은 두 손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그리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적녀는 역시 적녀였다.용모도, 몸가짐도, 사람을 다루는 방식도 모두 정실 안주인의 자리를 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만약 서안하가 진왕비가 되고, 진왕이 서안유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측비 자리 하나쯤 노려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한 집안에서 왕비와 측비를 함께 배출하게 된다면, 누가 감히 후작부가 몰락했다고 떠들 수 있겠는가.그렇게 생각하자 노부인의 눈빛에도 조금은 진심 어린 자애가 스며들었다.다만 두 손녀 모두 아직 계례도 치르지 않은 나이였다. 지금 당장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는 아니었다.노부인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네 어머니 쪽은 네가 좀 더 잘 달래드려야 한다.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말이다. 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직 젊으니 다시 아들을 볼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서안하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맞장구쳤다.“오라버니가 떠난 뒤로 어머니께서는 삶의 의지마저 잃으신 듯합니다. 저도 그게 참 걱정이에요.”노부인은 속으로만 답답함을 삼켰다.분명 진짜 적자가 하나 더 있는데, 지금은 떳떳하게 내세울 수조차 없었다.도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후작부의 진짜 적자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서안하는 찻잔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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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서안하가 무심한 듯 던진 말은 노부인의 가장 깊은 속을 정확히 찔렀다.그녀는 후처였다. 그녀 소생은 오직 서성현 하나뿐이었고, 그 아래로 딸 둘이 더 있었다.후작부에는 아들이 모두 넷이었다. 장남 서성일은 선부인 소생이었고, 차남이 바로 서성현이었다. 셋째와 넷째는 모두 첩실에게서 태어난 서자들이었다.젊은 시절 노후작은 적장자인 서성일을 세자로 책봉해 훗날 자연스럽게 작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노부인은 다급해졌다.그녀는 노후작이 입궁해 세자 책봉을 청하기도 전에 병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다.그 뒤 노후작은 반 년 넘게 자리에 누워 지냈다.그 긴 시간 동안 노부인은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정성을 다해 시중들었고, 서성현 역시 효심 깊은 아들인 양 부지런히 움직였다.거기에 더해 노부인은 날마다 노후작 귀에 속삭였다.장남 서성일은 늘 밖에서 술 마시고 고기나 뜯으며 흥청망청 놀아나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은 채 아버지 생사조차 돌보지 않는다고.병이 나은 뒤 노후작은 완전히 마음이 식어버렸다. 그 후로는 다시는 세자 책봉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노부인이 이십여 년 동안 공들여 꾸며온 일은 결국 하나였다. 서성현을 후작부 세자로 만드는 것.이제 노후작은 완전히 늙고 쇠약해져 병상에 누워 있었다. 열흘 중 칠팔 일은 정신조차 흐릿한 채 세상일에 손을 놓고 지냈다.며칠 전에는 손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눈을 뒤집으며 기절해버렸다.지금도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하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노부인은 노후작이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서성현을 세자 자리에 앉혀야 했다.하지만 현실은 서안하 말 그대로였다.서성현은 도무지 사람 구실을 못 하는 인간이었다.하루 종일 후택 여자들 사이만 맴돌며 지내느라 첩실과 통방만 여덟 명이 되었고, 어떤 날은 하룻밤 사이 여러 처소를 들락날락하기까지 했다.그러나 어제 양현 선생은 분명 말했다. 그녀 아들의 관운은 창창하고, 훗날 크게 출세해 권세를 휘두르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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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서안하는 깊은 한숨을 삼키듯 고개를 떨구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작년에는 오라버니께서 살인 사건에도 휘말리셨어요. 겨우 은자 팔백 냥으로 일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노부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팔백 냥이라고?”곁에 서 있던 온 소실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서안하는 못 본 척 태연히 말을 이었다.“오라버니께서 갓 혼인한 새색시 하나를 눈여겨보셨습니다. 헌데 그 부인은 성정이 강직해 끝까지 따르지 않았지요. 결국 오라버니는 건달들을 끌고 가 억지로 여인의 정절을 더럽혔습니다. 그 부인은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 날 우물에 몸을 던졌고요.”그녀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그 여인의 부군이 오라버니께서 현장에 떨어뜨린 옥패를 들고 관아에 고발장을 냈습니다. 마지막엔 은자 팔백 냥으로 겨우 입막음을 했지요.”전생에서 그 남자는 권세가들이 서로를 감싸는 세상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부인의 원한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그는 결국 팔백 냥을 받고 급히 경성을 떠났고, 훗날에는 거상이 되어 황실에 물품을 대는 황상 자리까지 올랐다.팔 년 뒤.서안하가 궁 안에서 살얼음판을 걷듯 살아가던 시절, 바로 그 남자가 후궁들과 손을 잡고 그녀를 함정에 빠뜨렸다.그 일로 그녀는 하마터면 냉궁에서 죽을 뻔했다.그리고 또 들은 소문이 있었다. 그날 서운민과 함께 새색시를 능욕했던 건달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이번 생에서도 그녀는 그 불쌍한 여인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미래의 그 거상과 원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빚을 만든 자가 갚아야 하는 법.서안하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할머니, 그 팔백 냥은 혹시 할머니께서 내주신 건가요? 어머니 말씀으론 그 돈을 주신 적 없다고 하셨거든요.”노부인은 팔백 냥 이야기가 나오자 속이 뒤틀렸다. 그 돈은 전부 자신의 사재에서 나간 것이었다.그런데 그게 대유학자에게 드릴 사례금이 아니라 입막음 하는 데 쓰였다니?작년에 온 소실이 돈을 요구했을 때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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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노부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졸음이 쏟아질 때, 마침 손녀가 베개를 내밀어준 셈이었다.진짜 적자를 어떻게든 당초령 슬하로 돌려놓을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이렇게 굴러 들어오다니.순간 노부인의 머릿속이 번쩍 트였다.억지로 명줄을 비틀어놓았기에 후작부 풍수까지 흐트러졌던 것이라면, 이제 그 명줄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후작부 운세 역시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닐까?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흥분으로 손끝까지 떨렸다. 눈빛에도 기쁨이 번쩍였다.서운기는 반드시 당초령 명의 아래로 돌아가야 했다. 이건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온 소실 역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안 된다. 절대 안 된다.자기 아들은 죽었는데, 당초령이 이제 와 자기 아들까지 되찾겠다고? 꿈도 꾸지 마라.서안하는 서로 다른 속셈을 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웃었다.“우리 이방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해요. 흥하면 함께 흥하고, 망하면 함께 망하는 거니까요. 미리 대비해야죠. 큰방 쪽이 다시 힘을 얻도록 두어선 안 되잖아요.”노부인은 눈앞 적손녀가 이토록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죄다 제 속을 긁어주는 말뿐이었다.그녀는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안하야, 이리 다시 와 앉거라. 이 할미와 더 이야기 좀 하자꾸나.”듣기 좋았다. 정말이지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들었다.서안하는 다시 몸을 돌려 노부인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하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문밖에서 진 어멈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마님! 노부인 마님! 제 억울함 좀 들어주십시오!”시종 하나가 끼어든 것만으로도 노부인은 불쾌해졌다.“또 무슨 일이냐?”진 어멈은 북희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안으로 뛰어들어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안하 아가씨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저에게 세 시진 벌을 서게 하셨습니다! 이 늙은 다리로 어찌 견디겠습니까? 노부인 마님께서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저는 노부인 마님 처소 사람입니다. 벌을 내리더라도 어찌 안하 아가씨께서 내리신단 말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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