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이 막을 내리면: Chapter 1 - Chapter 10

25 Chapters

제1화

“드디어... 우리 관계를 공개하려는 거야?”권유찬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한도희를 힐끗 바라봤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내일 우리 집에서 선을 볼 건데 와서 분위기 좀 띄워 봐. 나랑 맞선을 볼 상대가 불편해하면 안 되니까.”권유찬이 한 말이 비수처럼 한도희의 귀에 박혔다.충격을 받은 한도희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선을 본다고? 그러면 나는? 너한테 나는 뭐였어?”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던 권유찬은 그 말을 듣고 한도희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너? 너는 내 친구지. 밥도 같이 먹고, 게임도 같이 하고, 서로 욕구도 해소해 주는 친구.”한도희는 피가 식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지고 입술도 파르르 떨렸다.한도희의 표정을 본 권유찬은 서서히 미소를 거두더니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한도희, 너 설마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권유찬의 말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한도희의 가슴을 난도질했다.한도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느라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그, 그럴 리가. 나 먼저 씻고 올게.”한도희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후 비틀거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고, 문을 닫고 나서는 온몸의 힘이 전부 빠져나간 듯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조금 전 권유찬이 한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고개를 숙인 한도희는 권유찬이 남긴 키스 마크로 빼곡히 뒤덮인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권유찬과 한도희는 알고 지낸 지 20년이 넘는 소꿉친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우유를 마시고, 만화책을 읽으면서 자랐다.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에는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런 일들은 두 번, 세 번 계속해 이어졌고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두 사람은 속궁합도 잘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연인들이나 할 법한 일들을 모조리 했었다.사람들이 많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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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음 날, 한도희는 권유찬이 보낸 문자 때문에 잠에서 깼다.권유찬이 문자 수십 개를 연달아 보내며 언제 올 거냐고 한도희를 재촉했다.한도희는 씁쓸함을 느꼈다.‘권유찬, 너 진짜 잔인하다.’한도희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오늘 몸이 좀 아파서 못 가.]그런데 잠시 뒤 부모님이 방문을 두드렸다.“도희야, 유찬이랑 싸운 거니? 우리 곧 있으면 이민 가는데 그만 화 풀어. 얼른 옷 갈아입고 유찬이 집에 가봐. 유찬이가 이번 맞선을 엄청 기대하고 있어. 얘기를 들어보니까 맞선 상대인 정채윤을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정채윤이 귀국하자마자 바로 너희 아빠한테 맞선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대.”“맞아. 채윤이가 예전에 나한테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거든. 내가 직접 찾아가서 부탁해서 성사한 자리야. 유찬이가 이번에 선물부터 시작해서 식사 자리까지 아주 정성 들여 준비했어. 너를 부른 이유는 분위기를 좀 띄워줬으면 해서야. 또래 여자가 있으면 채윤이도 덜 어색할 테니까. 유찬이 이번에 진심인 것 같더라. 너희 둘 사이도 좋은데 네가 좀 도와주도록 해.”권유찬은 한도희가 가지 않겠다고 하자 한도희의 부모님에게까지 전화를 했다.부모님의 설득에 한도희는 어쩔 수 없이 애써 눈물을 삼키며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한도희의 집과 권유찬의 집은 아주 가까웠다. 10분 뒤 한도희는 권유찬의 집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신발장을 열었다.그러나 안에 늘 있던 토끼 슬리퍼가 보이지 않았다.이곳저곳 몇 번이나 살핀 끝에 한도희는 마침내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그 슬리퍼를 발견했다.쓰레기통 안에는 슬리퍼뿐만이 아니라 한도희가 쓰던 컵, 칫솔, 수건, 파자마 등이 들어 있었다.“아가씨, 그것들은 도련님께서 버리신 거예요. 오늘은 다른 슬리퍼를 신으세요.”한도희는 쓰레기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침묵했다.한씨 가문과 권씨 가문은 대대로 친분이 두터웠고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한도희는 매일 권유찬의 집에 들렀고 가끔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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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저녁때가 되자 권씨 가문에서 준비한 차량이 도착했고 그들은 함께 차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한도희와 권유찬, 정채윤 세 사람은 같은 차에 앉았다.가는 내내 중간에 앉은 권유찬은 정채윤을 계속 챙겼다.에어컨 온도를 조절해 주고, 담요를 건네주고, 대신 생수 병뚜껑도 따주었다.왼쪽에 앉은 한도희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그런데 잠시 후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주변은 어두웠고 앞의 차가 상향등을 켜고 있어 내리막길을 달리던 운전기사는 강한 불빛에 눈이 부셔서 방향을 제때 틀지 못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말았다.위험천만한 순간, 권유찬은 본능적으로 정채윤을 감싸안았다.쾅!창문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고, 왼쪽에 앉아 있던 한도희는 강한 충격을 받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오른쪽 차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권유찬은 초조한 얼굴로 정채윤을 안고 차에서 내린 뒤 구급차를 불렀고 그 와중에 부드럽게 정채윤을 달랬다.권유찬은 차 안에 사람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한도희에게는 아무런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구급차가 도착한 뒤 의사는 우선 더 심하게 다친 환자부터 이송해야 한다고 했다.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한도희와 충격으로 넋이 나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정채윤을 번갈아 보던 권유찬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정채윤을 먼저 병원으로 이송해달라고 했다.멀어지는 구급차를 바라보며 한도희의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어갔다.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흘러내리고 말았다.‘권유찬, 우리 20년 넘게 알고 지냈어. 그런데 그 20여 년의 시간보다 정채윤이 더 소중한 거야?’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질수록 한도희를 괴롭히던 통증도 서서히 사라졌다.다음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한도희는 눈앞이 까매지면서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도희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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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날 밤, 한도희는 항공권 앱을 열어 세원시에서 홀리벤으로 향하는 항공편을 검색했다.결제를 마치자마자 권유찬이 정채윤과 함께 한도희를 찾아왔다.“도희야,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나 채윤이랑 사귀게 되었어. 너한테 가장 먼저 얘기하는 거야. 어때? 나 의리 있지?”서로의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을 본 한도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히 대답했다.“축하해.”정채윤은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쑥스러운 듯 웃었다.“축하해줘서 고마워. 유찬 오빠 어머니한테서 들었어. 심하게 다쳤다면서? 몸은 좀 괜찮아? 전복죽을 가져왔는데 조금이라도 먹어볼래?”정채윤은 그렇게 말하더니 권유찬에게 얼른 죽을 건네라고 했다.권유찬이 군말 없이 정채윤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한도희는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챙겨줘서 고마워. 마음만 받을게.”그 말에 권유찬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권유찬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도희를 바라봤다.“이건 채윤이가 직접 만든 전복죽이야. 사실 너한테 주기 아까웠는데 채윤이가 너를 너무 걱정하길래 마지못해 한 그릇 가져온 거야. 그런데 왜 사람 호의를 무시해?”권유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억지로 한도희의 손에 죽을 쥐여주며 빨리 먹으라고 강요했다.한도희가 상황을 설명하려는데 권유찬이 손목을 힘주어 틀어쥐었다.그러다 실랑이 끝에 그릇이 떨어지며 뜨거운 죽이 한도희의 상처 위로 쏟아졌다.“꺅!”엄청난 통증 때문에 한도희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면서 안색이 창백해졌고, 얼굴은 통증 때문에 잔뜩 찌푸려졌다.정채윤은 깜짝 놀라며 미안한 표정으로 티슈를 뽑아 닦아주려고 했다.그러나 권유찬은 정채윤이 화상을 입을까 봐 황급히 정채윤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채윤아, 이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도희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튼튼했어. 별로 안 다쳤을 테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티슈를 쥔 한도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다음 순간 한서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서훈은 한도희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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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권재필과 서연정이 대답하려는데 한도희가 먼저 선수를 쳤다.“아니야. 네가 잘못 들은 거야.”권재필과 서연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한도희를 바라봤다.권유찬은 부모님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걸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다짜고짜 한도희를 끌고 가서 차에 태웠다.“마침 잘 왔어. 얘기 끝난 것 같은데 다른 일정은 없지?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권유찬과 한도희는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가 멈춘 뒤에야 한도희는 권유찬이 자신을 백화점으로 데려온 걸 알게 됐다.권유찬은 매장 직원에게 옷과 신발, 가방들을 잔뜩 건네며 한도희에게 전부 입어보라고 했다.한도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왜 이것들을 입어보라는 거야?”권유찬은 한도희를 피팅룸 안으로 밀어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일단 입어 봐.”한도희가 거절하려는데 직원이 문을 닫고 박스를 열기 시작했다.한도희가 옷을 입고 나올 때마다 권유찬은 사진을 한 장씩 찍어서 남겼고 그런 뒤에는 다시 한도희를 피팅룸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런 행위가 반복되면서 한도희는 어느샌가 수십 벌의 옷을 입어보게 되었다. 그 탓에 매우 지쳤고 하이힐 때문에 발뒤꿈치가 까져서 피가 났다.결국 참다못한 한도희가 피팅룸을 박차고 나와 절뚝거리며 권유찬의 곁으로 걸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미안해서 이런 것들을 사주려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아까 그 버건디색 드레스 빼고 나머지는 전부 포장해서 채움 별장의 정채윤에게 보내주세요.”권유찬의 말을 들은 한도희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뒷말을 삼켰다.한도희는 망설임 없이 결제하는 권유찬을 바라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나를 이곳까지 데려와서 저 옷들을 입어보게 한 이유가 네 여자 친구한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어?”권유찬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응. 채윤이한테 선물을 주고 싶은데 혹시나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안 되니까. 너희 둘은 체형이 비슷해서 네가 모델이 되어주면 실패할 일이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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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다음 날 아침, 한도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자마자 권유찬을 보게 되었다.권유찬은 잔뜩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서 퉁명스럽게 말했다.“한도희!”한도희는 권유찬의 목소리를 통해 권유찬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러나 한도희는 권유찬을 달랠 생각이 없었기에 무심하게 말했다.“좋은 아침. 나는 남자 친구랑 데이트하러 가야 해서 먼저 나가볼게. 편하게 있어.”그 순간 며칠 동안 참아왔던 권유찬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권유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도희의 손목을 낚아채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남자 친구? 너한테 남자 친구가 있다고?”한도희는 대꾸하지 않았고 무서워하지도 않았다.권유찬은 왠지 모르게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올라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왜 대답을 안 해? 내가 묻잖아!”한도희는 권유찬에게 꽉 잡혀서 빨개진 손목을 빼내려고 하면서 쌀쌀맞게 말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거 아니야?”싸움이 더 크게 번질 것 같자 아래층으로 내려온 조혜민이 황급히 두 사람을 말렸다.“어머, 도희가 지금 심통이 나서 그래. 요즘 안 그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무슨 시간이 있어서 남자 친구를 사귀겠어? 연애할 생각이라면 좀 여유가 생긴 뒤에 해야지. 너희는 어렸을 때부터 친했잖아. 싸우지 말고 그냥 말로 풀어.”어른이 말리자 두 사람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자리에 앉았다.조혜민이 외출한 후 권유찬은 아까 자신이 지나치게 화를 냈음을 인지했다.그리고 이성을 되찾은 뒤에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얼굴을 찌푸렸다.조혜민은 요즘 한도희가 매우 바쁘다고 했다.무슨 일이 생겼길래 연애를 하려고 해도 여유가 생긴 뒤에 해야 한다고 한 걸까?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권유찬은 한도희에게 물었다.“아까 나한테 거짓말한 거지?”한도희는 권유찬을 힐끗 본 뒤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무슨 일로 온 거야?”한도희가 화제를 돌리자 권유찬은 한도희가 자신을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 여기고는 안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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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생일 파티가 한창일 때 권유찬과 정채윤은 사람들 앞에서 결혼 날짜를 발표했다.한도희는 그제야 오늘이 권유찬의 생일 파티일 뿐만 아니라 권유찬과 정채윤의 결혼 사실을 발표하기 위해 준비된 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 순간 파티장 안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두 사람을 축하해 주었다.홀로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한도희는 권유찬과 정채윤이 행복한 얼굴로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모습을 무심하게 쳐다보았다.잠시 후 정채윤이 권유찬의 팔에 팔짱을 끼고 웃는 얼굴로 잔을 든 채 다가왔다.“도희 언니, 언니는 우리 유찬 오빠랑 아주 친한 사이잖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우리 결혼식에 혹시 들러리로 와줄 수 있어?”“미안. 나 그날에는 다른 볼일이 있어 너희 결혼식에 참석할 수가 없어.”한도희가 딱 잘라 거절하자 권유찬의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권유찬은 싸늘한 눈빛으로 한도희를 힐끗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우리 결혼식에 꼭 참석할 필요는 없어. 대신 축의금을 기대할게.”한도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소꿉친구로서 축의금은 두둑하게 보낼 테니까.”진지한 목소리였다. 마치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하는 것처럼 말이다.며칠 전 백화점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린 권유찬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그때 마침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권유찬은 정채윤을 데리고 홀 쪽으로 걸어갔다.스포트라이트는 권유찬과 정채윤을 따라 움직였고, 두 사람은 마치 한 쌍의 나비처럼 우아하고 가벼운 몸짓으로 춤을 췄다.두 사람의 사이좋은 모습을 지켜보던 손님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감탄했다.“진짜 선남선녀야. 천생연분이네. 그런데 만난 지 한 달도 안 돼서 결혼이라니,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네가 뭘 알아? 권유찬은 정채윤을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어. 이제 겨우 정채윤과 연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하루빨리 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겠지.”한도희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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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고 단순한 찰과상이라는 의사의 소견에 한도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상처를 치료한 뒤 한도희는 집으로 돌아갔다.떠날 날이 가까워지면서 거실에는 크고 작은 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한도희는 이틀간 휴식을 취한 뒤 친한 친구들에게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전했다.한도희의 친구들은 한도희를 위해 특별히 송별회를 준비했다.송별회 분위기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다들 한도희가 떠난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아쉬워하면서 이민을 가도 자주 연락하라고 했다.송별회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친구들을 배웅한 뒤 한도희는 계산을 마치고 룸으로 돌아가 가방을 챙겼다.그리고 밖으로 나온 뒤 옆 룸을 지나칠 때 익숙한 목소리들을 들었다.“유찬아,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여자랑 연인이 된 기분은 어때?”문이 살짝 열려 있었기에 한도희는 안에서 들려오는 권유찬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지금 당장 죽으라고 해도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정도랄까?”그 대답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내 누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러면 한도희는?”권유찬은 아주 잠깐 침묵했다가 무척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한도희? 나랑 속궁합이 잘 맞았지.”“하고 싶을 때마다 부르면 바로 나오고 따로 책임질 필요도 없는 섹파라니. 진짜 부러워 죽겠네.”또 한 번 폭소가 터졌다. 권유찬은 눈썹을 치켜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너 정채윤이랑 약혼했잖아. 앞으로 한도희는 어떻게 할 거야?”“어떻게 하긴. 좋게 끝내야지. 내 마음속에는 채윤이뿐이야. 채윤이 말고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권유찬의 확신에 찬 대답에 사람들은 순정남이라고 하면서 권유찬을 치켜세웠다.오직 한도희만이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직접 들으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20년 넘게 이어진 우정이, 그동안 수없이 나눈 통화가, 손을 맞잡고 키스하고 관계를 가졌던 것이...속궁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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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권유찬이 다짜고짜 질책하자 그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서러움과 고통이 극에 달했다.그럼에도 한도희는 이성을 잃지 않고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려고 했다.“정채윤은 사람을 시켜서 나를 강간하려고 했어. 계단에서 구른 것도 정채윤의 자작극이야. 나는 밀친 적 없어. 못 믿겠으면 지금 내가 있던 룸으로 가봐. 그 노숙자는 아직 거기에 있을...”그 말을 듣고 정채윤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울먹거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아니야, 유찬아. 언니가 먼저 나를 욕했어. 내가 뻔뻔하게 너희 둘 사이에 끼어든 거라면서 말이야. 그래서 나를 계단에서 밀친 거야.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나를 그런 식으로 모함하는 건지 모르겠어.”권유찬은 두 사람 중에서 정채윤의 말을 믿었다.권유찬은 정채윤을 품에 안더니 한도희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도희, 어떻게 채윤이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채윤이를 계단에서 밀친 걸로도 부족해서 채윤이한테 누명까지 씌우려고 해? 너는 어렸을 때부터 늘 내 뒤만 따라다녔었지. 나는 집안 어른들 체면 때문에 그동안 너랑 잘 지냈던 거야.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이런 짓까지 벌여? 당장 꺼져!”그 말에 한도희는 마음이 완전히 차게 식었다.한도희는 권유찬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좋아. 네 말대로 할게. 우리 앞으로는 절대 다시 보지 말자.”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한도희의 냉랭한 태도에 권유찬의 분노가 더 커졌다.한도희가 절뚝거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권유찬은 매정하게 말했다.“앞으로 내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한도희는 앞으로 권유찬과 마주칠 일은 영영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그렇게 한도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하루 쉬고 난 뒤 한도희는 달력 위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날짜에 엑스 표시를 그렸다.캐리어를 챙겨서 차고로 걸어가는데 부모님이 한도희를 불러 세웠다.“도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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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새벽이 되어서야 권유찬은 집으로 돌아왔다.권유찬은 겉옷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뒤 텅 빈 거실을 둘러보다가 하품을 하며 가정부에게 물었다.“저희 부모님 말이에요. 어제 왜 저한테 그렇게 연락을 많이 한 거예요?”청소하고 있던 가정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과 사모님께서 어제 한도희 씨 가족분들을 집에 초대해서 같이 식사를 하셨어요. 어제 한도희 씨 가족분들이...”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권유찬은 한도희의 이름이 나오자 짜증이 나서 가정부의 말을 끊었다.“됐어요. 앞으로 한도희네 집안일은 저한테 알려주지 않아도 돼요.”말을 마친 뒤 권유찬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권유찬은 점심이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권유찬은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마침 식사하고 있던 권재필과 서연정은 권유찬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유찬아, 너 도희한테 한 번 연락해 봐. 지금쯤이면 아마...”권유찬은 식탁 앞으로 걸어가서 앉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히 거절했다.“저는 웨딩홀을 알아봐야 해서 바빠요.”서연정은 굳이 강요하지 않고 직접 영상통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는 순간 공교롭게도 정채윤에게서 전화가 왔다.권유찬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폰을 꼈다.“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같이 아침 먹자.”권유찬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연정 옆을 지나칠 때 휴대폰 화면을 힐끗 봤다.화면 너머로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한도희와 호텔 같아 보이는 배경이 보였다.‘지금 이 시간에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건가?’의문이 들어 물으려는데 정채윤이 아침 메뉴를 정했다.“나 쌀국수 먹고 싶어. 얼른 와. 같이 먹으러 가자.”권유찬은 곧장 현관으로 걸어가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얼핏 들었다.“도희야, 도착한 거야? 거기 날씨는 어때?”‘도착했다고? 가족들이랑 여행이라도 갔나?’권유찬이 떠올릴 수 있는 건 여행뿐이었다.권유찬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그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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