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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미안해'라는 입 모양

재호의 동선을 따라다닌 지 일주일째였다.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은밀한 만남도, 호텔 출입도, 손을 잡는 장면조차 없었다.그 대신 남은 건 지나치게 정상적인 일상.“이게 더 애매하네.”하빈이 중얼거렸다.카페 미팅.사무실 회의.늦은 귀가.모두 설명 가능한 범위 안이었다.“사업 커지면 저럴 수 있지.”이수는 말하면서도 표정을 굳히지 않았다.그녀는 확신을 피하고 있었다.그날 오후.재호가 회사에서 나와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휴대폰을 들고 한참 통화했다.그리고, 이수는 거리를 둔 채 지켜봤다.재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표정은 보였다.낮은 웃음.잠깐의 침묵.그리고“미안해.”입 모양이 그렇게 움직였다.이수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들렸어?”하빈이 물었다.“아니.”“그럼?”“입 모양.”짧은 정적.통화가 끝난 뒤, 재호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불안한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지친 사람의 모습이었다.그날 저녁. 서연이 다시 연락했다.[오늘도 늦네요.]짧은 메시지 뒤에 사진 하나가 첨부됐다.재호의 뒷모습.건물 로비에서 찍힌 듯했다.이수는 그 사진을 확대해봤다.“이건…”하빈이 화면을 들여다봤다.“우리 쪽에서 찍은 거 아니지?”“응.”“그럼 누가.”사진 각도가 이상했다.위에서 내려다본 구도. CCTV 캡처처럼 보였다.“서연이 직접 찍은 거 아니야.”이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럼 어디서 받은 거지.”잠깐의 침묵.이수는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이 정도면 확실하지 않나요?]그 문장이 조금 걸렸다.‘확실.’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다음 날.이수는 서연을 불렀다.“사진은 어디서 받으셨어요?”서연은 눈을 깜빡였다.“지인이요.”“어떤 지인이요?”“그 사람 회사에 아는 분이 있어서…”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아주 잠깐.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이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바로 밀어붙이지 않았다.“조금 더 확인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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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대면

재호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해 있었다.정장 차림은 단정했고, 넥타이는 조금 느슨했다.피곤해 보였지만 흐트러지진 않았다.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는 잠깐 멈췄다.“여기서 상담을…?”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무실을 따로 쓰진 않습니다.”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그의 시선이 이수에게 향했다.짧게 인사했다.“윤재호입니다.”“서이수입니다.”악수는 하지 않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재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내가… 여기 다녀갔죠.”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상담 요청이 있었습니다.”재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럼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네요.”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지 않았다.“의심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단계입니다.”하빈의 말은 중립적이었다.재호는 쓴웃음을 지었다.“전… 바람 피운 적 없습니다.”짧은 정적.이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고, 피하는 눈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그럼 아내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재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요즘 늦습니다.”그가 인정했다.“접대도 많고, 투자자도 많고.”“새벽 두 시 귀가도요?”이수의 질문에 재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두 시는… 딱 한 번입니다.”“어디에 계셨죠.”“병원.”짧은 침묵.“어머니가 쓰러지셨습니다.”공기가 살짝 흔들렸다.이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아내는 몰랐습니까.”“말 안 했습니다.”재호는 고개를 숙였다.“괜히 더 불안해할까 봐.”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살짝 움켜쥐어졌다.“사업이 커지면서… 이미 많이 예민해졌습니다.”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 대신 표정을 읽었다.불안은 있었지만 거짓의 그림자는 옅었다.“외도 의심받는 상황이 불쾌하지 않으십니까.”하빈이 물었다. 재호는 웃었다.“불쾌하죠.”“그런데도 여기 오셨네요.”“끝내고 싶어서요.”그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아내가 저를 떠날까 봐.”그 말은 작았지만 진심처럼 들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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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피해자가 누군지 모르겠다

병원 기록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공식 경로가 아니라, 하빈 쪽 인맥을 통해서였다.“입원 맞아.”하빈이 화면을 돌렸다.“윤재호 어머니. 그날 새벽 1시 12분 응급실 접수.”이수는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퇴원은?”“다음 날 오전.”그녀의 시선이 멈췄다.새벽 두 시 귀가. 그 시간은 병원과 맞아떨어졌다.“그럼…”이수의 말이 흐려졌다.“서연은 왜 모른다고 했지.”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으니까.남편이 숨겼을 수도 있다.하지만, 그날 밤 병원 CCTV에 찍힌 재호의 모습은 분명 초조했다.이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이 사람… 바람 필 정신 아니야.”“아직은 몰라.”하빈은 신중했다.“근데 적어도 그날은 아니야.”짧은 정적.판의 중심이 미묘하게 움직였다.그날 오후. 서연이 또 찾아왔다.눈은 붉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병원 갔다면서요.”이수가 먼저 말했다.서연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뭐요?”“어머니.”짧은 침묵.“아… 네. 들었어요.”그녀는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말했어요.”“어제요?”“네.”말이 조금 엇나갔다.이수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입원 사실을 그날은 몰랐다고 하셨죠.”서연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그게…”그녀는 고개를 떨궜다.“제가 너무 예민해서… 그냥 넘겼어요.”이수는 조용히 물었다.“그날 병원 가신 거 알고 계셨나요.”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처음으로 길어졌다.여자가 돌아간 뒤. 하빈이 낮게 말했다.“흔들렸어.”“응.”“병원 얘기할 때.”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거짓말이야?”“모르겠어.”그녀는 쉽게 단정하지 않았다.“근데… 뭔가 계산이 달라.”이수는 서연이 앉았던 의자를 바라봤다.처음 만났을 때의 눈물. 오늘의 침묵. 둘 중 하나는 연기다.하지만 어느 쪽인지 아직 모른다.그날 밤. 재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아내가 또 찾아갔나요?]이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어떻게 알지.”하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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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우리가 누굴 돕고 있는 걸까

서연이 돌아간 뒤에도 미용실 안에는 그녀의 향수가 남아 있었다.달콤하지만 묘하게 무거운 향. 이수는 창문을 열었다.“왜?”하빈이 물었다.“답답해서.”향 때문인지, 대화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 때문인지.“정리해보자.”하빈이 말했다.“병원은 사실.”“응.”“새벽 귀가도 사실.”“응.”“외도 증거는 아직 없음.”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서연은 확신하고 있어.”“확신이라기보다…”이수는 말을 고르다 멈췄다.“결론을 정해놓은 느낌.”짧은 정적.며칠 뒤, 재호의 통화 기록을 추가로 확인했다.그날 새벽 두 시 이후, 통화는 한 번뿐이었다.수신자: 서연.통화 시간 18초.“짧네.”하빈이 말했다.“응.”이수는 기록을 오래 바라봤다.“그날 서연은 몰랐다고 했지.”“응.”“근데 통화는 했어.”짧은 침묵.“그럼 왜 몰랐다고 했을까.”이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잊었을 수도 있고.”“아니면.”“기억을 선택했을 수도.”그날 저녁.서연이 다시 나타났다.이번엔 위자료 얘기를 먼저 꺼냈다.“사업이 커져서 자산이 많이 늘었어요.”목소리는 차분했다.“재산 분할이 복잡해질 것 같아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외도 확정은 아닙니다.”“그래도 대비는 해야죠.”그녀의 시선이 잠시 날카로워졌다.“그 사람은 준비 다 했을 거예요.”그 문장이 이상하게 남았다.‘준비.’이수는 물었다.“남편이 이혼 준비를 한다는 말입니까.”서연은 아주 잠깐 멈췄다.“아뇨. 그냥… 성격이 그렇다는 뜻이에요.”웃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처음보다 조금 얇았다.여자가 돌아간 뒤. 하빈이 낮게 말했다.“자산 얘기부터 꺼내는 건 빠르지 않아?”“응.”이수는 의자에 앉아 손을 모았다.“보통은 감정이 먼저야.”“근데?”“이 사람은 계산이 먼저야.”확신은 아니었다.하지만, 비율이 이상했다.며칠 후. 재호가 다시 연락해왔다.[아내가 요즘 자주 어디 나가는 것 같아요.]짧은 메시지.이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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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틈

서연의 외출을 본 뒤, 이수는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카페에서 만난 남자. 손을 잡지도 않았고, 몸을 기대지도 않았다.하지만, 표정은 숨기지 못했다.그건 거래의 얼굴이 아니라 감정의 얼굴이었다.“단정 못 해.”이수가 먼저 말했다.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업 관련일 수도 있어.”“그럴 수도.”이수는 카메라를 내려다봤다.확신을 밀어내듯, 스스로에게 말을 붙였다.며칠 뒤. 재호 쪽에서 또 연락이 왔다.[아내 카드 사용 내역이 이상합니다.]이수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하빈에게 건넸다.“뭐래.”“고가의 가방이랑 보석.”“평소에 그런 소비 안 했대?”“아니.”짧은 정적.“갑자기 늘었다고.”이수는 기록을 받아 확인했다.최근 2주 사이.명품 매장 두 곳.고급 레스토랑 세 번.호텔 라운지 한 번.“호텔.”하빈이 낮게 말했다.“같은 날이야?”“응.”이수는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그날은 재호가 병원에 있던 날.짧은 침묵.“그럼.”하빈이 말했다.“누가 누구를 속인 거지.”이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아직은 몰라.”하지만 심장은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그날 저녁. 서연이 또 찾아왔다.이번엔 평소보다 화장이 진했다.“요즘 잠이 안 와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이수는 머리를 정리해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최근에 호텔 가신 적 있으세요?”가위가 잠깐 멈췄다.거울 속에서 서연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호텔이요?”“네.”“남편이요?”이수는 말을 고르지 않았다.“카드 사용 내역에 남아서요.”서연은 웃었다.“접대 자리예요.”“누구 접대죠?”잠시 침묵.“남편이요.”이수는 거울을 통해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거짓은 아니었다.하지만, 말이 어딘가 느슨했다.“같이 가셨어요?”“아니요.”“그럼 왜 카드가…”서연은 말을 끊었다.“제가 썼어요.”짧은 대답.“기분 전환이 필요했거든요.”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남편이 변한 걸 느끼면, 여자는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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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관계를 끝내더라도, 망가뜨리지 않게

이수는 서연의 카드 사용 내역을 다시 정리했다.호텔 라운지.고급 레스토랑.명품 매장.금액은 크지 않았다.하지만 타이밍이 묘했다.재호가 병원에 있던 날, 서연은 호텔에 있었다.“우연일 수도 있어.”하빈이 말했다.“응.”이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근데 우연이 겹치면.”“패턴이 되지.”짧은 정적.며칠 뒤. 재호가 먼저 찾아왔다.이번엔 표정이 더 지쳐 있었다.“저… 하나만 확인해도 될까요.”“말씀하세요.”“아내가 혹시… 제 재산 상황을 자세히 물어봤습니까.”이수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왜 그렇게 생각하시죠.”재호는 망설이다 말했다.“최근에 제 회사 지분 구조랑 보험 내역을 자꾸 묻더군요.”“이혼 대비일 수도 있죠.”“아직 확정도 안 됐는데요?”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조금의 날이 섰다.“전 아직… 이혼 생각 없습니다.”짧은 침묵. 이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내가 자산 이전을 시도한 흔적은요.”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제 명의 계좌 일부를 공동 계좌로 바꾸자고 했습니다.”“이유는요.”“‘정리 차원’이라고.”그 단어가 공기 중에 남았다.정리.이수는 그 말이 불편했다.상담이 끝난 뒤. 하빈이 낮게 말했다.“이건 방향이 바뀌는 건데.”“응.”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아직 부족해.”“뭐가.”“결정적인 증거.”그녀는 쉽게 사람을 뒤집지 않았다.한 번 잘못 판단하면 누군가의 인생이 무너진다.그날 밤. 서연의 동선을 다시 추적했다.호텔 라운지.그날,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카메라를 확대하자 낯선 남자가 함께 있었다.손을 잡지는 않았다.하지만, 서연이 먼저 웃었다.그 웃음은 남편 이야기할 때의 웃음과 달랐다.가볍고, 편안하고, 무장하지 않은 얼굴. 이수는 카메라를 내렸다.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봤어?”하빈이 물었다.“응.”“어떻게 할래.”이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조작은 없어.”“응.”“외도 증거도 아직은 애매해.”“근데 방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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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관계를 끝내더라도, 망가뜨리지 않게

이수는 곧바로 서연을 부르지 않았다.대신, 며칠을 더 지켜봤다.서연은 여전히 남편을 의심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위자료 액수를 다시 한 번 확인했고,회사 지분 구조를 물었다.급하지 않은 척했지만 조급함이 묻어났다.“이제 알았지?”하빈이 낮게 말했다.“응.”“어떻게 할 거야.”이수는 잠시 생각했다.“직접 들이대면 부정할거야.”“그럼.”“스스로 말하게 해야지.”짧은 정적.이수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며칠 뒤. 서연이 다시 미용실을 찾았다.이번엔 차분했다.“진전 있으셨어요?”이수는 미소를 지었다.“조금요.”“정말요?”눈빛이 반짝였다.기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남편 쪽에서 재산 정리를 먼저 준비 중인 것 같아요.”짧은 침묵.서연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죠?”“지분 일부를 이미 외부로 이전한 기록이 있어요.”거짓이었다.하지만 이수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그래서 위자료 계산이 생각보다 줄어들 수 있어요.”서연의 손이 가방을 꽉 쥐었다.“그 사람이… 먼저요?”“네.”이수는 일부러 고개를 기울였다.“몰랐습니까?”서연은 말문이 막혔다.아주 잠깐. 그 짧은 틈. 이수는 그걸 기다렸다.“그럴 리 없어요.”서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 사람은 아직… 준비 안 됐어요.”“확신하시네요.”“당연하죠.”짧은 침묵.이수는 조용히 덧붙였다.“그럼 왜 먼저 자산 이동을 시도하셨습니까.”공기가 멈췄다.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제가요?”“네.”이수는 서류를 천천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부계정으로 개통한 번호.”“위조 문자.”“호텔 동선.”하나씩. 속도를 늦춰가며.“설명하시겠어요?”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끝이 떨렸다.처음 만났을 때의 떨림과 달랐다.이건 계산이 틀어진 사람의 떨림이었다.“그 사람도 변했어요.”그녀가 먼저 말했다.목소리는 낮았다.“돈이 생기고, 사람이 달라졌어요.”“그래서 먼저 변하셨습니까.”이수의 질문은 감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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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대치

이수는 두 사람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불렀다.서연에게는 “진전이 있다”고 말했고, 재호에게는 “정리할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둘 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오후 네 시.미용실 문 위의 종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서연이 먼저 들어왔고, 뒤이어 재호가 멈칫한 채 문 앞에 섰다.서로의 눈이 마주쳤다.순간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왜 여기에…”재호가 말을 잇지 못했다.서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이수는 조용히 말했다.“앉으세요.”네 사람의 숨소리가 미묘하게 엇갈렸다.하빈은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두 사람을 지켜봤고, 이수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외도 증거는 없었습니다.”짧은 정적.재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서연의 손은 더 단단히 모였다.“그리고.”이수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문자 조작 기록은 확인됐습니다.”공기가 무너졌다.“그게 무슨…”재호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계정 번호.”“위조된 메시지.”“호텔 동선.”이수는 하나씩 천천히 말했다.몰아붙이지 않았고, 설명하듯 천천히“설명하시겠습니까.”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입술이 하얗게 질릴 뿐, 재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서연.”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이게 뭐야.”짧은 침묵.서연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당신이 먼저 변했어.”그녀가 말했다.“무슨 소리야.”“돈이 생기고, 사람들한테 둘러싸이고.”“그게 변한 거야?”재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그게 죄야?”“아니.”서연은 고개를 저었다.“근데 나를 안 봤잖아.”정적.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건 증거 싸움이 아니었다.감정의 균열이었다.“난 무서웠어.”서연이 낮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버릴까 봐.”“그래서 먼저 버리려고 했어?”재호의 말이 날카로웠고,서연은 눈을 감았다.“지키려고.”그녀의 말은 모순이었다.하지만 진심처럼 들렸다.“보험 수익자 변경 시도는 왜 했습니까.”이수가 물었을 때, 서연의 숨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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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난 안 가, 선택이야

그날 이후로 이틀 동안 연락은 없었다.서연도, 재호도. 이수는 일부러 먼저 묻지 않았다.이번 사건은 설득으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선택은 당사자 몫이었다.미용실 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드라이기 소리, 가위 소리,손님들의 가벼운 수다.그런데 이상하게, 이수의 귀에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마치 모든 감각이 조금 예민해진 것처럼.“생각 많지.”하빈이 말했다.이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이상하게 조용해.”“무슨 뜻이야.”“사건이 끝날 때마다 남는 소리 있잖아.”하빈은 잠시 생각했다.“후회?”“아니.”이수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바라봤다.“사람이 무너질 뻔하다가 멈춘 소리.”짧은 정적.그 표현이 묘하게 정확했다.그날 밤. 문자가 왔다.보낸 사람, 재호.[잠깐 뵐 수 있을까요.]이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하빈을 바라봤다.“혼자 갈 거야?”그가 물었다.“응.”“괜찮겠어?”이수는 짧게 웃었다.“이번엔 싸움 아니니까 괜찮아.”카페는 조용했다.재호는 먼저 와 있었다.수염이 조금 자랐고, 눈 밑이 어두웠다.“죄송합니다.”앉자마자 말했다.“뭐가요.”“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거.”이수는 고개를 기울였다.“그건 본인 선택입니다.”“그래도.”재호는 손을 모았다.“저도 시험했어요.”“어떻게요.”“말 안 했습니다.”짧은 숨.“어머니 병세도, 회사 문제도.”“왜요.”“지키려고.”이수는 천천히 말했다.“그건 지키는 게 아니라 혼자 짊어지는 겁니다.”재호는 고개를 숙였다.“이혼 안 하기로 했습니다.”짧은 문장. 그 안에 무게가 있었다.“조건은요.”“부부 상담.”“재산 분리.”“그리고.”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다시 말하기로 했습니다.”“뭘요.”“무섭다고.”그 말이 떨어지자이수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섭다고 말하는 것.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칠 뒤, 서연도 찾아왔다.혼자였다.눈은 붉었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제가 먼저 사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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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확인

저녁이 조금 늦었다.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가 눅눅했다.미용실 간판 불이 꺼지기 직전의 시간.골목은 한산했고, 건너편 편의점 불빛만 희미하게 새어나왔다.남자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엔진은 끈 상태였다.운전석 창문을 아주 조금 내린 채, 그는 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장미 미용실.낯선 이름.낯선 삶.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문. 유리창. 안쪽 의자. 거울.그리고, 문이 열렸고, 이수가 나왔다.앞치마를 벗으며, 머리를 묶은 고무줄을 풀고 있었다.지친 표정. 그러나 무너지지 않은 얼굴.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시선만 따라갈 뿐.이수는 문을 잠그고,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확인했다.잠깐, 고개가 들렸다.골목을 스치는 바람 때문인지 이유 없는 기척 때문인지.차 안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그 방향을 스쳐갔다.남자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익숙한 버릇. 익숙한 걸음.“……”말은 없었다.대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찾은 게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확인일 뿐. 하빈이 미용실 안에서 나왔다.“늦었네.”그가 말하며 이수 옆에 섰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거리도, 속도도 익숙했다.남자의 시선이 그 간격에 잠시 머물렀다.하빈이 무언가 말했고, 이수가 작게 웃었다.그 웃음이 차 안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보였다.남자의 턱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손이 핸들을 쥐었다가 천천히 풀렸다.질투는 아니었다.분노도 아니었다.계산.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사진을 찍지 않았다.녹음도 하지 않았다.그저 화면을 켰다가 껐다.아직은 아니다.두 사람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남자는 시동을 걸었다.차는 천천히 움직였다.골목을 빠져나가기 직전, 그는 한 번 더 백미러로 간판을 봤다.불 꺼진 장미 미용실.“…….”아주 낮게, 거의 숨처럼.“이제야.”그 한 마디. 찾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움직일 시간이라는 의미. 차는 골목을 벗어났다.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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