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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륜해드립니다.: Chapter 1 - Chapter 10

22 Chapters

1. 제의

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장미 미용실.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붉었던 글자는 연분홍에 가까웠고,밤이 되면 조명에 눌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이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손님은 없었다.예약도 없었고, 문을 닫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가위는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오늘은 머리를 자를 일이 없을 것 같았다.그런 예감은 대개 틀리지 않았다.문이 열렸다.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짧고 가벼운 소리.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마흔 초반쯤.나이를 짐작하게 만드는 건 얼굴이 아니라 어깨였다.힘이 빠진 어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여자는 미용실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들어와도 되는지, 돌아가야 하는지 결정을 미루는 사람처럼.“머리 하시게요?”이수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높지도, 낮지도 않게. 감정을 섞지 않은 톤.“편하신 데 앉으세요.”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안쪽으로 몇 발짝 들어왔다.의자에 앉지 않은 채,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저기요…”목소리는 작았고, 끝이 조금 떨렸다.“건너 건너서 들었어요.”“뭘요.”이수는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했다.상대가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방식이었다.여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결심을 여러 번 되돌려 삼킨 얼굴이었다.“이혼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이수의 손이 멈췄다.정확히 말하면, 멈춘 것처럼 보였다.사실은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저는 미용사예요.”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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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흔들리는 선

남자들은 너무 완벽한 것 앞에서 경계한다.완벽은 함정의 냄새가 난다.대신 ‘조금 과한 듯한 자연스러움’이 필요했다.그래야 자기 욕망을 자기 탓으로 돌릴 수 있다.이수는 파운데이션을 얇게 올렸다.눈매를 길게 뺐다.립은 선명하지만 젖지 않게. 향수는 거의 쓰지 않았다.향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나중에 문제가 된다.옷은 고민하지 않았다.고민이 길어지면 마음이 늦어진다.이수는 얇은 니트와 코트를 걸쳤다.너무 화려하지 않은 색.하지만 얼굴은 눈에 띄게.거울 앞에서 한 번 더 확인했다.표정은 비워두었다.웃는 얼굴은 오늘 필요하지 않았다.웃음은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지만, 지금은 긴장이 필요했다.이수는 가방을 들고 나섰다.진상의 카페는 생각보다 더 조용한 곳에 있었다.점심이 가까워졌지만 손님은 많지 않았다.이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종이 울렸다.’카운터 뒤에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진상.’그는 이수를 한 번 보았다.그리고 한 번 더 보았다.시선이 두 번 머무는 건, 대개 ‘확인’이 아니라 ‘망설임’이다.“주문하시겠어요?”그 목소리는 평범했다.평범함은 종종 가면이다.“아니요.”이수는 고개를 저었다.“알바요. 어제… 여기서 알바 얘기 들었다고 해서요.”진상은 잠시 이수의 얼굴을 봤다.그 다음엔 이수의 손, 가방,그리고 다시 얼굴.사람은 원할 때만 자세히 본다.“지금은… 사람 안 구하는데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실망한 표정을 만들지 않았다.실망은 붙잡는 손이 된다.붙잡는 손은 추해 보인다.“네. 알겠어요.”이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한 발 물러섰다.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그럼 나중에,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이수는 명함을 꺼내려다 멈췄다. 명함 같은 건 없다.미용실이 있다는 건 불필요한 흔적이다.대신 그녀는 말만 남겼다.“장미 미용실이에요. 근처예요.”거짓말이었다. 근처가 아니었다.하지만 ‘근처’는 거리보다 마음의 말이다.이수는 더 말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밖으로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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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틈

카페의 아침은 생각보다 빨랐다.문을 열기도 전에 커피 향이 먼저 퍼졌고,기계가 예열되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진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셔터를 올렸다.매일 같은 시간, 같은 순서였고 그래서 더 생각하지 않는 동작들이었다.이수는 그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문을 열자 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계는 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네.”이수는 짧게 답했다.목소리는 낮았고, 불필요한 온도는 없었다.앞치마를 두르는 동안 그녀는 카페 안을 훑었다.테이블 간격, 창가 자리, 카운터 뒤 동선.어제와 달라진 건 거의 없었지만 아주 작은 차이가 하나 있었다.자신의 자리.어제는 ‘알바’였고, 오늘은 ‘있는 사람’이었다.이수는 설거지부터 시작했다.물은 어제보다 미지근했고, 세제 냄새는 여전히 강했다.접시를 하나 집어 들면, 다음 접시가 자연스럽게 손에 잡혔다.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일.그건 이수가 가장 잘하는 종류의 일이었다.진상은 커피를 내리다가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힐끗, 이라는 표현이 맞았다.확인하려는 눈빛은 아니었고관성처럼 돌아가는 시선이었다.이수는 그 시선을 느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시선을 받는 쪽이 먼저 반응하면 그건 이미 대화가 된다.지금은 아직,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근처 공사장에서 일하는 남자였다.커피를 받아 들고 창가에 앉았다.진상은 주문을 받으며 이수를 한 번 더 봤다.“물은 이쪽에 둬요.”그는 괜히 말을 붙였다.이미 알고 있을 말이었다.“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쪽으로 물통을 옮겼다.그 동작은 부드러웠고, 부드러움은 늘 사람의 경계를 늦춘다.카페는 한동안 조용했다.기계 소리와 컵 부딪히는 소리만 남았다.그 조용함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키운다.진상도 그중 하나였다.그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화를 내긴 했지만 이유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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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닿은 손등

비는 밤새 그쳤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아침이 되자 길 위엔 물기가 남았고, 공기는 묘하게 가벼웠다.무언가 씻겨 내려간 뒤의 냄새였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어제와 같은 말이었다.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말보다 먼저 인식하는 방식.그건 습관이 아니라 선택에 가까웠다.“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손이 앞치마 끈을 묶는 동안,진상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을 따라갔다.손목, 손가락, 매듭.이수는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모른 척하는 건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다.그 태도는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고, 불안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주방으로 들어가자 커피 머신이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증기가 얇게 올라왔다가 사라졌다.이수는 컵을 꺼내며 생각했다.오늘은 어제보다 사람이 많을 거라고. 예감은 대개 맞았다.오전 내내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동네 주민, 근처 사무실 직원, 지나가다 들른 얼굴들.카페는 바빴지만 정신없을 정도는 아니었다.이런 애매한 바쁨이 사람의 집중을 흐트러뜨린다.이수는 주문을 받아 컵을 건넸다.손이 겹치지 않게, 늘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접촉은 우연처럼 보여야 했고, 우연은 늘 상대 쪽에서 일어나야 했다.“컵 조심하세요.”그녀가 말하자 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별일 아닌 장면.그때, 진상이 뒤에서 다가왔다.“이 컵은”그의 손이 컵을 잡으려는 순간, 이수의 손등과 스쳤다.아주 잠깐. 의도적으로 피하지도, 억지로 붙이지도 않은 거리.손끝이 아니라 손등이었다는 게 중요했다.손등은 사과가 쉽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쉽다.“아.”진상이 짧게 소리를 냈다.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괜찮아요?”그 질문은 접촉에 대한 확인처럼 들렸지만,사실은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말이었다.“네, 괜찮아요.”그는 웃었다. 조금 빠른 웃음. 당황을 감추는 속도였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일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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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흔들림

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무거웠다.비가 그쳤다는 사실보다, 언제든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습기는 벽에 남아 있었고, 냄새는 아직 빠지지 않았다.이수는 카페 문을 열며 잠시 멈췄다.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어제와 달랐다.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컵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진상은 이미 나와 있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오늘은 왜이렇게 일찍 왔어요?”이수가 말했다.말끝은 가볍게 올렸지만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잠이 안 와서요.”그는 그렇게 답했다.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그러나 이유를 남기듯이.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잠이 안 왔다는 말은 어젯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었다.사람들은 보통 자기 생각의 원인을 자기 말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카페는 아직 한산했다.아침 손님 몇 명이 들렀다 나갔고, 그 사이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이수는 커피 잔을 정리하며 어제보다 더 천천히 움직였다.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은 바쁜 사람보다 더 눈에 띈다.바쁨은 이해되지만, 여유는 의심을 만든다.진상은 계산대에 서서 몇 번이나 시선을 보냈다.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숨기지 않는 시선은 이미 마음속에서 이유를 만들어낸 뒤에 나온다.“어제는… 괜찮았어요?”그가 갑자기 물었다.무슨 이야긴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었다.이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뭐가요.”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답했다.“그… 어제.”말을 줄이는 방식으로 상황을 다시 꺼냈다.이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마주치면 그 질문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별일 없었어요.”짧은 대답. 부정도, 긍정도 아닌 말.진상은 그 말을 듣고 안심한 얼굴을 했다가,곧 그 안심이 불충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사람은 늘 괜찮다는 말을 들은 뒤에 괜찮지 않았기를 바란다.“그럼 다행이고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대화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제 막 시작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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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늘은 안 돼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말 속에 ‘기쁨’을 숨기 듯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일정이 연기되서요.”이수는 짧게 답했다.자세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변명이 길어지는 순간, 사람은 설명해야 할 사람이 된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끝이 차분했지만, 매듭을 마지막에 한 번 더 당겼다.단단히 묶는 습관은 무언가를 쉽게 풀지 않겠다는 태도와 닮아 있었다.카페는 오전 내내 한산했다.손님이 없는 시간이 길면 말이 생긴다.말은 일을 채우고, 일이 비는 곳을 마음이 차지한다.진상은 커피 머신을 예열하다가 멈췄다.기계가 멈춘 건 아니었다.그가 손을 멈춘 것뿐이었다.“혹시… 원래 알바 오래 해봤어요?”그가 물었다.일 이야기처럼 꺼냈지만 관심의 방향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조금요.”이수는 컵을 닦으며 대답했다.‘조금’은 가장 좋은 단어였다.거짓말에도, 진실에도 붙일 수 있는 말.“손이 빠르네.”그가 말했다.칭찬 같았지만, 관찰이었다.관찰은 상대를 가까이 두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배우는 중이라서요.”이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미용을 배우는 중.그 말은 이수에게 여러 겹의 의미가 있었다.기술을 배우는 중이기도 하고, 사람을 다루는 법을 더 정확하게 배우는 중이기도 했다.“미용?”진상이 되물었다.그는 더 알고 싶어졌다.“네. 아직… 제대로 벌 만큼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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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 앞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가 잠시 끊겼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공간이 존재했다.진상은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이번엔 놓지 않았다.잡고 있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진짜… 가볍게예요.”그가 덧붙였다.‘진짜’라는 말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이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작게. 그 끄덕임은 아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동작이었다.문이 열렸다.안쪽에서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술 냄새와, 기름기 섞인 안주 냄새. 일상의 냄새였다.이수는 한 발을 들였다가 멈췄다.멈춘 이유는 없었다.멈출 수 있는 순간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진상은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이수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기다림은 책임을 넘기는 방식이다.“안 불편하면…”그가 말을 꺼냈다가 끝을 흐렸다.이수는 그를 보았다.지금 이 남자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선택한 상태만 원하고 있었다.“조금만.”이수가 말했다.전에 카페에서 그가 썼던 단어였다.말을 되돌려 쓰는 건 관계를 빠르게 만든다.진상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안도의 흔적이었다.둘은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생각보다 좁았다.테이블 몇 개,바 자리 몇 개.벽에는 오래된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의자는 조금 낮았다.이수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벽 쪽. 도망칠 수 있는 방향을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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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느려진 생각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대답도 하지 않았다.말을 멈추게 하지도 않았다.그는 말을 이어갔다.“집에 있으면,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서요.”시간 이야기는 사람이 혼자라는 뜻이다.혼자는 대개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을 때 꺼내는 말이다.이수는 잔을 들었다.이번엔 한 모금이 아니었다.두 모금 정도. 목 안쪽이 조금 따뜻해졌다.“느리면 좋은 거 아닌가요.”그녀가 말했다.동의처럼 들리지만, 선택을 상대에게 돌리는 문장.진상은 웃었다. 웃음이 길지 않았다.길게 웃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사람이 없으면요.”그가 말했다.“느린 건… 생각이 많아져서.”그 말은 자기 합리의 연장이었다.생각이 많아서 힘들다는 말은 생각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이수는 그를 보았다.이번엔 아주 짧게. 짧은 시선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든다.“그래서 술이요?”이수의 질문은 가벼웠다.그러나 방향은 분명했다.진상은 잠시 말을 멈췄다.질문을 정면으로 받았기 때문이다.“그냥…”그는 다시 그 단어를 썼다.“잠깐.”잠깐이라는 말은 시간을 잘게 쪼갠다.잘게 쪼개진 시간은 책임이 줄어든다.이수는 잔을 내려놓았다.이번엔 천천히. 내려놓는 동안 그의 시선이 잔을 따라 움직였다.“잠깐이면.”이수가 말했다.“괜찮죠.”확인처럼 들렸지만, 이미 결론이 들어 있는 문장.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끄덕임은 자기 마음을 따라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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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거리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괜히 집에 가기 싫어요.”그 말은 오늘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집에 대한 말도 아니었다.자기 자신에 대한 말이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대신 테이블 위에 남은 물기를 손끝으로 살짝 문질렀다.동그랗게 번진 자국이 조금 흐려졌다.“그럴 때 있죠.”그녀가 말했다.6화에서 썼던 말과 비슷했지만, 지금은 다른 무게였다.진상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이번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웃음이 남아 있다는 건 말을 더 해도 괜찮다는 신호다.“사람이…”그는 말을 이어갔다.“너무 조용하면 괜히 자기를 돌아보게 되잖아요.”조용하다는 말은 여전히 반복됐다.그 단어는 이미 그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이수는 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았다.잔을 들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을 느꼈다.시선은 더 이상 숨겨지지 않았다.“돌아보면.”이수가 말했다.“답이 나오던가요.”질문은 부드러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진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그는 잔을 들이켰다.이번엔 천천히. 마시면서 생각하는 사람의 속도였다.“아니요.”그가 말했다.“그래서 더 싫은 것 같아요.”답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짧게, 그러나 분명하게.“그럼.”그녀가 말했다.“돌아보지 말아야죠.”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선택을 다른 쪽으로 미는 말이었다.진상의 눈이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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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탐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금 덜 피곤해 보이네요.”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인사처럼 들렸지만, 관찰에 가까운 말이었다.“그런가요.”이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부정하는 순간, 왜 그런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카페는 오전 내내 조용했다.손님이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닮아갔다.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공기 속에 떠 있었고,말하지 않은 생각들이 자꾸만 자리를 차지했다.이수는 컵을 꺼내다 손을 멈췄다.컵이 미끄러진 건 아니었지만, 미끄러질 수 있는 각도였다.그녀는 손에 힘을 더 주어 컵을 받침 위에 내려놓았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손을 떼었다.그 짧은 동작을, 진상은 놓치지 않았다.“조심하시네요.”그는 웃으며 말했다.칭찬인지, 확인인지 모호한 말이었다.“깨지면 번거로워서요.”이수는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이었다.그러나 전부는 아니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끄덕임에는 이해보다는 동의가 섞여 있었다.이해하려는 사람은 묻지만, 동의하는 사람은 묻지 않는다.점심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손님이 두어 명 들어왔다가 금방 나갔다.카운터 위에는 사용한 컵들이 늘어났고, 이수는 하나씩 정리하며 물을 갈았다.수도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잠시 공간을 채웠다가, 다시 조용해졌다.“요즘은.”진상이 말을 꺼냈다.이수는 그가 ‘요즘’을 말할 때마다, 그 말이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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