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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os los capítulos de 불륜해드립니다.: Capítulo 151 - Capítulo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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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살려고 한 선택

집 안은 조용했다.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멈췄고, 하빈이 컵 두 개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따뜻한 거 마셔.”이수는 컵을 받았다.김이 천천히 올라왔다.손끝이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는 않았다.컵을 쥔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떨림을 본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미정 씨는?”“임시 거처 들어갔어. 지금은 안전해.”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태훈은?”“조사 받고 귀가 조치 될 가능성 커. 초범이고, 크게 다친 건 없으니까.”“그럼 또…”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하빈이 천천히 말했다.“이번엔 달라.”“뭐가.”“기록이 남았어.”짧은 문장이었다.하지만 그 안에는 무게가 있었다.오늘 밤은 ‘말’이 아니라 ‘사건’이 되었으니까.이수는 컵을 내려놓았다.“내가 밀었어.”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하빈이 시선을 들었다.“뭘.”“미정 씨한테.”“용기를 강요했을지도...”그녀는 고개를 숙였다.“도망치지 말라고 했어. 참지 말라고 했고.”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근데 내가 그 말 할 자격이 있나 싶어.”하빈은 한참을 생각했다.“왜 없는데.”“난 도망쳤잖아.”정적. 거실의 공기가 잠깐 멈춘 듯했다.“아버지 병원에서.”“민준한테서.”“이름도 버렸고.”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묵은 죄책감이 눌려 있었다.하빈은 천천히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그건 도망이 아니야.”“그럼 뭐야.”“살려고 한 거지.”이수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살려고 선택한 걸 도망이라고 하면, 그럼 세상에 도망 아닌 선택이 몇 개나 되겠어.”그는 과하게 위로하지 않았다.판단하지도 않았다.그냥, 사실처럼 말했다.“미정 씨는 오늘 처음으로 나왔고, 넌 오늘 처음으로 안 도망쳤어.”“……”“둘 다 다른 방향으로 같은 선택한 거야.”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숨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잠시 후, 이수가 조용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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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여진

밤은 끝내 깊어졌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이수는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눈을 떴다.천장이 여전히 낯설었다.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몸은 아직 그 방법을 잘 몰랐다.방문 밖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발소리. 하빈이었다.물 마시는 소리, 컵이 싱크대에 닿는 소리.이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주방 쪽 작은 등만 켜져 있었다.하빈이 컵을 내려놓으며 돌아봤다.“왜. 잠 안 와?”“응.”잠시 어색한 침묵.이수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하빈도 마주 앉았다.“태훈.”이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내일 미정 씨한테 연락할까?”“연락해야지.”“접근 금지 신청… 하게?”“그건 본인이 결정해야 해.”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울 거야.”“그래도 오늘보단 덜 무서울 거야.”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잠시 정적. 이수가 낮게 물었다.“하빈아.”“응.”“나 오늘… 진짜 멈출 뻔했어.”그의 눈이 올라왔다.“창고에서.”“네가 문 열고 들어오기 전.”“나 잠깐 생각했어.”“그냥… 멈출까.”그 말은 작았지만, 무겁게 내려앉았다.하빈의 손이 조용히 움켜쥐어졌다.“근데.”이수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네가 사랑한다고 한 말이 자꾸 떠올랐어.”그의 숨이 멎었다.“그 말이… 이상하게.”“내가 나를 막았어.”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도망 안 간다고 말해놓고…”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내가 아니니까.”한참 후, 하빈이 낮게 말했다.“그래서 오늘 안 도망친 거야?”“응.”그녀는 솔직했다.“나 혼자였으면… 또 달랐을지도 몰라.”그 말은 고백이었다.하빈은 고개를 숙였다.기쁜데, 무거웠다.“그럼 나 때문에 안 도망친 거네.”“응.”이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래서 무섭기도 해.”“뭐가.”“내 선택이… 너를 힘들게 할까봐.”그 말은 생각보다 솔직했다.하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선택은 네가 한 거야.”“내가 한 건 문 열고 들어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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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같이 버티자

새벽 공기가 희게 번질 무렵, 이수는 결국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얇았다.밤과 아침 사이, 애매한 시간.몸은 무거웠지만, 이상하게 머리는 맑았다.창고 안에서 벽에 밀렸던 순간,하빈의 팔이 자신을 감싸던 순간, 경찰차의 붉은 불빛.모든 장면이 또렷했다.하지만 그 장면들 사이에 하나가 더 끼어 있었다.-네가 도망치던 날부터.그 말은 밤새 마음 한쪽에 걸려 있었다.이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하빈은 이미 깨어 있었다.식탁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안 잤어?”이수가 물었다.하빈은 고개를 들었다.“조금.”“거짓말.”그는 작게 웃었다.“너도.”이수는 대답 대신 물을 따랐다.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태훈 쪽에서 연락 왔어?”“아직은.”“미정 씨는?”“아침에 통화하기로 했어.”잠시 정적.이수는 하빈 맞은편에 앉았다.“하빈아.”“응.”“태훈… 변할까?”그 질문은 단순하지 않았다.하빈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사람이 바뀌는 건.”그가 천천히 말했다.“자기가 무너졌다는 걸 인정할 때야.”“어제는?”“흔들렸지.”짧은 판단.“근데 아직은 자기한테 화난 상태일거야.”“자기한테?”“네가 아니라, 상황이 아니라, 자기 통제가 안 된 자기 자신한테.”이수는 고개를 숙였다.“그럼 더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그래서 접근 금지.”단단한 어조였다.“이번엔 우리가 끝까지 가야 해.”그 말은 일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수는 그 안에 다른 의미도 느꼈다.도망치지 않는 선택.같은 시각. 태훈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잠은 잔 게 아니었다.그냥 의식을 잃었다가 돌아온 느낌이었다.거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휴대폰을 들었다.미정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눌렀다.신호음. 그리고 연결되지 않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분노가 아니라, 막막함이 올라왔다.“이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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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파문

접근금지 신청서는 생각보다 얇았다.A4 몇 장.체크 박스 몇 개.사실관계 기재란.그 종이를 보며 미정은 한참을 펜을 들지 못했다.“여기… 폭력 유형 체크하는 부분.”이수가 조용히 설명했다.“신체적, 정서적, 통제, 협박.”미정은 ‘신체적’에 체크했다.잠시 망설이다가 ‘통제’에도 표시를 했다.손이 조금 떨렸다.“이거 내면… 진짜 끝인 거죠?”하빈이 답했다.“끝이라기보단.”잠시 단어를 고르고.“되돌리기 어려워지는 거죠.”정직한 말이었다.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할게요.”이번엔 망설임이 적었다.신청서를 접수하고 나오는 길.하늘은 맑았다.너무 맑아서, 오히려 어색했다.미정은 작게 웃었다.“어제는 그렇게 비가 오더니.”이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어제의 빗소리,창고의 냄새,벽의 차가움.그리고.“나 진짜 무서웠어.”하빈의 목소리.“괜찮아요?”미정이 물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었다.그 시각. 태훈은 법원에서 온 연락을 받았다.접근금지 신청 접수.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신청이 받아들여지면.”변호사가 차분히 설명했다.“일정 거리 접근 금지, 연락 금지, 위반 시 형사처벌.”태훈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그저 물었다.“이렇게까지 해야 됩니까.”“그건.”변호사가 말했다.“상대가 그렇게 느꼈다는 뜻이죠.”‘무서웠어요.’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태훈은 주먹을 쥐었다.자존심이 먼저 반응했다.하지만 그 아래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상실.저녁 시간, 미용실 이수는 가위를 쥔 채 거울 속 자신을 봤다.손은 안정되어 있었다.손님이 나가고 나자,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하빈이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임시조치 빠르면 내일.”“생각보다 빠르네.”“이번 건은 명확해.”이수는 가위를 내려놓았다.“하빈아.”“응.”“태훈… 가만히 있을까?”하빈은 잠시 생각했다.“모르지.”정직한 대답.“자존심 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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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같이 끝까지 가자

거실 불은 낮게 켜져 있었다.이수는 소파 한쪽에 앉았고, 하빈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기대 앉았다.TV는 켜지지 않았다.대화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그런데도 이상하게, 공기가 어색하지 않았다.“예전엔.”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렇게 조용한 게 싫었어.”“왜.”“생각이 많아지니까.”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되는 말이었다.조용해지면 과거가 소리 없이 밀려왔다.병실의 냄새.기계 소리.민준의 낮은 웃음.이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근데 오늘은… 조금 다르다.”“뭐가.”“생각이 많아져도, 난 결국 도망 안가니까”하빈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도망 안 간다는 게.”그가 천천히 물었다.“그 생각 안 한다는 뜻은 아니지?”“응.”“무서워도 버틴다는 거.”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더 힘들어.”“그래도.”그는 짧게 말했다.“네가 선택한 거잖아.”그 말은 책임을 돌리는 게 아니었다.오히려, 인정이었다.이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진짜 변호사 같다.”“지금은 그냥 남자야.”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가 아주 미묘하게 달라졌다.이수는 시선을 피했다.“그 남자.”“응.”“어제… 무너진 것 같았어.”태훈을 말하는 거였다.“처음으로.”“응.”“근데.”이수는 손을 모았다.“무너진 사람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하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맞아.”“자존심이 센 사람일수록.”정확한 분석이었다.“그래서 대비할 거야.”하빈의 말은 짧았다.“접근금지 나오면 일단 한숨 돌리고, 위반하면 바로 형사 처벌로.”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엔 나도 빠지지 않을게.”“무슨 뜻이야.”“네가 앞에 서고, 내가 뒤에서 계산하는 구조 아니고.”잠시 멈췄다.“같이 끝까지 함께 하자고”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하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알았어.”짧게 대답했다.다음 날. 법원에서 임시조치 결정이 나왔다.접근금지 100미터.연락 금지.통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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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잔류

접근금지 결정문은 생각보다 얇았다.A4 한 장.법원 직인 하나.조항 몇 줄.그 종이 한 장이 한 사람의 움직임을 묶는다고 생각하니,이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100미터.”미정이 낮게 읽었다.“연락 금지.”그녀의 손끝이 종이를 잡은 채 미세하게 떨렸다.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울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의 숨이었다.하빈이 말했다.“이건 시작이에요.”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현실이었다.“위반하면 바로 형사 사건으로 갑니다. 이번엔 기록이 남았으니까요.”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고개는 확신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그 사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이수는 그 말을 듣고 한순간 눈을 감았다.이 문장. 너무 익숙했다.“술만 안 마시면 괜찮아요.”그 말도. 하빈이 조용히 물었다.“그럼 술 마시면요.”미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짧은 침묵 안에 끌려가던 밤,잡힌 손목, 닫힌 공간이 다 들어 있었다.“무서웠어요.”결국 그 말이 나왔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럼 답은 나왔어요.”미정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겁이 아니라, 자기 입으로 처음 인정한 안도감 때문이었다.며칠 동안 태훈은 조용했다.문자도, 전화도 없었다.그 고요가 오히려 더 불안했다.“무너진 사람은,”이수가 말했다.“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자존심이 큰 사람일수록.”“응.”태훈은 통지서를 받았다고 했다.종이를 구기지 않았고, 찢지도 않았고, 그저 오래 바라봤다고.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이수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분노보다는 공허가 더 오래 간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저녁 시간, 미용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공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조용했다.너무 조용했다.이수는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예전 같으면, 이 지점에서 계산이 시작됐을 것이다.위험도. 거리. 개입 여부. 지금은 계산보다 감각이 먼저였다.“하빈.”“응.”“조용해지면… 더 불안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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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버티는 건 같이 하면 돼

접근금지 결정이 내려진 뒤 며칠은 묘하게 평온했다.미정은 임시 거처에서 지내며 변호사 상담을 이어갔고,태훈은 더 이상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다.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그런데 평온은 늘 오래 가지 않았다.이수는 그걸 알고 있었다.오전 예약이 끝난 뒤, 이수는 미용실 의자에 잠시 기대 앉아 있었다.창밖으로 보이는 골목은 한산했고, 바람이 간판을 스치며 작은 소리를 냈다.“왜 이렇게 조용하지.”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하빈은 카운터 쪽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조용하면 좋은 거 아니야.”“응… 좋은데.”이수는 말을 고르듯 잠시 멈췄다.“너무 조용하면, 뭔가 빠진 느낌이 들어.”“폭풍 전야?”그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수는 웃지 않았다.“그런 건 아니고.”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맞은편 골목. 며칠 전 보았던 그 뒷모습이 문득 겹쳐졌다.낯선 남자. 익숙한 어깨선.‘설마’라는 생각은 그날 이후 한 번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수는 고개를 털었다.“괜한 생각이겠지.”“뭐가.”“아무것도 아니야.”하빈은 더 묻지 않았다.요즘 그는, 묻고 싶은 걸 바로 묻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저녁이 되자 비가 조금 내렸다.가늘게, 소리 없이. 미용실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수는 우산을 들고 걷다가 갑자기 멈췄다.“하빈아.”“응.”“내가 예전에…”그녀는 말하다가 멈췄다.“뭐.”“사람을 잘 못 믿었잖아.”“지금도 잘 믿는 건 아니지.”담담한 말이었다.이수는 피식 웃었다.“그래도 예전엔 더 심했어.”“알아.”“왜 믿기 싫었는지 알아?”하빈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믿으면, 내가 약해질 것 같았거든.”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누군가한테 기대면, 그 사람이 사라질 때 내가 무너질까 봐.”비가 우산 위를 두드렸다.하빈은 한참을 말하지 않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은?”“지금은…”이수는 우산을 조금 더 낮췄다.“조금은 괜찮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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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그림자

비는 그날도 가늘게 내렸다.이수는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위를 내려놓았다.손님이 모두 돌아간 뒤의 미용실은 이상할 만큼 넓어 보였다.“오늘 왜 이렇게 멍해.”하빈이 물었다.“그런가.”“응. 아까도 계산 두 번 틀렸어.”이수는 피식 웃었다.“나 원래 숫자 못 해.”“거짓말.”그는 알았다.이수가 멍해질 때는 생각이 많을 때였다.“병원 꿈 또 꿨어?”이수는 잠깐 멈췄다.“응.”짧은 대답.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하빈은 느꼈다.이건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걸.그날 밤. 이수는 잠들었다가새벽 세 시에 눈을 떴다.가슴이 조였다.이유는 없었다.이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알림 없음.부재중 없음.그런데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예민해진 거겠지.”스스로 중얼거렸다.다음 날. 미용실 앞 골목에 낯선 차 한 대가 잠깐 세워졌다가 사라졌다.이수는 그걸 보지 못했다.하빈만 봤다.차 번호를 외울 만큼 오래 있진 않았다.하지만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골목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 기억에 남았다.“손님이야?”이수가 물었다.“아니.”“그럼?”“그냥 길 잘못 든 사람.”하빈은 그렇게 말했다.굳이 불안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저녁. 두 사람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서 미용실 안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너 요즘 이상하게 조용해.”이수가 말했다.“원래 조용했어.”“아니, 그런 조용함 말고.”하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불안한 거지.”“뭐가.”“태훈 일 끝난 것 같지 않아서?”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니야.”“그럼.”잠시 정적.“모르겠어.”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끝났다고 생각하면… 항상 다른 게 시작됐어.”그 말이 공기 중에 남았다.하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이번엔.”그가 천천히 말했다.“시작해도 우리가 먼저 알 거야.”“왜.”“지금은 네가 혼자가 아니니까.”이수는 웃지 않았다.대신 아주 조용히 그의 손을 건드렸다.닿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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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변한 게 진짜 그 사람일까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미용실 안은 조용했고, 이수는 예약표를 정리하고 있었다.문 위의 종이 부드럽게 울렸다.“어서 오세요.”고개를 들었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여자는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단정한 코트, 정갈한 머리.하지만 눈 밑에 옅은 그림자가 내려와 있었다.“예약 안 했는데… 가능할까요?”목소리는 차분했다.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의 톤이었다.“네. 괜찮아요.”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에 앉았다.거울을 마주 보는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머리는…어떻게.”이수는 가위를 들다가 멈췄다.“저기….”여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이혼을 생각하고 있어요.”공기가 아주 조금 멈췄다.낯선 말은 아니었다.이곳에선 더더욱.“외도인가요?”하빈이 조용히 물었다.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하진 않지만… 거의요.”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이수는 그 미세한 떨림을 보았다.연기라기엔 자연스러웠다.“요즘 사업이 잘 돼요.”여자가 말을 이었다.“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더라고요.”그녀는 억지로 웃었다.“예전엔… 저밖에 몰랐는데.”그 말에서 감정이 무너졌다.이수는 거울 속 여자의 눈을 바라봤다.그 눈은 붉어져 있었다.“증거가 필요하신 거죠.”“네.”이번엔 망설임이 없었다.“그 사람이 부정 못 하게.”여자는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영수증 몇 장.낯선 여자 이름이 적힌 문자 캡처.출장 일정표.이수는 빠르게 훑었다.겉으로 보기엔 이상하지 않았다.하빈은 조용히 서류를 받아들었다.“시간이 좀 필요합니다.”여자는 고개를 숙였다.“얼마든지요.”잠시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제 이름은 서연이에요.”“연락드릴게요.”문이 닫히고 종이 울렸다. 조용해졌다.이수는 한동안 거울을 바라봤다.“어때.”하빈이 물었다.“힘들어 보였어.”“응.”“진짜 같았고.”이수는 봉투를 다시 정리했다.“사업 잘되면 접대 많아지고, 늦어지고… 흔한 케이스야.”“의뢰 받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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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균열

조사는 생각보다 단조로웠다.남편, 윤재호.서연의 말대로 최근 1년 사이 사업이 급격히 성장했다.건설 자재 유통에서 시작해, 투자까지 손을 뻗었다.접대 일정이 많았고, 미팅도 잦았다.“여기 봐.”하빈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식당 예약 내역.호텔 로비 미팅 기록.카드 사용 내역.“여자랑 단둘이 만난 건 맞아.”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이상한 건 없어.”모두 공개된 장소였다.룸도 아니고, 은밀한 시간대도 아니었다.서연이 말한 “늦은 밤 호텔 출입”은 출장 일정과 겹쳤다.“접대일 가능성 높아.”하빈이 정리했다.“그래도 계속 보자.”이수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며칠 뒤. 윤재호의 동선을 따라간 날.비가 내리진 않았지만 공기가 무거웠다.남편은 카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이수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저 사람?”하빈이 낮게 물었다.“응.”두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손을 잡지도, 몸을 기울이지도 않았다.사업 이야기를 하는 듯 서류를 주고받았다.한 시간 뒤,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이수는 카메라를 내렸다.“애매하네.”하빈이 말했다.“응.”“서연 말처럼 은밀한 느낌은 아니야.”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대신, 재호의 표정을 오래 바라봤다.불안해 보이지 않았다.숨기는 사람 특유의 경계도 없었다.“사람이 바람 피우면,”이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눈이 먼저 달라져.”“그래?”“응. 뭔가… 계산해.”재호의 눈에는 계산이 없었다.그날 저녁. 서연이 먼저 연락해왔다.[오늘도 늦게 들어왔어요.]짧은 메시지.이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대신 물었다.“남편 오늘 몇 시에 귀가했는지 확인해봤어?”하빈은 자료를 넘겼다.“저녁 9시 40분.”“카페는 6시에 끝났지?”“응.”“중간 3시간 비어.”짧은 정적.“그 시간에 뭐 했는지 알아야겠네.”이수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문득 물었다.“하빈.”“응.”“만약에.”“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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